예수께서 성전 정화 사역을 행하시다
마태복음 21장 12-13절 / 12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13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 하시니라. (병행구절, 막 11:15-19; 눅 19:45-48)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행하신 두 번의 성전 정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셔서 절기의 시기를 이용하여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절기에 쓰일 제물을 매매하는 행위를 함으로 성전을 어지럽히며 성전을 더럽힘에 있어 성전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를 정화하심에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성전 정화의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모두 두 차례 있었습니다. 제1차 성전 정화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 때인 공생애 기간 중에서 첫 번째 유월절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있었으며 요한복음 2:13-2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성전 정화가 예수님의 사역 말기 때인 공생애 기간 중에서 마지막 유월절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있었으니,1) 본문인 마태복음 21:12-13입니다. 이곳의 내용은 마가복음 11:15-19, 누가복음 19:45-48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에 대해 먼저 알고 있어야 할 것
예수께서는 그동안 걸어오셨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건은 복음서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됩니다. 그동안 행해 왔던 유대와 갈릴리 사역이 종결되었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도 끝이 났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복음서 전체 강화의 목표와 절정의 예비 단계인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사건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입니다. 그것으로 21-22장에서 세 가지 비유(21:28-22:14)와 논쟁들(22:15-46), 그리고 23장에서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과 25-25장에서의 감람산 종말론 강화로 구성되는 예수님과 유대인 간의 대립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인 26-28장에서 예수님을 죽일 구체적인 음모의 실행에 따른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과 부활을 다룹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것에서 선지자가 전한 예언에 따라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 다음 날인 일요일입니다.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유월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환호하였는데,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폈으며 어떤 사람들은 손에 들고 온 종려나무가지 길에 깔았으므로(요 12:12-13), 오늘날의 교회는 이 날을‘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날로부터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은 고난주간으로 불립니다. 본문인 성전 정화의 사건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다음날에 있은 일입니다. 그 날은 고난의 한 주간 중 월요일입니다. 그런데 이 날에 있은 사건은 성전 정화 사건만 있은 것은 아닙니다. 이 사건 이전인 일요일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바로 활동해 나가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성전을 주의 깊게 둘러보신 후 날이 저물자 예루살렘에서 나가셔서 베다니에서 머물며 하룻밤을 보내셨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인 월요일이 되는 다음날에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 성 안에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루살렘 성에로 돌아오시는 길에 예수님은 시장기를 느끼시고는 길가에 심겨 있는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고자 했으나, 아직 열매가 열릴 시기가 아닌 까닭에 잎사귀만 무성할 뿐이지 먹을 만한 열매를 하나도 얻지 못하시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는 것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장차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저주를 알려주시는 징표로 삼는 가르침을 주시는 것에서 이 무화과나무가 앞으로는 다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니 이제부터 영원히 열매 맺지 못할 것이어서 그 누구도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를 하셨습니다(막 11:12-14). 마태는 예수님의 저주 선언이 있자 바로 무화과나무가 즉시 말랐다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이 저주하신 대로 마르되 뿌리 채 말라 도무지 열매가 맺힐 수 없는 상태에 있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이 날 저녁에도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있다가 화요일이 되는 다음 날 다시 예루살렘 성에로 되돌아오는 길에서였습니다(막 11:20-26).
이처럼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저주하시는 말씀이 있자 그대로 즉시 뿌리 채 마른 무화과나무가 된 사건 사이에 이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 사건과 관련하는 중요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성전 정화(숙정) 사건입니다. 마가는 이 사건을 각각의 사건으로 구분하여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만, 마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하나의 사건으로 묶어서 다루면서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이 저주하신 대로 권능이 행해져 즉시 뿌리부터 마르게 된 결과에 무게를 두고서 이를 성전 정화 사건과의 연관에 두는 것에서 성전 정화 사건을 먼저 기록하고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의 사건은 성전 정화 뒤의 사건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마가복음에서는 성전 정화 사건을 예루살렘 입성 다음날로 기록하는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성전 정화 사건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직후에 일어난 일로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건의 진행에 있어서는 먼저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먼저 다루고 나서 그 이해에 의해서 예수께서 사람들에 의해 도둑질 당하여 악한 도둑의 소굴이 된 성전을 본래의 깨끗함으로 있는 성전으로 찾아 놓으시는 성전 정화 사건을 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내용의 전개를 알고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보도록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입성 후 예수께서 행하신 성전 정화
앞에서 설명 한 대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후 성전을 주의 깊게 둘러보신 후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므로 성 밖으로 나가셔서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보내시고, 그 다음날에 다시 예루살렘 성에로 들어오셨습니다. 그 날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지 이틀째가 되는 월요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셔서는 성전으로 향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성전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 있던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물건들을 가지고 성전 뜰을 지나다니는 것도 못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막 11:16). 그리고는 그들에게“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라고 말씀하여 그들을 큰소리로 꾸짖으셨습니다. 이에 대해 마가복음에서는 좀 더 자세히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해 주시고 있습니다.“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막 11:17). 이는“‘시온산에 우뚝 서 있는 내 집(성전)은 세계 만민이 다 와서 나에게 기도할 수 있는 곳이 되게 해 주겠다’라고 이사야 56:7에 기록해 주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예레미야 7:11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바인 율법을 범하며 살다가 성전 제사에 참여함으로 죄를 사함 받았다고 생각함으로써 성전을 은신처로 삼았던 조상들의 죄악을 그대로 따라 하여‘강도의 소굴’, 곧 강도들이 숨어 지내는 소굴로 만들고 있다”는 것으로, 성전 뜰을 차지하고서 매매하는 사람들, 돈 바꾸는 사람들,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을 강도의 무리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전 정화에 있으신 까닭
마태복음의 기록 순서에 의할 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장 먼저 하신 첫 번째 일이 성전을 정화하여 청결하게 하신 것인데, 그 까닭이 무엇인지를 이와 함께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성전 정화에 있으신 것은 선지자의 예언을 응하시는 것에서입니다. 예수께서“기록된 바”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내 집은 (만민의)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이사야 56:7과 예레미야 7:11에서 해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그곳에 보면,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7:11)
이라고 예언되어 있어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신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온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와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비로우신 은혜를 구할 수 있게 해 주신 곳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리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선지가 예언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은 본래 번제와 희생제사가 드려지는 곳인데, 이러한 성전을 선지자는 무엇 때문에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예언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 안에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한지 480년이 지난 B.C. 10세기에 솔로몬왕에 의해 건축된 여호와의 성전이 스룹바벨의 인도에 의해서 재건축된 성전으로 이어지고 또한 헤롯 성전에 이르는 성전이 있었습니다.2) 이 성전의 가장 바깥쪽에는‘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이방인들을 위하여 정해놓은 것인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구역인‘이스라엘의 뜰(마당)’(이스라엘 남자의 뜰과 이스라엘 여자의 뜰)에 이방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나,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위한 지역으로‘이방인의 뜰’을 만들어 이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성전)을 유대인들이 어떤 곳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가 하면 강도의 소굴입니다. 성전 뜰은 매매하는 장사꾼들, 돈 바꾸는 환전상들,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성전 안에서 성전세에 필요한 돈을 바꿔주는 일을 하는 환전과 제사에 쓰일 짐승을 매매하는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을 한 때문입니다. 유월절에는 제사에 드려질 짐승으로 양(羊)과 비둘기를 공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유월절에 참여하는 유대인들은 제사에 쓰일 양을 집에서 준비하여 가져오게 되는데, 먼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므로 이곳 이방인의 뜰에서 제사에 쓰일 양을 구입하여 제물로 드릴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이방인의 뜰에서는 하루 종일 환전과 매매의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서 도입한 제도였습니다만, 원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만 아니라 근거리에 있는 사람들도 절기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절기 때가 되면 이방인의 뜰에서 양을 구입하여 제물로 드리는 게으름, 나태, 무성의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얻는 수익으로 돈을 쌓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제사장들 또한 이것으로 얻는 수익에 욕심을 가졌습니다. 제사장들이 이방인들이 기도할 수 있게 한 이방인의 뜰을 환전과 매매 행위를 할 수 있는 장사를 할 수 있게 허가하면서 그들로부터 이곳을 이용할 수 있는 사용료로 큰 비용을 요구하여 잇속을 챙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폐해는 곧바로 백성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비둘기 한 마리의 대가로 종종 금전 한 닢이 요구됐을 정도입니다. 당시 안나스 일가는 탐욕으로 대제사장의 권한을 행사하려 들면서 제 배를 채웠습니다. 그러니 성전의 뜰은 인간의 탐심이 가득하였으니, 하나님께 제사를 바친다는 것을 빌미로 백성들의 돈을 빼앗음에 있는 강도에 다름없었으며, 성전은 그들이 모여들어 있는 소굴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의한 작태를 아신 예수님은 그곳에 있던 장사꾼들을 다 내쫓아 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사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면서 장사를 감독하는 제사장들의 악함을 큰 소리로“성경에‘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도 어째서 너희는 조상들이 보인 행태를 그대로 따라 하여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것이냐?”라고 말씀하여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단지 성전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행태를 불쾌히 여기시며 못마땅하게 생각해서가 아닙니다.“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하신 그 만민의 기도를 이루시는 구속주의 일을 하시는 것에서 먼저 성전을 정화하여 나가신 것이며, 이를 통해서 성전을 회복하신 후 그 성전에서 행해지는 일인 유월절 양의 희생사역을 행하여 나가실 것에서입니다. 이것의 이해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번제와 희생제사가 드려지는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시게 된 이해를 가져나가야겠습니다. 그런 후에 하늘의 새성전을 이루는 만민의 기도에 있어나가야겠습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에 대한 이해
성전 – 하나님의 집 : 예수께서“성경에‘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고 기록되어 있다”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 말씀은 성전의 의의와 그 성격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이때의 처소의 개념은 건물이나 장소에 의해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인 임재에 의해서입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어떤 곳에서든지 함께 하심이 있으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그러므로 처소의 개념은 하나님의 집을 말합니다.
이 사실을 잘 알게 해 주는 것이 야곱의‘벧엘’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동생 야곱을 아브라함과 이삭을 잇는 언약의 자손으로 삼으신 경륜에 의해 형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속하게 하시는 섭리로 야곱이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받아내고 에서가 받을 축복을 야곱이 받음으로 인해 야곱이 에서를 피해 브엘세바를 떠나 외할아버지 브두엘과 외삼촌 라반이 있는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의 밧단아람으로 가기 위해 거쳐 가게 되는 길목인 하란을 향하여 가는 중 어떤 한 곳에 머물러 돌을 베개 삼아 하룻밤을 보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한 꿈을 통해 그에게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야곱이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위에 계신데,“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깨달아 말하기를“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하고서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벧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벧엘로 불리게 된 곳의 원래 이름은 루스였습니다(창 25:19-28:22). 야곱은 할아버지(아브라함)와 아버지(이삭)가 사시는 땅과 집이 있는 곳에서만 하나님이 계시며, 이곳에서라야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 그는 하나님은 한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계시고 또한 자신이 있는 곳 어디에서든지 계시며 그렇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 있는 자신과 맞닿아 함께 해 주시는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야곱이 갈 곳인 밧단아람에서도 계시며 야곱과 함께 하실 것이고 또한 그가 태어난 곳인 아브라함과 이삭이 있는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여 그를 통해서 이루실 일을 다 행하실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곧 하나님이 계시며 함께 하시는 처소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 하나님의 집이 보게 해 주시는 참된 하나님의 집이 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집은 하늘에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궁성이며, 온 우주적인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시편 11편 4절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으며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이러한 사실을 현상적으로 보게 하여 그에 대한 믿음 속에 있게 하고자 주신 것이 지상의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성전은 하늘에 있는 성전을 보여주는 계시의 한 방편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왕국을 다스리시는 분으로써 또한 그 궁성에 거하고 계십니다. 이곳에서 자기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지켜보시고 세상의 온갖 일을 두루 살펴보십니다. 그래서 선하고 의로운 백성들을 아껴 주시며, 그들에게서 악하고 그릇된 백성들을 가려내어서 벌하십니다(시11:4-6).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전에 거하여 계시면서 자기 백성들을 만나 상대하시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성막(성전)을 세우시고 그 안에 거주하시는 모습의 현상을 쉐키나4) 구름이 영광으로 친히 나타나는 것으로 띠시며 제사 제도를 시행하게 하여서 온 백성을 대표하여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 들어가는 시은좌, 즉 속죄소를 두시고 그곳에서 그와 만나 은혜를 베푸는 것을 통하여 백성들과 교통하는 일에서 하셨습니다. 따라서 지상에서의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명백하게 가르쳐 주시는 계시의 방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 만민이 기도하는 집 : 예수께서는 성전을‘내 집’이라고 말씀하여 이곳이 사람이 거주하는 곳으로서의 처소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거주하시는 처소라고 하시면서 이곳을‘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정의를 하신 것은 성전이 어떤 곳인지 성격과 그 의의를 잘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56장 7절을 인용한 것인데 그곳에 보면“내 백성으로 들어온 이방인들도 시온산 위에 있는 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백성과 함께 기도하며 잔치의 기쁨을 나눌 것이다. 그들도 나의 제단에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바칠 수 있으며 나는 그들의 제물을 받고 기뻐할 것이다. 나는 시온산 위에 있는 나의 성전을 세계 만민이 다 와서 나에게 기도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오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 삼아서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 만민이 다 하나님에게 나와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러니 이 성전은 한 일정한 장소와 건물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생명의 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성전이 시온산 위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참된 성전을 보여주어서 그에 대한 믿음에 있게 하는 표적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유대인 : 그러니 성전을 찾아 올라오는 자는 이미 자신을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처소로 제공하고서 하나님과 교통의 관계 속에서 살아온 마음을 가진 자들로서 그런 곳으로 제시해 주었던 성전을 찾아 오르는 길에 있어야 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사실을 잊고서 단지 절기를 이용하여서 성전을 드나드는 가난한 자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앗는 악한 제사장들에게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레미야 7장 11절을 인용하여서“너희는 만민이 기도하는 내 집을 고작 강도들이 거처하는 소굴로 만들고 있다”고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강도들은 자기들이 거처한 소굴에서 온갖 악한 꾀를 짜내고 악한 계획을 세우고 악행한 물건으로 채우는 일을 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은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이용해서 잇속을 챙기고 있는 성전의 감독자들인 타락한 대제사장 안나스 일가를 염두에 두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당시에 만연된 성전에서의 예배의식 태도가 불신앙적이어서 하나님과의 교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형식적으로 종교 생활을 하는 백성들까지도 염두에 두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유대 백성이 서로 한통속이 되어 있었던 참으로 암울한 상태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고 있는 까닭에 유월절에 필요한 제물을 구입하고자 해서 이루어지는 매매행위로 인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본래의 목적은 상실되어 사람들의 마음에는 없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주후 66년의 유월절에는 제사에 필요한 양이 255,600마리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기록에 의하여 예수님 당시의 유월절에도 그때의 규모와는 비록 차이가 있을지라도 수많은 장사꾼들이 이방인의 뜰에 몰려 들어서 제사에 쓰일 제물을 팔고 이를 사는 유대인들로 인해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만든 지역은 정작 이방인들이 도무지‘기도하는 집’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절기 때마다 겪는 유대 백성들의 어려운 점을 헤아리고 이를 생각해서 제사에 필요한 것들을 편리하게 공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장사를 허용한 제도가 오히려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경배하는 일을 훼방하는 죄악을 범하는 것이 되고 있었습니다.
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성전을 사람들이 어떻게 상대해 갈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악함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기 때문입니다(렘 17:9). 그러므로 이를 예언하게 하셨으며, 예언하신 대로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 정화에 있으신 의도 : 그러한 성전을 보며 예수님은 크게 노하시면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환전하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엎으셨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존재 목적과 다르게 변질되어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강도의 소굴이 되어 가고 있는 성전이기에 그곳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임을 상기시키셔서 본래의 상태의 모습으로 되돌아와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보여준 성전 정화에서 깨닫고 그동안에 자기들이 행했던 악행을 그치고 하나님이 내신 성전 규례에 따라 절기를 지키며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메시야의 헌제사역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처럼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서,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성전을 어떤 곳으로 존재케 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성전에서의 제사 의식의 행함은,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 예배의 참여에 있는 것은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제물로 삼음으로써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용서 속에 들어오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죽음 아래 있는 그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전을‘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삼고, 이방인들도 그들에게 정해진 뜰에서 기도할 수 있게 하신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이 성전에서 기도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 용서를 구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전에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 : 성전에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를 베푸는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구함으로써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죄 용서의 은혜를 입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구원을 얻을 것이기에 예수님은 성전을‘내 집’이라고 하셨으며, 또한‘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5)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속죄 제사 : 그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그동안 성전에서 제사장을 통해 행하여 오던 제사를 통해서 보여 알려 오셨던 일을 직접 행하실 것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로서 참 대제사장이 되시고 또한 단번에 드릴 영원한 유월절 희생제물의 어린양이 되실 것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으로서 성전에 나가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로서 대속의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속죄제사가 드려지는 성전에서 하실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 그에 앞서 성전 정화에 있으신 것입니다.6) 그에 따라서 이 성전에서는 만민의 기도가 있어 오게 하셨던 속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의 성취가 있게 되니, 예수께서는 성전의 주인으로서 성전의 속죄 제사에 의해 있게 되는 외치심을 십자가에서 하시게 됩니다.“다 이루었다”라고 말입니다.
하늘의 새예루살렘에 있는 새성전과 만민의 기도
사도 요한은 장차 되어질 일로 본 환상의 계시에서 하늘의 새 성인 예루살렘을 보게 되었는데 이 안에는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가 흐르는 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서 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강으로 흐르는 생명수로 인해서 성 안에는 다시는 저주받을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 하늘의 새 성인 예루살렘은 이 땅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에서는 볼 수 없는 참으로 신비한 것이었습니다. 새 성 예루살렘 안에는 성전이 눈에 띄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성 안 어느 곳에서든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예배드릴 수 있기 때문인데, 이곳에 들어온 세계의 모든 민족들로 돌 위에 돌이 놓이고 돌과 돌이 연결하여 세워지는 성전이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어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함께 하는 하나님의 집을 이루고 있는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땅에서의 성전과 같은 성전이 더 이상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새 성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었으며, 여기에 흐르는 생명수의 강은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어린양에게서 나와 그 강의 양쪽 언덕에 있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달마다 열매를 맺게 하며 그 나뭇잎이 온 세계의 민족들을 치료하는 약이 되게 함으로써 성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이제 더 이상 저주 받을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며,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영원히 없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늘의 새 성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와 함께 하고 있는 만민의 예배로 충만하니,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어린양에게서 나오는 생명수가 미치는 자들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서 구함에 있은 죄 용서의 은혜를 구함에 있은 기도의 응답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계 21:1-22:5).
열왕기상 8:38-39에 보면,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예루살렘 성전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의 공급지입니다. 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죄 용서하시는 은혜의 공급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차별 없이 미치는 것이 되었습니다. 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이란 민족의 차별이 없어지고 지역의 벽이 무너져서 죄로 말미암아 절망의 죽음 아래 있는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죄 용서의 은혜가 미칩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전의 구조에서도 그대로 잘 나타납니다. 헤롯이 지은 성전 안에는 이전에 있어 왔던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스라엘 남자의 뜰과 이스라엘 여자의 뜰이 각각 있었으며, 또한 이방인의 뜰도 있었습니다. 이는 성전이 거듭 재건되는 과정에서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다 성전에서 나오는 죄 용서의 은혜를 입게 하실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오게 하시는 것에서 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므로 예수님을 믿어 그 이름을 힘입음으로 성전의 주인에게서 주어지는 죄 용서의 은혜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누구든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야 할 성전 안에서 그 기도에 있지 않고 환전과 매매 행위의 북새통 속에서 자기들의 배만 채우는 강도의 무리들이 모여들어 자기들의 소굴로 삼고 있는 행태에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성전이 결코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져서는 안 될 것을 지적하시며, 만민이 주께 구할 기도에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만민의 기도
이제 우리는“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말씀하여 가르침을 주시는 기도에 우리의 기도가 있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의 예언에서 나타내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약속)대로 반드시 실행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인신 만민의 주가 되셔서 그들을 주 안에로 한 데 모아 주의 집에 거하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은 그래서 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그리스도 안에로 불러 한 데 모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되게 하시니, 이들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 하나님의 성전, 곧 하나님의 집을 이룸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 서는 하나하나의 돌이며, 하나님의 집을 이루는 구성원(가족)입니다. 그러한 이들에게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함에 있는 기도에 있으니 세계 만민이 한 성령을 따라 한 믿음으로 구함에 있습니다.
이는 성전의 실체요 주인이신, 그리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그분 안에서 가져나가게 되는 기도를 가르침 받고 있는데 따른 것입니다. 기도에 있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볼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허락하신 죄 용서와 여기에 뒤따라오는 하늘의 풍성한 복을 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각할 때마다 따르게 됩니다. 이 기도를 하는 것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믿어온 것에 대해서 눈을 더 뜨고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 기쁨을 더욱더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함께 전무하였는데, 그들은 그렇게 말씀과 함께 기도를 가져나가는 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져다주는 은혜의 풍성한 복을 보며 그 기쁨 속에 있었으며, 이를 생명으로 여기고서, 적대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담대함으로 힘 있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더 알 수 있기를 위해서 또한 기도에 있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자신을 가로막는 마음과 그 충동이 일어날 때 여기에 이끌리며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겠습니다. 주님의 용서를 가로막는 교만이나 그릇되거나 악한 행동의 잘못으로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자인지를 깨닫고 우리에게 착 달라붙어서 무겁고, 거치는 것이 되며, 힘 빠지게 하는 낙심과 좌절이 발생될 때 그러한 자신의 자비가 되신 주님의 용서하심을 다시금 바라보며 그 은혜를 잊지 말고 늘 상기하며 의존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자신을 위해서 할 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해야 합니다(참조, 약 5:3-20). 그것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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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구속주로서의 공생애 기간인 3년 6개월 동안에는 모두 네 번의 유월절이 있었다. 첫 번째는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는 30세 때이며, 31세 때 두 번째의 유월절, 32세 때 세 번째의 유월절, 그리고 33세 때 공생애 사역 말기의 끝인 고난 주간 때 맞이하신 마지막 네 번째 유월절이다.
2) 이스라엘이 B.C. 1446년에 출애굽한지 480년이 지난 때는 B.C. 966년으로 솔로몬왕이 즉위한지 4년 2월이 된 해이다. 솔로몬왕은 이때에 성전을 건축하여 7년 6개월이 걸린 공사 끝에 11년 10월(B.C. 952)에 완공을 보았다. 이때로부터 성막에 이어지는 성전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솔로몬왕에 의해 건축된 성전을 제1성전이라고 한다. 이는 이 후 성전이 크게 훼파되어 무너지는 사건을 두 번 겪으면서 재건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성전과의 구별을 갖기 위해서 이다. 제1성전으로 불리는 솔로몬 성전에 이어져 제2성전으로 불리는 성전 건축은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 포로기를 겪고 귀환하면서 있었다. 솔로몬 성전은 B.C. 605년에 시작되어 모두 세 차례에 걸친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침공에 의해 B.C. 586년 남왕국 유다의 멸망과 함께 훼파되었었는데, 70년이 지나 스룹바벨의 인도에 의해서 B.C. 536에 재건의 첫 삽을 떼었으나 16년 동안 중지되어 있다가 B.C. 520년에 다시 건축이 시작되어 B.C. 516년에 완공을 보았다. 이 두 번째의 성전을 제2성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성전의 재건은 다시 한 번 있었다. 제2성전으로 불리는 스룹바벨 성전 또한 역사의 수난을 겪으며 훼파되었으니, B.C. 16년8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파괴되며 모욕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성전이 훼손되거나 보수 되는 일이 자주 있다가 B.C. 20/19년 헤롯 대왕에 의해 성전이 다시 건축되어 그 뒤를 잇는 헤롯 왕가를 통해 계속되어서 A.D. 64년에 이르러서 완공되는 헤롯 성전이 있었다. 이 성전은 세 번째 건축된 성전이므로 제3의 성전이라고도 불린다. 이 성전의 건축 특징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헤롯 대왕이 당시 존재하고 있는 제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그대로 두고 번제와 희생 제사도 중단하지 않고 그대로 행하게 하면서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고 부속 건물과 주변의 요새들을 건축하는 형태의 새로운 성전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건축이 시작된 제3의 성전인 헤롯 성전은 건물 자체는 1년 반 정도 걸려 완성되었으나 이 성전 건물과 관련한 건축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는데 요한복음 2:20에서의 유대인의 말에 의하면 헤롯 성전은 예수님 사역 초기 당시인 B.C. 27년까지도 공사 과정에 있어 46년에 이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완공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으며, B.C. 6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하지만 헤롯 성전은 불과 6년 후인 B.C. 70년에 로마 장군 티토(티투스. Titus;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69-79)황제의 장남으로 A.D. 79년에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고 2년 후인 A.D. 81년에 사망함)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어 무너져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음에 있음으로써 모세를 통해 세우신 성막을 거쳐 솔로몬 성전 이후 존재해 왔었던 성전 시대는 종결되었다.
3) 유월절에는 제사에 드려질 제물로 양이 사용되나 가난한 자들은 비싼 양을 사서 드릴 수가 없으므로 대신에 비둘기를 사서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하였다(참조, 눅2:24).
4) 쉐키나(shekinah)는 '거주'란 뜻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가시적 임재, 영광스런 보좌 곧 속죄소(贖罪所, mercy seat)에 나타난 하나님의 광휘(영광, 광채)에 찬 모습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성경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다양한 장면에서 소개되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처소인 성전(왕상8:29)과 그분의 지상 보좌라 할 수 있는 언약궤(민10:35-36)에서 그 같은 장면을 시사하고 있다. *naver 지식백과.
5) 그리스도인인 성도가 교회 모임을 갖는 것은 이 건물이 교회이어서가 아니라,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이곳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됨에 있는 ‘만남의 교제’를 갖는 것을 통해서 그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죄 용서하시는 주님을 섬김에 있는 것에서이다. ‘주일’이란 날의 주인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이 교회의 주인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그분의 죄 용서의 은혜를 듣고 그 믿음에 견고히 서나감에 있어야 한다.
6)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사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주로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헌제사역(獻祭事役)을 모형으로 하고 있다(히 7:27; 9:11-14; 10:12; 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