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9:1-14절 진실로 주님을 만났는가.
9장은 8장의 질문에 답변의 연속선상에서 바울의 자유와 절제의 대한 교훈을 주시면서 성도들에게 자유하지만 절제할수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자신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성도들에게 바울 자신을 본 받으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말만 앞세우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모습을 연상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23: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지식을 가지고 알고만 있고 행하지 않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담대하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고전11:1절에서 권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또 살후3:9절에서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게 하려고 또한 하나님께 헌신하고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해 개인적인 권리를 절제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수 있는 것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야 할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나는 노예가 아니야, 뿐만 아니라 나는 로마 시민권자야, 그런 말입니다. 이어서 사도권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나는 주예수를 만났고 율법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판단과 행동을 할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보지’‘헤오라카’는 보다의 완료형으로 행9장 다멕섹에서 만난 부활의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사도의 첫 번째가 예수님을 살아계실 때 만났었는가입니다. 바울은 완료형으로 행9장,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진술합니다.
그렇다면 같은 이치로 우리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살아계신 우리 주님을 만나냐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음의 눈으로, 베드로가 말씀합니다. 벧전1:8절“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라고 증언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우리의 육안으로 본다는 것이 불가합니다.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자는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요14:21절에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롬13:10절“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또 요일2:11절“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가 사랑이신 주님을 뵙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과 교제하고 교통하는 자가 주를 뵙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요14:1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또 다른 보혜사는 성령님이십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는 ‘돕는자 상담자 변호사, 중재자, 협조자, 대변자라는’의미가 있고 3위의 하나님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가르치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성도들을 주님에게로 이끌어 가십니다.(요14:26절) 주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려 한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바울은 롬8:14절에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했습니다. 즉 내 입으로 하는 말보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행하는 자가 진정한 성도요, 주의 제자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2절을 보면 신앙의 열매를 맺는 자가 진정으로 성도이며 직분자인 것을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이 말은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됨을 인쳤다고 말씀합니다. 마치 문서에 도장을 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도 믿음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5:22,23절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또 엡5:9절에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예수님은 마7:16절에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열매를 맺혀야 합니다. 바울은 갈6:7절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는 성도라는 직임에 알맞은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4-5절은 전도자의 생활비를 언급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고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한다면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아마 당시에 베드로는 아내되는 자매를 데리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식화 된 12사도들은 자매들을 데리고 선교비를 받으면서 다녔던 것 같습니다. 바울도 그럴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10:9,10절“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바울도 딤전5:18절에서“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는 물질에서 자유하여야 합니다.
6-7절“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의 지원이 없이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당시 사도들에게 사역의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딤전5:1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러한 권리를 누리지 않은 것은 복음전파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 천막짓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 충당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 고린도교회에 성도들은 하층 계급의 어려운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 랍비들은 돈을 받지 않고 가르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아마 바울도 유대 랍비밑에서 율법과 함께 천막만드는 기술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역자들은 물질에 탐욕을 가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돈은 잘못하면 뱀처럼 쏘기 때문에 돈에 뱀독이 들어가면 끝이 좋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쓰다가 버림받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사람들이 배금주의 사상에 물든다해도 성도는 사역자는 그러면 안되는 것입니다. 사역자는 사역지에서 받는 것을 감사함으로 지내야 하며 더 필요하면 스스로 일하여 채워야 할 것입니다. 단 교회가 넉넉하면 필요한 것을 지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목회자의 생활비를 주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딤후2:2,3절에서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군인은 국가에서 의식주를 책임져 줍니다.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군인은 이탈할 것입니다.
어제 이만갑을 보았습니다. 20살 난 앳띤 북한 병사가 탈북을 했습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고 잘못하면 엄청난 구타를 당하고 그래서 탈북을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또 고전3:7절을 보면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가꾸는 것을 연상합니다. 그 일군이 포도원에서 나는 포도를 먹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8절에서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성경은 양을 교회로 비유합니다. 렘23:2절“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역자는 성도들을 잘 양육하는 의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또한 교회가 형편이 되면 생활비도 주어야 합니다. 없는 것을 억지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있다면 해야 합니다. 바울은 구약을 끌어 와서 9절“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말씀합니다. 10절“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이것은 신25: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교회서 일하는 사역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일하는 모든이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일을 시키면 그 노동에 합당한 삯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레19:13절에서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이어서 딤후2:6절“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했습니다.
마치려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진정으로 주님을 만났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쌓여진 지식으로 인해 타성에 젖어 착각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자신을 날마다 점검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모양만 아니라 진정으로 주께서 우리를 보실 때 성령으로 충만하여 헌신함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인정과 칭찬을 받고 주님의 제자답게 열매 맺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의정부 하늘등대지기 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