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 그리고 ‘철부지’
사랑이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곱게 늙고 싶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둘이 된
고독을 가르쳐 주고
나는 당신에게
둘이 된 그리움을 가르쳐줍니다.
사랑이란
서로에게
위로의 대명사가 되는 것입니다.
눈길에 빗나간 가난한 발자국,
그 발자국 따라가며
꽃씨를 심는
사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항상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랑합니다.
당신은 나에게 둘이 된 고독을 가르쳐주고
나는 당신에게 둘이 된 그리움을 가르쳐줍니다.
김현성 시인의 ‘사랑이란’ 제목의 시입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별 거 아니고, 그저 쉽기만 한데 이상하지요. 우린 쉬운 걸 잘 못하나봐요.
제가 김재훈, 안미경 부부와 신성용 신부님이 함께 쓴 성공하는 결혼 이야기, 『나를 웃게 하는 당신』이라는 책의 서문을 써 주면서 인용한 시입니다. 『나를 웃게 하는 당신』은 저자들이 자기들 결혼생활에 얽힌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줌으로써, 행복한 결혼생활로 이끌어주는 관계의 비법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배우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감싸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배우자와 참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에 대해 소탈하게 나눕니다.
저는 자기는 사랑을 주었는데, 상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어떤 사람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저는 다만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청하며, 그 사람에게 이 시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나를 웃게 하는 당신』과 이 시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서로를 바라보면서 애틋한 마음을 지니는 것, 서로를 바라보면서 때로는 서운함 때문에 고독도 느끼지만 둘이 함께 했던 시간들 안에서의 그리움, 안쓰러움, 따스함을 지니는 것입니다.
고독은 꼭 혼자 있어야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사실 둘이 된 고독이 더 깊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자서 외로우면 그러려니 하지만 둘이 있으면서 외로우면 섭섭함까지 드니까요.
혼자 있으나 둘이 있으니 삶에서 고독, 외로움은 밀려오게 마련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고 읊었지요. 그래도 우리들의 가슴에 고독이나 외로움보다는 그리움, 따스함이 더 가득히 고여 오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우리의 마음을 더 많이 배우자 상대에게 열고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배우자가 없는 사람은 또 다른 상대가 있기 마련이지요. 두 사람이 마주 기대어야 사람 인자(人)가 만들어지니까요. 그 상대에게, 그가 친구이든, 연인이든, 가족이든, 지인이든,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
부부간의 사랑이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이랍니다. 저는 부부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의하지 않으세요?
동의하신다고요?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가 중요해요. 그 이유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해요. 부부가 부모보다도 자식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인 까닭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란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둘인 신비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이입니다. 가깝고 소중하기에 더 상대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지요. 소중할수록 깨기기 쉬우니 조심해야 하고요.
늘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야 하고 늘 서로에게 내 편이 되어주어야 하고 늘 서로에게 용서가 되어야 합니다. 둘이 된 고독이 찾아들 때면 둘이 된 그리움으로 그것을 승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복음에서 우리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대목을 듣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일까요?
물론 ‘자칭’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라는 말인데, 과연 예수님이 지칭한 ‘자칭’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과연 예수님이 볼 때, 스스로 자기가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 쉽게 말하면, 스스로 자기들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여러 정황이나 예수님의 다른 말씀에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수석 사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나아가 사두가이들이나 헤로데 당원들까지 당시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을 망라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듣게 됩니다.
반면에 ‘철부지들’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고, 그래서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들, 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예를 드신 사람들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소외당하고 있던 세리와 창녀들, 과부와 어린아이들입니다.
복음서에 ‘두 아들에 관한 비유’ 이야기가 있지요. 저는 이 두 아들에 관한 비유와 이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이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복음 말씀을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거든요.
여러분들, 두 아들의 비유 잘 아시지요? 이 비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자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같은 말을 하였는데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대답은 하였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고. 그들이 물론 맏아들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이 비유 말씀의 뜻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합니까?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보면,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신 비유입니까? 바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다.
배경은 마태 21 장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성전 정화하시는 대목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한 마디로, 성전 정화를 하신 것이지요. 그러자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와서 말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님께서는 되물으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고.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한 후에 모르겠다고 답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자니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군중이 두려워서 모른다고 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하시고 나서 바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당신에게 도전을 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이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고 세리와 창녀들이 맏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와 창녀들이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단죄했던 세리와 창녀들, 철부지로 보이는 그들이 하느님의 법, 율법을 지키기에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 바로 수석 사제들, 원로들, 바리사이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늘 성경에서 이 대목을 읽으니까, 아,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구나. 하며 별로 놀라지 않지만, 당시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정말 청천벽력과 같은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미움을 받게 되는 계기도 되고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이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비행기 표를 구하는 조건이 수석 사제들, 원로들, 바리사이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율법을 지키는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얼마나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의탁하는가, 한마디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 바라사이들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지닌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비록 자칭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분명 인간적으로만 볼 때는 똑똑합니다. 지혜롭고 슬기롭습니다. 그런데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울까요? 그렇다면 그것이 문제일 리는 없지요. 문제는 그들이 진정 지혜롭고 슬기롭지는 못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참 지혜와 슬기는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니, 그들의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에게는 하느님, 바로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만 있지, 하느님, 바로 사랑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이 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을 때 그 말은 진정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었고 그것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과 바리사이인들은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면서 남을 단죄하는 사람들보다 ‘철부지들’,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회개하라는 요한의 외침을 가슴으로 받아들였던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느님과 사랑은 동의어입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아무리 미사 참례를 열심히 하고,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마음 안에 사랑을 지니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철부지’가 아니라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 속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들의 마음으로 지녀야 할 것입니다. 필립비서의 유명한 말씀을 잘 알고 계시지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은 참으로 연민의 마음을 지니셨던 분입니다. 참으로 위로의 마음을 지니셨던 분입니다. 마음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시면서 깊은 위로를 나누셨습니다. 때로는 슬픔을 지니셨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행위를 이해 받지 못하고 배척받으실 때 슬픔을 지니셨습니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다만 슬퍼하셨습니다. 그리고 용서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까지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한마디로 크신 사랑의 마음을 지니셨던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