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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못 성지-다블뤼 주교를 중심으로

작성자류해욱|작성시간14.10.13|조회수642 목록 댓글 5

   갈매못 성지-다블뤼 주교를 중심으로

 

  오늘 공동체 미사에서 갈매못 성지 이야기가 나왔지요. 주례 사제가 다블뤼 주교님께 큰 감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 천주교회가 외국인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진리를 찾다가 신앙을 받아들인 유례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다보니, 다블뤼 주교님 같은 외국인 선교사가 있었고 그분들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를 간과하기 쉽습니다. 전에 썼던 글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다블뤼 주교님을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갈매못은 원래 갈마연이라는 말에서 연유된 명칭이라고 합니다. 갈마연은 풀이하면 목마른 말에게 물을 먹이는 연못이라는 말입니다. 말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도 갈증을 느끼며 물을 갈망합니다. 영혼이 갈증을 느끼는 것이지요. 갈매못은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는 생명의 물이라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모두 사마리아 여인처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찾습니다. 갈인연, 사람의 갈증을 축여주는 생명의 물이 있는 갈매못으로 가고 있습니다.

  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 해안가에 있는 이 순교 성지는 바다를 접하고 있어 가장 아름다운 성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도소리가 순교자들의 참수의 아픔을 달래주듯 철석거리는 곳입니다. 저는 겨울에 처음 그곳을 찾았다가 갑자기 눈이 오는 바람에 차가 미끄러져 혼났던 기억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갈매못은 이름 모를 수많은 순교자(대략 500 명으로 추산합니다.)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지만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민 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회장 등 다섯 명의 성인이 같은 날 참수를 당한 곳으로 잘 알려진 성지입니다. 

  1845년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 안 주교님은 조선 교구 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장 주교님이 순교를 당하자 후임으로 1866년 3월 7일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던 분입니다. 주교 임명 4일 만인 3월 11일에 당시 그의 복사 역할을 했던 황석두 루카 회장님과  함께 주 사목 활동지였던 내포 지방에서 체포됐습니다.

  다블뤼 주교님은 당신 자신이 대박해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보고,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마구 잡혀 처형되자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한 뒤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후 붙잡혔습니다. 다블뤼 주교님의 체포 소식을 들은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도 거의 자진하다시피 하여 잡혀 서울로 압송됐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게 되고 국혼(國婚)도 가까운 시기여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이들을 250여 리 떨어진 보령수영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들 네 명은 갈매못으로 향하게 됩니다. 서울에서 장장 250리 죽음으로 가는 긴 여정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이었던 장주기 회장님이 합세하며 모두 5명이 함께 순교의 여정을 걸었습니다.

 

  당시 주로 산길로 걸어서 그 긴 길을 단지 죽으러 갔던 것입니다. 포승줄에 매여 터벅터벅 오는 그들의 모습을 그려보면 참 기가 막히고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래도 압송하던 관리가 꽤 인간미가 있던 사람이었나 봅니다. 이들이 갈매못을 향해 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군 음봉면 길가에 앉아 바위 위에 걸터앉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도록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잠시 쉬는 틈에도 서로 묵상 나눔을 하고 성가를 부르며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때 그 바위는 지난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갈매못이 순교 성지로 눈길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75년 9월 대전교구 대천 본당 주임이었던 정용택(요한) 신부가 순교 당시의 위치를 확인하고 순교복자 기념비를 세우면서부터라고 합니다. 그 후 1985년 9월에 다섯 분의 순교 성인 기념비와 야외 제단이 세워졌고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갈매못으로 순례의 여정을 떠나 왔지만 여사울, 신리 성지 등과 연결하여 보아야 합니다. 여사울은 내포 교회가 시작된 못자리이며 신리는 내포 교회가 박해를 극복해 나가던 교우촌이었고, 갈매못은 성인들의 순교 터였습니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신앙의 중심지였고, 순교사에서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한국교회가 순교자들의 피로 면면히 계승, 성장해 온 것을 숙고해 볼 때, 바로 이곳 내포 지역은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를 받쳐주고 있는 주춧돌인 셈입니다.

  충청도 내포 지역의 교회 공동체는 거듭되는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끈질기게 복음의 생명력을 이어간 곳입니다. 그곳에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성인품에 잘 알려진 인물로는 거더리(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출신의 손자선(孫 토마스)이 있습니다. 그는 1866년에 공주 관아에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분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이 거더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 바로 신리입니다.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두 마을이 구분되어 있지만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거더리와 신리는 같은 지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다블뤼 안 주교님이 체포되었던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었습니다. 신리 성지도 가 보신 분, 계시지요? 작고 단출하지만 다블뤼 안 주교님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성지입니다. 

  다블뤼 주교님은 1845년 10월, 한국에 입국한 이래 주로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사목활동 중에도 한국 순교사와 교회사 자료 수집에 열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블뤼 주교의 "한국 순교 비망기"(備忘記)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1863년 주교님의 거처에 화재가 발생하여 오랫동안 수집해 놓았던 귀중한 자료들이 타 버리고 말았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은 다블뤼 안 주교님이 그 전에 이미 순교사와 교회사를 나름대로 정리한 비망기를 프랑스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순교 ‘비망기’가 남았고 순교사 연구에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된 것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블뤼 안 주교님은 신리에 있는 손치호(니콜라오) 회장댁에 머물고 있었답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입니다. 다블뤼 안 주교님은  그 때 이웃에 있던 오매트르 오 신부님과 위앵 민 신부님을 불러오게 하여 피신할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는데,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다블뤼 주교님과 복사인 황석두 화장님을 체포하였습니다. 이어 위앵 민 신부님이 멀지 않은 곳인 예산군 봉산면 금치리에서 체포되었고, 오매트르  오 신부님이 거더리에 들렀다가 체포되었습니다.

  다블뤼 주교님은 체포되기 직전에 동료인 만주 교구장에게 편지를 한 통 보냈습니다. 1866년 3월 10일자 서한입니다. 이 서한에서 순교를 앞둔 주교님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내 차례도 올 것이니, 제가 싸움터에서 견디어 낼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순교의 현장에서 그날의 장면을 떠올려 보게 됩니다.

  3월 30일 수난주일 충청 수사(水使) 앞에서 배교를 거부한 다블뤼 안 주교님이 먼저 칼을 받았고, 이어 오매트로 오 신부님, 위앵 민 신부님, 황석두 루가 회장님, 장주기 요셉 회장님이 차례로 치명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다블뤼 안 주교님은 조선에 입국한 지 21년이 되고, 전임 베르뇌 장 주교님을 도와 9년간 부주교직에 있다가 조선교구의 제 5대 교구장이 된지 불과 21일 되는 날이었습니다.

  다블뤼 안 주교님은 앞서 언급한 "조선 순교자 비망기" 뿐만 아니라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등 많은 번역과 저서를 남긴 사목자이면서 학자이기도 한 분입니다. 

  그는 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와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헌신적으로 사목할 뿐만 아니라 귀중한 자료 수집과 집필 활동을 쉬지 않고 했던 분입니다. 그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음식이 맞을 리 없으니,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통이 무척 심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탁월한 언어 감각과 언변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말을 제대로 배워 아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또 나중에는 보신탕도 즐길 정도로 적응을 잘 하였고, 선교사 중에 가장 한국적인 분이었고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서품 후 배를 타고 입국하려다가 먼저 도착한 곳이 제주도 용수입니다. 지금 용수성지에는 김대건 신부님 일행 표착 기념관과 성당이 있습니다. 그때 당시 신부였던 다블뤼 주교님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한 것이지요. 그 후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사목하시다가 마침내는 순교를 당하신 것입니다.

  다블뤼 안 주교님은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당할 때도 너무나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다블뤼 안 주교님 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이 서울을 떠나 수영에 도착한 때는 성주간이었답니다. 참수를 당한 순교일은 3월 30일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님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답니다. 그런데 마침 이날이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으므로 안 다블뤼 주교님은 그들에게 당일 사형집행을 청하였고, 이 청이 받아들여져서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순교 장면의 목격자의 한 사람인 이 힐라리오가 기록을 남겼습니다.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

  안 다블뤼 주교님의 그 때 나이는 49세였습니다. 예수님보다 16 년을 더 사시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 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38년 후, 다블뤼 안 주교님의 고향 사람들이 방한하여 자기들의 선조의 순교 성지 체험을 하게 됩니다.

  프랑스 아미앵교구 방한단(대표 버나르드 가페)이 2004년 4월 20일 열흘간 일정으로 방한하였답니다. 아미앵교구 출신으로 제5대 조선대목구장을 지낸 성 다블뤼 주교님의 사목현장과 순교성지 그리고 한국 문화 전반을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방한단은 아미앵 교구장 장룰 부이에레 주교를 포함한 25명으로, 이들은 다블뤼 주교 사목거점이었던 대전교구 당진군 합덕면 신리공소와 갈매못성지를 찾아 다블뤼 주교님의 신앙적 숨결을 직접 호흡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다블뤼 주교님의 유품인 중백의(수단 위에 입는 흰 웃옷)를 기증하였다고 합니다.

  갈매못 성지측은 방한단 방문에 맞춰 이날 성 다블뤼 주교 성상 축복식을 거행하였답니다. 젊은 조각가 김송필(클라우드)씨가 '성 황석두루가 회장' 성상과 함께 6개월간에 걸쳐 제작한 다블뤼 주교 성상은 높이만 220㎝ 크기로, 오른손으로 구원의 세례를 베풀고 왼손에는 소박한 나무 목장을 들고 있는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성지 내 성당 정문 좌우에 세워졌습니다.

   

  사실 갈매못은 5 분의 성인으로 유명하지만 실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박해의 칼 아래 스러져 간 곳입니다.

  다시 한 번 한국인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이 땅의 복음 전파를 위해 멀리 이역 땅에서 와서 모진 고생을 했던 외국 선교사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블뤼 안 주교님이 만들어 바치던 기도문입니다.

 

  *성 안 주교님이 바치신 기도 

 

"주님, 핍박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저들 불쌍한 형제들의 원을 들어주소서.

저들은 당신의 사랑을 원하나이다.

그러나 주님, 이 땅은 지금 당신을 알고,

당신 말씀을 따르기에는 너무 벅찬 고난의 시기이옵니다.

핍박과 환란이 오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박해를 피해 집을 버리고,

논과 땅도 버리고 산으로 피했습니다.

그들은 고통 중에도 당신을 찾고 있사옵니다.

고통 속에서도 당신 이름을 찬양하옵니다.

그들에게 빛을 주소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소서.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어

당신과 함께 님을 알기에 충분한 신덕을 주소서

당신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멘. "

 

   바다에 위치한 성지로 잘 알려진 갈매못 성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다, 들, 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입니다. 성지에서 내려다보이는 성지 모퉁이 한켠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 가을의 풍요로움을 더해 줍니다. 그러나 이곳의 매력, 아름다움의 진수는 외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마치 햇살이 바다의 물결 위에 빛나듯 수많은 순교자들의 얼이 깃들여 빛나는 슬픔이 담긴 아름다움입니다.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순수했던 신앙의 아름다움이 오늘도 흰 새털구름이 되어 하늘을 수놓고 있습니다.

   ‘배교합니다.’라는 한 마디만 하면 살 수 있었지만 끝내 침묵 속에서 믿음을 고백하고 형장의 이슬이 되어간 수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을 지닌 그들은 진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진정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다블뤼 안토니오 안 주교님. 참으로 놀라운 분입니다. 주교님은 프랑스 '아미앙'의 귀족 출신, 아주 명망 있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최고의 대학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분입니다. 프랑스에서도 워낙 학문에 탁월했던 분입니다. 가히 천재라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여러 저서들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한불사전까지 편찬할 정도로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천재였습니다. 위앵 민 신부님에게는 직접 한국말을 가르쳤지요.

 

   다블뤼 주교 성상은 오른손에 뭔가 흘리는 모습이라 교우들이 궁금해 하는데, 바로 물로 세례를 베푸는 모습이고, 왼손에는 소박한 나무 십자가를 들고 있습니다. 늘 세례를 베풀고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당신의 삶을 표현한 것이지요.

   유럽 명문가에서 세상적으로 최고의 삶을 살 수 있고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신부가 되어, 전혀 알려지지 않은 나라, 한 번 가면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나라, 미지의 나라, 조선이라는 곳으로 자진해서 선교를 떠난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 바보, 다블뤼 안 주교님. 그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바보이지만 이 세상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보물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

 

   이것이 바로 다블뤼 안 신부님의 좌우명입니다. 그는 그가 보내는 모든 편지의 서두에 이 말을 썼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가 ‘+ 그리스도의 평화’ 라고 쓰듯이 보내는 모든 편지에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라고 썼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지닌 것에 대한 자부심, 행복감이 충만했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당할 때, 배교하라는 관리에게 너무나 유창한 한국말로 심문에 반박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치려고 하자, 화가 난 관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훨씬 더 심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은 아주 의연하게 고통을 감내하면서 자기가 지닌 모든 것, 바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거한 것입니다.

 

   저는 주교님의 순교 정신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적인 열정에 대해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언자적인 식견도 지니고 있던 분입니다. 훗날 한국교회에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중요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전의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수집을 하여 비망록을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유명한 [조선 순교자 비망기]입니다. 이 책은 병인박해 이전의 박해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록한 한국교회사에서 아주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는 풍토병이라고 할 수 있는 위장병과 신경통을 앓았지만 밤에는 공소들을 방문하여, 교우들을 만나고, 돌아다니기 위험한 낮에는 집필 등의 학문 연구에 매진한 열정을 지닌 사목자이며 학자였습니다.

   탁월한 언어 감각과 언변을 지니고 있었던 다블뤼 주교님, 놀라운 열정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신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던 그분을 만나는 모든 교우들은 탄복을 금치 못했습니다. 교우들과 어울리기 위해 기꺼이 보신탕을 함께 먹던 가장 한국적인 선교사로 알려진 다블뤼 주교님.

   그는 단순히 예수님을 지닌 분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작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주교님보다 다섯 살이나 위였지만 주교님을 아버지로 모시던 황석두 루카 회장님의 주교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주교님이 체포당하였을 때, 주교님과 함께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불며 함께 죽게 해 달라고 울며 애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실 때는 제자들이 도망쳤지만, 다블뤼 주교님이 체포당할 때는 황석두 루카 회장님은 함께 죽겠다고 매달린 것입니다.

 

   여러분들, 상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여러분과 함께 죽는 것이 소원이라며 울고 불며 매달리는 사람을 친구로 둘 수 있다면 여러분은 더 없이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다블뤼 주교님과 황 석두 회장님이 나눈 넓은 의미의 우정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황석두 회장님은 망나니가 주교님의 목을 반만 베고 관리와 흥정을 하려고 했을 때, 망나니에게 단칼에 베라고 호통을 칩니다. 자기가 죽는 그 상황에서도 자기보다는 주교님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더 마음 아팠던 것입니다. 그 호통에 놀란 망나니가 오메트로 오 신부님부터는 모두 단 칼에 벱니다.

 

   5 분이 치명을 당하시던 날, 목이 잘린 머리를 지금의 순교자비가 있는 자리에 걸어놓자, 은빛 무지개 다섯 개가 하늘에 떴다고 합니다. 이것은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220번에 있는 기록입니다. 바로 하늘나라의 영광에 들어갔다는 표징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우들은 지금의 새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순교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언덕 위의 숲에서 순교를 목격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늘에 찬란하게 뜬 은빛 무지개를 보며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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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스텔라 | 작성시간 14.10.13 다섯개의 은빛 무지개...
    참 영광의 표징이네요.
    언젠가 올려주신 글도, 지금의 말씀도
    여전히 가슴아프고 끔찍하고..놀랍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찾은 갈매못 성지에서
    저의 믿음이 얼마나 부끄럽던지요.
    지금도 여전하지만요^^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곡스 | 작성시간 14.10.13 신부님.....


    바~~~~보
    ㅎㅎㅎ
  • 작성자착한초보 | 작성시간 14.10.13 황석두 루가...그분에 관한 글을 읽었었는데요
    다블뤼주교님 덕분에 다시 태어나신 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신부님 감사합니다^^
  • 작성자흐르는 강물처럼~~ | 작성시간 14.10.15 갈매못의 순교 성인들이시여!~~~이 시대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알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고 특히 한국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그 고귀하신 희생과 한 방울 한 방울의 성혈의 은총의 힘이 이 시대의 모든 이들과 한국에 넘쳐 흐르게 하시며 나라와 시대의 하느님의 뜻과 다르게 나아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바로 잡혀갈 수 있도록 전구하여주시며 지켜주소서...사랑하올 순교 성인들이시여! 온 존재로 엎드려 당신들의 그 크나큰 사랑의 희생을 우러르며 사랑의 피눈물로 함께 그 순간 안에 머물러 봅니다. 이보다 더 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어디 있으오리이까!~~
    오 하느님!~~한국 교회를 일으켜주소서!
  • 작성자황금연못 | 작성시간 14.10.16
    빛나는 슬픔이 담긴 아름다운 서해바다로
    이 가을 저희들을 데려가셔서...
    다블리 주교님과 황석두 회장님의 아름다운 우정을 보여주시고
    신앙의 거룩함과 영광을 따를 용기를 주시네요.

    '누이여, 하늘나라에 가서 다시 만납시다'

    뜨거운 사랑의 열망이 다가오는 가을 빛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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