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맑고 향기롭게

[알타반의말씀] 2026년 6월 6일 (녹)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작성자록은|작성시간26.06.06|조회수22 목록 댓글 0
[알타반의  말씀사랑]


2026년 6월 6일 (녹)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오 상선 신부


제1독서; 티모 2서 4,1-8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십시오. 주님께서 의로움의 화관을 주실 것입니다.>
 복음; 마르12,38-44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
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40 그들은 과부들의 가
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
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저마다 삶의 상황이 다른 세 부류의 사람들, 율법 학자, 부자들, 가난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고루 겪게 되는 삶의 기회들, 시기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마르 12,38).

문맥으로 보면 현재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사두가이들과 두루 마찰을 빚고 계시는 중인데, 오늘의 대목에서는 율법 학자들을 정면으로비난하십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 예수님께서 단지 그들을 같이 비난하고 손가락질하자고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

율법 학자는 지식과 권위를 소유한(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권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그들의 적나라한 모습, 인사받기를 즐기고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찾고 과부를 등쳐먹으며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태도는 오늘날 심심찮게 문제가 되고 있는 위선과 갑질의 전형이지요.

그들은 앎과 삶이 분리되어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빠진 우리의 단면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공동선을 위해 우리 손에 쥐어 주신 지식과 권위, 능력과 영향력을 제 명예와 영광을 위해 오용하고 남용하는, 어찌 보면 주님 눈에 불쌍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지요.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마르 12,38).

그들은 하느님께 무언가를 봉헌하는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꼭 재물만이 아니어도 탈렌트나 시간, 건강 등 우리 삶에 이런 풍요의 순간이나 기회가 없지 않지요. 그때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되돌려 드리는 태도는 결코 작거나 하찮지 않습니다.

그런데 봉헌의 지향이 하느님의 더 큰 보상을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헌금함에 돈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찬사를 보내줄 사람들 때문인지, 사심 없는 감사의 표현인지에 대해서는 하느님만 아십니다. 중요한 건, 사람은 그 봉헌의 물리적 수량을 보지만 하느님은 마음을, 지향의 순수성을 보신다는 점입니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렙톤 두 닢을 넣었다"(마르 12,42).

보호자 없는 과부는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아주 취약한 약자입니다. 게다가 가난하기까지 하니 그녀는 생활 이전에 생계와 생존의 위협을 받고 살았을 겁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재산도 사람도 위로도 기대할 수 없이 철저한 고독으로 밀려났던 시기를 떠올려 줍니다. 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고, 혹 지금 이 순간 그 어려움을 겪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인간은 실존적으로 이러한 가난의 체험을 거치게 마련입니다.

그때 절망의 나락에서 추스르고 일어나 제단 앞으로 나아가는 건 놀라운 결단입니다. 게다가 자기에게 남은 것을 있는 것 없는 것까지 박박 끌어 모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건 대단한 용기지요. 자신을 이런 바닥까지 몰아넣은(몰아넣었다고 여기는) 신을 원망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자신을 그분께 의탁하는 태도는 엄청난 신앙입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가져야 할 모습이지요.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 가난한 과부입니다. 사실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 우리가 바치는 건 그게 무엇이 얼마나 되었든 액수에 관계 없이 렢톤 두 닢도 못 되는 가치니까요. 또 돈, 인맥, 제도 등으로 겹겹이 보호막을 치고 살아도 생로병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외에 인간에게 진정한 보호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단순한 의탁과 겸손한 봉헌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유언에 가까운 내용을 전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2티모 4,2). 이미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린"(2티모 4,7) 선배로서 바오로가 충고합니다. 그는 기회가 늘 좋거나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압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2티모 4,5)라는 권고에는 사랑하는 제자이며 후배에게 갖는 짠하고 안쓰러운 심경까지 비칩니다.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박해와 모욕과 죽음의 위협 속을 걸어가는 복음 선포자의 삶이 세상 눈에는 그저 렙톤 두 닢 어치도 못 되는 가치일 수 있지만, 하느님 눈에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마르 12,43) 봉헌한 것이지요. 그 가치는 하느님과,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간 이들만이 압니다.

"이제 다 늙어 버린 이 몸을 버리지 마소서. 제 기운 다한 지금 저를 떠나지 마소서"(화답송).

시편 저자는 복음 속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담아, 아니, 저마다 가난하고 초라한 실존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담아 노래합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나약하고 가련한 실존을 지고 꿋꿋이 살아가는 길은 우리의 가난을 그 약함과 부족함, 죄악까지 주님 발 앞에 바치는 의탁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가난과 겸손으로, 온 세상, 온 우주를 통틀어 가장 부요하고 완전하신 성삼위 하느님을 기리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준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부자가 아니어서, 가난해서 행복한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 프란치스코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