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문명을 건설하고 난 후, 문명들은 충돌하며 숱한 전쟁들을 낳았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전쟁 병기나 전투의 전략 만큼이나 전쟁을 준비하는 측에서 고심하는 것들중 하나는 바로 보급. 그것도 당장 병사가 먹고 사는 식량이었다. 전장에서 필요한 영양소를 얼마나 알차게 낮은 비용으로 많이 공급하는가, 또 그것들을 오래 보존하고, 창고에 보관하기 쉬운 형태로 저장하는 일 또한 중요했다.
그런 배경에서 전투식량은 전장에서 건빵, 미숫가루, 병조림, 알루미늄 캔, 그리고 우리가 흔히 접했던 레트로트 팩(전투식량) 등등의 다채로운 모습으로 병사의 곁에 있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고, 평화를 만끽하는 현 인류는 이것을 심심하다는 이유로 취식하거나, 등산할때 도시락으로 요긴하게 쓸 수 있다. 물론 국방의 의무를 지고있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전투식량 하나에 웃거나 웃지 못할 추억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중에서 현대의 전투식량 그것도, 미군의 전투식량으로 알려져있는 MRE를 구해서 시식해 보기로 했다.
MRE란? 훈련이나 전투중에 손쉽게 즉각 취식할 수 있는 전투식량. 장기보존, 보관이 용이하며 병사에게 필요한 영양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 다만 전시라고 무조건 이것만 먹는것은 아니고, 부식이 피치못할 사정으로 지연되거나 할 때 비상용으로 먹는다. 사실 전장에서의 쓰임은 중요하지 않고, 민간인인 우리에게 중요한것은 바로 '맛' 이다.
Meal Ready to Eat 의 줄임말은 아마 문서상의 이름일 것이다. 마치 군대에서 '아저씨'를 '전우님'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 처럼 말이다. 미군들은 이 식사를 Meal Rejected by-Everyone(or Ethiopian 모두가 거부하는 그 음식, 혹은 에티오피아 난민도 줘도 안먹는 음식)이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그만큼 홍석천씨 머리숱만큼 풍성한 풍미를 지닌 식품이다.
구성으로 들어가 보자
24여가지 맛 중에 chicken with noodles(쉽게 말하면 닭 볶음 면정도 될 것이다.)이 있었다. 짐작컨데 미군기지에서 반출된 물품을 마구잡이로 3만원대 가격에 팔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구매할때 24가지 맛이라는 소리도 없었고 내가 맛을 고르지도 못했다.
전투식량을 드셔본 분들은 알겠지만, 단순히 밥만 들어있지 않다. 메인을 포함해서 메인을 데워 먹을 수 있는 고체연료팩 빵, 땅콩버터, 견과류믹스, 포도젤리, 레몬-라임 음료 분말, 커피, 껌 , 티슈, 성냥, 일회용 수저, 소금, 후추, 메인에 넣어 먹는 페퍼소스까지 다양한 구성으로 병사들의 이런저런 영양이나 기호식품 문제를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는 물품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고기부터 견과류 분말까지 고루 갖춰져 있지만 본문에서 영양성분을 굳이 분석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민간인이니까.
자 이제부터 개봉을 시작해 보겠다.
빵은 식빵과 건빵의 중간 맛이다. 식빵의 살짝 부드러운 강도에, 건빵의 목메임, 건빵의 아무 맛도 안나는 맛, 건빵의 텁텁한 식감을 합쳐놓은 것 같다. 그리고 저 짜디 짠 땅콩버터소스와 곁들여 먹었다.
포도 젤리, 먹으면 개구리로 변할 것 같지만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 포도 잼보다는 밍밍하지만 그래도 제법 포도 향이 나는 설탕 덩어리다.
대망의 메인이다
대략 이렇게 생긴 핫 팩에 (뜨거운 물이 아니어도 된다. 어짜피 핫팩 안에 있는 물질이 물과 반응해서 열을 만든다. 짐작해보건데 물과 반응하여 치지지직하는 소리와 연기를 내는것을 보니 반응속도를 조절한 나트륨 칼륨 등의 1족원소가 아닌가 싶다)
여튼 아래의 설명데로 뎁혀서
접시에 덜어 먹는다. 난 문명인이니까. 보기에도 상당히 맛이 거북해 보인다.
그래서 슬라임의 사체 페퍼소스를 뿌려서 먹어본다.
맛은.. 우리가 흔히 먹는 편의점 도시락이 컬러 사진이라면, 전투식량의 맛은 빈티지와 흑백 사진정도라고 해두면 된다.
빈티지와 흑백 사진은 분위기가 좋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분위기가 아니라 색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맛이 바랬다. 재료가 상하거나 해서 나는 역한 맛도 아니고, 조리법이 잘못해서 나는 맛도 아니다. 그냥 누군가가 맛과 식감을 거두어가고 남은 것을 주섬주섬 들이키는 기분이었다. 아마 장기보관을 위해서 취한 조리법일것이라 짐작해본다. 면도 닭고기도 채소도 본래의 맛과 식감을 잃어버린채 새벽 5시 반 즈음 홍대 근방의 널부러진 청춘들처럼 입안에서 흐느적거리며 기어다닌다.
전투력 최강인 미군조차 자국의 짬밥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부식들로 넘어가보자
MRE의 유일한 자랑거리 견과류 믹스. 마치 한국 전투식량에서 초코볼 급의 포지션이다. 사실 이것이 메인이라 해도 상관 없다. 견과류는 장기보존이 용이해서 그런지 식감이나 맛의 변화가 전혀 없다고 봐도 된다. 게다가 중간중간 말린 과일류가 페퍼소스로 착취당한 내 미각에 한 줄기 빛을 비춰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오염된 노움의 피 레몬-라임 음료.
..이걸 마시고 마나를 잃어버렸다. 이번 크리스마스땐 마법으로 손을 안대고 라면을 끓일 수 있었는데..
총평 :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맛의 수준은 극악이다. 그러나 영양소를 고루 갖춘 비상식량인점, 장기보존이 가능하고 박스형태라 보관시 공간확보가 쉽다는 점,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게 설명이 되어있고, 접시나 컵을 쓰지 않는 이상 설거지조차 필요없다. 한 박스의 칼로리는 1200-1300칼로리이며, 전장에서 필요한 양의 1/3에서 1/2정도를 차지한다.
요리로는 낙점이지만, 식량으로서는 의의가 상당하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접하는 3분 레트로트용기나 인스턴트 커피, 참치나 스팸 통조림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보면, 사실 전투식량의 맛은 알아선 안 될 맛이었지만 그들의 출현은 필수 불가결한 역사의 흐름이었으리라.
다음에 쓸 리뷰는 최근에 오픈베타테스트 중인 온라인게임 트리오브세이비어(TOS 혹은 똥나무망겜)가 될 것 같다.
MRE의 맛 만큼이나 맛 없는 긴 글을 읽어주어서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