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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교회 설교

[2026년 6월 7일 성령강림 후 제2주]

작성자첫눈|작성시간26.06.07|조회수39 목록 댓글 0

20260607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2)

환영하기가게 놓아두기

5:15~6:6; 4:16~25; 9:9~13,18~26

 

송구영신의 새해를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교회력으로는 대림절부터 시작되어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을 보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오는 대림절까지 남은 반년을 절기 없는 연중시기로 지나게 됩니다. 이 절기 없는 연중시기는, 반년 동안 우리가 되새겼던 절기의 의미들을 자양분 삼아 우리의 삶을 일상에 뿌리내고 성장하고 열매 맺는 시간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어떻게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지, 우리를 어떻게 추동하시고 이끄시는지, 어떻게 우리의 모든 잠재력을 이끌어내시고 우리 삶을 새롭게 창조하시는지, 그것을 똑바로 보고, 그것을 바로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삶으로 옮기는 시간이며, 우리의 일상 속에서 구현하는 시간이 됩니다.

 

사실 이런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우리가 못하는 건 하나님도 하실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냥 알아서 모든 일을 다 하셨다면, 성경이 이렇게 두꺼울 필요도 없겠지요. “하나님께서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 이러면 되었겠지요. 하지만, 성경이 이렇게 아주 긴 시대에 걸쳐 많은 인생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연히 유투브 쇼츠를 보았는데, 전후 맥락은 모르겠습니다, 모건 프리먼이 어느 식당 서빙을 하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무척 힘들어하는 어느 여자 손님에게 모건 프리먼이 하는 말입니다. “누군가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인내심을 주시는 걸까요? 아니면 인내할 기회를 주시는 걸까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면, 용기를 주시는 걸까요, 아니면 용기를 낼 기회를 주시는 걸까요? 가족이 더 가까워지기를 기도하면, 하나님이 따뜻하고 포근한 마음을 주시는 걸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기회를 주시는 걸까요?”

 

하나님은 끈질긴 인내심, 불굴의 용기, 포근한 사랑을 직접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다 익은 열매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거둘 씨앗을 주신다, 멋있고 감동적인 말이지요. 인내할 기회를 주시고, 용기를 낼 기회를 주시고, 서로 사랑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정말 기회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기회진짜 기회로 받아들이며 사는 걸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땀을 흘려 그 씨앗을 삶의 밭에 뿌리고 물을 주고 가꾸고 열매를 거두는 걸까요?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불편함과 난감함, 마주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 심지어는 고통의 시간까지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기회들은 기회라는 옷을 입고 찾아오기 않고 위기라는 옷을 입고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 번 소개해드린 루미의 시가 있지요. “여인숙이라는 시입니다.

 

인생은 여인숙/ 날마다 새 손님을 맞는다.// 기쁨, 낙심, 무료함/ 찰나에 있다가 사라지는 깨달음들이/ 예약도 없이 찾아온다// 그들 모두를 환영하고 잘 대접하라/ 그들이 비록 네 집을 거칠게 휩쓸어/ 방 안에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슬픔의 무리라 해도, 조용히/ 정중하게, 그들 각자를 손님으로 모셔라/ 그가 너를 말끔이 닦아 새 빛을 받아들이게 할 것이다.// 어두운 생각, 수치와 악의가/ 찾아오거든 문간에서 웃으며/ 맞아들여라// 누가 오든지 고맙게 여겨라/ 그들 모두 저 너머에서 보내어진/ 안내원들이니.

 

기회를 기회로 보는 능력, 이것을 능력이라고 한다면, 이런 능력이야말로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겠지요. 이것은 삶이 나에게 해주는 이야기를 깊이 있게 듣고, 계속해서 대화하고, 몸으로 살아보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중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삶의 역량(capacity)이라고 하지요.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저는 이것을 환영하고 가게 놓아두는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마태의 집에 가셔서 식사를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세리는 죄인과 동일시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바라새파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 당시 세리 같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는 것은, 단순히 품위가 떨어지는 일이 아니라 율법을 범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예수님은 소위 세상에서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이들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지 않습니다. 환영하십니다. 그들과 더불어 식사하시고, 그들과 어울리시고 그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이것은 당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자체가 죄를 범하는 것이고 소위 의인이 될 수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대의 신앙의 기준이었던 소위 죄인을 환영하는 일에 대해서는 율법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은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와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십시오. 그러면 살아날 것입니다.”라는 청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라가는 중에,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당신의 옷술을 만지는 것을 감지하십니다. 유대 사회에서 죽은 시신이나 하혈을 하는 여자는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주검이나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는 것도 똑같이 부정하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몰래 다가가서 옷에 손을 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죽은 딸을 살려달라는 어떤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부정함의 거부가 아니라, 부정함을 있는 그대로 환영하고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단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이를 치유하는 기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환영하는 역량으로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은, 근원적으로 예수님의 이 받아들이고 환영하는 능력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를 가게 놓아두는 일을 통해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환영하고 가게 놓아두는 일, 이것은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 사람은 기본적으로,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좋은 것은 붙잡고 싫은 것을 멀리 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원하는 것은 받아들이고 원치 않는 것은 거부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이런 방식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삶의 초기부터 알게 됩니다. 욕구와 욕구가 부딪치고, 내 욕구가 모두 다 채워지는 것은 아니며, 당장 욕구가 채워진다고 해서 나의 욕구가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조율이 시작되는데, 이 조율은 쓰라린 감정을 동반합니다. 이 조율이 얼마나 원활하게 이루어지는지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이 조율이 잘 이루어질 때 우리 안에는 좀 더 넓은 공간이 생기게 됩니다. 이 공간은 훨씬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또 흘러가게 놓아두는 공간이 됩니다. 예수님의 삶의 공간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푸시어 그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신다고 믿습니다. 그 사랑은 태양빛과 같이 한 시도 멈춘 적이 없이 우리를 비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빛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신에게 빛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자신에게 은혜가 없다고 불평합니다. 하지만 실재는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너무나 많은 잡동사니들로 가득 쌓여서 빛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을 작동하는 원리는 너무나 분명한 집착과 혐오입니다. 내가 나인 것은 네가 아니기 때문에 나입니다. 내가 특별한 것은 네가 없는 것을 내가 가졌기 때문에 특별한 것입니다. 너의 부정이 나의 인정이고, 너의 빈약함이 나의 특별함입니다. 또한 나의 자아실현은 지금의 나를 넘어서서(지금의 나를 부정해서) 이루는 어떤 특별한 나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 우리 삶이 어떻든지간에,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에게 바다처럼 넘쳐나고 있다는 것을 잊는 것이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거대한 사랑의 흐름 안에, 혹은 거대한 사랑의 원무 가운데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는 것입니다.

 

오늘 호세아의 말씀에, 새벽마다 여명이 밝아 오듯이, 주님의 자비는 그처럼 어김없이 찾아오시고, 가을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아침 안개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변함없는 사랑(<헤세드>)이지 제사가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온전한데 우리 사람의 사랑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침 안개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 같습니다. 임시적이고 일시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변함없는 사랑/신실한 사랑인 헷세드를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는 것(다앗 엘로힘)을 바라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들여 우리 안에 마음의 공간을 넓히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변함없는 사랑, 헷세드는 우리 마음의 공간이 넓었을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마음의 공간을 넓히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우리 마음의 공간을 억지로 넓힐 수는 없습니다. 넓힐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공간은 이미 넓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넓으냐 하면, 하나님의 넓이만큼 넓습니다. 하나님의 공간은 우리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잡동사니들을 치워서 우리 마음의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하나님의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다앗 엘로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하면, 우리의 마음의 공간만큼/우리의 의식의 수준만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저는 앞에서 잡동사니라는 말을 썼지만, 이 말은 좀 어폐가 있습니다. 이 말은 마치 우리 안에 뭔가 쓸데없는 것이 가득해서, 깨끗하게 청소해야 할 쓰레기 더미로 우리 자신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 내게 들어내야 할 이런 잡동사니들이 많이 쌓여 있어.”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 압박감 자체가 오히려 잡동사니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잡동사니대신에 루미가 말했던 여인숙 손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넓이를 우리에게 찾아오는 손님을 통해 알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손님에게 집착하고 원치 않는 손님을 혐오하여 부정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의 공간은 매우 좁아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손님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는 휘청댑니다. 환영할 수가 없습니다. 루미가 여인숙의 손님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 손님이 영원히 우리에게 붙어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원치 않는 손님을 혐오하고 거부하게 되면 아주 오래 붙어 있게 될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 손님을 환영하고 받아들일 때까지. 만일 우리가 원하는 손님에 집착하고 놓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손님과 제대로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요. 아브라함은 자신 안에 삶의 공간(하나님의 공간)이 있고 그것이 매우 넓다는 것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환영하고 가게 놓아두는 일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의 공간을 넓혀 갑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기회들을 그가 잘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회로? 믿음을 키울 기회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런 기회를 계속 제공했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엔, 아들을 번제로 바치는 기회까지.

 

이 말은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사랑, 한결같은 사랑인 헤세드를 붙잡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 안에 공간을 넓힐 수 있는 유일한 요소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은, 어둠 속으로 무작정 뛰어드는 일이 아니라(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 얼핏 본 것 같았던 가는 실이 실제로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내적인 확신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내적인 확신은 계속되는 기도 경험을 통해 갖게 되는 확신입니다.이것을 바울은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4:18)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남은 반 년 동안,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성장할 기회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새벽여명처럼 여러분에게 찾아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봄비처럼 찾아오는 주님의 사랑을 매순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여유와 공간만큼 환영하고 가게 놓아두는 일을 계속하십시오. 여러분의 공간은 점점 더 넓어질 것입니다. 그 공간은 여러분을 더욱 자유스럽게 만들어 줄 것이고, 여러분의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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