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4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3주)
달라지는 웃음
창18:9~15; 롬5:1~8; 마9:35~10:8
지난 주일에, 우리의 남은 시간들은 “성장할 기회”를 얻는 시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인내가 아닌 인내할 기회, 용기가 아닌 용기를 낼 기회, 사랑이 아닌 사랑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라구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 친절과 선함, 신실과 온유와 절제” 같은 열매들을, 완성된 열매로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작은 씨앗으로 받게 되며, 우리가 열매를 얻으려면 우리의 남은 시간 동안 그 씨앗을 밭에 심어 새싹부터 틔우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서 키워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너무 뻔히 아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와 여러분은 일상 속에서 이것을 얼마나 체감하며 몸에 배여 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직접 농사지어서 참외나 수박을 길러 먹지 않습니다. 그냥 먹고 싶으면 바로 시장으로 가서 열매를 사먹지요. 우리는 씨를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바로 구매하지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의 대부분의 일상이 “열매”를 거두는 “특별한 날”이기보다는, 대부분 땀 흘려 가꾸고 농사짓는 평범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까먹습니다. 특별히 믿는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들은 성령이 역사하시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으로 알 때가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갑자기 하늘에서 다 익은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날마다 새벽 여명으로 찾아오시고, 해마다 내리는 가을비처럼 봄비처럼 찾아오십니다. 그렇지요! 어둠을 밝히는 새벽 미명은 우리에게 매일 변함없이 찾아옵니다. 그 빛은 우리에게 하루를 시작하게 하고, 그 열은 우리를 보호하고 살립니다. 우리는 새벽 여명을 무심코 넘길지 모르지만, 식물은 그 빛과 열을 그냥 무심히 넘기기 않습니다. 직접 그것으로 열심히 광합성 작용을 하면서 양분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때마다 가을비, 봄비로 찾아오십니다. 식물은 그 비를 그냥 무심코 넘기지 않고, 빨아들여 축척하고 그것으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일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상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잘 알아차리고, 이것을 삶에서 살아낸다면, 우리 삶은 조금씩 더 깊어지겠지요. 어느 수도승 신부님의 시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다, 정말 자신의 시처럼 살아가고 있는 수도승의 삶이, 정말 일 년 열 두 달 똑같은 루틴에 똑같이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수도승의 일상이 특별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삶의 밀도가, 농도가 남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삶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이런 삶의 진수, 삶의 속살을 직접 맛보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 날마다 새벽 미명으로 찾아오시고, 때마다 가을비, 봄비로 찾아오시는 분의 그 정기와 기운을 우리가 얼마나 잘 받고 사는지가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오늘 창세기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내년 이맘 때 쯤 자신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고지를 찾아온 손님을 통해 듣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목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한창 더운 대낮에 손님들이 아브라함의 장막에 찾아오고, 아브라함은 그 손님들을 극진히 대접을 합니다. 찾아온 손님을 환대하는 것은 유목민들에게 몸에 배어있는 습관이었을 것입니다.
잘 차려진 잔칫상을 받고 나서 찾아온 손님들이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라를 찾습니다. 그리고는 “내년 이맘 때에, 당신을 다시 찾아 올 것인데 그때 당신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장막 안에서 아브라함을 등지고 서 있던 사라는 이렇게 말하며 속으로 웃지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직역: “힘이 바닥났는데, 내게 성욕(성적 즐거움)이 있을라구? 주인 양반도 늙었고.”)
창세기의 나레이터는 사라의 이 웃음을(실은 비웃음이지요)을 가지고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지요. 손님들(여기서부터 “주님/야훼”이라고 바뀌지요.)은, 사라가 웃은 것을 보고, “당신이 어찌 웃으면서 내가 어찌 아들을 낳겠냐고 말하며 의심하느냐?” 힐문하고, 사라는 두려워서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손님은 “아니다, 웃었다”고 못 박습니다.
나중에 이 사라의 웃음은 달라집니다. 일년 후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태어났을 때, 사라는 이렇게 혼잣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셨구나. 나와 같은 늙은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듣는 사람마다 나처럼 웃지 않을 수 없겠지.” 태어난 아들 “이삭”(이츠학)이라는 이름의 뜻은 “그/그녀가 웃을 것이다”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창세기의 웃음 이야기는 삶의 아이러니와 역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도 안돼서 나오는 헛웃음이나 비웃음이 있지요. 그런데 이런 비웃음이 진짜 웃음이 된다는 아이러니와 역설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저 의심하지 말고 믿기만 하면, 네가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라고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믿음은 어둠 속으로 무작정 뛰어드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심이 일어나도 그 의심을 내리 누르고 “믿는 대로 될지어다.” 자기쇄뇌를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이것을 알고 있지요. 그래서 어쩌면 믿음을 어리석은 것이고, 쉽게 웃어넘기는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은 쓸데없고 약발이 다 떨어진 약처럼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인생 후반기를 잘 살아내려면, 더 많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배운 많은 것을 지우는 일이 더 필요합니다. unlearn이라고 하지요. 배운 것을 다시 해체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내게 아직도 의미가 있는지 더 이상은 의미가 없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사회가/세상이 그냥 넣어준 것을 다시 꺼내 재구성/재조직화하는 일입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 이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 신앙이 단단해지고, 좀더 의미있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짜 믿음이 아닌 진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의심을 내리누르고 “믿는대로 될지어다” 자기쇄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은 어둠 속에서 얼핏 본 것 같았던 “가는 실”이 실제로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다는 내적인 확신을 서서히 확인해 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은 욕망의 충족이나 마술 같은 기적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얼핏 본 우리 삶의 본질을 붙잡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과 닮음(모양)을 따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일입니다. 그 “가는 실”이 진짜로 연결되어 있는 그 곳을 향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창세기에서 보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그런 믿음입니다. 살고 있는 땅, 아버지 집을 떠나서, 다시 말해 자기의 구습, 세상이 규정해 놓은 “자기”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약속”을 얻기 위해 (이 약속을 창세기는 “하나님께 받을 상속”이라고 하고, “아들”과 “땅”으로 상징합니다.) 어둠 속에서 “얼핏 본 것 같았던 가는 실”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지요.
오늘 창세기 본문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당신들에게 다가오는 호의와 신호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헛웃음, 실소로 넘기지 마십시오. 날마다 익숙하게 다가오는 아침 여명과 때마다 찾아오는 가을비, 봄비를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당신들의 일상을 꿰뚫고 있는 많은 지지와 도움을 웃기지 말라고 비웃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상속의 실현은, 먼저 그런 호의와 신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모리스 니콜의 말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소위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고 많이 공감되는 글입니다.
“당신의 존재가 커질수록 더 높은 의미를 받아들이는 당신의 수용성도 커진다. 당신의 존재가 줄어들면, 오래된 의미들이 되돌아온다.”
여러분, 이 말을 오래 오래 곱씹어 보십시오. 우리 존재가 커진다는 것은, 에고 인플레이션, 에고가 팽창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공간이 넓어진다는 뜻입니다. 더 많은 것들을 받아들여 환영하고 또 가게 놓아둘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버지 집을 떠나서 가나안 땅을 방랑할 때에, 그가 배운 것은 바로 그동안 자신이 배운 것을 unlearn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공간을 만든 일입니다. 그의 고난과 역경은 바로 그 공간을 만들어 주는 기회였습니다. 그가 존재가 줄어들 때, 그에게 오래된 의미들이 되돌아 왔습니다. 현실이 두려워졌고, 그래서 무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행동이 부산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마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셨다”, <스프랑크니조마이>는 <스프랑크논>에서 왔는데, <스프랑크논>은 내장, 몸의 안쪽, 마음이라는 뜻이 있지요. 예수님의 모든 치유의 근원이 “불쌍이 여기셨다”는 말이고, 예수님의 치유에는 늘 이 말이 쓰였다고 간파한 사람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라는 책을 쓴 앨버트 놀란입니다. 참, 깊은 통찰입니다. 이 말이 창자와 관련되어 “애끓는 사랑”이라는 뜻으로도 보지만, 요즘 제가 보기에 그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몸의 안쪽, 즉 마음의 광활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부정적이라고 소외된 사람들을 그의 몸의 안쪽, 넓은 마음으로 품고 받아들이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치유의 근원은 거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일러 주십니다. “앓는 사람을 고쳐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어라.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우리에게도 <스프랑크논> 마음을 넓힐 기회를 주시는 것이지요. 받아들이고 환영할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품어야지” 할 필요도 없습니다. 환영하고 가게 놓아두면 됩니다.
또 우리가 환영하고 받아들일 때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힘든 일이 찾아왔을 때, 고난과 역격이 찾아왔을 때, 그 일을 받아들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가령 어떤 외부적인 사고가 났는데, 그걸 받아들이라, 어떤 큰 병에 걸렸는데, 그걸 그냥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슨 상황이 벌어지든 상황을 받아들여라, 너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을 받아들여라! 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받아들이는 일보다는 억압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 복지부동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받아들일 것은, 그런 일로 인한 우리의 감정입니다. 우리의 실패감, 자괴감, 아픔, 후회, 자책 등입니다. 그리고 이 때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런 마음, 그런 감정이 와도 돼, 괜찮아~! 내 감정으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 감정을 우리의 몸의 감각으로 체험하고 몸의 에너지로 풀어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멀리 이방인을 찾아가지도 말고, 사마리아 사람을 찾아 가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들을 환영하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일 겁니다. 그리고 우리 식구들, 가까이 있는 이웃들이겠지요.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 식구들일 겁니다. 거기서 올라오는 모든 감정을 판단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아프면 아픈 그대로 몸의 감각으로 만나는 것이지요. 거기에 뭔가 자꾸 덧붙이고 해석하고 이야기 짓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마다, “판단 중지!”(에포케) 그래야 실상을 봅니다.
특히, 나 자신에 대해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길은, 항상 따라붙는 비평, 해석, 이야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이것을 잘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판단하지 않는다. 가서 죄 짓지 말고 살아라!” (웃기는 건, 간음을 여자 혼자하지는 않았을 텐데, 남자의 이야기는 성경에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늘 이렇게 편파적이고 부분적입니다!)
여러분, 오늘 사도바울이 하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은 복잡하고 교리적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판단 중지를 할 수 있는 근거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받아들여 환영하고 가게 놓아둘 수 있는 근거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도바울의 말씀들은 대부분 교리적인 말이 아니라, 그의 그리스도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제 자신의 체험입니다.) 여러분도 이 부분에 한번 마음을 두고, 앞으로 여러분의 신앙에 화두로 삼아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일이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중보기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