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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교회 설교

[2026년 6월 21일 성령강림 후 제4주] 이삭과 이스마엘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다

작성자첫눈|작성시간26.06.21|조회수31 목록 댓글 0

2026062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4)

이삭과 이스마엘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다

21:8~21; 6:4~11; 10:26~31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21장에는 사라와 하갈 사이의 갈등이 있었고, 이로 인해 하갈이 추방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많은 경우, 이 장면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약속된 상속자이삭과, 아랍민족의 조상이 되는 육의 자녀이스마엘의 대립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이런 양식의 이야기를 민담에서는 원인론적 이야기라고 하지요. 훗날 이삭의 후손(이스라엘 민족)과 이스마엘의 후손(아랍 민족/이슬람 전통) 사이에 겪게 되는 역사적ㆍ종교적ㆍ정치적 분리의 원인을 설명해주는 틀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하갈 추방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두 번 나옵니다. 16장과 21장입니다. (구약학에서는 하나의 구전이 두 개의 버전의 자료로 전해오다가 오경이 편집되는 과정에서 함께 들어간 것으로 봅니다.) 이 두 번의 하갈 추방 이야기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야기의 뼈대는 비슷합니다. (사실은, 세 번째 버전이 있는데, 이슬람의 꾸란과 꾸란의 해석집인 하디스에 나오는 이스마엘의 관점입니다. 거기서는 이스마엘이 쫓겨나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아브라함과 함께 광야로 나가서 이스마엘이 이삭처럼 하나님께 바쳐지게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래서 그곳에 메카 중심에 있는 카아바 성전을 건축했다고 합니다. 물론 거기에도 광야 방랑과 샘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쨌든, 창세기16에서는, 사래(사라)가 자신의 몸종 이집트 여인 하갈을 통해 아브람(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얻게 하지요. 그런데 임신한 하갈이 주인 사래를 깔봤고,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니까 하갈이 스스로 사막(광야)으로 도망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갈이 광야 샘 곁에서 있는데 천사가 찾아와, 너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너의 자손을 셀 수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는 태어날 아이를 이스마엘(하나님께서 들으심)이라고 하라고 하지요. 이는 네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갈은 이 일을 겪고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엘 로이”(보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고, 그 셈을 브엘라헤로이”(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샘은 지금까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그대로 있다고 하지요. (원인론적 이야기의 특징이지요.) 그래서 하갈이 주인에게도 돌아가 아이를 낳습니다.

 

오늘 읽은 두 번째 추방 이야기는 사라가 이삭을 낳자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자 사라가 하갈을 쫓아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의 이야기보다 더 비극적이지요. 하갈은 어린 아들과 빈들에서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니다 물이 다 떨어져 거의 죽게 될 지경에 이르러 방성대곡을 하고 있는데, 천사가 찾아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는 말을 하고,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셔서 샘을 발견하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 20절 말씀이 눈에 띕니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살면서 활을 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하갈과 이스마엘이 (도망쳐 가든지, 쫓겨 나든지) 광야로 나가게 되었고, 광야에서 천사를 만났고, 이스마엘에게서 큰 민족이 일어난다는 약속을 듣게 되고, 샘에 얽힌 사연이 나오는 것은 공통적입니다. 어쨌든 하갈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는 사라와 이삭의 이야기라는 본류에서 곁가지로 뻗어나온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창세기에서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두 관점을 대비 혹은 대립으로 읽게 됩니다.

 

우선, 창세기의 이야기는 이삭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태어난 약속의 상속자, 이스마엘을 인간의 꾀로 인해 태어난 육의 자녀로 대비시키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10절에도,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라고 못 박습니다. 이는 훗날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독점적인 언약 백성(선민)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신학적 근거가 됩니다.

 

또한, 거주지와 경계선이 그어지게 되지요.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짓는 반면, 이스마엘은 가나안 남쪽 경계 밖, 광야지대에서 살게 되지요. 성경은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활 쏘는 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농경민족이었던 이삭의 후손들과 달리 유목과 사냥을 하며 거친 광야에서 살아가는 이스마엘 후손들(베두인 및 아랍 부족들)의 삶의 방식을 원인론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스마엘을 완전히 버려진 존재로만 그리지 않지요. 하나님은 하갈에게도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21:18)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하나님은 약한 자를 버리지 않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의미에서 해석될 수 있겠지요. “참새 두 마라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10:29)

 

그런데 저는 오늘 이 이야기를 선과 악, 적자와 서자, 약속된 상속자와 상속을 받지 못한 후손, 선택된 자와 버려진 자라는 대립과 분리라는 관점을 넘어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이원적 관점 혹은 통합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 창세기의 이야기가 약속의 아들, 이삭의 관점에서 그려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창세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원을 다루고 있는 책이니까요. 당시 구약은 아무래도 우리의식, 즉 민족의식에 머물러 있지, “우리 모두의식, 즉 세계의식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민족들에 대해 배타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요. 그것은 아마도 당시의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그랬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하지만,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 모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단편적으로마나 전해주는 책이나 구절이 있습니다. 가령, 후대의 책이기는 하지만, 요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의 아니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 백성도 사랑하고 계심을 요나의 고집과 대비해서 알려주지요. 또 이사야19장에 이집트에 대한 예언을 하는 중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이복을 받아라.”

 

이렇게 민족주의에 짙게 채색되어 있는 구약성경도 종종 온 세계의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드러냅니다. 오늘 이스마엘을 향한 축복,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 “하나님이 그 아이(이스마엘)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오늘 우리는 이삭과 이스마엘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이분법적인 경계 대신에, “서로 달라 보이는 모든 존재가 결국 하나의 거대한 사랑의 흐름 안에서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는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드러난 모양은 다르지만, 각자가 하나님의 자녀다, 라는 것이지요.

이원적 관점에서는 이삭은 ”, 이스마엘은 추방”(저주)으로 보이지만, 비이원의 눈으로 보면 두 아이 모두 아브라함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하나님의 동일한 축복(“큰 민족을 이루리라”)을 실현하는 생명들입니다. 물론 드러나는 양상은 다르지요. 이삭의 길은 언약의 중심에서 내면의 성소를 지키는 형태, 즉 안으로 수렴하는 길이라면, 이스마엘의 길은 거친 바란 광야에서 활을 쏘며 한계가 없는 공간으로 뻗어 나가는 형태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삭의 길이 중심을 지키고 정착하는 것이라면, 이스마엘의 길은 광야 밖으로 확장하고 뻗어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삭과 이스마엘은 대립하는 두 존재가 아니라, 한 근원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드러낸 안과 밖, 수렴과 확장, 음과 양, 혹은 빛과 그림자가 됩니다. 광야가 없으면 가나안이 존재할 수 없듯, 둘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과 이스마엘은 하나의 생명이 드러나는 두 개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59절에 보면,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모여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숨을 거두고... 조상들이 간 길로 갔다. 그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막벨라 굴에 안장하였다..” 7~80년 동안 각자의 길을 걸으며 분리되었던 두 형제는 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한자리에 모입니다. 비이원적 시선에서 이 장례식은 매우 강렬한 상징처럼 보입니다.

현상 세계/보이는 세계에서 이삭은 약속의 울타리 안에 있었고, 이스마엘은 울타리 밖광야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음근원”(아버지)이라는 절대적인 진리 앞에서는 중심과 변방, 정착과 방랑, 선택과 추방이라는 이분법적 경계가 순식간에 녹아내립니다.

 

여기서 막벨라 굴의 상징성이 나옵니다. 막벨라(Machpelah)는 히브리어로 겹치다”, “두 배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이라는 두 개의 평행선 같던 삶이 아버지를 묻는 이 좁은 동굴 안에서 하나로 겹쳐집니다. 성경은 이들이 만났을 때 누가 옳았는지 따지거나 싸웠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함께 아버지를 장사 지냅니다. 이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때 되어지는 일을 지금 만나는 것이, 비이원적 삶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여기 서로 다른 두 형제가 자신의 뿌리인 아버지 앞에서 다시 하나로 만나는 이 장면이야말로 오늘 이삭과 이스마엘 이야기의 숨겨진 결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숨겨진 결말은, 안과 밖, 중심과 주변, 선택된 자와 버려진 자 사이에 늘 갈등하고 대립하는 우리들에게, 우리 삶은 이미 이 둘을 포함하고 계시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야기 속에서 광야에 가득 찬 하나님의 현존을 볼 수 있습니다. 하갈이 절망의 끝에서 눈물 흘릴 때, 하나님은 성전 안이 아닌 텅 빈 광야 한복판에서 내가 아이와 함께 있겠다”,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울타리 안쪽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구름이 아무리 두터워도 그 너머의 하늘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듯이, 추방의 자리, 공허한 텅 빈 공간 역시 하나님의 생명력과 축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의 죽음과 장사지낸 이야기 바로 다음에 이스마엘의 족보를 전하고 있습니다. (2512절 이하) 이스마엘의 열 두 아들이 열 두 지파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과 이스마엘이 137세까지 살았다는 기록입니다. 하갈의 절망이 깊었던 텅 빈 광야 역시 하나님의 생명력과 축복으로 가득 채워진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선택받은 땅(가나안)에만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땅(광야)에서도 하나님은 동일한 크기와 밀도로 현존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여러분, 본디 이 세계는 온전한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하나임(oneness)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둘은 대립과 갈등으로, 주체와 객체로, “이것아니면 저것으로 보며 살아왔습니다. 또한 늘 나 아닌 것의 대립 속에서 살아왔고 또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둘을 넘어 둘이 아닌 쪽으로 간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이것도 저것도의 관점을 갖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머튼의 말대로, 우리는 오랫동안 둘이 갈라진 이원의 세계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둘이 아니라는 것을 진짜로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존재가 커질수록 더 높은 의미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수용성도 커지고, 우리 존재가 줄어들면 오래된 의미들이 되돌아 올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세상살이에 지쳐 다시 구습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나는 선택받은 이삭인가, 버려진 이스마엘인가?” 이분법적 질문에 갇히게 되고, “나는 울타리 안의 삶인가, 울타리 밖의 삶인가?” 판단하려 들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이를 향해서도 드러난 현상을 보면서 계속 판단하고, 단정해 버려 사실로 받아들이고, 현실을 자신 대로 고정시킬 것입니다.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대로, “무엇이든지 받아들여지는 것은, 받아들이는 자의 방식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법입니다. 사실, 이런 일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의 뿌리는 우리의 중심이 무너질까봐 두려워하는 에고의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표면적으로는 열 두 제자의 전도단에 대한 박해를 말하고 있지만, 우리 삶의 중심에 있는 두려움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이 만든 두려움, 이야기 짓기가 만든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 밖에 존재하는 공간이나 상황은 없다는 것이지요. 이삭의 풍요로움도 이스마엘의 광야도, 결국은 우리를 살리고 묶어 흐르는 거대한 숨결 안에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요동침과 마음의 심한 흔들림 속에서도, 참새 한 마리, 머리카락 한 올도 놓치지 않고 붙들고 계시는 흐르는 하나임을 기억하십시오.

 

이삭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이라는 한 근원 안에서 결국 만나 장사를 지냈듯, 우리가 계속해서 근원을 향하다 보면, 우리의 흔들리는 일상과 변하는 기분 역시 그 도도한 생명의 흐름 안에서 결국 하나의 아름다운 춤으로 모아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순간순간 그 바람결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자유의 씨를 뿌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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