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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기병의 기원

작성자Lord|작성시간04.10.21|조회수412 목록 댓글 1
일단 중장기병의 기원에 대해 말해보기 전에 중장기병(重裝騎兵)이란 무엇인가부터 알아보자. 중장기병은 상대적으로 무거운 갑옷으로 몸을 두른 기병을 말한다. 반대로 경장기병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장을 한 기병이다. 일단 사전적인 의미는 이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중장기병을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보편적으로 쓰이는 중장기병의 의미는 철갑옷(혹은 기타 금속제 갑옷) 으로 전신 혹은 대부분의 몸 부위를 보호하고 긴 창에 말과 사람의 무게를 더해 상대를 찔러 그 진영을 무너뜨리는 이른바 충격전술 혹은 돌격전술을 쓰는 기병을 지칭한다. 말에 탄 사람뿐만 아니라 말까지 마갑(馬甲)을 입힌 기병도 있다. 고구려의 자랑 개마기병이 그들인데 이 경우는 사람 뿐만 아니라 말까지 갑옷을 입힌 경우다. 편의상 말과 사람 둘 다 중무장한 기병을 중갑기병(重甲騎兵)혹은 개마기병(介馬騎兵)이란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최초의 중장기병은 페르시아 제국(BC 550~330) 에서 중무장을 한 기병이 등장한 것이 그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몸을 가리는 철갑과 투구, 그리고 말의 머리와 몸통 앞부분을 가리는 약간의 마갑을 갖추었으나 전술적 활용도 면에서는 경기병이라 볼 수 있다. 즉 그들의 주요전술은 적진에 돌격해서 충격전술로 승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적군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투창이나 활등의 투사무기로 적진을 혼란에 빠트리다가 적군의 측면을 기습해 짧은 창으로 적의 보병대를 기습하는 임무를 맡았다. 다리우스 2세 시절 바빌로니아 지방의 문서에 의하면 페르시아 기병은 ‘고삐와 허리띠를 갖춘 말, 투구, 철로 만든 흉갑, 청동 방패, 화살 120개, 철퇴, 철창 2개’ 을 갖출 것을 명시하고 있다.


기원전 4세기 경 마케도니아의 필립 대왕은 그 아들 알렉산더 대왕에게 중무장한 기병대를 물려준다. 전쟁의 천재 알렉산더는 그의 중장기병을 투사무기에 의존하지 않고 길이 9피트 무게 4파운드 가량의 창을 앞으로 내밀고 적에 부딪히는 이른바 충격전술을 쓰는 기병대로 활용한다. 혹은 적군 앞 3미터 까지 돌격했다가 창을 던져 적을 맞추기도 했는데, 이때의 창은 말의 속도가 더해진 상태기 때문에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세계 최초로 충격전술을 사용하는 중장기병의 등장이었다. 

그들은 보통 무거운 창으로 무장하고 칼은 보조무기로 착용했으며, 몸통에는 청동이나 철로 만든 판금갑옷을 머리에는 금속제 투구를 거기다 방패를 들기도 했다. 방패는 보통 말 위에서는 쓰지 않고 말에서 내렸을 때 쓴 것으로 보인다. 마케도니아 군에서 기병의 비율은 보통 보병 5명에 1명의 기병이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중장기병은 쐐기꼴 모양의 진영을 유지하면서 적의 전열을 돌파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충격전술을 이용하는 중장기병이 등장하는데 등자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말안장 아래에 기수가 발을 디딜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는 등자는 기수에게 좀더 자유로운 움직임과 안정성을 갖추게 하는 등 등자를 단 기병이 그렇지 않은 기병에 비해 우위에 서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중장기병 전술을 창안했을 때는 아직 등자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케도니아의 중장기병은 적군과 충돌 시에 오는 반동을 오랜 기간 기마술을 연마해 얻은 뛰어난 승마술로 커버해야 했다. 

따라서 이때의 중장기병은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중장보병과의 정면충돌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중장보병대의 측면이나 후방으로 침투해야 했다. 중장기병이 잘 훈련된 중장보병과의 대결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 시기는 후대에 등자가 등장한 시기부터이다.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구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점한 것은 셀레우코스 왕조였다. 이러한 셀레우코스 왕조를 대신한 것이 이란계 유목민족 출신이 주축이 된 파르티아 제국(BC 247~ AD 224)이었는데, 파르티아인들은 새로운 말의 사육방식을 알아냈다. 원래 초원에 사는 유목민들은 풀이 부족한 겨울에는 말을 그냥 초원에 풀어 방목했다. 파르티아 인들은 겨울에 말에게 자주개자리란 식물을 먹이면 그 말이 초원의 작은 말보다 훨씬 힘도 세지고 덩치도 커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이 새로운 말은 좀 더 무거운 장비를 지닌 기병을 태울 수 있었다.

파르티아 인들은 알렉산더의 후예인 셀레우코스 왕조의 잘 훈련된 중장보병대와 로마의 군단병과 투쟁하면서 밀집진형을 이룬 잘 훈련된 중장보병을 상대하는 방법은 잘 훈련된 중장기병으로 적의 진영을 무너뜨리고 갑옷을 관통할 수 있는 강력한 활로 무장한 궁기병으로 적을 약화시키는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경무장을 한 궁기병은 접근전에 취약성을 보이므로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파르티아 인들은 세계 최초로 말과 사람 둘 다 철갑을 입힌 중갑기병 혹은 개마기병을 새로 발견한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전마에 태웠다. 파르티아의 군대는 대부분이 기마병으로 구성돼 있었고, 기마병 중 궁기병 대 중갑기병 의 비율은 10 대 1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등자가 없는 중갑기병의 돌격력은 그 위력이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나 파르티아인들은 이를 유목민족 특유의 뛰어난 기마술로 극복했다. 

파르티아 인들은 작은 강철판이나 철판 여러 개를 생가죽에 붙힌 무릎까지 내려오는 비늘갑옷을 기병에게 입히고 그가 탄 전마에도 머리부터 무릎까지를 덮어주는 청동이나 강철로 만든 미늘갑옷 씌워 이전의 기병보다 월등한 방호력을 가질 수 있었다. 파르티아의 중갑기병은 긴 창이나 활을 공격무기로 썼다. 

파르티아의 중갑기병은 등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병이 돌격할 때 내지른 창 하나가 두 명의 병사를 관통한 일이 있을 정도로 막강한 파괴력을 자랑했다. 기원전 53년 칼헤 전투에서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 군은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 중장보?눼騈? 궁기병의 화살 공격으로 로마군을 약화시키고 중갑기병이 돌격해 결정타를 먹이는 전술로 로마군을 대패시켰다. 또한 파르티아의 중갑기병은 주위의 유목민족의 경기병과의 대결에서 파르티아 군이 우세를 점하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파르티아 제국을 멸망시킨 사산조 페르시아(서기 226~651년)는 기존의 파르티아의 비늘갑옷보다 유연하고 방어력이 좋은 사슬갑옷을 로마군으로부터 도입해 파르티아 중갑기병과의 대결에서 우세를 보였다. 전신을 사슬갑옷으로 무장하고 마갑을 입힌 사산조 페르시아의 중갑기병에게 쓴 맛을 본 로마군은 서기 3세기 무렵 사산조 페르시아의 중갑기병을 모방한 기병을 도입한다. 


페르시아에서 세계 최초로 중장기병이 등장한지 700여년 후 동북아시아에서 드디어 등자를 갖춘 개마기병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중국에 등자가 등장한 것은 한나라(BC 202~AD 220)연간이나, 한나라 때의 등자는 발판이 하나뿐인 데다 등자의 길이도 안장보다 짧아 기수가 일단 말에 올라타면 그 등자를 발판으로 쓸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등자는 말을 올라타는 데 쓰였을 뿐이고, 일단 말에 오르면 등자가 없는 기병과 큰 차이가 없었다. 기수의 안정성을 높여주는 발판이 안장 양쪽으로 두 개가 있고 적과의 충돌에서 오는 막대한 충격을 버티기 위해 통짜로 금속으로 만들거나 나무를 금속으로 감싸 보강한 등자만이 중장기병의 파괴력을 높여줄 수 있었다.

이런 중장기병에 적합한 등자가 등장하는 것은 서기 4세기 무렵으로 4세기 중반부터 중국과 고구려에서 완전히 진화한 등자가 다량 발굴된다. 4세기 무렵 동북아시아에서는 등자를 장착하고, 기수와 말을 미늘갑옷으로 감싼 개마기병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고구려의 유명한 개마기병이 바로 이들인데 중국에서는 동진시대(AD 317~420) 고구려에서는 4세기 중반무렵부터 널리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4~6세기 동아시아에서는 여러 북방민족과 중국왕조에서 각각 대량의 개마기병을 도입했다.

등자의 등장은 중갑기병의 안정성과 충격력을 높여주었지만, 보다 중요한 점은 효과적인 중갑기병을 활용하기 위해서 더 이상 예술적인 기마실력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존에는 승마술이 뛰어난 기병만이 중장기병으로 활용될 수 있었지만 이제 훌륭한 기마술이 없더라도 효과적인 중장기병으로 활약할 수 있어 중장기병의 숫자가 대폭 늘어날 수 있는 개기가 된다. 일예로, 파르티아의 중장기병의 수는 전체기병의 10분의 1밖에 안됐지만 고구려의 행렬도에 등장하는 개마기병의 수는 경무장을 한 기병의 거의 반에 육박한다. 


서기 4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에는 잘 훈련된 중장보병을 압도할 수 있는 중장기병이 등장했다. 이후 중장기병의 진화는 8세기 무렵부터 등자를 도입한 서유럽에 그 명맥이 이어져 계속 중장기병의 충격력과 방호력을 극대화 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해 15세기 무렵 고딕 기사의 등장으로 그 절정에 이른다. 





출처 : <네이버 오픈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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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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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Claymore | 작성시간 04.10.21 아....고구려의 개마무사... 제발 이 개마무사에 대한 더 확실한 유물좀 하나만 발굴되라!!! 이시기에 중국의 병력이 대부분 보병인것에 비해 고구려는 군사비율중 거의 절반이 중장기병이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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