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십자군 원정의 성공으로 지금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몇 개의 십자군 공국들이 건국됩니다. 그러나 실지탈환을 꾀하는 이슬람교도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프랑크군의 전술은 한마디로 하나의 발사체, 미사일과 같은 것이라는 게 특색입니다. 이는 강력한 중무장, 이를 뒷받침 하는 체력을 바탕으로한 기사들의 대대적인 돌격이라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들의 이른바 '돌격'은 중동 전역에서 유명했으며 두려움의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중동인들은 이들을 '짐승같이 힘이 센 자들'이라 부르기도 했었죠.)
반면 이에 맞서는 투르크군은 역시 유목민족의 그 것, 그러니까 적을 유인해서 대형을 분열시킨후 각개격파...였습니다. 투르크 기병들은 프랑크 기사들의 돌격을 교묘하게 유도한 후 이를 맞받아치는 것이 아니라 측면이나 후면에서 덮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투르크군의 전술은 프랑크군에게 큰 골칫거리였으므로 그래서 밀집대형의 유지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행군하면서 투르크 기병들의 기습공격을 대비해야 할 때 더욱 이 문제가 절실했는데, 길게 늘어선 종대가 뚫린다는 것은 각개격파를 당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몇번의 쓰라린 경험 끝에 프랑크군은 전위, 후위,측위를 갖추고 이안에서 보병사수가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행군대열을 조직했다고 하며 그 결과로 프랑크군은 행군시 서로간에 매우 밀착하여 전진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군대가 '밀집되고 정렬되었다.', '사과 한개조차도 들어갈 수 없도록 밀집되었다.' 는 칭찬의 말들은 당시 프랑크군의 고심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공명심이 강하고 개인주의적인 중세의 기사들이 적의 습격에 대해 본능을억제하고 밀집대형을 취하는 것을 너무나도 힘들어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방책도 끊임없이 활로 화살을 퍼부으며 치고 빠지는 투르크 기병들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기 힘들었다는 측면이 있었으며, 결국 프랑크군도 경기병으로 구성된 토착민 부대의 수를 늘려야 했습니다. 물론 이들의 충성심은 믿기 힘들었는데 그 것은 프랑크 인들과 현지인들과의 종교적, 문화적 차이가 너무 컸고 지배자인 프랑크인들은
그들과의 화합을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에는 프랑크인들은 누레딘 휘하의 이슬람 투르크군에 의해 점차 쇠퇴하게 되며 십자군 공국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몇몇 국가들도 훗날 맘루크 왕조의 술탄 칼라운에 의해 키프로스섬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디펜스 코리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