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병의 등장
중세 전쟁을 특징짓는 인물이 바로 기사, 즉 기창(lance)과 검으로 무장하고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병이다. 중세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그 갑옷은 더욱 더 무거워지고 효과적으로 되었으며, 또한 그에 따라 값비싸졌다.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중기병에 의해 전쟁이 지배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 규명하기란 쉽지 않다.
고트(Goth) 족과 훈(Hun) 족 군대의 손에 의한 로마 군의 패배와 발렌스(Valens) 황제의 죽음이 전환점으로서 보여져 왔으며, 이 사건 이후 로마 제국 정부는 전통적으로 보병에 의존하던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 중기병으로 선회하였다. 그러나 아드리아노플(Adrianople) 전투에서의 야만족 기병의 역할은 과대 평가되어져 왔으며, 그 전투는 대부분 보병의 전투였다. 어쨌든 로마 군은 3세기 이후 갑옷을 입은 기병 부대를 늘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또한 야만족 침입자들 중에서도 중기병은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갑옷과 군마(軍馬), 무기의 비용은 이러한 형태의 전투가 왕과 귀족들에게만 제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기병이 등장하게 된 또다른 전환점은 8세기 동안에 위치한다. 프랑크(Frank) 왕국의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이 732년의 푸아티에(Poitiers) 전투에서의 아랍 인들과의 충돌로 인해 중기병의 필요성을 확신하고서, 교회의 영지를 이용하여 중기병을 양성하였다고 논해져 왔다. 비록 이러한 이론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또다른 이론으로 인해 이것이 대체되었다. 이 이론은 8세기 초에 서유럽에 등자(stirrp)가 도입되면서 기마병이 보다 튼튼하게 앉을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기마 충격 전투"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병을 전장의 주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등자가 가져온 이익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지식이 정확히 8세기 전반에 서구에 도달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 이전 시기에는 확실히 프랑크 군대에 기병은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지만, 기병이 주력 요소가 되는 것은 8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카롤링거(Carolingian) 왕조가 거의 한 세기 가까이 계속된 정복 전쟁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수단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군대는 파괴와 순전한 잔인성으로서 작전에 임하였으며, 이것은 상대방의 저항 능력과 의지를 꺾어 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샤를마뉴(Charlemagne, 카롤루스 마그누스[역자 註])의 군대에서의 중기병의 중요성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800년을 전후하여 가용 총 병력은 5,000명에서 35,000명까지 추정되고 있으나, 프랑크 왕국이 훌륭한 중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상당한 수의 전사들에게 값비싼 갑옷과 장비를 갖출 수 있게 한 국가의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샤를마뉴는 그의 군대 - 중기병 뿐만 아니라 경기병과 보병 역시 - 의 장비와 원정에 있어서의 병참에 신중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 왕국의 지체 높은 인물들에게는 토지가 수여되었으며, 그들에게는 이 토지로써 장비를 잘 갖춘 기병을 제공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들의 유인 동기는 돈이 되면서 또한 영광스러운 정복 원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이러한 정복 전쟁에서 격전은 드물었다고 해도, 실제로 격전이 있었을 경우 프랑크 중기병은 보다 가볍게 무장한 적들에 대해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의 전술은 규율이 잡힌 근접 돌격이었으며, 혼전(melee)에서 그들은 검에 의존하였다. 프랑크 기병들은 상황이 요구할 경우 말에서 내려서 싸우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우수한 장비는 그들을 압도적으로 만들었다 - 그들이 규율을 기억하는 한. 782년 색슨(Saxon) 인들에 대한 순텔(Suntel) 산맥에서의 전투, 그리고 891년 데인(Dane) 인들에 대한 딜레(Dyle) 전투에서, 프랑크 기병들은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졌으며 규율을 잊었다. 그 결과 그들은 격퇴되었다.
9세기 카롤링거 제국의 분열로 인해 동 프랑크(독일) 왕국은 장비를 잘 갖춘 프랑크 기병이 부족한 채로 남겨지게 되었다. 색슨의 '새 사냥꾼' 헨리(Henry the Fowler) 공작이 왕이 되자(제위 918-36년), 그는 이제까지 경기병으로써 싸워 오던 귀족들을 중갑 기병군으로 개조하였다. 이것은 군사적 혁명과 같다. 그는 귀족들을 규율이 잡히고 전문적인 '강철 인간(men of iron)'으로 바꾸었으며, 그들은 그의 왕조(오토 대제의 왕조[Ottonian])가 독일 내부의 적과 마자르(Magyar) 족(훈 족), 슬라브(Slave) 족과 이탈리아의 적에 대해 우위를 누릴 수 있게 하였다. 프랑크 왕국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근접 돌격에 의족하였다. 마자르 족의 기마 궁수에 대한 리아데(Riade) 전투(933) 직전에, 헨리는 그의 장병들에게 전열을 유지하면서 방패를 사용하여 최초의 화살 공격을 튕겨 내고, 그 이후에 비로소 말에 박차를 가하여 근접 공격에 나설 것을 일깨워 주었다. 10세기와 11세기의 오토 왕조의 성공은, 헨리 왕의 선견지명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미 1000년 무렵에는 주력 부대로서 중기병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점진적인 진화에 의한 것이었지 혁명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11세기의 주된 발전과 이러한 추세의 결론은, 기창을 팔 아래 단단히 끼워 겨누는('카우츠'하는[couching]) 기술을 통한 보다 효율적인 기창 사용 방법일 것이며, 이것은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 1080년)에서도 볼 수 있다. 11세기 무렵에는 서유럽인들 중 오직 영국인들만이 말 위에서 전투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의 군사 장비는 - 예를 든다면 - 노르만(Norman) 인들의 것과 매우 흡사했지만, 그들은 말을 타고 전장에 나섰지만 말에서 내려서 싸웠다. 그러나 중기병의 이러한 우세한 상태를 과장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중세의 군대는 보병, 창병과 궁수를 포함하였으며, 그들의 역할 역시 적당하게 평가받았으며 또한 중요하였다 - 이러한 사실은 자세한 증거가 충분한 상황, 즉 예를 들면 헤이스팅스 전투(1066)와 제 1차 십자군 전쟁에서와 같은 상황에서 언제나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었다.
<Robin Cross의 The Encyclopedia of Warfare> 참고
중세 전쟁을 특징짓는 인물이 바로 기사, 즉 기창(lance)과 검으로 무장하고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병이다. 중세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그 갑옷은 더욱 더 무거워지고 효과적으로 되었으며, 또한 그에 따라 값비싸졌다.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중기병에 의해 전쟁이 지배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 규명하기란 쉽지 않다.
고트(Goth) 족과 훈(Hun) 족 군대의 손에 의한 로마 군의 패배와 발렌스(Valens) 황제의 죽음이 전환점으로서 보여져 왔으며, 이 사건 이후 로마 제국 정부는 전통적으로 보병에 의존하던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 중기병으로 선회하였다. 그러나 아드리아노플(Adrianople) 전투에서의 야만족 기병의 역할은 과대 평가되어져 왔으며, 그 전투는 대부분 보병의 전투였다. 어쨌든 로마 군은 3세기 이후 갑옷을 입은 기병 부대를 늘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또한 야만족 침입자들 중에서도 중기병은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갑옷과 군마(軍馬), 무기의 비용은 이러한 형태의 전투가 왕과 귀족들에게만 제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기병이 등장하게 된 또다른 전환점은 8세기 동안에 위치한다. 프랑크(Frank) 왕국의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이 732년의 푸아티에(Poitiers) 전투에서의 아랍 인들과의 충돌로 인해 중기병의 필요성을 확신하고서, 교회의 영지를 이용하여 중기병을 양성하였다고 논해져 왔다. 비록 이러한 이론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또다른 이론으로 인해 이것이 대체되었다. 이 이론은 8세기 초에 서유럽에 등자(stirrp)가 도입되면서 기마병이 보다 튼튼하게 앉을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기마 충격 전투"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병을 전장의 주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등자가 가져온 이익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지식이 정확히 8세기 전반에 서구에 도달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 이전 시기에는 확실히 프랑크 군대에 기병은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지만, 기병이 주력 요소가 되는 것은 8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카롤링거(Carolingian) 왕조가 거의 한 세기 가까이 계속된 정복 전쟁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수단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군대는 파괴와 순전한 잔인성으로서 작전에 임하였으며, 이것은 상대방의 저항 능력과 의지를 꺾어 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샤를마뉴(Charlemagne, 카롤루스 마그누스[역자 註])의 군대에서의 중기병의 중요성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800년을 전후하여 가용 총 병력은 5,000명에서 35,000명까지 추정되고 있으나, 프랑크 왕국이 훌륭한 중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상당한 수의 전사들에게 값비싼 갑옷과 장비를 갖출 수 있게 한 국가의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샤를마뉴는 그의 군대 - 중기병 뿐만 아니라 경기병과 보병 역시 - 의 장비와 원정에 있어서의 병참에 신중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 왕국의 지체 높은 인물들에게는 토지가 수여되었으며, 그들에게는 이 토지로써 장비를 잘 갖춘 기병을 제공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들의 유인 동기는 돈이 되면서 또한 영광스러운 정복 원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이러한 정복 전쟁에서 격전은 드물었다고 해도, 실제로 격전이 있었을 경우 프랑크 중기병은 보다 가볍게 무장한 적들에 대해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의 전술은 규율이 잡힌 근접 돌격이었으며, 혼전(melee)에서 그들은 검에 의존하였다. 프랑크 기병들은 상황이 요구할 경우 말에서 내려서 싸우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우수한 장비는 그들을 압도적으로 만들었다 - 그들이 규율을 기억하는 한. 782년 색슨(Saxon) 인들에 대한 순텔(Suntel) 산맥에서의 전투, 그리고 891년 데인(Dane) 인들에 대한 딜레(Dyle) 전투에서, 프랑크 기병들은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졌으며 규율을 잊었다. 그 결과 그들은 격퇴되었다.
9세기 카롤링거 제국의 분열로 인해 동 프랑크(독일) 왕국은 장비를 잘 갖춘 프랑크 기병이 부족한 채로 남겨지게 되었다. 색슨의 '새 사냥꾼' 헨리(Henry the Fowler) 공작이 왕이 되자(제위 918-36년), 그는 이제까지 경기병으로써 싸워 오던 귀족들을 중갑 기병군으로 개조하였다. 이것은 군사적 혁명과 같다. 그는 귀족들을 규율이 잡히고 전문적인 '강철 인간(men of iron)'으로 바꾸었으며, 그들은 그의 왕조(오토 대제의 왕조[Ottonian])가 독일 내부의 적과 마자르(Magyar) 족(훈 족), 슬라브(Slave) 족과 이탈리아의 적에 대해 우위를 누릴 수 있게 하였다. 프랑크 왕국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근접 돌격에 의족하였다. 마자르 족의 기마 궁수에 대한 리아데(Riade) 전투(933) 직전에, 헨리는 그의 장병들에게 전열을 유지하면서 방패를 사용하여 최초의 화살 공격을 튕겨 내고, 그 이후에 비로소 말에 박차를 가하여 근접 공격에 나설 것을 일깨워 주었다. 10세기와 11세기의 오토 왕조의 성공은, 헨리 왕의 선견지명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미 1000년 무렵에는 주력 부대로서 중기병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점진적인 진화에 의한 것이었지 혁명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11세기의 주된 발전과 이러한 추세의 결론은, 기창을 팔 아래 단단히 끼워 겨누는('카우츠'하는[couching]) 기술을 통한 보다 효율적인 기창 사용 방법일 것이며, 이것은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 1080년)에서도 볼 수 있다. 11세기 무렵에는 서유럽인들 중 오직 영국인들만이 말 위에서 전투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의 군사 장비는 - 예를 든다면 - 노르만(Norman) 인들의 것과 매우 흡사했지만, 그들은 말을 타고 전장에 나섰지만 말에서 내려서 싸웠다. 그러나 중기병의 이러한 우세한 상태를 과장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중세의 군대는 보병, 창병과 궁수를 포함하였으며, 그들의 역할 역시 적당하게 평가받았으며 또한 중요하였다 - 이러한 사실은 자세한 증거가 충분한 상황, 즉 예를 들면 헤이스팅스 전투(1066)와 제 1차 십자군 전쟁에서와 같은 상황에서 언제나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었다.
<Robin Cross의 The Encyclopedia of Warfare>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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