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중세기사 자료실

공성전의 수행 - 기술과 포병대

작성자Lord|작성시간04.09.27|조회수319 목록 댓글 0
공성전의 수행 - 기술과 포병대

중세 시대의 전쟁에서 요새가 중요했다는 것은, 곧 요새를 탈취하는 데에 주의깊은 관심이 기울여졌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것이다. 공성전은 중세 시대 전체에 걸쳐, 기술과 공학이 매우 진보해 나갔던 영역이었다. 11세기에는 수비군이 우위에 있었다.  노르망디(Normandy)의 젊은 군주였을 때의 윌리엄(William)이, 강의 중간에 위치한 난공불락의 브리온느(Brionne) 성을 함락하는 데에 2년이 걸렸다. 그는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결국은 성공을 불러 온 봉쇄 작전을 구사하였다.  윌리엄은 그 이후의 생애 동안은 그렇게 참을성이 강하지 않아서,  1067년에는 단기전으로 엑세터(Exeter)를 휩쓸어 버렸다.

이러한 경우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수비군의 성벽을 위 혹은 아래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 혹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기도 하였다. 땅굴 파기는 중세 시대 전체에 걸쳐 이용되었으나,  이 작전은 적합한 환경(해자가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이었다) 혹은 필수적인 전문가가 존재하는가에 의존하였다.  1215년 죤(John) 왕이 로체스터(Rochester) 성을 포위 공격하는 데에, 전 잉글랜드의 광부들이 동원되어야만 했다. 성벽 위를 넘어가기 위해 공격군은 바퀴나 롤러로 움직이는 거대한 공성탑을 만들었으며, 이 탑에는 윗층에 다리를 매달아 두어서 공격 부대가 건너갈 수 있게 하였다.

보통 어떠한 공격이든 그것에 앞서 포병대로부터 상대를 두들기는 것이 행해졌다.  맹거넬(mangonel) 혹은 페트라리(petrary)(투석기)로 알려진 이것들은, 비틀리는 힘을 이용한(torsion-powered) 목제 기계였다. 12세기 중반 무렵 아랍 인들과의 접촉 결과, 십자군은 트레뷰솃(trebuchet)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무게추의 힘을 이용한 기계이며 거대한 돌을 200-400야드까지 날릴 수 있었다. 이러한 포병대가 1190년에 아크레(Acre) 공성전에서 십자군에 의해 사용되어졌다.  13세기에 트레뷰솃은 가장 중요한 공성 무기였다.

1330년경 마참내 전쟁의 양상을 바꾸게 될 무기 - 화약에 의해 발사되는 대포 - 가 서구 사회에 등장하였다. 몽골 족은 이미 한 세기 전에 로켓과 다른 발화 물질을 사용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강력한 대포를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금속제 항아리와 원통을 주조하는 기술 - 종을 주조하는 기술에 근거한 - 의 발전이었다.  대포는 폭발력을 가지기에 그 추진력을 늘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에드워드(Edward) 3세는 1346년의 크레시(Crecy) 전투에서의 대승 이후, 칼레(Calais) 공성전에서 대포를 이용하였으나, 그 도시는 수비군을 굶김으로써 마침내 확보되었다.

진정한 대형 공성포을 개발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헨리(Henry) 5세는 1415-22년에 대포를 가지고 프랑스를 위협하였다.  프랑스의 샤를(Charles) 7세는 1440년대에 압도적인 포병 전력으로써 그의 왕국을 수복하였다.  몽스 메(Mons Meg)(반대쪽 페이지에 보이는)와 같은 중포를 공격군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수비군이 성벽이 무너지기 전에 전투 없이 항복하도록 하는 데에는 충분하였다. 이 당시 동방에서는 오직 오스만(Ottoman) 제국만이 대포를 개발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서방의 전문가를 고용한 오스만 제국은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성전과 1480년의 로도스(Rhodes) 공성전에서 대포를 성공적으로 이용하였다.

<Robin Cross의 The Encyclopedia of Warfare> 참고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