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우~~ 무려 2시간은 친것 같네요! 무려 4장 반 분량...커억~~~ 손 아파서...전..처음엔 붉은 수염왕해서..뛰어난 명장이구나 했죠...징기스칸4에서도 아주 멋진 아저씨로 표현되어있길래...헌데...오히려 프로필을 읽어보니...봉건시대의 전형적인 정치가로...왕권의 강화을 노려 교황과 악착같이 싸운 인물로 나오네요!...^^ 흠~~ 재미있을지 모르겠네요!
저도..조금 이해가 안가네요!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이 봉건제도로 이루어졌다는 것만 기억....
이제 유럽의 강력한 왕국의 국왕은 다 했으니..이젠 그시대 그 주변국을 살필 예정입니다! 다음번에는 비잔틴의 후기 몇몇 이름난 명군들을 살핀 예정입니다! 그럼...좋은 시간 되세요!! ^^
프리드리히일세 Friedrich Ⅰ (영) Frederick Ⅰ. 별칭은 그의 붉은 수염때문에 붉은수염왕 프리드리히(Friedrich Barbarossa). 1123경∼1190. 6. 10 아르메니아 왕국. 슈바벤의 공작(프리드리히 3세, 1147∼90), 독일의 왕이며 신성로마제국 황제(1152∼90 재위).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고 서유럽에서 독일의 우위를 확립하려고 애썼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과 싸웠고(1154∼83), 6차례에 걸쳐 대규모 원정대를 남쪽으로 보냈다. 제 3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여 성지로 가는 길에 죽었다.
[초기생애] 프리드리히는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2세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9세의 딸 유디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바이에른 공작 가문은 벨프 왕조와 경쟁하는 집안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슈바벤 공작이 된 뒤, 1152년 3월 4일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백부인 콘라트 3세의 뒤를 이어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의 동시대인들은 그가 벨프 가문과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왕국의 내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주교와 수도원장에 대한 임명권을 둘러싼 다툼에서 그때까지는 교황들이 줄곧 황제에 대해 우위를 차지했지만, 프리드리히가 교황 유게니우스 3세에게 보낸 국왕 선출 통지서는 교황의 이런 우위를 더 이상 인정할 수 없다는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프리드리히는 공석으로 남아 있는 몇몇 교구에 주교를 임명해 1122년의 보름스 협약을 위반했다.
그러나 서유럽의 정치적 세력 균형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는 전임 황제인 오토 1세와 하인리히 3세처럼 쉽게 교황권을 압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강력한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 시대에 비잔틴 제국은 지중해와 이탈리아에서 중요한 정치적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은 노르만족의 왕 루지에로 2세의 왕국으로 통일되었다. 롬바르디아의 도시들은 이전의 황제들에게는 귀찮은 존재였지만, 이제는 아무도 정복할 수 없는 무적의 존재가 되었다.
프리디리히는 놀라운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유럽의 여러 군주국에 대한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라는 해묵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는 전임 황제인 콘라트 3세와 비잔틴 제국의 마누엘 1세 콤네누스가 시칠리아의 루지에로 2세에 대항하여 맺은 동맹 조약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교황 유게니우스 3세가 그와 콘스탄츠 조약(1153)을 맺을 수밖에 없도록 했다.
교황은 로마에서 브레시아의 아르놀트에게 압력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남쪽에 있는 노르만 왕국의 압력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는 교황의 동의를 받지 않고는 아르놀트가 이끄는 로마 시민이나 노르만족과 평화 조약을 맺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어떤 이탈리아 땅도 비잔틴 제국 황제에게 양보하지 않겠으며, 끝으로 교황의 지위(호노르 파파투스)를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유게니우스 3세는 프리드리히를 황제로 즉위시키고 신성로마제국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비잔틴 제국의 마누엘 1세는 프리드리히에게 비잔틴 제국의 공주를 아내로 주겠다고 제의하면서 노르만 왕국과 맞서 싸우게 하려고 부추겼지만 프리드리히는 거절했다. 유게니우스 3세의 후임자인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는 콘스탄츠 조약을 지켜, 1155년 6월 18일 로마에서 프리드리히를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독일 군주들은 프리드리히가 시칠리아 왕국을 공격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거부했다. 당시 시칠리아 왕국은 루지에로의 아들 굴리엘모 1세(1154∼66 재위) 치하에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마누엘은 반역적인 노르만족 봉건영주들과 제노바 시 및 교황과 동맹을 맺었지만,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는 시칠리아의 굴리엘모 1세와 싸우는 데 필요한 도움을 주겠다는 비잔틴 제국의 제의를 여전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굴리엘모는 위기를 해결한 뒤, 교황을 강요하여 1156년에 베네벤토 협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이 협약에서 하드리아누스는 굴리엘모에게 시칠리아 섬 이외에 이탈리아 본토의 남쪽 끝에서 나폴리와 카푸아까지 퍼져 있는 노르만족의 공국들을 주고, 시칠리아 교회에 대한 특권도 인정해주었다. 교황이 새로 맺은 이 조약은 콘스탄츠 조약을 위반한 것이었다. 롤란드 추기경(나중의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은 1157년 브장송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교황의 새로운 정책을 군주들과 황제에게 설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총리인 다셀의 라이날트가 자극적으로 번역한 교황의 편지는 신성로마제국이 교황권에 종속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교황의 대표단과 독일 군주들 사이에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나중에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는 이 모든 말썽의 원인인 ‘베네피키움(beneficium)이라는 낱말은 봉토가 아니라 은대지(恩貸地)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제국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노력] 프리드리히는 몇 가지 중요한 국내 문제를 해결한 뒤, 1158년에 제국의 권리를 완전히 되찾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제 2차 원정을 시작했다. 프리드리히는 그에게 맞서려고 했던 밀라노를 포위 공격해 정복한 뒤 론칼리아 의회를 열었다. 이 의회의 목적은 황제의 권리를 명시하고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여기에서의 결정에 따르면 신성로마제국은 해마다 3만 파운드 가량의 은을 얻게 될 예정이었다.
프리드리히는 1158년부터 이 권리를 인정받고 체계적인 재무행정을 시행하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으며, 특히 1162년부터는 이 노력을 더욱 강화했다. 그의 목적은 이탈리아에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를 잘 통제된 성과 궁전 및 도시들로 조직화하고, 도시에는 제국 관리들이 지배하는 자치정부를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시들은 이를 그들의 자유를 축소하는 조치로 생각했다. ‘포드룸’이라는 세금이 이탈리아의 신성로마 제국 영토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부과된 대신, 이탈리아 귀족과 자치단체는 프리드리히의 군대에서 복무해야 할 의무를 면제받고 그의 보호를 보장받았다.
이탈리아에서 들어오는 돈의 일부는 독일 군주들에게 돌아갔다. 덕분에 프리드리히는 독일 군주들에게 정치적으로 많이 양보하지 않고도 독일에서 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군주들 가운데 성직자들은 여전히 이탈리아에 철저히 봉사해야 했다.
마인츠 대주교 관구는 크리스티안 대주교가 오랫동안 이탈리아에서 황제의 사절로 활동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탈리아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으로 프리드리히는 용병(브라반티니)을 모집하여, 봉토 소유자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군사적 부담을 어느 정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거두어들이는 돈이 프리드리히의 이탈리아 정책을 좌우하는 유일한 동기는 아니었다. 도시뿐만 아니라 교황도 이탈리아에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가 탄탄하게 조직된는 것에 위협을 느꼈다.
1159년 옥타비아누스 추기경은 프리드리히의 지지를 얻어 교황 빅토르 4세로 선출되었고, 롤란드 추기경은 많은 소란과 논쟁이 벌어진 선출 회의에서 알렉산데르 3세로 선출되었다. 많은 추기경의 지지를 얻은 알렉산데르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시칠리아의 굴리엘모한테서 진짜 교황으로 인정을 받았다. 116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소집한 파비아 종교회의에는 빅토르 4세만 참석하여 정식 교황으로 선언되었고, 알렉산데르의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황제의 관계] 교회의 가장 훌륭한 법률가 가운데 하나인 알렉산데르 3세는 황제한테서 독립된 교황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는 1160년에 프리드리히를 파문했다. 프랑스∘잉글랜드∘스페인∘헝가리∘롬바르디아,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마누엘 황제까지도 알렉산데르 쪽에 가담했다. 알렉산데르는 1161년에 프랑스로 가서 1165년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당시 솔즈베리의 요한네스는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누가 독일인을 국가들의 재판관으로 임명했는가?” 프리드리히는 손 강 연안의 생장드로슨에서 프랑스의 루이 7세를 만났을 때,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애써줄 것을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알렉산데르는 프리드리히를 다시 교회 안으로 데려오려고 애썼지만, 이 노력도 성공하지 못했다.
알렉산데르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비잔틴 제국의 마누엘 황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교황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162년에 프리드리히는 밀라노를 파괴했다.
1164년 빅토르 4세가 죽자, 다셀의 라이날트는 황제의 뜻을 어기고 새 교황 선출을 서둘러 파스칼리스 3세(1164∼68 재위)를 새로운 황제파 교황으로 선출했다. 루이 7세가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알력 관계에 있었고 헨리 2세가 토머스 베케트와의 논쟁에 말려들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헨리 2세와 동맹을 맺기로 결심했다. 1165년 뷔르츠부르크에서 열린 의회에서 프리드리히는 알렉산데르 3세를 교황으로 승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1166년 시칠리아의 굴리엘모 1세가 죽은 뒤, 프리드리히는 로마로 돌아간 알렉산데르 3세와 시칠리아에 결정타를 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제4차 이탈리아 원정을 막기 위해 롬바르디아 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의 원정은 군대 내부에서 말라리아가 발생하여 재난으로 끝났다. 다셀의 라이날트도 이때 로마에서 죽었기 때문에 황제는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드리히가 루이 7세와 헨리 2세 사이의 화해를 주선한 다음, 1170년에 밤베르크 주교를 알렉산데르 3세에게 보내고 비잔틴 제국에도 사절을 보내자, 알렉산데르조차도 피할수 없는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제5차 이탈리아 원정(1174)에서 롬바르디아 동맹을 군사적으로 무찌르지는 못했지만, 롬바르디아 동맹은 몬테벨로 휴전 협정에서 황제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작센의 사자공 하인리히 공작이 지원하러 오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레냐노 전투에서 롬바르디아 동맹에게 패배했다. 그는 교황과 거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1176년에 그들은 아나니 조약을 맺었다. 베네치아 평화조약(1177)에서 프리드리히는 알렉산데르 3세를 진정한 교황으로 인정했다. 프리드리히는 산마르코 교회 앞에서 교황으로부터 평화의 입맞춤을 받았다.
베네치아에서 황제의 대표단은 황제의 입장을 개선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롬바르디아 동맹과 황제 사이에 휴전 협정은 맺어졌지만 강화조약에는 롬바르디아 동맹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롬바르디아 동맹과 황제는 1183년에 마침내 평화 조약을 맺었다.
한편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제국 안에서 광범위한 변화를 일으켰다. 신성로마 제국에서는 그의 사촌인 작센의 사자공 하인리히가 프리드리히 다음으로 강력한 군주였다. 프리드리히가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자, 하인리히는 오스트리아의 변경백 하인리히 2세 야조미르고트의 영지인 바이에른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프리드리히는 하인리히에게 바이에른을 주었고, 변경백의 영지인 바이에른을 특권을 가진 공작령으로 끌어올렸다. 황제는 또한 하인리히가 작센 공작령과 메클렌부르크를 계속 지배하게 했고, 1154년에 하인리히는 엘베 강 동쪽의 식민지에서 주교들을 임명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1158년은 신성로마 제국에 매우 중요한 해였다. 이해에 프리드리히는 제국령 플라이스너란트(라이프치히 남쪽)를 세웠고,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2세를 왕의 지위로 끌어올렸으며, 브레멘 대주교에게 중요한 특권을 주어 대주교가 빼앗긴 정치적 권한을 되돌려 주었다. 같은 해 프리드리히는 덴마크의 발데마르 1세에게 영지를 주겠다고, 즉 발데마르를 일정한 권한을 가진 봉신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하인리히 공작은 뮌헨과 뤼베크라는 도시를 세웠다(1158). 뤼베크가 건설되자 독일 상인들은 발트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인리히 공작은 독일인과 고틀란드 주민들 사이의 계약을 체결해주었고, 스칸디나비아와 러시아에 사절을 보냈으며, 1189년에는 노브고로트와 무역 협정을 맺었다. 1180년경에 독일 상인들은 발트 해 연안의 리가에 도착했다.
하인리히가 1177년에 메클랜부르크를 점령한 것이 그들의 진출을 보호해 주었다. 1148년에 이미 하인리히는 엘베강 연안의 가장 중요한 항구인 슈타데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인리히 공작의 몰락] 이 무렵 독일 이주민들은 곰이라는 별명을 가진 변경백 알브레히트 1세가 지배하는 브란덴부르크와 슐레지엔에 정착했다. 프리드리히는 1157, 1172년 2차례의 폴란드 원정으로 폴란드 공작들을 다시 종속적인 지위로 떨어뜨렸다. 독일 북부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인 하인리히 공작은 브라운슈바이크를 거처로 삼았다. 그는 사이가 나쁜 다른 군주들에게 되풀이 도전했지만, 마크데부르크 대주교 비히만,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히트, 튀링겐 백작 루트비히 3세, 쾰른의 대주교 라이날트는 굽히지 않고 저항을 거듭했다.
하인리히가 몰락한 원인이 1176년 프리드리히의 지원요청을 거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다방면으로 나라의 평화를 깨뜨렸다. 이 때문에 황제는 그를 비난하고 뤼베크를 점령했으며, 1180년에는 겔른하우젠에서 열린 군주 회의를 통해 그를 퇴위시켰다. 하인리히는 공작령을 잃었다.
베스트팔렌은 쾰른 대주교에게 주어졌고, 바이에른은 비텔스바흐의 오토에게 주어졌다. 잉글랜드의 마틸다 공주와 결혼한 하인리히는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에게로 망명했다. 하인리히에 대한 재판 결과, 봉건 제도는 제국을 이루는 훨씬 더 강력한 토대가 되었다.
그후로는 신성로마 제국 황제한테서 직접 땅을 받은 군주들만이 제국 군주(라이히스퓌르스텐)들의 배타적인 집단에 받아들여졌다. 프리드리히는 포메른 군주들을 공작의 지위로 끌어올렸고, 안데흐 백작들은 메라니아(트리에스테 근처)공작들이 되었으며, 슈타이어마르크는 공작령이 되었다. 프리드리히가 취한 또 하나의 중요한 조치는 1168년에 뷔르츠부르크 주교를 프랑켄 공작의 지위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날로 커지는 군주들의 세력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1152년에 그는 이미 제국의 영토인 부르고뉴 지역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는 체링겐 공작 베르톨트 4세를 부르고뉴 공국에 대한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아 지중해 지역까지 담당하게 했고, 부르고뉴 백작 라이날트의 딸인 베아트릭스와 결혼했다(1156). 프리드리히는 군주들이 지배하는 지역 사이에 자신의 제국령을 세우려고 꾀했다. 이 영토는 성과 도시, 소유지, 성직자의 관구, 그리고 슈바벤에서 튀링겐까지 다소 촘촘하게 흩어져 있는 독립 영토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방대한 영지는 황제의 장관들(미니스테리알레스 임페리)이 다스렸다. 이들은 대부분 황제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뮌첸베르크의 쿠노였는데, 그의 성은 오늘날 프랑크푸르트 북쪽의 베테라우에 보존되어 있다. 프리트베르크라는 도시를 세운 사람도 바로 쿠노였다. 영토에 관한 ‘평화 유지법’은 황제에게 권력을 계속 보장해주기 위한 그의 노력의 일환이다.
기사제도는 프리드리히 시대에 특별한 성격을 부여했다. 프리드리히는 1184년에 마인츠에서 열린 오순절 축제 때 아들들에게 기사작위를 주면서, 이상적인 생활방식인 기사도에 대한 열정을 표시했다. 1188년에 열린 ‘예수 그리스도 의회’는 이 오순절 축제를 능가했다. 이 의회에서는 나무르 변경백령이 제국의 공국으로 바뀌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1189년 봄에 프리드리히가 1187년에 살라딘의 군대에 점령된 예루살렘을 해방하기 위해 제3차 십자군을 소집한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원정을 떠나기 전에 토스카나 백작 부인 마틸다의 소유지인 교황령의 일부를 교황에게 되돌려주었다.
1190년에 황제는 그당시 십자군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대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아나톨리아에 들어가 라틴세력을 격파후 이슬람에 포위된 십자군군대에게 자신이 오고 있음을 알린후 진격하다가 세우레키아 지방의 살레프강을 도하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평가] 프리드리히는 작센(색슨)족과 잘리어족의 혈통에 속하는 통치자들의 제국 정책을 계승하려고 애썼다. 그의 나라는 여전히 귀족과 고위 귀족,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로 생긴 계급인 황제의 종복들에게 기반을 두고 있었다. 독일의 제국 도시들은 왕의 관리들(아드보카티스 스쿨테티)이 다스렸고, 시민들은 통치에 참여했다. 도시들은 정치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았다.
성직 임명권을 둘러싸고 황제와 다툰 뒤, 교회는 확고하게 통제받는 조직이 되었으며, 그 권한은 법률로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이점은 프리드리히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 강력한 이탈리아 북부의 나라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울 때, 교회는 그들 편에 가담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프리드리히와 정치적 협정을 맺지 않도록 유럽의 왕들(특히 프랑스의 루이 7세)에게 강요할 수 있었다. 오직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만이 유럽 본토를 점령한 앵글로노르만족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리드리히와 조약을 맺었다.
제국이 지배하는 영토에서 제국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강화했다 해도 군주들의 세력이 무너졌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프리드리히가 죽은 뒤, 독일은 지역 국가 연합 체제로 발전했고, 프랑스는 필리프 2세 시대에 중앙집권화한 군주국으로 발전했다. 프리드리히는 법률과 제국의 위세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교황과 하인리히 공작을 악착같이 반대했기 때문에, 19세기에는 독일 통일의 상징이 되어 낭만적으로 미화되었다. 그는 무장으로써 완전한 자질과 예리한 웅변술을 갖추었으며, 인재등용에 뛰어나 라이날트, 폰 프라이징 등의 성직자들을 등용했다. 궁정기사문화를 한몸에 모은 인물로 찬양되고, 중세말기 이후에는 곤궁과 오욕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영웅으로서 미화되었다. 14세기 이후 사람들은 그가 황제의 성인 키프호이저에서 잠자고 있다고 믿었고, 그가 잠에서 깨어나 돌아오기를 기대했다. 1890∼96에는 그 성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출처는여... 토탈워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