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apons : a pictorial history」(12)
저자 - Edwin Tunis
역자 - 문제청년(박완)
<필독(必讀)! 반드시 읽어 주십시오!>
이 글은 Edwin Tunis 가 쓴 「Weapons : a pictorial history」
(Cleveland : World Pub. Co., 1954)의 1999년도 판(Baltimore : John
Hopkins University Press) 전문을 번역한 내용입니다. 2000년 12월에 번역
에 착수하였습니다. 원본 서적은 현재 국내에 정식 번역판이 없으며 국내에
수입되지도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고 자유롭게
퍼 가시되, 다른 통신망이나 사이트에 올리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와 역자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역자의 사전 허락 없이 글의 내용을 무단 변
경하지 마시고, 이 글을 상업적으로 무단 이용하는 것은 엄금합니다.
중세의 군대와 "공성 발사 무기(gyn)"
('gyn'은 일반적인 영어 사전에는 없는 단어로, 본문의 내용에 따르자면
공성 무기들 중에 창이나 돌덩이 등의 발사체를 날리는 무기를 가리키는 고
유 명사로 보인다[역자 註])
(1300∼1400)
중세 시대는 거친 시대였다. 20세기와 마찬가지로 시민들은 종종 습격을
당하고 강도를 만났기에, 어느 누구도 어떤 종류의 무기 없이 공공연히 돌
아다니지 않았다. 상인들과 성직자, 혹은 평복을 입은 기사들은 '바슬라드
(baselard)'라고 불리는 짧은 검(혹은 긴 단검)을 가운의 허리띠에 차서 들
고 다녔다. 그보다 못한 이들은 육척봉(quarterstaff)과 더크(dirk - 주로
스코틀랜드 고지인들이 차고 다니는 단검으로, 부러진 검의 끝 부분을 다듬
어서 만듦[역자 註]) 종류를 들고 다녔다. 신사들의 단검은 종종 목에 걸려
있거나 작은 쌈지에 넣어졌다. 심지어 여성들조차 그들의 거들에 장식적인
작은 단검을 끈으로 묶어서 찼다.
군대가 소집되어야 할 때에는 모든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에 연루되게
되어 있었지만, 기록에 따라 판단하자면 군역(軍役) 중의 일부는 임시적인
것이었으며 징병 위원회 역시 그리 엄격하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궁수로서
전쟁에 나섰던 이들 중 "그가 그의 화살을 모두 쏴 버릴 때까지만" 왕의 군
대와 함께 할 것을 요구받은 이가 적어도 한 명 있고, 또 다른 이는 베이컨
으로 만든 돼지의 옆구리 고기를 들고 와서 오직 그가 그것을 다 먹을 때까
지만 군인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자작농(yeoman)들은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존심이 허용되었기에, 점차로 보병이 되어서 그들의 비중이 느껴지게 하
였다. 농민들은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가축처럼 다루어졌던 유럽 대륙
에서는, 그들은 그에 합당하게 행동하였다.
중세의 군대는 그리 대단하게 조직화하고자 하지는 않았지만, 한 떼의 무
리들을 세분화하고자 하는 시도는 어느 정도 존재하였다. 하나의 군대는 세
개의 '배틀(battle)'로 구성되었고 이들 각각은 보다 많거나 혹은 보다 적
은 수의 '루트(route)' 혹은 '레터뉴(retinue, 수행원)'로 되어 있었으며
이것들은 각각 25명에서 80명까지의 군인들을 포함하였다. 하나의 루트는
한 명의 군주나 배너릿(banneret) 기사의 신하들로 구성될 수도 있었고, 혹
은 몇 개의 그러한 레너튜가 하나의 루트로서 모여질 수도 있었다. 이렇게
조직된 군대를 지휘한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복잡하
였는데, 그것은 각각의 군인들은 그들 자신의 영주에게만 복종하려고 할 것
이고, 각각의 영주들은 자신들에게 영지를 하사한 남작에게만 책임을 진다
고 느꼈으며, 이번에는 이 귀족은 자신이 충성을 맹세하였던 백작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무관심하였다는 사실이었다.
전투에서 궁수들과 석궁수들은 보통 말 탄 기사들의 앞에 배치되었고, 이
보병들이 화살을 쏜 뒤에 기병들이 그들 사이로 - 혹은 프랑스에서는 때로
는 그들을 짓밟고 - 돌격할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단지 농민들의 개들일
뿐인 것이다. 크레시(Crecy) 전투에서 제노바(Genova) 인 석궁수들은 그들
이 프랑스 군대를 '위하여' 석궁 화살을 쏜 뒤, 프랑스 군대에 '의해' 짓밟
혔으며 그들이 잉글랜드 군대로부터 입은 것보다도 그들 편의 기사들로부터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로마의 전성기 이후로 그 전투에 이르기까지 보병에 대한 말 탄 기사의
우월함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란 전혀 없었지만, 크레시에서 잉글랜드의
긴 활 궁수들은 그들의 두 발로 선 채 말을 탄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시
작하였다. 그들은 프랑스 기사들을 십자포화 안에 묶어 두었으며, 신중하게
위치를 잡은 화살들로 그들의 말을 학살하였다. 같은 날에 흑태자(Black
Prince -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맏아들로서 백년 전쟁 초반의 크레시
[1346] ·칼레[1349] ·푸아티에[1356] 전투의 승리에 커다란 공을 세웠으
며, 항상 검은 갑옷을 입었다 하여 '흑태자 에드워드'라고 불리는 인물[역
자 註])는 그의 기사들 중 일부로 하여금 박차를 떼어내고 짧게 한 기창을
가지고 말에서 내려서 싸우도록 하였다. 그는 또한 대포를 사용하였던 것으
로 보이나, 우리는 그것에 대해 나중에 논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미리 전체 전역(戰役)의 계획을 수립해 두었지
만, 중세 시대에는 전략이란 잊혀진 개념이었다. 공격군과 수비군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혹은 그들의 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거의 알지 못하였고, 가
끔씩 그들은 몇 주간 숨바꼭질을 한 뒤 서로를 전혀 찾아내지 못하고서 본
국으로 돌아왔다. 지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침공해 온 군대가 한 도시 앞에
도달하였을 때, 종종 그들은 그 도시가 어느 곳인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
거나, 혹은 그 곳은 전혀 다른 어떤 곳이라고 확신한 상태였던 것이다.
크레시 전투는 1346년에 발발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대는 미
리 계획된 몇 가지 전술을 사용하였다. 그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이러한 것
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대부분의 전투는 기사들 사이의 일련의
개인 전투였으며, 그들이 공동 작전에 가장 근접했던 것이란 그때 그때마다
그들의 친구를 위급한 상황에서 도와주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야기되는 혼
란 때문에 어떤 종류의 집결 지점을 두는 것이 필요하였다. 문장(紋章)이나
"휘장(徽章, badge)"을 그려서 표시한 사각 깃발이 이것을 위한 하나의 수
단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왕은 그의 왕실 깃발과 그것을 지킬 정예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 종종 이 깃발은 소가 끄는 수레 위에 설치된 깃대에서 펄
럭거렸다. 싸움터 위로 이 깃발을 볼 수 있을 때까지는, 이 깃발을 따르는
이들은 그들이 완전히 패배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군인들은 뒤섞여 싸우는 와중에도 서로를 알아 볼 필요가 있었기에,
기사들은 그들의 호움(heaume) 위에 볏 장식을 달기 시작하였다. 이 장식은
나무를 조각한 것이거나 혹은 가죽으로 모양을 낸 것이며, 일반적으로 어떤
동물이나 혹은 기사에게 있어서 제 2의 상징의 역할을 하는 대상을 의미하
는 것이었다. 최초의 볏 장식은 깃털로 된 부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이 장식은 그것을 차고 있는 이를 보다 키가 크고 또한 당당하게 보이게 한
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것들은 매우 정교해졌고 대단히, 대단히 높아지게
되었다.
전투 중의 함성은 일반적이었으며, 이것들은 일본인들의 "반자이(banzai,
萬歲)"와 같이 전투를 부추기는 것에 더하여, 지휘관을 중심으로 군인들을
집결시키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미군 대대의 군인들이 "자유와 미합중국"
이라든가 "하, 아이젠하워(Eisenhower)!"라고 외치면서 싸우는 모습을 상상
하기란 어렵다. 가끔씩 그들도 싸우면서 고함을 지르기는 하지만, 그 외치
는 말은 전혀 다른 것이다.
'트롬프(trompe)', '오리펀트(oliphant)', '클레롱소(claironceau)', 그
리고 멋있는 이름이 있는 다른 여러 개의 뿔 나팔이 집결을 위하여 울려 퍼
졌으며, 같은 목적을 위하여 '테이버(tabour)' 혹은 '탬부어(tambour)'(우
리에게는 북이라는 의미)를 쳤다 - 비록 온통 퍼져 있는 아우성 너머로 이
것들을 어떻게 들을 수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말이다.
포위 공격은 중세의 군사 작전에서 작은 부분이 아니었으며, 강력한 성을
함락시키는 것이란 길고 지루한 작업이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의 청교도 군대가 코프(Corfe) 성을 함락시키는 데에는 3년이 걸
렸다 - 비록 그들은 당시 대포와 머스킷(musket)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지
역의 주둔군이란 용감한 뱅크스(Bankes) 부인과 그녀의 하녀들로 구성된 것
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가장 오래되었으며 또한 가장 간단한 공성 무기는 파성추(破城鎚)였으나,
10피트(약 3.05m[역자 註]) 두께의 돌로 된 성벽에 대해서는 이것은 조금도
가치가 없었다. 중세의 군대는 이것들이 먹혀 들어갈 수 있는 도시의 성문
에 대하여 이것들을 사용하였다. "쥐"는 로마 시대의 '테레브라(terebra)'
와 같은 드릴이었다. 이것은 간단한 손잡이를 사용하여 회전하였고, 역시
돌로 된 성에 대해서는 거의 가망이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베프루아(beffroi)'라고 불리는 전투용 탑은 중세 시대의
군인들에게 "고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보통 이 탑은 효과가 있을 만큼
성벽에 가까이 끌고 가는 것이 불가능하였는데, 이것을 위한 통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해자(垓字)를 메우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에스컬레이드
(escalade, 공성 사다리)'라는 이름의 다양한 종류의 사다리가 높은 성벽
위로 오르기 위하여 사용되었으나, 높은 사다리 꼭대기에 있는 이가 그의
위에서 그 사다리를 밀쳐 내고 그를 창과 화살로 찌르려고 하는 무장한 이
들에 대하여 어떤 눈에 띄는 이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것들을 볼 때 성을 포위 공격하는 이들이 그들의 공격에 있어서
발사체를 날리는 '공성 발사 무기(gyn)'에 주로 의존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전의 나무로 된 성의 시대에는 '스프링얼(springal)'이 매우
유효하였다. 이것은 로마 시대의 '팔라리카(falarica)'의 변형으로서, 탄력
있는 목재로 짧은 화살의 끝 부분을 찰싹 쳐서 날리는 것이었다. 일반적으
로 이 화살은 불을 지르기 위한 것이어서 수비군들이 불을 끄기에 바쁘도록
하였다. 대체로 이러한 종류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성의 지붕을 입히는 소
재로서 점차 납이 쓰이게 되었다. 이것은 발사체를 날리는 무기들 중 가장
가벼운 것이었으며 배는 매우 불이 잘 붙기 때문에, 스프링얼은 수 세기간
중요한 해군용 무기였다.
스프링얼보다 약간 더 강력한 것은 발리스타(ballista)로, 이것은 가끔씩
은 '아버리스트(arbalest)'라고 불리기도 하였지만, 후자의 이름은 또한 강
력한 석궁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예전의 용어를 고집하기로 한다.
이것은 사실은 캐터펄트(catapult)와 같으며 결코 로마 시대의 발리스타만
큼 크지도 강력하지도 않았다. 중세 시대의 것은 섬유를 꼬아 만든 실타래
가 달려 있지 않았다 - 이것은 단순히 거대한 활이었고, 윈치를 사용하여
당겼다. 로마 시대의 미끄러지는 홈통은 사라졌다 - 방아쇠는 단순히 끝이
둘로 갈라진 미끄러지는 갈고리였다. 그러나 중세 시대의 발리스타는 투창
을 매우 훌륭히 발사하였고, 아마도 공성 무기 중 가장 정확한 것일 것이
다.
'맹거넬(mangonel)'은 4개의 바퀴 위에 설치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조랑
말"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로마인들이 이것을 "야생 당나귀"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 즉 이것은 발사되었을 때에 그 뒷부분 끝
을 차 올렸던 것이다. 맹거넬은 돌덩이를 날렸다. 나중에 이 단어는 "곤느
(gonne)"로 줄어들었고, 최초의 대포 역시 돌덩이를 날렸기에, 이것 역시
곤느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원리에 있어서 맹거넬은 로마 시대의 오너거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 하지만 실제로는 이것은 훨씬 조악한 기계였으며 비교
적 조그마하였다. 이것이 가진 최대의 장점은, 이것은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이었다 - 이것은 "야포(野砲)"였다. 이것의 추진력의 근원인 실타래는 결코
로마 시대의 것만큼 효율적이지는 못하였다. 이것에는 발사체를 담기 위하
여 일반적으로 국자 모양의 것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돌팔매 끈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 반면 트레뷰솃에는 거의 언제나 돌팔매 끈이 달려
있었다.
'트레뷰솃(trebuchet)'은 중세 시대의 포병대의 중(重) 곡사포였다. 일반
적으로 이것은 대단히 거대하였기에 작전 지역에서 조립되어져야 했다 - 이
것의 '주신(柱身, verge - 둥근 기둥의 몸체[역자 註])', 즉 기둥은 보통
나무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이것은 결코 고대의 발리스타의
사정거리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며 또한 성벽에 실질적인 피해를 거의 입히지
못했던 반면, 이것은 성의 주민들을 거의 기절시킬 만큼 두렵게 하는 데에
는 충분히 훌륭한 성능을 발휘하였다.
트레뷰솃을 이해하기 위하여, 한 쪽은 짧고 한 쪽은 긴 시소를 그려보자.
짧은 쪽 끝에는 몸무게 300파운드(약 136.1Kg[역자 註])의 헨리(Henry) 아
저씨를 올려 두고, 당신이 긴 쪽 끝에 몸무게 30파운드(약 13.6Kg[역자
註])의 주니어(Junior)를 올려 둘 때까지는 그 긴 쪽을 아래로 눌러 두자.
이제 일이 진행되도록 내버려 하고서 주니어가 집 너머로 날아가는 것을 보
라 - 헨리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길 지에는 전혀 신경 쓰지 마라.
실제의 무기에 있어서 이 시소는 무게 균형점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헨리
아저씨 대신에 돌과 흙을 담은 커다란 상자가 짧은 쪽 끝의 갈라진 곳에 경
첩으로 달려 있다. 발사가 가능하도록 기둥을 당기고 놓는 수단은 맹거넬의
것과 같지만, 그 윈치는 주 버팀 다리 아래, 즉 멩거넬에 있어서 실타래를
감는 윈치가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이 다르며, 기둥을 당기는 밧줄은 전체 구
조물의 받침대 뒷부분에 있는 롤러 밑을 통하여 이 윈치에 이른다. 방아쇠
는 종종 기둥 자체를 붙드는 커다란 갈고리 모양의 것이었으며, 발사하기
전에는 먼저 기둥을 당긴 밧줄을 벗겨 내는 것이 필요하도록 하였다. 돌덩
이 포탄은 돌팔매 끈 안에 담겨, 윈치 바로 뒤에서부터 시작하는 긴 받침대
위에 놓이게 되었다. 이 곳으로부터 돌덩이가 방아쇠가 풀린 기둥에 의해
낚아 채여서, 이 기둥의 끝에서 호를 그리며 휘둘려진다. 2/3 정도 올라갔
을 시점에 돌팔매 끈의 한쪽이 기둥 끝에서부터 벗겨지게 되고, 돌덩이는
그 목표를 향하여 높은 곡선을 따라 자유로이 날아가게 된다.
대형 트레뷰솃에 있어서는 발사체가 떠난 뒤에 이 기둥을 멈추게 할 것이
전혀 없었다. 무게 추는 버팀 다리 사이로 흔들거리게 되었다 - 기둥은 앞
뒤로 흔들리게 되고 마침내 똑바로 선 채 멈추게 되었다. 매 한 발을 발사
한 뒤에는 명백히 기둥 위로 기어올라서 다시 그 끝에 밧줄을 거는 것이 필
요하였던 것이다! 소형 트레뷰솃에 달린 무게 추는 보통 받침대 위로 떨어
져서 그 곳에 놓이게 되고, 기둥은 결코 60도 이상으로 높은 각도에 도달하
지 않았다. 이것만으로 충분하였는데, 그것은 돌팔매 끈을 사용할 경우 기
둥이 그 정도로 높이 올라갔을 때에는 이미 돌덩이는 날아간 뒤였기 때문이
다.
트레뷰솃은 이 무기의 프랑스식 이름이다. 물론 노르만 귀족들에 의해 사
용되었기에, 이 단어는 어쨌든 현대 영어에 남아 있다. 그 당시의 영어에
있어서 이것은 "트립 게이트(trip-gate)" 혹은 "트랩 게이트(trap-gate)"라
고 불리었다. 이 기계로부터 돌덩이가 목표를 향해 "날아갔으며(trapped)",
우리는 여전히 기계에 의하여 날려진 작은 물체에 대해 '트랩 사격
(trapshooting - 산탄총을 사용한 표적 사격 경기인 클레이 사격의 한 종목
[역자 註])'을 연습하고 있다.
트랩 게이트는 원리에 있어서 어떠한 변화 없이 16세기까지 공성 무기로
서 잘 사용되었다. 금속제 베어링이 이 기계의 작동을 개량하였고, 예전의
잡동사니를 넣은 상자를 대신한 금속제 무게 추는 이것을 보다 간편하고 오
래 쓸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이것들에 아낌없이 주어진 장식들이 이것의
사정거리나 정확도를 조금이라도 늘려 주었는지는 의심스럽다.
당신은 공성 무기들이 주민들을 귀찮게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강력한 성
에는 효과가 적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포위 공격을 하는
이들은 이것을 알고서는, 가능한 한 이들을 귀찮게 하는 데에 집중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돌덩이와 창에 더불어, 막 죽은 동물의 시체를 던졌을 것이
고, 혹은 그들이 포로를 잡아 두었다면 그를 산채로 던졌을 것이며, 가끔씩
은 지원군을 데리고 오도록 성으로부터 파견된 급사(急使) 역시 던졌을 것
이다. 사람들은 "좋았던 옛날"에는 이러한 종류의 사소한 농담에는 지나치
게 점잔을 떨지는 않았던 것이다.
포위 공격을 당하는 성에는 그들 자신의 공성 발사 무기들이 있었고, 이
것들은 성의 안뜰에서 조작되었다. 이것들은 보다 높은 지점에서 더 효과적
이었겠지만, 성의 망루는 이것들이 발사될 때의 충격을 견뎌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로마 시대에 로마인들은 그 꼭대기까지 완전히 튼튼한 특수한 망루
를 쌓았으며, 이것은 명백히 발리스타를 설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중세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이것을 기억하거나 혹은 이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
였다.
우리는 땅굴 파기를, 성벽의 토대 아래를 파 들어감으로써 성벽을 무너뜨
리는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작업은 오늘날 탄광
을 파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행해졌다. 땅굴이 나아가면서 두꺼운 목재를
사용하여 땅굴에 버팀목을 대었다. 땅굴이 돌로 된 성벽 바로 아래에 이를
만큼 충분히 멀리 나아갔을 때에, 성벽은 버팀목으로 받쳐졌다 - 그리고
나서 땅굴을 파던 이들은 이 버팀목을 기름과 역청(瀝靑)으로 흠뻑 적신 뒤
에 불을 붙이고는 자신들의 막사로 돌아갔다. 수비군들이 땅굴을 수몰시키
는 방법을 찾지 못했을 경우, 그 성벽은 버팀목이 불타 버릴 때에 무너지게
되었다.
또한 기름과 역청을 사용하여 나무로 된 성문에 불을 지르는 것 역시 시
도되었다 - 그렇기에 성문 바로 위의 성벽 안에는 좁은 수로가 비스듬히 나
있어서, 이 곳을 통하여 쏟아진 물이 나무로 된 성문의 바깥 면을 흠뻑 적
시도록 하였다.
저자 - Edwin Tunis
역자 - 문제청년(박완)
<필독(必讀)! 반드시 읽어 주십시오!>
이 글은 Edwin Tunis 가 쓴 「Weapons : a pictorial history」
(Cleveland : World Pub. Co., 1954)의 1999년도 판(Baltimore : John
Hopkins University Press) 전문을 번역한 내용입니다. 2000년 12월에 번역
에 착수하였습니다. 원본 서적은 현재 국내에 정식 번역판이 없으며 국내에
수입되지도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고 자유롭게
퍼 가시되, 다른 통신망이나 사이트에 올리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와 역자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역자의 사전 허락 없이 글의 내용을 무단 변
경하지 마시고, 이 글을 상업적으로 무단 이용하는 것은 엄금합니다.
중세의 군대와 "공성 발사 무기(gyn)"
('gyn'은 일반적인 영어 사전에는 없는 단어로, 본문의 내용에 따르자면
공성 무기들 중에 창이나 돌덩이 등의 발사체를 날리는 무기를 가리키는 고
유 명사로 보인다[역자 註])
(1300∼1400)
중세 시대는 거친 시대였다. 20세기와 마찬가지로 시민들은 종종 습격을
당하고 강도를 만났기에, 어느 누구도 어떤 종류의 무기 없이 공공연히 돌
아다니지 않았다. 상인들과 성직자, 혹은 평복을 입은 기사들은 '바슬라드
(baselard)'라고 불리는 짧은 검(혹은 긴 단검)을 가운의 허리띠에 차서 들
고 다녔다. 그보다 못한 이들은 육척봉(quarterstaff)과 더크(dirk - 주로
스코틀랜드 고지인들이 차고 다니는 단검으로, 부러진 검의 끝 부분을 다듬
어서 만듦[역자 註]) 종류를 들고 다녔다. 신사들의 단검은 종종 목에 걸려
있거나 작은 쌈지에 넣어졌다. 심지어 여성들조차 그들의 거들에 장식적인
작은 단검을 끈으로 묶어서 찼다.
군대가 소집되어야 할 때에는 모든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에 연루되게
되어 있었지만, 기록에 따라 판단하자면 군역(軍役) 중의 일부는 임시적인
것이었으며 징병 위원회 역시 그리 엄격하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궁수로서
전쟁에 나섰던 이들 중 "그가 그의 화살을 모두 쏴 버릴 때까지만" 왕의 군
대와 함께 할 것을 요구받은 이가 적어도 한 명 있고, 또 다른 이는 베이컨
으로 만든 돼지의 옆구리 고기를 들고 와서 오직 그가 그것을 다 먹을 때까
지만 군인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자작농(yeoman)들은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존심이 허용되었기에, 점차로 보병이 되어서 그들의 비중이 느껴지게 하
였다. 농민들은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가축처럼 다루어졌던 유럽 대륙
에서는, 그들은 그에 합당하게 행동하였다.
중세의 군대는 그리 대단하게 조직화하고자 하지는 않았지만, 한 떼의 무
리들을 세분화하고자 하는 시도는 어느 정도 존재하였다. 하나의 군대는 세
개의 '배틀(battle)'로 구성되었고 이들 각각은 보다 많거나 혹은 보다 적
은 수의 '루트(route)' 혹은 '레터뉴(retinue, 수행원)'로 되어 있었으며
이것들은 각각 25명에서 80명까지의 군인들을 포함하였다. 하나의 루트는
한 명의 군주나 배너릿(banneret) 기사의 신하들로 구성될 수도 있었고, 혹
은 몇 개의 그러한 레너튜가 하나의 루트로서 모여질 수도 있었다. 이렇게
조직된 군대를 지휘한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복잡하
였는데, 그것은 각각의 군인들은 그들 자신의 영주에게만 복종하려고 할 것
이고, 각각의 영주들은 자신들에게 영지를 하사한 남작에게만 책임을 진다
고 느꼈으며, 이번에는 이 귀족은 자신이 충성을 맹세하였던 백작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무관심하였다는 사실이었다.
전투에서 궁수들과 석궁수들은 보통 말 탄 기사들의 앞에 배치되었고, 이
보병들이 화살을 쏜 뒤에 기병들이 그들 사이로 - 혹은 프랑스에서는 때로
는 그들을 짓밟고 - 돌격할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단지 농민들의 개들일
뿐인 것이다. 크레시(Crecy) 전투에서 제노바(Genova) 인 석궁수들은 그들
이 프랑스 군대를 '위하여' 석궁 화살을 쏜 뒤, 프랑스 군대에 '의해' 짓밟
혔으며 그들이 잉글랜드 군대로부터 입은 것보다도 그들 편의 기사들로부터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로마의 전성기 이후로 그 전투에 이르기까지 보병에 대한 말 탄 기사의
우월함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란 전혀 없었지만, 크레시에서 잉글랜드의
긴 활 궁수들은 그들의 두 발로 선 채 말을 탄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시
작하였다. 그들은 프랑스 기사들을 십자포화 안에 묶어 두었으며, 신중하게
위치를 잡은 화살들로 그들의 말을 학살하였다. 같은 날에 흑태자(Black
Prince -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맏아들로서 백년 전쟁 초반의 크레시
[1346] ·칼레[1349] ·푸아티에[1356] 전투의 승리에 커다란 공을 세웠으
며, 항상 검은 갑옷을 입었다 하여 '흑태자 에드워드'라고 불리는 인물[역
자 註])는 그의 기사들 중 일부로 하여금 박차를 떼어내고 짧게 한 기창을
가지고 말에서 내려서 싸우도록 하였다. 그는 또한 대포를 사용하였던 것으
로 보이나, 우리는 그것에 대해 나중에 논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미리 전체 전역(戰役)의 계획을 수립해 두었지
만, 중세 시대에는 전략이란 잊혀진 개념이었다. 공격군과 수비군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혹은 그들의 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거의 알지 못하였고, 가
끔씩 그들은 몇 주간 숨바꼭질을 한 뒤 서로를 전혀 찾아내지 못하고서 본
국으로 돌아왔다. 지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침공해 온 군대가 한 도시 앞에
도달하였을 때, 종종 그들은 그 도시가 어느 곳인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
거나, 혹은 그 곳은 전혀 다른 어떤 곳이라고 확신한 상태였던 것이다.
크레시 전투는 1346년에 발발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대는 미
리 계획된 몇 가지 전술을 사용하였다. 그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이러한 것
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대부분의 전투는 기사들 사이의 일련의
개인 전투였으며, 그들이 공동 작전에 가장 근접했던 것이란 그때 그때마다
그들의 친구를 위급한 상황에서 도와주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야기되는 혼
란 때문에 어떤 종류의 집결 지점을 두는 것이 필요하였다. 문장(紋章)이나
"휘장(徽章, badge)"을 그려서 표시한 사각 깃발이 이것을 위한 하나의 수
단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왕은 그의 왕실 깃발과 그것을 지킬 정예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 종종 이 깃발은 소가 끄는 수레 위에 설치된 깃대에서 펄
럭거렸다. 싸움터 위로 이 깃발을 볼 수 있을 때까지는, 이 깃발을 따르는
이들은 그들이 완전히 패배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군인들은 뒤섞여 싸우는 와중에도 서로를 알아 볼 필요가 있었기에,
기사들은 그들의 호움(heaume) 위에 볏 장식을 달기 시작하였다. 이 장식은
나무를 조각한 것이거나 혹은 가죽으로 모양을 낸 것이며, 일반적으로 어떤
동물이나 혹은 기사에게 있어서 제 2의 상징의 역할을 하는 대상을 의미하
는 것이었다. 최초의 볏 장식은 깃털로 된 부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이 장식은 그것을 차고 있는 이를 보다 키가 크고 또한 당당하게 보이게 한
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것들은 매우 정교해졌고 대단히, 대단히 높아지게
되었다.
전투 중의 함성은 일반적이었으며, 이것들은 일본인들의 "반자이(banzai,
萬歲)"와 같이 전투를 부추기는 것에 더하여, 지휘관을 중심으로 군인들을
집결시키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미군 대대의 군인들이 "자유와 미합중국"
이라든가 "하, 아이젠하워(Eisenhower)!"라고 외치면서 싸우는 모습을 상상
하기란 어렵다. 가끔씩 그들도 싸우면서 고함을 지르기는 하지만, 그 외치
는 말은 전혀 다른 것이다.
'트롬프(trompe)', '오리펀트(oliphant)', '클레롱소(claironceau)', 그
리고 멋있는 이름이 있는 다른 여러 개의 뿔 나팔이 집결을 위하여 울려 퍼
졌으며, 같은 목적을 위하여 '테이버(tabour)' 혹은 '탬부어(tambour)'(우
리에게는 북이라는 의미)를 쳤다 - 비록 온통 퍼져 있는 아우성 너머로 이
것들을 어떻게 들을 수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말이다.
포위 공격은 중세의 군사 작전에서 작은 부분이 아니었으며, 강력한 성을
함락시키는 것이란 길고 지루한 작업이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의 청교도 군대가 코프(Corfe) 성을 함락시키는 데에는 3년이 걸
렸다 - 비록 그들은 당시 대포와 머스킷(musket)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지
역의 주둔군이란 용감한 뱅크스(Bankes) 부인과 그녀의 하녀들로 구성된 것
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가장 오래되었으며 또한 가장 간단한 공성 무기는 파성추(破城鎚)였으나,
10피트(약 3.05m[역자 註]) 두께의 돌로 된 성벽에 대해서는 이것은 조금도
가치가 없었다. 중세의 군대는 이것들이 먹혀 들어갈 수 있는 도시의 성문
에 대하여 이것들을 사용하였다. "쥐"는 로마 시대의 '테레브라(terebra)'
와 같은 드릴이었다. 이것은 간단한 손잡이를 사용하여 회전하였고, 역시
돌로 된 성에 대해서는 거의 가망이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베프루아(beffroi)'라고 불리는 전투용 탑은 중세 시대의
군인들에게 "고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보통 이 탑은 효과가 있을 만큼
성벽에 가까이 끌고 가는 것이 불가능하였는데, 이것을 위한 통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해자(垓字)를 메우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에스컬레이드
(escalade, 공성 사다리)'라는 이름의 다양한 종류의 사다리가 높은 성벽
위로 오르기 위하여 사용되었으나, 높은 사다리 꼭대기에 있는 이가 그의
위에서 그 사다리를 밀쳐 내고 그를 창과 화살로 찌르려고 하는 무장한 이
들에 대하여 어떤 눈에 띄는 이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것들을 볼 때 성을 포위 공격하는 이들이 그들의 공격에 있어서
발사체를 날리는 '공성 발사 무기(gyn)'에 주로 의존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전의 나무로 된 성의 시대에는 '스프링얼(springal)'이 매우
유효하였다. 이것은 로마 시대의 '팔라리카(falarica)'의 변형으로서, 탄력
있는 목재로 짧은 화살의 끝 부분을 찰싹 쳐서 날리는 것이었다. 일반적으
로 이 화살은 불을 지르기 위한 것이어서 수비군들이 불을 끄기에 바쁘도록
하였다. 대체로 이러한 종류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성의 지붕을 입히는 소
재로서 점차 납이 쓰이게 되었다. 이것은 발사체를 날리는 무기들 중 가장
가벼운 것이었으며 배는 매우 불이 잘 붙기 때문에, 스프링얼은 수 세기간
중요한 해군용 무기였다.
스프링얼보다 약간 더 강력한 것은 발리스타(ballista)로, 이것은 가끔씩
은 '아버리스트(arbalest)'라고 불리기도 하였지만, 후자의 이름은 또한 강
력한 석궁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예전의 용어를 고집하기로 한다.
이것은 사실은 캐터펄트(catapult)와 같으며 결코 로마 시대의 발리스타만
큼 크지도 강력하지도 않았다. 중세 시대의 것은 섬유를 꼬아 만든 실타래
가 달려 있지 않았다 - 이것은 단순히 거대한 활이었고, 윈치를 사용하여
당겼다. 로마 시대의 미끄러지는 홈통은 사라졌다 - 방아쇠는 단순히 끝이
둘로 갈라진 미끄러지는 갈고리였다. 그러나 중세 시대의 발리스타는 투창
을 매우 훌륭히 발사하였고, 아마도 공성 무기 중 가장 정확한 것일 것이
다.
'맹거넬(mangonel)'은 4개의 바퀴 위에 설치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조랑
말"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로마인들이 이것을 "야생 당나귀"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 즉 이것은 발사되었을 때에 그 뒷부분 끝
을 차 올렸던 것이다. 맹거넬은 돌덩이를 날렸다. 나중에 이 단어는 "곤느
(gonne)"로 줄어들었고, 최초의 대포 역시 돌덩이를 날렸기에, 이것 역시
곤느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원리에 있어서 맹거넬은 로마 시대의 오너거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 하지만 실제로는 이것은 훨씬 조악한 기계였으며 비교
적 조그마하였다. 이것이 가진 최대의 장점은, 이것은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이었다 - 이것은 "야포(野砲)"였다. 이것의 추진력의 근원인 실타래는 결코
로마 시대의 것만큼 효율적이지는 못하였다. 이것에는 발사체를 담기 위하
여 일반적으로 국자 모양의 것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돌팔매 끈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 반면 트레뷰솃에는 거의 언제나 돌팔매 끈이 달려
있었다.
'트레뷰솃(trebuchet)'은 중세 시대의 포병대의 중(重) 곡사포였다. 일반
적으로 이것은 대단히 거대하였기에 작전 지역에서 조립되어져야 했다 - 이
것의 '주신(柱身, verge - 둥근 기둥의 몸체[역자 註])', 즉 기둥은 보통
나무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이것은 결코 고대의 발리스타의
사정거리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며 또한 성벽에 실질적인 피해를 거의 입히지
못했던 반면, 이것은 성의 주민들을 거의 기절시킬 만큼 두렵게 하는 데에
는 충분히 훌륭한 성능을 발휘하였다.
트레뷰솃을 이해하기 위하여, 한 쪽은 짧고 한 쪽은 긴 시소를 그려보자.
짧은 쪽 끝에는 몸무게 300파운드(약 136.1Kg[역자 註])의 헨리(Henry) 아
저씨를 올려 두고, 당신이 긴 쪽 끝에 몸무게 30파운드(약 13.6Kg[역자
註])의 주니어(Junior)를 올려 둘 때까지는 그 긴 쪽을 아래로 눌러 두자.
이제 일이 진행되도록 내버려 하고서 주니어가 집 너머로 날아가는 것을 보
라 - 헨리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길 지에는 전혀 신경 쓰지 마라.
실제의 무기에 있어서 이 시소는 무게 균형점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헨리
아저씨 대신에 돌과 흙을 담은 커다란 상자가 짧은 쪽 끝의 갈라진 곳에 경
첩으로 달려 있다. 발사가 가능하도록 기둥을 당기고 놓는 수단은 맹거넬의
것과 같지만, 그 윈치는 주 버팀 다리 아래, 즉 멩거넬에 있어서 실타래를
감는 윈치가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이 다르며, 기둥을 당기는 밧줄은 전체 구
조물의 받침대 뒷부분에 있는 롤러 밑을 통하여 이 윈치에 이른다. 방아쇠
는 종종 기둥 자체를 붙드는 커다란 갈고리 모양의 것이었으며, 발사하기
전에는 먼저 기둥을 당긴 밧줄을 벗겨 내는 것이 필요하도록 하였다. 돌덩
이 포탄은 돌팔매 끈 안에 담겨, 윈치 바로 뒤에서부터 시작하는 긴 받침대
위에 놓이게 되었다. 이 곳으로부터 돌덩이가 방아쇠가 풀린 기둥에 의해
낚아 채여서, 이 기둥의 끝에서 호를 그리며 휘둘려진다. 2/3 정도 올라갔
을 시점에 돌팔매 끈의 한쪽이 기둥 끝에서부터 벗겨지게 되고, 돌덩이는
그 목표를 향하여 높은 곡선을 따라 자유로이 날아가게 된다.
대형 트레뷰솃에 있어서는 발사체가 떠난 뒤에 이 기둥을 멈추게 할 것이
전혀 없었다. 무게 추는 버팀 다리 사이로 흔들거리게 되었다 - 기둥은 앞
뒤로 흔들리게 되고 마침내 똑바로 선 채 멈추게 되었다. 매 한 발을 발사
한 뒤에는 명백히 기둥 위로 기어올라서 다시 그 끝에 밧줄을 거는 것이 필
요하였던 것이다! 소형 트레뷰솃에 달린 무게 추는 보통 받침대 위로 떨어
져서 그 곳에 놓이게 되고, 기둥은 결코 60도 이상으로 높은 각도에 도달하
지 않았다. 이것만으로 충분하였는데, 그것은 돌팔매 끈을 사용할 경우 기
둥이 그 정도로 높이 올라갔을 때에는 이미 돌덩이는 날아간 뒤였기 때문이
다.
트레뷰솃은 이 무기의 프랑스식 이름이다. 물론 노르만 귀족들에 의해 사
용되었기에, 이 단어는 어쨌든 현대 영어에 남아 있다. 그 당시의 영어에
있어서 이것은 "트립 게이트(trip-gate)" 혹은 "트랩 게이트(trap-gate)"라
고 불리었다. 이 기계로부터 돌덩이가 목표를 향해 "날아갔으며(trapped)",
우리는 여전히 기계에 의하여 날려진 작은 물체에 대해 '트랩 사격
(trapshooting - 산탄총을 사용한 표적 사격 경기인 클레이 사격의 한 종목
[역자 註])'을 연습하고 있다.
트랩 게이트는 원리에 있어서 어떠한 변화 없이 16세기까지 공성 무기로
서 잘 사용되었다. 금속제 베어링이 이 기계의 작동을 개량하였고, 예전의
잡동사니를 넣은 상자를 대신한 금속제 무게 추는 이것을 보다 간편하고 오
래 쓸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이것들에 아낌없이 주어진 장식들이 이것의
사정거리나 정확도를 조금이라도 늘려 주었는지는 의심스럽다.
당신은 공성 무기들이 주민들을 귀찮게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강력한 성
에는 효과가 적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포위 공격을 하는
이들은 이것을 알고서는, 가능한 한 이들을 귀찮게 하는 데에 집중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돌덩이와 창에 더불어, 막 죽은 동물의 시체를 던졌을 것이
고, 혹은 그들이 포로를 잡아 두었다면 그를 산채로 던졌을 것이며, 가끔씩
은 지원군을 데리고 오도록 성으로부터 파견된 급사(急使) 역시 던졌을 것
이다. 사람들은 "좋았던 옛날"에는 이러한 종류의 사소한 농담에는 지나치
게 점잔을 떨지는 않았던 것이다.
포위 공격을 당하는 성에는 그들 자신의 공성 발사 무기들이 있었고, 이
것들은 성의 안뜰에서 조작되었다. 이것들은 보다 높은 지점에서 더 효과적
이었겠지만, 성의 망루는 이것들이 발사될 때의 충격을 견뎌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로마 시대에 로마인들은 그 꼭대기까지 완전히 튼튼한 특수한 망루
를 쌓았으며, 이것은 명백히 발리스타를 설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중세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이것을 기억하거나 혹은 이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
였다.
우리는 땅굴 파기를, 성벽의 토대 아래를 파 들어감으로써 성벽을 무너뜨
리는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작업은 오늘날 탄광
을 파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행해졌다. 땅굴이 나아가면서 두꺼운 목재를
사용하여 땅굴에 버팀목을 대었다. 땅굴이 돌로 된 성벽 바로 아래에 이를
만큼 충분히 멀리 나아갔을 때에, 성벽은 버팀목으로 받쳐졌다 - 그리고
나서 땅굴을 파던 이들은 이 버팀목을 기름과 역청(瀝靑)으로 흠뻑 적신 뒤
에 불을 붙이고는 자신들의 막사로 돌아갔다. 수비군들이 땅굴을 수몰시키
는 방법을 찾지 못했을 경우, 그 성벽은 버팀목이 불타 버릴 때에 무너지게
되었다.
또한 기름과 역청을 사용하여 나무로 된 성문에 불을 지르는 것 역시 시
도되었다 - 그렇기에 성문 바로 위의 성벽 안에는 좁은 수로가 비스듬히 나
있어서, 이 곳을 통하여 쏟아진 물이 나무로 된 성문의 바깥 면을 흠뻑 적
시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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