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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상업의 발달

작성자싸갈탱이|작성시간04.12.31|조회수986 목록 댓글 0

서    론

 11세기와 12세기에 서유럽 문명이 기초하고 있던 경제체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 변화의 기본적인 측면은 활발한 상품교환에 바탕을 둔 경제의 출현과 그에 수반된 화폐유통량의 증가였다. 그리고 외적의 침입위협에서 벗어나게되자, 서유럽은 전보다 중단의 두려움으 훨씬 덜 느끼면서 경제 생활의 발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인해 비교적 연속성이 보장되면서 매우중요한 기술적 진보가 달성되었는데, 이것은 서유럽 혁명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도시들이 크게 성장이 비약적이었다. 13세기 경에는 누구나 잉여 생산물을 팔고 생산하지 못하는 물품을 살 수 있었다. 이러한 교역의 증대화 인고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전문적인 수공업이 부활하고 도시가 발달하였다. 사제와 기사 그리고 농민의 사회에서 상인과 무역업자 그리고 수공업자가 새로이 대두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현상들은 중세 문명의 모든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측면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본    론

   1) 상업의 부활

 2세기와 3세기의 빈번한 내란으로 시작된 게르만의 침입으로 더욱 심각해진 서유럽에서의 전반적인 교역 쇠퇴는 9세기에 정점에 달했다. 로마 제국에서 상업의 주요동맥을 이루었던 지중해의 여러 해로는 대부분 아프리카 및 스페인의 해안 지대와 서지중해의 섬들을 장악한 회교도들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문제는 회교도지역이 기독교도와의 무역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 유럽이 회교도 지역에 수출할 만한 상품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회교도 해적들 때문에 바다여행은 매우 위험하였다. 비잔틴 해군이 베네치아에 이르는 아드리아해의 해로를 안전하게 지켜주었고, 실제로 몇몇 유대 상인들은 회교도 지역과 기독교도 지역사이에서 교역활동을 벌였으나, 대규모 교역은 사라졌다. 북방에서는 유럽의 해안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몇 안되는 상인 거주자마저 바이킹 침략자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바이킹들 자신이 약탈행위와 함께 어느 정도 교역활동도 하였으나 북유럽에서의 상업활동은 전체적으로 보아 너무나도 보잘 것이 없게 되었다.
 서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상업의 부활은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10세기말, 베네치아는 곡물과 포도주 그리고 목재를 콘스탄티노플로 수출하고 그곳에서 고급 비단천을 싣고 돌아와 그 비단을 북 이탈리아의 이웃 도시들에게 팔고 있었다. 한편 그 당시에 아말피의 상인들도 카이로와 광범위한 교역관계를 맺고 있었다. 북이탈리아의 내륙 도시들은 독자적으로 산업 특히 모직물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었으나,  이 모직물에 대한 시장은 처음에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새로운 시장에로의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한 것은 대개 서이탈리아 해안도시들의 업적이었다. 10세기에 제노바와 삐사의 상인들은 회교도 해적떼들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었음에도 과감하게 해안을  따라 프랑스로향해하기 시작하였다. 11세기 초까지도 제노바와 삐사는 이따금 회교도의 해적떼에 게 약탈을 당했으나 1061년에는 그들의 연합함대가 회교도들을 사르디니아에서 쫒아내었다. 제노바와 삐사가 꼬르시카와 사르디니아를 정복하고 회교도에게 장악되어 있던 아프리카의 여러 항구를 공격하는 동안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망디 모험가들은 시칠리아를 점령하였다. 1091년에 노르망디인의 시칠리아 정복이 완수됨으로써, 서지중해에서 기독교도의 상업활동은 실질적으로 자유롭게 되었다.
 제노바와 삐사의 발전은 십자군 운동으로 크게 촉진되었다. 1096년의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한 제후 및 기사들은 발칸반도를 가로질러 콘스탄티노플까지 그리고 그곳에서 소아시아를 가로질러 팔레스타인 육로까지 진군하였으나 그들은 바다를 통한 보급과 지원을 바라고 있었다.
 북이탈리아의 몇몇 도시들은 이미 어느 정도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예를 들면 베니스가 그렇다. 비록 콘스탄티노플과 베니스의 첫 번째 중요한 무역협정은 992년 10세기 말로 추정되지만 베니스는 이미 9,10 양세기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와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베니스는 이미 아드리아 해를 정복하는데 성공하였고 910년에는 바야흐로 중요한 위치를 획득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던 코마치오를 위축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베니스는 반드시 다른 도시보다 훨씬 앞선 것은 아니었다. 베니스의 상술이 일찍부터 근대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힘은 아직 상대적으로 작았다. 동시대의 볼로냐는 포 강유역과 라인강 유역간의 접촉을 유지했고 투린은 독일지역과 관계 중에 있었다.
 다음으로 독일의 상업활동을 보면 독일의 도시들 가운데 렌겐스부르그에는 상업에 종사하는 많은 거주자들이 있었다. 옛 로마시였던 마인쯔는 886년 바이킹에게 침략당했다. 그러나 그 곳은 얼마 되지 않아서 복원되었고 10세기를 통해 거기에서는 상업이 번성하였다. 그리고 이 부유한 도회지에서 아라비아화폐가 널리 알려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게르만족의 침략기간이래로 고대 로마의 성채가 황폐되었던 꼴로뉴에서 상인들이 다시 안착했고 라인 강구에 있는 성벽 밖에는 한 작은 도시가 발전하고 있었다. 10세기 말까지는 이 두 소도시들은 융합할만큼 충분히 크게 성장하였다. 899년에 처음으로 언급된 도르트문트는 라인강과 베제르강 사이에 있는 통로 덕분에 존재했다. 그것의 중요성은 10세기에 있어서 이미 상당하였다. 왜냐하면 하르츠산의 광산들과 뫼즈 강에 접한 소도시들 사이에 이미 교통이 완전한 소통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10세기에 있어서의 상업이 가장 잘 발전할 수 있었던 장소들은 북부 이탈리아와 독일의 큰강들과 플랑드르였다. 남부 프랑스에서는 상업 활동이 훨씬 활발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상업은 항상 유지되어 졌고 지중해에 대한 아라비아인들의 지배가 프로방스인들의 모든 해외무역활동을 단절시키지는 못하였다는 것은 간스호프가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학자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남부 프랑스의 상황은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까지 이미 나쁜상태에서 더욱 악화되었음이 명백하다. 시실리는 아라비아인들에 의해 완전히 종복되었고 라 가르드 프레에에서 그리고 아마 성트로페에서 사라센 변경수비대가 주둔함으로써 무역에 있어서 파국적인 결과가 초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를르, 아비뇽, 마르세이유와 같은 도회지들은 요새에 의해 아라비아인들의 습격을 피할 수 있었으며 904년에 성빅톨의 수도원에 부여된 마르세이유 항구 및 해산물의 채취장, 또 921년 아를르에 있었던 희랍인 어부들에 대한 언급 등을 통해서 계속된 항해에 대한 어느정도의 증거를 볼 수 있다. 여행은 바다를 통해서도 여전히 가능 하였다. 10세기  
 당시에는 도시들이 존재하였다. 만약 우리들이 상설시장이 있거나 농촌의 생활양식과는 달리생활하는 곳이 도시라면 그들은 작긴했지만 도시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도시에는 상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한 상인들이란 중세 전반을 통하여 모든 종류의 상품을 취급했으나 한가지 상품을 가지고 전문화하려고 하지는 않았던 그러한 의미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어떤 물건이라도 구입해서 그것을 운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그렇게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행상인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행상인들은 오직 겨울을 지내기위해서만 정착했으므로 부동산을 소유하지 않았고, 집도 주소도 없는 사람들 이었다. 그러한 사람들은 정말 존재하였을 것이나 결코 상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지는 못했다. 게르만의 사료로부터 명백히 나타난 중요한 사실은 그 때에 이미 여행하는 상인과 자신의 주거지에 상주하면서 상업하는 상인 등 두 종류의 상이한 계급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연히 황제의 특허장은 모험자들에게는 관계가 없었고 떠돌아 다니던 상인들은 어떤 정착지를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었으며 아마도 토지재산의 소유자들이었을 것이다. 피렌느가 상상한 부모와 처자도 없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집도 가족도 없는 그러한 사람들로 간주할 수는 없다. 이런 계층의 상인들은 유랑도 하고 또 어디론가에서 함께 흘러온 사람들, 혹은 시장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불려졌다. 다른 형태의 상인들은 지역주민 또는 도시주민과 같은 표현으로 구별된다. 오토 1세는 952년 오다 가다 여기에 머무르는 상인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레겐스부르그, 마인쯔, 콘스탄스, 메르세부르그, 부레멘 등과 같은 많은 독일의 도시에는 그들의 성벽내에서 상인들이 정착생활을 하였다. 중세 말기에 있어 각 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상인형을 가장명확히 발견할 수 있었던 도시는 레겐스부르그일 것이다. 그 때에도 직업적인 상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드물었을 뿐이며 그 시대에 상인들의 필요성이 줄어듬에 따라 그 수가 줄어 들었던 것이다. 남아있게 된 자들은 8. 9세기 상인의 전통을 유지하였고 도회지에 살면서 어떤 경우에는 자신들의 선박을 소유하였고 13세기에 있어서의 아라스, 시에나, 플로렌스 들지의 상인들처럼 항상 이동하였다. 시에나의 상인들은 국내 문제에 자신들이 간여할 만큼 빈번히 집을 떠나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아라스의 시장선거가 연기되어야만 했는데 이는 가장 부자인 선거인들이 도시에 부재했기 때문이다. 도시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도시의 통치를 지배한 부자상인들이라는 의미, 즉 이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의 귀족들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계급의식을 갖고 있던 귀족계급을 찾는다는 것은 아마 너무이른 느낌이 든다. 유일한 그러면서도 사실상 훌륭한 예외는 베니스였으니 거기에는 942년에 중산계층과 하층계급뿐만 아니라 상층계급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있어서의 무역로는 이미 한계가 잘 지어졌고 또한 베르덩에서 스페인까지 온 상인들, 북해로부터 라인강상류와 독일의 큰 강들까지 내려온 상인들, 베니스로부터 콘스탄티노플까지 거슬러 올라간 상인들, 즉 이런 모든 상인들이 정기적으로 사용하였다.

   2) 도시의 발달
 
 중세의 도시는 농업생활의 기반위에 만들어 졌다. 농산물의 잉여생산물을 판매할 시장이 필요함에 따라서 만들어졌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장사를 열심히 하고 그 이익으로  먹을 것을 구입함으로써 삶을 꾸려 나가는 장소라는 경제적 의미에서의 도시는 게르만의 침입으로 서유럽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비교적 많은 인구가 함께 거주하는 지역은 남아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옛로마 시대의 도시가 여전히 많은 경우 주교나 백작의 소재지이자 중요한 수도원의 소재지로서 존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치도시제를 보면 고대의 법제도와 일치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 로마가 그 지배권을 전지중재 세계까지 확대해 갔을 때 그 제도를 황제행정의 기초로 삼았다. 이 제도는 서구에 있어 게르만족의 침입 속에서도 잘유지 되어 갔다. 이와 같이 자치도시제의 자취와 그 명확한 잔재들은 5세기 이후 오랫동안 갈리아, 스페인, 아프리카 그리고 이탈리아 등지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조직의 점진적인 약화로 인하여 그 제도의 특수성은 대부분이 폐지되고 말았다. 8세기 까지 시참사회원, 도시기록전, 도시수호자도 다 없어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지중해 세계로 이슬람이 공격해 옴으로써 그때까지 제도시간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유지 시켜 왔던 상거래를 마비시켰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도시의 쇠퇴를 초래케 하였지만 그것이 도시를 파국으로 까지 몰고 가지는 않았다. 비록 이들 도시가 쇠퇴하고 약화되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존속되었으며 또 그 사회적 기능도 다소는 유지되어 갔던 것이다. 당시의 농업적인 사회질서 속에서도 이들 제도시는 그 기본적인 주요성을 상실하지는 않았다. 그 후 이들 도시에 무슨 일이 발생햐였는가를 이해하기위해서는 도시가 작용한 역할을 충분히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처럼 로마의 도시들과 같이 주요한 가치가 부여되었는데 이러한 가치들이 도시들을 보호해 주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9세기의 경제 상황 속에서 도시들은 그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였으며 또 상거래의 중심지가 단절됨으로써 도시들은 그들 주민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말았다. 옛날 그곳에 자주 내왕하였거나 거기에서 살았던 상인들도 또 메로빙왕조 시대까지 잘 보존해 왔던 도시의 성격마저도 그들과 더불어 사라지고 말았다. 세속사회는 이제 더 이상 도시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순수한 농업을 바탕으로하여 형성된 국가가 도시의 운명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국가는 그 자체로서의 어떤 행정력을 발휘는 하였지만 로마의 제도시에서 볼 수 있었던 실제적인 상황에 결코 한번도 기여할 수는 없었다. 제국의 행정구역을 형성하고 있었던 주에 있어서도  제국 그 자체에 수도가 없었던 것처럼 제속주에도 역시 주요 도회지가 없었다. 제속주의 감독을 위임받은 백작들은 어느 일정지역에 정착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재판을 주재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또 군을 징모하기 위하여 그들이 관할하고 있는 행정구역을 항상 순회하였다. 그들의 행정적 중심지는 제후의 대저택이 있는 곳이 아니라 주민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도회지에 주거지를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그렇게 중대한 문제는 아니었다. 지방에서의 대토지 소유주들 가운데에서 선출된 그들은 결국 대부분이 토지로 생활을 영위해 갔던 것이다. 그들의 대저택은 마치 황제들의 궁전과도 같이 전통적으로 농촌에 있었다.
 중세 말의 도성들 중에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여러 자료를 통해서 정확한 표현을 구상할 수 는 있다. 도성들은 무엇보다도 군대의 편제로 되어 있었으나 초기에 있어서 그 본래의 기능에 행정적인 중심지로서의 기능이 부가되었던 것이다. 성주는 군병둔지의 요새를 수호하는 기사들을 지휘하는 사령관의 직분은 끝났지만 제후는 그에게 성벽주위의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 할 수 있는 재정권과 재판권을 위임했으며 10세기까지 성주라는 이름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상업과 산업활동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모두 이방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당시의 농어문명과의 관계를 잠시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당시에 형성하고 있었던 집단들은 결국 별 가치가 없었다. 신뢰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제시할 수는 없으나 도성의 주민은 수 백명에 불과했으며 또 도회지 주민도 아마 2-3천 명을 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그러나 도회지와 도성들은 도시의 역사에 있어 주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도시발전사의 디딤돌이었으며 그들 성벽주위에 있는 제도시는 경 ┛?부흥을 구체화하였는데 그 최초의 조짐은 10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분명해 졌다.


   결    론
 
 상업의 부활은 11세기로부터 도시 생활의 새로운 성장을 촉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장사를 열심히 하고 그 이익을 먹을 것을 구입함으로써 삶을 꾸려나가는 장소라는 경제적 의미에서의 도시는 게르만의 침입으로 서유럽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일부 중세 교역도시는 이러한 옛 중심지들에 서서히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다시 자리를 잡으면서 성장하였다. 이는 왕과 제후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성장하였다는데 큰 성과가 있었다. 1050년부터 1300년 사이에 제노바, 삐사, 베네치아 등의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지중해의 상당 부분을 회교도의 지배로부터 되찾았다. 이 후부터 과거 비잔틴에 속했던 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고 동부 지중해에 동방과 활발한 교역을 시작하여서 상품이 점차 전문화 되었다. 무역이 활성화되자 도시들이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중세 도시는 고대 세계나 근대 세계의 거대도시들에 비하면 그 규모가 매우 작았다. 상인들이 항상 거주하고 있고 외부 상인들의 발길을 끌 만큼 중요한 정기시가 열리는 꽤 큰 도시도 대개 5천명 정도의 주민밖에 없었다. 또 그러한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 경우 여전히 주변 농촌에서 농사를 짓거나 도시를 에워싼 공유지에서 가축을 방목하고 있었다. 북유럽에서는 런던과 브뤼지 그리고 겐트와 같은 가장 큰 몇몇 상업 중심지만이 4만명 가량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다.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밀라노등 이탈리아의 대도시들은 10만명선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다. 중제 전반에 걸쳐 유럽 인구의 대부분은 농업인구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도시들은 그 부 때문에 도시민 총수에 비해 훨씬 큰 영향을 경제적. 정치적 생활에 끼치게 되었다.  도시는 시장과 상품의 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함으로서 사회의 경제 전반이 번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도시들은 정부 제도의 발전에도 중대한 기여를 했다. 많은 징역의 도시들이 독립하여 도시 국가로서 자치권을 누렸기 때문이다. 그중 도시가 가장 발달했던 이탈리아는 행정 기법에서 많은 발전을 보여주어서 전유럽의 정치적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출처-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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