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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사 자료실

르네상스전쟁이야기

작성자싸갈탱이|작성시간04.10.02|조회수1,587 목록 댓글 0

오랜만에 라니안판타지에 들어가 보았더니 존경스러운 아르키메데스님의 글이 있더군요

바로 복사해서 올립니다. 르네상스전쟁사이야기더군요.

 

 

보통 전쟁사의 관점으로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백년전쟁의 종결부터 1618년 30년 전쟁의 시작까지의 기간을 르네상스로 본다.  15세기 말 무렵 유럽의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각기 자국을 통일, 정비하고 서로에게 그 칼끝을 들이댄다.  르네상스의 전쟁은 크게 프랑스의 발로아 왕조와 스페인의 합스부르그 왕가의 이탈리아 쟁탈전, 스페인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세력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이슬람 세력과의 대립, 마지막으로 신, 구교간의 국지전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끊임없는 전쟁, 인구의 증가, 화약무기의 도입, 도시, 경제성장, 종교개혁으로 재구성된 사회, 정부체계의 변화 등이 전쟁의 변화를 유래하게 된다.  르네상스는 보병을 중심으로 하는 장창 전술의 도입, 군대규모의 대형화, 대포의 위협에 따른 새로운 능보 요새의 등장, 총병의 증가, 상비군 체제의 시작, 용병 중요성의 증가 등을 경험했다.

1.  르네상스의 대포

13~14세기 무렵 최초의 화약무기가 유럽에 소개된 이후, 유럽의 대포는 점차 그 위력이 증대되고, 정확도와 안정성이 향상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초기의 대포는 트레뷰세 같은 중세말기의 공성기보다 그 위력이 떨어졌으나 15세기에 이르면 대포의 위력이 트레뷰세의 위력을 초과하게 된다.  

우선 화약을 제조하는데 드는 비용이 하락했고, 특히 화약을 젖혀 혼합한 다음, 가루나, 덩어리로 말리는 새로운 방식의 화약제조법은 화약의 화력을 상승시켰고, 습기나, 분해에 강한 내성을 지니게 했다.  대포의 탄환도 기존의 돌을 깎아 만드는 방식에서 대구경의 포는 철을, 소구경은 납을 써 대포의 파괴력을 높였다.  

15~16세기의 대포는 청동 주조나, 주철을 써 제작했다.  주철은 청동으로 만드는 것보다 10배 이상 저렴했으나, 폭발의 위험이 크고, 안정성이 떨어져 소구경 포에만 이용이 됐고, 청동은 가격은 비싸지만, 내구성이 좋고, 더 많은 화약을 사용할 수 있어 대구경 포에 많이 사용됐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탄환의 무게와 크기에 따라 대포를 구분하는 표준화가 진행됐다.  단거리의 대형 공성포는 풀 캐논(full cannon), 하프 캐논(half cannon), 더블 캐논(double cannon) 으로 구분됐고, 포신이 긴 장거리 용 공성포는 컬버린(culverin)으로 구분했다.  캐논(풀 캐논, 하프 캐논, 더블 캐논)의 화약 권장량은 탄환무게의 3분의 2였고, 장거리용인 컬버린의 화약 권장량은 탄환무게의 5분의 4였다.  컬버린이나 캐논 종류의 대형포는 공성전에는 적합하지만 야전에서 쓰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워, 야전에서는 쿼터 캐논(quarter cannon), 하프 캘버린(half culverin), 세이커(sakers), 팔콘(falcon)등의 탄환 무게가 12~15 파운드 이하의 가벼운 대포가 널리 쓰였다.  

르네상스의 대포 구분은 다음과 같다.

르네상스의 대포 종류

종류       탄환무게   대포무게       대포길이: 구경의 비율
---------------------------------------------
더블 캐논  100파운드 20,000 파운드       20:1
캐논       50 파운드  9,000 파운드       18:1
하프 캐논  25 파운드  3,500 파운드       24:1
쿼터 캐논  16 파운드  2,000 파운드       28:1
컬버린     25 파운드  1,700 파운드       36:1
세이커      6 파운드  2,500 파운드       32:1
팔콘        3 파운드   1,500 파운드      36:1
팔코넷      1 파운드     500 파운드      40:1

마르크 안토니오 벨로네에 따르면 1584년 당시 대포의 사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 표에서 사용된 한 보는 대략 1야드(0.91미터) 보다 약간 짧다.


종류     유효 사거리       최대 사거리
-----------------------------------------
하프 캐논   500보           6,000보
쿼터 캐논   450보           5,400보
세이커      350보           4,200보
펠콘        300보           3,600보
펠코넷      250보           3,000보
컬버린      600보           7,200보
하프 컬버린 450보           5,200보

이러한 표준 대포 이외에 높은 각도로 포탄을 발사해 성벽을 넘어 성내에 폭발물을 떨어뜨리는 구포(mortar), 여러 개의 총신을 묶어 한 번에 다량의 총을 발사할 수 있게 만든 오르간 건 등이 전쟁에 사용되곤 했다.

또한 대포유지에 드는 비용은 르네상스 들어 꾸준히 상승해 더 이상 소영주나, 민간인들이 대포를 구입, 유지하기 힘들게 됐다.  대규모의 공성포, 야전포를 운용할 수 있는 이는 각국의 국왕이나, 최소한 공작 정도는 돼야 대포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다.

일예로 1595년 단순노동자의 3개월 임금이 1 두카토 정도인 시절에 대포를 구입하는 데 든 비용은,

대포의 가격

대포종류      대포 포신 가격    대포 운반대를 포함한 가격
----------------------------------------------
120파운드 캐논   1,296두카토      1,310두카토
100파운드 컬버린 1,227두카토      1,069두카토
80파운드 캐논      781두카토        814두카토
50파운드 컬버린    781두카토        814두카토
50파운드 캐논      472두카토        501두카토
20파운드 컬버린    314두카토        334두카토
20파운드 캐논      177두카토        294두카토
12파운드 세이커    175두카토        190두카토
6파운드 팔콘       151두카토        160두카토
3파운드 펠코넷      90두카토         97두카토
</table>

대포의 구입비용보다 더 큰 문제는 대포의 운반이었는데, 대포 특히 공성포는 막대한 인원을 필요로 했다.  대포를 조작하는 데만 50파운드 케논은 3명의 포수와 15명의 조수가, 20파운드 케논은 2명의 포수와 10명의 조수, 14파운드 컬버린은 2명의 포수와 10명의 조수, 12파운드 세이커는 1명의 포수와 5명의 조수를 필요로 했다.  1610년 네덜란드 군의 15문의 대포와 그 관련부품, 장교 물품 등을 운반하는데 198대의 마차가 동원된 사실을 보면, 대포가 얼마만한 수송인원을 필요로 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의 일반적인 군대가 40문 이상의 대포를 소지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었던 것을 감안하자면, 포병대에 필요했던 수송인력 및 말의 숫자는 이 보다 배 이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말은 한 마리 당 1000~1200 파운드 정도를 운반했다.)

2. 르네상스의 요새

15~16세기 대포가 중세의 성들을 위협하기 시작하자, 대포에 대항할 수 있는 요새의 연구, 건축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가장 먼저 등장한 요새의 형태는 다수의 포탑(artillery tower)을 성벽 곳곳에 새우는 형태였다.  포탑은 수 미터 두께로 최대 7층 높이의 벽돌 탑이었는데,  포탑 안의 각 층에는 다수의 대포가 배치돼 바깥 벽 틈새로 대포를 발사할 수 있게 했다.  



           <포탑요새>

포탑은 더 높은 지점에서 상대의 대포를 아군의 대포로 공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구조적으로 아래 부분이 취약해 상대방이 요새 아래에 땅굴을 파 화약을 폭발시키면 요새가 무너질 염려가 컸다.  그 외에도 대포의 반동 때문에 대형포를 장착하기가 힘들고, 피탄면적이 커 적의 포격에 노출이 크다는 단점이 있었다. 거기다 적군이 포탑에 바짝 접근하면 사격을 가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었다.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은 포탑 주위에 깊은 해자나 참호를 파 피탄면적을 줄이면서도 근접한 적이 요새를 기어오르기 힘들게 만들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 아군이 가지는 높이의 이점이 사라지고, 탑 아래에 배치돼 있는 대포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단점을 가졌다.

또 다른 방안으로는 기존의 중세의 성을 대포의 공격에 견딜 수 있도록 강화시키는 방법이 있었다.  즉, 기존의 성벽을 나무보루, 흙 담, 나뭇단, 보람(원통의 바구니에 돌을 담은 것), 양털 가죽 등으로 강화시켜 대포의 포격에 좀더 잘 버티게 하고, 대포의 반동을 견뎌 낼 수 있는 구조물에는 대포를 배치했다.  그런 다음 적군의 은신처로 쓰일 수 있는 성밖의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성벽의 피탄면적을 줄이기 위해, 성벽을 낮고 두꺼운 토성으로 교체했다.  그 다음 벽의 안이나 벽에 카발리에 라고 불린 포대를 건설하거나, 성벽바깥에 다수의 보루를 건설해 대포를 배치했다.  이 방식은 방어거점을 줄임으로써 요새의 약점을 최소화 하는 의미가 있었다.  각 보루 및 카발리에는 총이나 대포의 사정거리 안에 배치해 서로를 지원할 수 있게 했다.  보루나 카발리에는 포탑과 비교해서 배치할 수 있는 대포의 수가 적고, 방어력도 뒤떨어졌으나, 흙과 나무로 만든 보루는 상당량의 포격을 흡수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성벽 밖을 울타리로 두르고 성벽과 울타리 사이를 다수의 흙으로 만든 보루를 배치해 그 안에서 총병이 서로의 보루를 지원할 수 있게 하기도 했다.  이 방식은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스페인 군이 스위스 용병의 돌격을 방어하는데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다.



<능보요새>

1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는 능보요새(bastion)가 등장했다.  포탑을 방어거점으로 전방위의 사격이 가능한 포탑 요새와는 달리 능보요새는 옆에 있는 보루에서 서로의 사각을 지원사격할 수 있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이 요새는 벽이 사각을 이루는 곳에 각기 보루를 설치해 대포를 배치하고 각 대포는 반대쪽 보루를 향해 발사해 양 보루의 화력이 십자포화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요새의 벽을 낮고 두터운 흙벽으로 쌓아 대포공격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고 피탄면적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 형태의 요새는 적군이 성벽 아래까지 바짝 접근해도 반대쪽 보루에서 사격이 가능해 사각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포탑 형태의 요새와는 달리 구조물의 하층부가 취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땅굴파기 공격에 대한 저항력도 높은 편이었다.  당시의 지성인들은 이 능보요새를 가장 효율적인 대 대포 요새로 인정했다.  능보요새의 단점은 높은 건축비로 이 능보요새의 건설 때문에 각국의 중앙정부와 지방 자치단체는 막대한 재정을 지불해야 했다.

3. 공성전

요새의 비약적인 발전에 따라 공성법도 그에 따라 발전해야 했다.  특히 새로운 개념의 요새로 개조된 주요도시들은 대군이 공격해도 수개월 이상을 버틸 수 있을 만큼 공략이 힘들어졌다.  

공성을 시작하는 군대는 우선 도시를 보병요새, 기병순찰, 감시요새 등으로 둘러싸 바깥의 지원으로부터 고립시켰다.  포위망은 도시 안쪽을 둘러싸는 포위망과 도시 바깥쪽을 향하는 방어망으로 두 겹으로 만들어졌다.  포위망은 우선 참호로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곳곳에 흙벽으로 만든 보루를 설치해 포위망을 강화했다.  그 다음 잘못 건설된 보루, 오래된 성벽, 낡은 성문 등의 약점으로 공격의 집중을 했다.  그 다음 거대한 공성포를 성 가까이로 옮기고 공성포를 흙벽이나 보람(바구니에 돌을 담은 것)으로 보호했다.  그리고는 공성포 주위에 토산을 쌓아 적의 요새를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공성포를 발사할 수 있도록 했다.

일단 포격이 시작되면 포격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했다.  대포는 각기 역할이 있어서 케논 이나 컬버린같은 대구경 포는 적 성벽이나 보루를 사격하고, 소구경 포와 총은 적 병사나 성벽 수리공들을 집중적으로 사격했다.  구포는 성안의 구조물을 향해 연신 폭탄을 쏟아댔다.  1567년 기롤라모 카텔레오에 따르면 공성을 하는데는 컬버린 2문 이상, 캐논 3문, 하프 캐논 4문, 쿼터 캐논 8문, 팔콘이나 세이커 포 8문, 팔코넷 12문 으로 총 3410개의 대포알과 32,300파운드의 화약을 쓸 것을 권장하고 있다.  또 카텔레오는 각 대포의 하루 발사가능 포탄 양과 화약소모량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 표와 같다.

대포 하루 사격량 및 화약 소모량

대포종류           하루 포탄 발사량      화약 소모량
------------------------------------------------
60파운드 캐논        80발                 3,200파운드
50파운드 컬버린      45발                 1,500파운드
30파운드 하프 캐논   110발                2,200파운드
6파운드 세이커/팔콘   120발                  720파운드
3파운드 팔코넷        140발                  420파운드

잘 계획된 공성전에서는 공격 측이 방어 측의 거점을 하나씩 차례차례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우선 적 성병의 사각에 배치된 보루의 방어대포를 하나하나씩 제거했다. 적의 대포가 대부분 무력화 되면, 대형 공성포들을 요새의 100 보 이내로 옮겨 사격을 시작했다.  아무리 강한 벽이라도 계속적으로 공성포의 포격을 받으면 언젠가는 무너져 내리기 마련이었다.  벽이 무너지면 보병들이 사다리를 들고 직접 성벽을 공략했는데, 이 때가 공격군에게 가장 위험한 때였다.  성벽이 무너진 틈에 집중된 공격군은 방어 군이 바늘, 작은 돌맹이 등을 가득 넌 대포를 발사하면 그곳에서 학살될 수가 있었다.  혹은 방어군이 성벽에서 지뢰를 폭파시키거나, 성벽이 무너진 바로 뒤로 재빨리 방어벽을 건설하면 좁은 틈에서 쏟아지는 십자포화에 그대로 노출될 위험이 컸다.  공격군이 도시 내로 진입하는데 성공하면 공성전은 공격군의 승리로 끝나고 사령관은 3일 동안의 약탈, 방화를 병사들에게 허락했다.  

공성전은 제 아무리 잘 훈련된 군대라도 최소 수주에서 수개월 동안 막대한 비용이 드는 공성포를 동원해 가며 수만의 대군을 투입해야 했다.  그래서 쉽게 성을 탈취하기 위해 각종 특공대 작전이 등장했다.  소수의 지원자를 뽑아 폭탄을 성문이나 요새의 정문에 던지고 잽싸게 도망친 다음, 성공하면 적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공격군을 잽싸게 투입하는 방안이 있었다.  1580년 나바레의 앙리는 이 방법을 써 카호르를 단시일 내에 제압했다.  혹은 하수구를 막아놓은 쇠창살을 렌치로 조용히 해체하고 도시 내로 침투하는 방법이 쓰이기도 했다.  침투작전도 많이 쓰이곤 했는데 1590년 80명의 네덜란드 병사가 나룻배 아래에 숨어 브레다를 함락시켰고, 7년 후에는 스페인 병사들이 농부로 위장하고 당당히 성문을 걸어들어 가 마차로 성문을 닫지 못하게 하고 수비병을 잽싸게 제압했다.  이러한 침투를 방지하기 위해 각 도시의 경비병들은 건초를 실은 마차나 사람이 숨기 좋은 물품을 통과시킬 때는 할버드로 꼼꼼히 찔러보는 것이 보편화됐다.

가장 확실하게 도시를 탈취하는 방법은 중세와 마찬가지로 도시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도시는 주변지역으로부터 많은 물자를 필요로 하기에 오랜 기간을 고립돼 버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도시가 고립되면 그 도시의 지도자들은 필요 없는 입으로 규정된 민간인(대게 거지, 무숙자 등)들을 성 바깥으로 쫒아 보냈고, 모든 곡물을 빵으로 만들 수 있도록 술을 만드는 기구를 모조리 폐기 처분했다.  이 때 쫓겨난 필요 없는 민간인들 대부분은 공성군과 성벽 사이에서 굶어죽거나, 포위망을 돌파하다 살해당했다.  일부 운 좋은 몇 몇 만이 포위망을 돌파해 살아남았다.


4. 전술

르네상스에는 보병이 전장의 핵심전력으로 떠올랐다.  15세기부터 100여년간 이어진 스위스 군의 무패신화는 각국이 스위스의 장창병 전술을 도입하게 만들었다.  스위스의 장창병 전술은 기본적으로 종횡으로 같은 수의 장창병이 배치되는 스퀘어 진형이 기본이 됐다.  즉 종으로 10명의 장창병이 배치되면 횡으로도 10명의 장창병을 배치해 총 100명이 한 개의 정사각형 모양의 밀집진형을 이뤘다.  이 진형은 기본적으로 전군, 중군, 후군의 3개의 스퀘어로 이루어졌는데 중앙의 스퀘어가 앞으로 돌출되고 나머지 두 개의 스퀘어는 뒤의 양 측면에 배치되는 품(品)자 진형을 기본으로 했다.  

각 스퀘어가 방어진형을 취할 때는 맨 앞의 장창병은 무릎을 굽히고, 두 번째 열은 몸을 구부리고, 세 번째 줄은 가슴 높이로 장창을 세우고 네 번째 줄은 어깨 높이로 장창을 올렸다.  반면에 공격진형을 취할 때는 앞 줄 4열의 장창병이 모두 가슴 높이에 장창을 올리고 진격했다.  기병이 보병의 밀집진형으로 돌격해 올 때는 앞, 뒤, 좌, 우의 장창병이 각각 사방으로 장창을 치켜세우는 고슴도치 진형으로 변형해 어느 방향에서 기병이 돌격해 오더라도 약점이 없게 했다.

이런 스퀘어 진형의 기본형은 전 부대가 3개의 스퀘어로 나뉘는 것이었지만 점차 부대의 규모와 조직력이 중요해 짐에 따라 3개 이상의 스퀘어를 형성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게 됐다.  16세기 들어 각 스퀘어를 이루는 부대를 대대(battalion)이라 칭했는데 평균적으로 하나의 대대는 수백 명 정도였다.  3개 이상의 스퀘어를 형성할 경우 앞 에 여러 개의 스퀘어를 널리 떨어지게 배치하고 그 틈을 뒤에 배치된 여러 개의 스퀘어가 매꿨다.

sss      sss       sss
sss      sss       sss
    sss       sss  
    sss       sss (대충 요런 모양)

15~16세기 들어서 총병의 비율이 늘어남에 따라 어떻게 ?紀느? 기존의 장창병 전술과 혼합시키는 가가 관점이 됐다.  총검이 등장하기 전의 총병은 근접전의 전투능력이 제로에 가까워, 이들을 기병돌격이나, 적군 장창병과의 접전에서 지켜 줄 수 있는 장창병이 총병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르네상스의 사령관들은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장창병과 총병을 배치했다.

첫 번째는 장창병 앞 열 바로 뒤에 3~4열의 총병을 배치시키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하면 총병이 장창병 사이에서 사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장창병 사이에 배치시킬 수 있는 총병의 수가 제한돼 강한 화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총병을 장창병의 양 측면에 배치시키는 방법이 있었는데, 이 진형을 소매 진형이라고 불렀다.  마지막으로 장창병 진형의 네 구석에 각기 소수의 총병을 배치해, 총병이 장창병의 보호를 받으면서 서로 지원사격을 할 수 있게 하는 뿔 진형이 있었다.

총병        총병            총병         총병
    (장창병)                     (장창병)
    (장창병)                     (장창병)
총병        총병            총병         총병        (대충 요런 모양)

이 진형은 어느 방향에서도 총병이 지원사격을 할 수 있고, 사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이 진형을 제대로 익히려면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근접전에 약하다는 단점 이외에도 총병은 연사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을 지녀, 상대의 돌격에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느린 연사속도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반대 행군(countermarch)라는 전술이 고안됐다.  반대 행군은 첫 열의 총병이 발사를 하고 병사들 틈으로 맨 뒷 열으로 이동하면, 그 다음 줄이 사격을, 그 뒷줄은 기다리는 동안 계속 장전을 하는 방식의 행군을 말했다.  16세기의 유럽군은 반대행군을 도입함으로써 총병이 움직이면서, 지속적으로 사격을 하게 할 수 있었다.

15세기 이후 가볍고 운반이 편한 대포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주요 야전군은 수십문의 야전포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넓은 지형에서 발사속도가 느린 야전포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었으나, 적군의 밀집진형을 상대로는 어느정도의 살상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대포는 보병대 앞에 배치돼, 양군이 접전을 시작하기 전 포격을 개시하는게 보통이었다.  대포가 보병대 앞에 배치돼 있었기 때문에, 르네상스의 회전에서는 양군이 대포를 뺏고 뺏기기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1450년 경 중장기병은 그 효율성이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최첨단 기술로 제작된 풀 플레이트는 기수의 활동성을 보장하면서도 대부분의 투척무기로부터 기수를 보호했다.  더불어서 그 파괴력이 절정에 이른 기병창(lance), 강하고 빠른 전투마 등은 중장기병의 파괴력을 극대화 시켜줬다.  하지만, 총병과 장창병의 등장은 보병대도 기병대를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회전에서 중장기병의 가치가 하락한 것은 아니어서 중장기병은 여전히 적진의 측면돌파나, 적 기병대과의 정면격돌에서 최강의 위력을 보여줬다.  

중장기병의 문제는 중장기병이 대규모 회전 이외에는 큰 쓸모가 없고, 그 유지비용이 보병의 3배 이상이라는데 있었다.  르네상스의 전쟁 대부분은 소규모 기습전, 게릴라전, 공성전 등, 중장기병이 활약할 곳이 거의 없는 곳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다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경기병의 비율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경기병은 소규모 기습전이 자주 일어나는 국경 지방에서 많이 배출됐다.  헨리 8세 치하의 영국/스코틀랜드 국경에서는 가죽갑옷과, 철 투구, 창으로 무장한 경기병이, 발칸반도에서는 짧은 창과 세이버로 무장한 스트라디오트 라 불리는 경기병이 활약했다.  투르크 족 출신의 경기병이나, 헝가리의 후사르 등도 이 시기에 활약한 경기병이었다.  경기병은 기습이나, 정찰, 호위 업무 등 다양한 업무에 투입됐다.  

점차 그 역할이 줄어드는 중장기병을 대신하기 시작한 것은 1540년대 독일에서 등장한 리이터 였다.  리이터는 격발장치를 장착한 피스톨을 주무기로 사용한 중기병 이었다.  리이터는 3~4자루의 피스톨, 에스토크, 단검 등을 장비했다.  이런 피스톨 기병의 전술은 첫 열의 기병들이 권총 사거리까지 적군에 접근해 사격을 하고 맨 뒤 열로 후퇴해 다시 총을 장전하면 그 뒤 열의 기병들이 차례로 사격을 가해 끊임없이 치고 빠지며 적군에게 사격을 했다.  피스톨 기병은 곧 전통적인 중장기병과의 대결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려 유럽 각 군이 피스톨 기병을 도입했다.  

  

  
5. 군대규모 및 조직

르네상스에서 화약무기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야는 바로 군대의 규모였다.  총은 기존의 무기보다 숙련에 필요한 기간이 짧았고 따라서 짧은 기간 내에 많은 병사들을 키워낼 수 있게 했다.  거기다 대포의 위력이 증가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요새는 중세의 성이 수십~수백 명의 방어군이 주둔하던데 비해 수백~수천 명의 인원을 요구했기에 이 요새를 방어하는 데만도 많은 수의 병력을 필요로 했다  또한 강화된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야전군이 필요해지는 현상을 불러와 전체적으로 르네상스 군대는 중세에 비해 비약적으로 그 규모가 상승됐다.  거기다, 15~16세기의 급격한 인구의 증가, 좀더 잘 정비된 정부, 경제성장 등은 각 국가가 더 많은 수의 군대를 양성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시기의 각 국가의 군대규모를 보자면,

르네상스 각국의 현역병 수

연도    국가                  부대성격               총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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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   베니스                국내 정규병             21,000명
1451   프랑스                국내 정규병             20,000명
1475   카스틸/아라곤 왕국    포루투갈과의 전쟁       42,000명
1476   스위스 및 동맹국      무르텐 전투              25,000명
1480   프랑스               막시밀리안 1세와의 전쟁   25,000명
1491   프랑스               브리타니 원정             20,000명
1491   카스틸/아라곤 왕국    그라나다 전쟁            60,000명
1494   프랑스                이탈리아 침공            28,000명
1499   프랑스                이탈리아 침공            27,000명
1509   프랑스                아그다데오 전투          30,000명
1509   베니스                아그다네오 전투          29,500명
1510   카스틸/아라곤 왕국    트리폴리 원정             34,500명
1512   프랑스 및 동맹국      이탈리아 내 정규병        29,000명
1512   스위스 연맹           이탈리아 원정             24,000명
1525   프랑스                파비아 전투               28,000명
1528   신성로마제국(카를 5세) 파비아 전투              28,000명
1532   신성로마제국      대 투르크 방어전에 동원된 총병력 100,000명
1536   프랑스                프로방스 방어전            45,000명
1536~7 프랑스              프로방스, 롬바디 침공전      60,000명
1544    프랑스              프랑스 방어전               35,000명
1544    영국 및 동맹국      프랑스 공략전               48,000명
1552 신성로마제국 제국내(독일, 스페인,네덜란드, 신대륙)의 현역병 총수 150,000명
1552    신성로마제국         메츠 전역                  50,000명
1552     프랑스              메츠 전역                  38,000명
1557     스페인              퀘틴 전역                  45,000명
1558     프랑스              국내 정규병                50,000명
1574     스페인              네덜란드 주둔군            86,000명
1580     스페인              포루투갈 정복              35,000명
1590     스페인              네덜란드 주둔군            85,000명
1591     영국                브리타니 전역              20,000명
1595     영국                아일렌드 주둔군            17,000명
1607     네덜란드            정규병 총수                51,000명
1610     프랑스              국내 정규병                68,500명
1617     베니스              그라디스카 전쟁            26,500명

결론적으로 르네상스 의 주요 야전군은 1476년에서 1528년 사이에는 2만 5천명에서 3만명 사이가 대부분이었다.  그 후 스페인 군은 네덜란드 전쟁을 치루면서 급격하게 부대규모가 증가했고 (평균 주둔군 6만 5천명), 프랑스는 내전에서 회복한 뒤로부터 군대규모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정규군 5~6만명) 1610년 프랑스의 앙리 4세가 암살당하기 직전 프랑스의 재상 쉴리는 프랑스 군과 동맹국 군을 합쳐 총 19만명의 군대를 소집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도 1625년 필립 4세의 재상 올리바레 공작이 14만명의 민병대를 스페인 군에 추가시키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 계획들은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의 구스타푸스 아돌푸스와 구교동맹의 발렌슈타인이 각기 10만 이상의 군대를 동원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현실이 된다.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이 최대의 동원병력이 3만 2천여 명이었고, 대규모 전투에 7천~1만 5천 명 정도를 동원한 것을 감안하면 르네상스의 군대규모는 중세말기에 비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고 볼 수 있다.

군대규모의 증가와 함께 르네상스 유럽 각국에서 두드러진 현상은 상비군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각국의 군주들은 전쟁이 끝나면 해체되는 봉건적인 임시 군대보다 언제든지 전쟁에 돌입할 수 있는 상비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영국이나 스페인은 내전에서 우위를 점할 필요성 때문에 프랑스나 부르고뉴는 국경선의 방어와 침공군의 필요성 때문에, 이탈리아의 각 소국들은 1454년 이후 불안해진 국내정세 때문에 상비군이 절실해졌다.  또한 화약무기의 대두와 그에 따른 전술변화에 따라 신병들을 훈련시킬 최소한의 인원들이 필요해졌다.  기존에는 일상생활에서 전통적인 무기를 수련할 수 있는 여건이 됐지만, 총은 민간인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민간인에게 사격술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따라서 이러한 바로 징집된 신병들에게 무기훈련과 전술훈련을 시킬 베테랑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포병대는 상설적인 조직이 필요해 각국의 군주들은 포병대만큼은 상비군 제도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샤를 7세는 1461년 약 4000여명의 포병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15세기 중반 이후로 상비군들이 각국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1445년 프랑스의 국왕은 3,000명의 중장기병과 6,000명의 승마궁병을 포함한 9000여명의 상비군을 유지했다.  1471년 부르고뉴 공은 중장기병 1,200명, 승마궁병 3,600명, 보병대 3600명을 포함한 총 8,400명의 상비군을 창설했다.  베니스도 로디 조약 이후로 중장기병과 승마보병으로 구성된 8,000여명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항상 군대에 복무하게 하는 상비군을 만들었다.  밀란도 베니스와 비슷한 방법으로 군대를 창설했고, 스페인에서는 1493년 그라나다의 정복이 끝나면서 2,500명의 중장기병을 항시 유지했다.  

1481년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보병 14,000명, 근위대 600명, 중장기병 및 승마궁병 9000명을 합해 총 23,600명의 상비군을 창설해 17세기에 정착된 상비군 시대를 열었다.  스페인도 새로 정복한 나폴리 왕국과 밀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해적 및 프랑스 국왕과의 전쟁의 필요성 때문에 1590년 약 17,500여명의 상비군을 이탈리아 반도에 주둔시켰다.  이와 더불어 네덜란드 전선에는 항시 13,000명에서 15,000명의 상비군이 주둔하고 매 해마다 수만 명의 야전군을 네덜란드에 투입해 평균적으로 6만 5천명의 병력이 투입됐다.  이러한 스페인 군대규모의 급격한 성장은 신대륙에서 흘러들어오는 막대한 금과 은으로 가능해졌다.  프랑스는 16세기 중반 내전이 시작될 무렵 10,000여명의 상비군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내전이 끝난 후 앙리 4세의 재상 쉴리 공작은 기병 6천명을 포함한 5만 6천명의 상비군을 창설했다.  이런 상비군의 증가는 유럽 전체 국가에 해당되는 것으로 베니스는 16세기 중반 9300명의 상비군이 있었으나 1606년에서 1621년 사이 부대규모가 27,500~28,000명으로 증가했고, 독일도 1521년 무렵에는 24,000명의 보병대를 창설했으며, 사부아 공국에서도 24,000명의 군대를 창설했다.

보통 평화 시에도 유지되는 상비군은 전쟁에 투입되는 전투부대 중 핵심부대를 이루고, 대부분의 병사는 전쟁이 일어나면 모병으로 그 숫자를 채웠다. 그래도 부족한 병력은 용병을 고용해?? 채웠다.  이 밖에도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민병대가 자기의 고장을 지키는 의무가 주어졌다.  민병대는 주로 전략적 요충지에 배치된 상비 주둔군을 보조하거나, 위급 시에 방어전에 동원되곤 했다.  이러한 민병대는 일종의 예비군 역할을 했는데, 1534년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국경지방에 6개 군단 6만 여명의 민병대를 창설했다.  민병대의 수도 상비군과 마찬가지로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 1591년 영국에서는 91,400명이 민병대에 등록돼 있었다.

15세기 말부터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초기형의 총을 방아쇠로 총을 발사하는 아큐버스(arquebus, 화승총), 아큐버스보다 약간 짧은 총인 칼리버가 대신하게 됐다.  1540년부터는 발사속도는 아큐버스보다 좀 떨어지지만 200~240보 내에서는 특수 제작된 공성용 갑옷을 제외한 모든 갑옷을 관통할 수 있는 중 머스켓 총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부터 총병의 수가 꾸준히 늘기 시작했다.  총병의 증가와 함께 접근전 능력이 거의 전무한 총병을 보호하기 위해 장창과 할버드를 사용하는 병사의 비중도 커졌다.  그 전세기만 해도 많은 전장터에서 큰 활약을 보였던 투 헨드 소드(양손검)를 다루는 병사나, 검사, 방패와 검을 사용하는 병사들은 16세기 초반에 전장터에서 하나 둘씩 사라졌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각국에서는 보병대 내에서 각 병과의 비율을 표준화 하려고 노력했다.   1548년 베니스에서는 보병대의 10퍼센트를 할버드 병, 30퍼센트를 아큐버스 총병, 60퍼센트를 장창병으로 채울 것을 명시했다.  1566년 프랑스는 전 보병대의 33퍼센트를 아큐버스 병으로 할 것을 요구했고, 1571년에는 할버드 병 6퍼센트, 머스켓 총병 20퍼센트, 칼리버(caliver, 일종의 소총) 총병 34퍼센트, 장창병 40퍼센트를 명시했다.  1600년 프랑스 보병대는 반을 총병 나머지 반을 장창병으로 채울 것을 목표로 했다.  동시기의 스페인 보병의 비율은 할버드 병 10퍼센트, 장창병 30퍼센트, 머스켓 총병 25퍼센트, 아큐버스 총병 35 퍼센트 였다.   16세기 중반부터 전반적으로 총병과 장창병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르네상스의 주력은 보병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병대의 가치가 하락한 건 아니어서 여전히 기병은 중요한 전력으로 평가받았다.  기병대가 전체 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전쟁이 일어날 때 자비로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지주 계급의 숫자와, 기병대로 자원한 지주계급의 수, 재정의 상태에 따라 결정됐다.  

르네상스 군대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율을 살펴보자면,


르네상스 군대에서의 기병 비율

연도   부대 성격                         기병대       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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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5  카스틸/아라곤 대 포루투갈 전쟁     12,000명    30,000명
1485  카스틸 군 대 그라나다 전쟁         11,000명    25,000명
1489  카스틸 군 대 그라나다 전쟁         13,000명    40,000명
1494  이탈리아 침략 프랑스 군            13,000명    15,000명
1509   아그나델로 전투의 프랑스 군        4,000명    16,000명
1509   아그나델로 전투의 베니스 군        9,000명    20,000명
1515   파비아 전투의 프랑스 군            5,000명    24,000명
1552   메츠 전역의 프랑스 군              6,000명    32,000명
1555   베니스 상비군                      1,500명     5,000명
1610   프랑스 현역병                      6,500명    60,000명

16세기의 유럽 군대에서 기병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봉건기병의 전쟁 참가 하락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짧아진 기병 복무기간, 기병의 보충이 보병보다 더 힘들다는 문제, 해당 국가의 전투마 공급문제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스페인의 대 네덜란드 전쟁은 기병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운하가 많은 네덜란드에서는 기병의 활약이 힘들고, 대부분이 공성전으로 진행된 네덜란드 전쟁에서는 기병의 활약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들어와서 각국의 군 조직은 중대로 중심으로 편성됐다.  한 개 중대는 대게 100~150명으로 편성되며, 각 중대는 독립적인 전투가 가능했다.  특히 르네상스의 전쟁 대부분의 기간은 포위전의 육박전이나, 소규모 전투가 전쟁의 대부분을 차지했기에 독립적으로 전투를 할 수 있는 중대가 중요했다.  각 중대는 대위(captain)가 지휘했는데, 대위는 중대의 지휘 뿐 아니라, 해당 중대원의 모집, 훈련, 조직 등 중대의 거의 모든 부분을 관할했다.  대위 아래는 중위(lieutenant)가 대위를 보조했고, 대게 젊은 하급귀족들인 소위(ensign)는 부대의 깃발을 들고, 각기 부대원들을 이끌 의무가 있었다.  소위 아래는 경험이 많은 하사(sergeant)가 할버드를 들고 대략 50여명의 병사들을 통솔, 훈련시키고 진형을 짜는 임무를, 고참병사인 상등병(corporal)은 약 10여명의 병사를 책임졌다.

중대 위에는 대대(battalion)이란 부대 단위가 있었는데 대령(colonel) 이 지휘했다.  대대는 그 규모가 일정하지 않았고 대게 수백 명 단위의 부대가 모여 만든 한 개의 스퀘어(square)라고 불린 한 개의 정사각형 모양의 밀집 진형 단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대대에는 각기 원사(sergeant major)가 대대 진형을 짜는 임무를 맡았는데, 현대와는 달리 이 당시의 원사는 하사관이 아니라 고위 장교에 가까운 직위였다.  대령은 그 아래의 대위와 같이 직속부대는 1개 중대 뿐이어서, 수석대위와 비슷한 직위를 가졌다.  혹은 지방의 방위를 통솔하는 장교를 대령이라 칭하기도 했다.  스페인 군만이 테르시오(tercio)라고 불린 1000~1600명 사이의 연대를 운용했고, 타 국가에는 연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령 위에는 포병장군, 기병장군, 보병장군 이 있었는데, 이들이 지휘하는 병력은 일정치 않았고, 고위귀족에게 내려지는 직위라는 성격이 강했다.  야전군의 총사령관은 군사적 능력보다는 사회적 직위나, 일정기간 대규모의 부대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중요시 돼 대게 공작정도의 직위를 가진 귀족이 맡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6. 징집제도

유럽의 군대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각국은 더 많은 병사들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유럽 국가들은 충분한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이다.  15~16세기의 국가에서는 보통 인구의 3분의 1이 징집대상 연령인 15~16세 이하였고, 성직자, 기간산업 종사자, 병역 면제자 등을 제외하면 전체 인구의 10퍼센트 가량이 징집대상이 가능한 연령층이었다.  따라서 16세기의 프랑스의 경우 인구가 1600만에 육박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약 160만 명이 징병대상자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군대는 전체 인구의 0.5퍼센트에서 0.75퍼센트 이하였고, 국경지방이나, 내전, 분쟁지역 등 특수한 경우에도  대상지역 인구의 2퍼센트 이상이 군대에 징집되는 겨우는 없었다.   또한 전투병 수는 징병대상자의 5퍼센트를 넘는 경우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군주는 원하는 만큼의 병력을 징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당시의 징병제도가 강제로 국민을 징집하는 강제징집제가 아닌 지원자를 받아 병력을 채우는 모병제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전쟁에 드는 비용이 막대하다는데 있었다.  

르네상스 유럽 국가들의 징집방식은 중앙정부가 그 해 전쟁에 필요한 군인 수를 정하면, 그에 따라 각 지방에 일정수의 병력을 모집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면 각 지방의 대영주나 시장은 정해진 병력수를 모집해 야전군에 편입시킬 의무가 있었다.  이 당시는 병사들의 봉급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전쟁에서의 사망률도 민간인 생활보다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일반인 중에서는 지원자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각 공동체에서는 사회에서 원치 않는 최 하류층의 사람들을 군대에 지원하도록 압력을 주곤 했다.  군대에서 일정 기간을 복?デ玖? 지은 범죄를 사해 주는 제도도 있어서 각종 범죄자들이 군대에 입대하는 계기가 됐다.  물론 이런 사회 밑바닥 출신들만 군에 지원한 건 아니어서, 모험이 가득한 군대생활의 매력에 끌려 지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 군대로 향하는 자 중에는 첫 달 봉급만 받고 도망치는 사람이 많아 당국자들이 골치를 썩기도 했다.

이렇게 각 지방에서 모병으로 뽑은 병사들이 군대의 다수를 차지했지만, 문제는 이렇게 모여든 군인의 전투력이 제로에 가깝다는데 있었다.  따라서 전투경험이 풍부한 부대가 이들 신병들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 역할을 맡은 것이 일부 상비군과 용병이었다.  용병과 모집병들의 차이는 모집병은 국가기관에서 병사를 뽑았다는 것이고, 용병은 귀족 출신들의 용병대장들이 사적으로 군대를 모집, 훈련시켰다는 데 있었다.  또 다른 차이점은 용병은 전쟁이 끝나면 다른 전쟁터를 다니면서 지속적으로 부대를 유지하는 것에 비해 모집병은 전쟁이 끝나면 일단 해산된다는데 있었다.  용병은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자국군인에 비해 도망병이 월등하게 적으며, 비교적 훈련이 잘 돼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 자국군인들은 도망병이 많고, 전투력이 떨어졌으나, 용병과 달리 반란을 일으키는 횟수가 적고, 당장 봉급을 받지 못해도 계속 싸움을 이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일단 병사들이 모였으면, 국가는 각 중대의 대위에게 병사의 수와 장교, 하사관의 숫자에 알맞은 돈을 지불했다.  대위와 그를 보좌하는 중위는 그 돈으로 병사들의 장비를 구입하고, 장교 및 병사의 봉급을 지불하고, 해당 중대를 훈련,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부정한 대위는 병사의 수를 실제보다 늘려 보고한다던가, 중대운영비의 일부를 빼돌리는 등의 부정행위를 해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웠다.  따라서 각국에서는 각 중대의 운영비를 하사할 때 마다 국왕의 관리가 참관해 병사의 이름 및 얼굴, 정확한 숫자를 확인하도록 했으나, 각 부대장의 부정행위를 완전히 근절할 수는 없었다.  (이 문제는 17세기 루이 14세가 군대의 조직 권을 국왕의 관리가 관리하게 할 때까지 계속된다.)  

일단 부대에 배속된 병사는 자비로 자신이 속한 병과의 표준장비를 구입해야 했다.  총병을 예로 들자면 당시의 총병은 헬멧, 흉갑(cuirass), 검, 아큐버스(파이크 병의 경우는 장창)를 구입해야 했다.  이러한 표준장비들을 병사가 입대하기 전부터 가져오면 장비 구입비가 면제됐지만, 그렇지 않으면 봉급에서 최대 25퍼센트를 무기 구입비가 다 지불될 때까지 감봉했다.  당시 흉갑이 병사의 세 달치 봉급, 아큐버스(혹은 화승총)가 병사의 한 달치 봉급에 육박했다.

16세기 병사들의 계급 및 병과에 따른 봉급을 살펴보자면,

16세기 병사의 월급

계급/병과             월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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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령                80 두카토
대위                40 두카토
중위                15두카토
소위                12두카토
하사                 9 두카토
상등병               6 두카토
고수(북치는 상급병사)  4.5 두카토</td></tr>
중장기병              9 두카토
헬버드 병             4 두카토
장창병                3 두카토
아큐버스 총병         4 두카토
머스켓 총병           3 두카토

이 당시의 3 두카토 정도는 최저 생활비에 가까웠고 (1 두카토는 현대돈으로 15~20만원 정도), 단순노동자들도 비슷한 돈을 받았으므로 일반병사들은 최저 생활비 정도만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하사관이나 하급 장교, 중장기병등 비교적 높은 수준의 봉급을 받는 군인들도 그다지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했는데 하사관은 자비로 1명의 하인을 고용해야 했고, 하급장교도 같은 수나 그 이상을, 중장기병은 1명의 검사와 1명의 종자를 자비로 고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게 중위나 대위 계급 이상은 올라가야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거기다 각 병사들은 숙박만 국가에서 부담해 주고, 나머지(무기 값, 식사 값, 옷값 등)는 자비로 부담해야 했다.    당시의 군대복무는 국왕에 대한 봉사 내지는 의무로 여겨졌기 때문에 병사들의 봉급은 박봉이었다.  병사들은 약탈을 통해 상당양의 돈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약탈품의 일부는 국가, 해당 부대의 장교나, 하사관에 내고, 그 나머지만을 가질 수 있었기에 일확천금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예비군의 역할을 담당한 민병대도 정규군과 마찬가지로 지원자를 받아 부대를 편성했다.  민병대는 국가에서 봉급을 주지는 않았으나, 각 공동체에서 민병대 대원의 훈련비 및 집결지까지의 여행비를 부담했다.  민병대가 되면 일년에 몇 번씩 집결지에 모여 훈련을 하고, 나머지 기간은 일상생활에 종사했다.  민병대는 병역세를 면제받을 수 있고, 민간생활에서도 무기소지를 할 수 있다는 특권 때문에 지원자가 줄을 이었다.  



7. 보급

군대를 소집했으면, 정부 관계자들은 군인의 생필품을 대량으로 공급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보급은 대게 군대가 행군하기 전에 각 지방의 상인들에게 군대에 필요한 물품들을 미리 구입해 놓고, 군대가 그 곳에 도착하면 상인들이 동원한 민간업자들이 군대에 필요한 식량 및 생필품을 보급하는 체계였다.  

식량을 공급하는 업자 이외에도 군대에는 대장장이, 목수, 칼 제작공, 미장이, 벽돌공, 목수 등의 각종 장인들과 군대의 물자를 실어 나르는 수송인원, 병사들 대신 참호파기, 각종 막노동에 동원된 일반인, 병사들의 빵을 준비하는 요리사, 매춘부, 세탁업자 등 군대에 필요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인들이 따라다녔다.  이러한 군대를 따라 다니는 비전투원 및 민간인들은 통상적으로 전투병의 숫자와 거의 비슷한 숫자였다.  예를 들어 1491년 샤를 8세는 2만 명의 전투병을 지원할 목적으로 약 2만 8천명의 비전투원 및 민간인을 주변지역에서 징발했다.  카를 5세는 5만 명의 전투병을 소집하면서 약 5만 여명의 비전투원을 군대의 지원업무에 동원했다.

이렇게 전투병과 비전투원을 합쳐 5만~10만에 이르는 움직이는 도시를 먹이는 데는 막대한 양의 식량과 수송인원이 필요했다.  대포 및 탄환, 그 부품을 움직이는데도 많은 수송인원이 필요했고, 병사들의 무거운 갑옷, 식기, 무기 등도 실어 나를 필요가 있었다.  1602년 모리스가 이끄는 2만 4천명의 군대는 총 3천여 대의 짐마차를 필요로 했고, 각 짐마차는 4마리의 말과 2명의 마부를 필요로 했다.  1526년 헨리 8세는 군용으로 22,500 마리의 말과 노새를 유지했고, 군대가 지나갈 때는 그 지방의 거의 모든 말과 노새가 징발됐다.  이 시기의 군대는 보급부대와 같이 움직일 필요성 때문에 하루 평균 20km 정도를 행군할 수 있었다.

중세에 널리 쓰인 약탈만으로 군대를 유지시키는 방식은 군대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대신에 각국에서는 식량공급의 부담을 국가 전체로 돌리는 방식을 선호하게 됐다.  구체적으로는 각 지방의 상인들이 중앙정부의 병참관의 돈이나 채권을 받고 그 지방의 물품들을 사들여 책임지고 군대에까지 조달했다.  국가가 상인에게 지불하는 돈은 시장가격과 동일했기 때문에 싸고 빠르게 대규모의 수송인원을 조직할 수 있는 대상인 만이 국가와의 계약에서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국가가 직접 식량을 징발하는 것 보다는 이미 그 지역에 유통망을 가지고 있는 상인이 대신 물품을 운반하는 것이 더 효율적으로 여겨졌다.  이 시스템은 군대가 예정대로 행군하는 한 별 문제가 없었지만, 군대가 예정보다 더 오래 한 지역에 머무르게 되면, 그 지역의 식량이 빠른 시간 내에 고갈되는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7. 군 재정

르네상스 유럽 국가들은 현대 기준으로 봐도 국가 경제의 상당부분을 전쟁에 소모했다.  15세기 대부분의 국가들이 1년 GNP 의 5퍼센트 이상을 전쟁에 소모했고, 16세기 말의 영국은 3~4퍼센트, 스페인은 8~9 퍼센트, 네덜란드 는 16퍼센트를 지출했다.  르네상스의 정부는 아직 효율적인 세제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전쟁에 소요되는 상대적인 비용은 현대보다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르네상스의 중앙정부는 직할령에서 나오는 지대, 벌금, 수수료, 전통적인 관세, 재산세 로 국정을 운영했다.

전쟁비용은 평균적으로 국가재정의 반에 육박했고, 때로는 그해 국가재정의 1.5~3배 까지 올라가곤 했다.  이러한 전쟁비용은 대게 흑자가 난 해에 여분의 돈을 보석이나 동전으로 바꿔 주요관리 여러 명의 동의 하에만 열 수 있는 전쟁금고에 보관했다.  예를 들어 영국의 헨리 7세가 꾸준히 저축한 재정흑자를 헨리 8세가 전쟁으로 다 소모했고, 엘리자베스 여왕 초기에 저축한 25만 파운드의 은화는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의 전쟁으로 다 소모했다.  이러한 저축이 가장 성공한 사례는 베니스로 베니스는 1584년부터 1615년까지 꾸준히 전쟁비용을 저축해 1615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국가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고 장기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

평화 시에 드는 국방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16세기의 인구증가와 경제성장, 이에 따른 세수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새로 생겨난 상비군의 유지비, 현대화 된 요새의 건설, 대포 구입 및 유지비 등 중세에는 지출하지 않아도 됐던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1547년 헨리 8세는 국가재정의 29 퍼센트를 요새 건설비에 지출했다.  한 편 1611년 프랑스는 전체 세입인 2500만 리브레 중 650만 리브레를 , 1615년에는 2440만 리브레 중 1000만 리브레를 국방비로 지출했다.  이러한 사정은 지방자치 정부도 마찬가지여서 르네 시는 세입의 42퍼센트를 , 코모 시와 베르가모 시는 각각 50퍼센트 이상을 요새건설에 지출했다.  이러한 지출증가로 각 도시들은 시민권 세, 매상세, 수입세 등을 올리고, 나머지는 빌린 돈으로 충당해야 했다.  

일반적인 세입만으로는 더 이상 전쟁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럽의 각국 정부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그 구멍을 매 꿔야 했다.  가장 많이 쓰인 방법은 관직매매와 토지몰수 및 판매였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프랑소아 1세는 관직매매로 90만 리브레(당시 전체 재정은 500만 리브레)를 확보할 수 있었다.  헨리 8세는 교회의 토지를 압수, 판매 함으로써 프랑스와의 전쟁비용 중 32퍼센트를 충당할 수 있었다.

토지매매와 관직판매는 당장 돈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은 돈을 빌려서 충당했다.  르네상스 국가 중 가장 많은 군사비를 지출한 스페인은 1519년에서 1554년 사이 총 390만 두카토를 빌렸는데, 이 시기 스페인의 평균 1년 세입은 550만 두카토 였다.  유럽 국가 중 가장 재정이 튼튼했던 프랑스는 빌린 돈을 대부분 재 때 갚을 수 있었으나 내전이 일어나 세입이 급격히 줄자 프랑스도 파산 선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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