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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사 자료실

전성기중세시대(900~1300년)의 군

작성자싸갈탱이|작성시간04.09.23|조회수1,203 목록 댓글 0

중세시대에는 평균적으로 기사와 보조부대의 비율이 1:2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중세시대의 군

 

1.기사의 장비,보급
기사의 장비의 가격은 소 20~100마리 가격(한 촌락에서 기르는 가축들의 총가치가 이정도였다고 합니다.)였습니다. 
또 기사는 전쟁기간동안 자신이 먹을 식량및 생필품을 준비해야 됬지요. 
이 생필품의 양은 노새가 끄는 짐마차 두개분(약 3달치)이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기사가 준비해야하는 물품의 목록이지요.  

1100년경의 플랑드르 백작은 자기의 부름에 응하는 기사들에게 의무적으로 기사 한 사람당 말 세 마리 즉
전투마,행군마,짐말을 배정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복무기간으로 넘어가면 기사는 40일내로 집합지로 집결해야 하고, 전쟁시작이후에 2달간 의무적으로 복무해야한다고 백작은 규정했습니다. 전쟁이 두달보다 길어지면 기사들에게 봉급을 지급했다 합니다.

서양생활문화사를 보면 '1066년 영국의 전체인구는 대략 1백만 정도였는데, 2백명의 주군(로드)과 6천명의 기사(가신)가 있었다.....진정한 기사는 두 가지 미덕,즉 군주에 대한 충성심과 전쟁에서의 용맹성으로 결정되었다 왕의 자비에 대한 보답으로 기사는 1년에 40일 정도를 봉사해야 했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2. 기사가 싸우는 방식
기사가 싸우는 방식은 첯쨰도 돌격이요 둘째도 돌격이요 끝까지 돌격입니다. 기마전사는 가만히 멈추어
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돌격방식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주로 자유로운 전사들이기에 대열을 안 지키고 마구잡이로 돌격했습니다.
그리고 가끔식 기사가 한줄러쉬를 한다고 그러는 분들도 있었는데(한줄로 쭉 서서 돌격하는 것, 저도 처음에 기사들이 그렇게 공격하는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사료를 보니 기사들은 무리를 지어 서로 무릅정강이를 맞댈정도로 바짝 붙어서 덩어리를 이루어 돌격했다 합니다. 아무리 잘 싸워도 기동성을 잃고 포위되면 기사들은 많이 죽었습니다.
 


보조부대:

1. 궁수(marksmen)-  중세전쟁에서 궁수의 역할은 거의 무시할 수준이었는데 그 이유는 쇠갑옷을 뚫을 수 있는 화살은 매우 만들기도 어렵고 가격이 비싸 평민들로 이루어진 궁수들이 이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고,
에드워드1세의 업적으로 영국의 장궁대를 빼면, 잘훈련된 궁수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어서 주로 이탈리아에서 온  용병으로 구성했습니다. 그중 제노바석궁수가 유명합니다.

 

2. 중보병(서전트)- 중보병들은 견습기사(Squire) 그리고 종자등으로 이루어졌는데 기사들을 따라다니며 싸우는 오늘날의 직업군인인 하사관정도 였습니다. 접근전에서는 서로 옥수수같이 바짝 붙어서 덩어리를 이루어 돌격. 그리고 공성전에서는 이들의 역할이 승패를 결정지었다고 합니다.

 

3. 자경대(Militia)- 이들의 임무는 시간끌기입니다.(야전시에 소집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성전에는 소집된 것으로 압니다.) 낯 ,쟁기등의 농기구로 무장한 이들 농민군은 말하자면 방위대원 같은 역할을 했을게 분명합니다. 중세초기(800-1000년경)에는 전쟁시에 자경대소집이 있었지만 전투가 점점 고급화 되어 갈수록 전력을 갖추고 항상 전투준비가 되어 있는 전사계급만이 더욱 유용성 있다는 것이 입증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속적인 전투는 농부계층을 허약하게 만들어 영지의 수입에 불이익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투경험이 적은 탓으로 농부(자경대)들은 잔인한 전투에서 거의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1100년을 전후한 수십년동안 토지소유자들 상당수가 전쟁터에서 사망했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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