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중세기사 영화

헨리 5세 ( Henry V, 1989, 영국 )

작성자Lord|작성시간04.10.10|조회수536 목록 댓글 1

 

 

 

 

 

 

헨리 5세 ( Henry V, 1989, 영국 )

 

 

감독 : 케네스 브래너(Kenneth Branagh)
출연 : 케네스 브래너(Henry V), 데릭 자코비(Derek Jacobi, 내레이터), 이안 홀름(Ian Holm - Fluellen), 엠마 톰슨(Emma Thompson, Katherine), 시몬 셰퍼드(Simon Shepherd, Gloucester), 제임스 라킨(James Larkin, Bedford), 브리안 블레시드(Brian Blessed, Exeter), 크리스찬 베일(Christian Bale, Falstaff's Boy), 쥬디 덴치(Dame Judi Dench, Mistress Quickly), 폴 스코필드(Paul Scofield, French King Charles VI) 등
기타 : 윌리엄 셰익스피어(원작), 케네스 브래너(각본), 케네스 맥밀란(촬영), 패트릭 도일(음악)
 

 

 

 

 Inner Link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의 시작

 

 

 

엑스칼리버

윈스턴 처칠

브레이브 하트

로빈 후드

잔다르크

로렌스 올리비에

세르게이 에이젠쉬쩨인

알렉산더 네프스키

자와할랄 네루

모한디스 K. 간디

자말 압둘 나세르

마이클 콜린즈

마거릿 대처

파울 요제프 괴벨스

카사블랑카

 

1415년 10월 25일 새벽녘이 되었을 무렵,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기 위해 영국 원정군을 이끌고 온 헨리 5세는 그들이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 아쟁쿠르(Agincourt)의 병목처럼 생긴 작은 평야가 전날 내린 비로 인해 온통 진창으로 변했음을 알았다. 그의 병사들도 밤에 내린 비에 젖어 새벽 한기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의 병사들은 계속되는 행군에 지쳤고, 이질과 기관지염을 앓고 있었다. 어떤 이들에게 이 전투는 단지 인류 역사상 가장 길었던 “백년전쟁(1337년 - 1453년까지 116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일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헨리 5세가 이끄는 영국군이 6개월 전 처음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했을 때 병력은 12,000명이었으나 계속되는 전투의 사상자와 낙오병들로 인해 이제는 그 반도 되지 않는 병사들만 남아 있었다. 그나마 대부분의 병사들이 질병을 앓고 있었고, 낯선 프랑스의 시골길을 행군하느라 완전 탈진 상태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군량이 떨어진 뒤엔 약탈을 자행해 프랑스 농민들의 분노를 샀다. 프랑스 농민들은 영국군 낙오병을 살해함으로써 그들의 분풀이를 했고, 영국군의 진군 방향과 속도, 병사들의 사기에 대한 정보까지 프랑스군에게 낱낱이 제공했다. 프랑스군은 농부들이 제공해주는 정보를 통해 영국군 진영 내의 상황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전투는 시작하기 전부터 프랑스군의 당연한 승리를 예상할 수 있었다.

영국군과 헨리 5세는 아침 안개가 서서히 걷힐 무렵, 프랑스군 15,000(혹은 2만)명이 그들의 진군 방향을 가로막은채 진을 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영국군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에서 영국군을 내려다보는 형국으로 주둔하고 있었다. 영국군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프랑스는 당시 유럽 최강의 군사강국이었으며, 최첨단의 군사기술로 무장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나라의 최정예 군대와 마주 대한 상태에서 일전을 겨루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프랑스군의 선봉에는 칼, 전쟁용 도끼, 창, 철퇴 등으로 중무장한 보병대가 있었고, 그 뒤로는 유럽 최고의 갑옷 제작 기술로 이름난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장인들이 만든 철제 갑옷을 갖춘 5,000여명의 프랑스 기사들이 갑옷을 번쩍이며 돌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방패에는 그들의 귀족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들어 있었고, 투구에는 멋들어진 깃털 수술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들은 이미 1000년 전부터 보병에 대해 절대적인 우세를 자랑하는 기병대의 전통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려는 찰나였다. 게다가 이들이 타는 말은 육중한 기사의 무장을 견뎌낼 수 있도록 오랜 세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군마들이었고, 하나같이 철갑을 두르고 있어 보병들에게는 전차(combat tank)와 같은 육중한 돌격을 선사할 것이었다.

 

데릭 자코비(Derek Jacobi, 내레이터) - 셰익스피어의 희곡 자체의 특징을 충실히 따른 이 작품은 본래 셰익스피어 극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 요소들인 에피스드적 구조와 합창단을 사용하여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내레이터를 기용하고 있다는 것 또한 그렇다.

 

 

 

 

 

 

 

헨리 5세가 이끄는 영국군의 공격을 받아 5주간 버티다 결국 함락당하고 마는 하플러성 - 영화에서 케네스 브래너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대사를 연발한다. "한 번 더 돌파구를 향해 돌진하자. 친애하는 제군들이여! 다시 한 번, 아니면 요새를 우리 잉글랜드 병사들의 시체로 메워 버려라. - 이렇게 외쳐라. 신이시여, 헨리를 도우소서! 잉글랜드를 도우소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은 단순히 영국의 왕들을 찬미하는데 있지 않다. 그는 오히려 전쟁의 잔인함과 야심에 불타는 왕의 냉혹함을 부각하고 있다. 1944년 로렌스 올리비에의 영화에는 누락되었으나 1989년 케네스 브래너의 영화에는 삽입된 세익스피어 희곡에 본래 등장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헨리 5세는 이스트칩 시절 그의 단짝이기도 했던 바돌프를 교회에서 도둑질한 죄로 교수형 시킨다.(역사가들은 당시 헨리5세가 교회에서 도둑질하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성 크리스핀(크리스피누스) 축일의 연설
(St. Crispin's Day Speech)


웨스트모어랜드(헨리 5세의 사촌, 기사):(헨리 5세에게) 본국에 남아서 오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병사들 중에서 10,000명이라도 여기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헨리 왕 :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누군가? 내 사촌인 웨스트모어랜드인가? 아닐세, 사촌이여, 만일 우리가 모두 전사해야 할 지경이라면, 조국에 끼치는 손실은 우리만으로도 족하네.

만일 승리하여 살아남게 된다면 우리 군대의 인원수가 적을수록 우리들이 차지할 영예의 몫은 크게 마련이네. 신에게 맹세컨대, 한 사람의 병사도 더 바라지 말아 주게. 맹세코, 난 절대 황금을 탐내지 않네. 그리고 누가 나의 비용으로 먹고 마시더라도 나는 상관치 않네. 또한 사람들이 나의 옷을 입더라도 상관없네. 그런 외면적인 것은 일체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네. 하지만 명예를 탐내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네. 아닐세, 정녕, 사촌이여, 본국으로부터 한 사람도 증원을 바라지 말게.

신에게 맹세컨대, 내 바라기는 한 명이라도 인원이 많아져 내가 차지할 몫이 줄어들어 이 위대한 영광을 잃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하네. 오, 제발 한 사람도 더 바라지 말게. 오히려, 웨스트모어랜드여, 내 군대에게 이렇게 포고하게.

이 전투에 참가할 용기가 없는 자는 떠나가라. 그런 자들에게는 허가증을 발급해 주고 여비도 지급될 것이다. 우린 우리와 같이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들과 같이 죽고 싶지 않노라.

오늘은 크리스핀의 축일이라 불리는 날이다. 이 날 살아남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는 자는 이 날의 이름이 선포되고 크리스핀 성자의 이름을 들으며 깨어날 때 설레이며 일어나리라. 그리고 오늘 살아남아 노년이 되는 자는 해마다 그 전야제에 이웃사람들을 초대하여 이렇게 말하리라, "내일은 성 크리스핀 축일이요" 라고. 그리고 옷소매를 걷어올려 상처자국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하리라, "이 상처는 성 크리스핀 축일에 입은 상처요" 라고.

노인은 건망증이 심하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은 잊을지라도 그날 세웠던 공훈은 유리한 점들과 함께 반드시 기억해 내리라. 그때엔 우리들의 이름이 매일 쓰는 말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되어 헨리 왕, 베드포드, 엑스터, 워윅, 탤버트, 샐리베리, 그리고 글루세스터 같은 이름들은 그들이 주고받는 술잔 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전달될 것이고, 크리스핀 축일은 오늘부터 세상의 종말까지 영원히 그날 우리를 기억하지 않고는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소수 인원인 우리들, 다행히도 소수인 우리들은 모두 한 형제이다. 왜냐하면 오늘 나와 같이 피를 흘리는 사람은 나의 형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천한 신분도, 오늘부터는 상황이 좋아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고국 영국에서 침대에서 편히 쉬고 있는 귀족들은 이곳에 있지 않았던 것을 저주라고 생각하고 성 크리스핀 축일에 우리와 같이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신들의 체면이 몹시 깎여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This day is called the feast of Crispian: He that outlives this day, and comes safe home, Will stand a tip-toe when the day is named, And rouse him at the name of Crispian.

He that shall live this day, and see old age, Will yearly on the vigil feast his neighbours, And say 'To-morrow is Saint Crispian:' Then will he strip his sleeve and show his scars.

And say 'These wounds I had on Crispin's day.' Old men forget: yet all shall be forgot, But he'll remember with advantages What feats he did that day: then shall our names.

Familiar in his mouth as household words Harry the king, Bedford and Exeter, Warwick and Talbot, Salisbury and Gloucester, Be in their flowing cups freshly remember'd.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 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 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e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셰익스피어, <헨리5세>의 4막 3장


 

 


이에 비해 영국군은 말을 탄 기사들은 소수(800여명)에 불과했고, 대개는 농부의 복장한 궁수들이었다. 프랑스 기사들은 사슬갑옷에 철판을 여러 겹 덧대어 만든 철갑 갑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된 화살조차도 퉁겨낼 수 있었다. 당시 기사는 천하무적이었다. 말안장으로부터 연결된 등자에 든든하게 발을 걸치고 있는 기사를 보병이 공격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사를 말 위에서 끌어내려야 했는데,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는 보병이 기사를 공격하여 끌어내리려 시도했다가는 기사가 휘두른 묵중한 장검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쪼개지거나 기사가 휘두르는 철퇴에 머리통이 깨져 죽을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기사는 기사끼리 맞부딪쳐 말 위에서 떨어진 뒤에야 비로소 보병들이 달려들어 갑옷 틈새에 예리한 칼을 찔러 넣어야 죽일 수 있는 존재였다
(영화 <엑스칼리버>를 참조하시라). 영국군은 안개 속으로 기병의 돌진을 막을 뾰족한 나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미리 지급받은 화살을 자기 발 앞에 가지런히 꽂아둔 채 다가올 살육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글쎄?

리 옛 속담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속담이 만들어질 때는 선인들의 오랜 경험이 녹아 있는 말이므로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녔다 할 것이다. 그러나 말만으로 위대한 인물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역시 선인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큰 그릇은 늦게”라는 말을 만들었을 것이다. 영국사에서 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인물을 이야기하자면 역시 어린 시절 문제아의 대명사였던 헨리 5세와 윈스턴 처칠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생각했던 “헨리 5세”. 그는 현명했고, 유능했으며, 두려움을 몰랐고, 뛰어난 연설 솜씨로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명예를 존중했으며, 국민의 마음을 휘어잡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필요할 때엔 무자비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성인이 되었을 때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망나니였다. 그는 일찍부터 장난에 눈을 돌렸고, 노는 일에 정신이 팔려 온갖 잡기에 능해 왕실의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그가 나이를 먹은 뒤에는 시정잡배와 어울려 다니며 주색잡기에 몰두한 나머지 왕세자로서의 신분에 먹칠하기 일쑤였다. 그는 심지어 도둑들 무리에 끼어 부랑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영화에서는 팔스타프 Falstaff의 무리들).

노르만과 플랜타지네트(Norman & Plantagenet, 1066-1327) 왕조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에 대해 상위영주임을 주장하며 일어난 스코틀랜드 정복에 반발하여 윌리엄 월레스(영화 <브레이브 하트> 참조)가 반란에 나서고, 그의 처형(1305년) 뒤인 1306년에는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브루스가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에도 잉글랜드 왕들은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 대한 상위영주권의 인정을 요구했고, 프랑스는 스코틀랜드를 지원했다. 플랜타지네트 왕조의 잉글랜드는 사실상 영국 내부를 하나의 왕실 아래 통합하는데 성공했으나 성공은 아직 안정적이지 못했다. 당시 영국은 1066년부터 계속되던 플랜타지네트 왕조가 끝나고, 랭카스터와 요크가의 왕조(Lancaster & York, 1327 - 1485)의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영국의 왕위를 계승할 왕세자의 망나니 행동은 왕실의 염려를 빚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런 가운데 1413년 헨리 4세(재위 1399-1413)가 서거하고 영국 왕실은 걱정 속에 헨리 5세(재위 1413~1422)를 왕위 계승을 지켜보아야 했다. 물론, 그는 부왕을 보좌하는 왕세자로서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1400년에서 1405년 사이 여러 차례 웨일즈 원정을 수행하여 반란을 토벌했다.

그는 반란을 진압한 뒤 곧바로 웨일즈인들과 어느 정도 타협하는 자세를 취하는 등의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전체적으로는 매우 단호했다. 그는 변경 지역의 영주들에게 그들의 영지를 제대로 보살피라는 명령을 내렸다(웨일즈인들은 그런 명령과 상관없이 오랫동안 잉글랜드의 왕들에게 반항했고, 통치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웨일즈 지역에서 헨리 5세는 훗날 프랑스 원정시 채택했던 것과 비슷한 전략을 연습했다. 협공작전과 기마행군에 의한 파괴작전 그리고 육지와 해상을 통한 합동보급작전을 결합시킨 개념의 정복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헨리 5세는 부왕의 만년에 그를 대신하여 정무(政務)를 수행했다. 그의 치세 초기에는 롤라드파의 봉기(1414), 요크의 리처드 음모(1415) 등으로 위협을 받았으나 그는 이런 반항을 가차 없이 진압했다. 천하의 망나니인 줄로만 알았던 왕세자는 헨리 5세로 등극하면서부터는 이전의 모든 악행을 청산하고,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 돌변했다. 그는 너무나 유능한 왕이었고, 그 주변의 신하들은 왕의 깊은 속을 헤아릴 수 없어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비록 왕이 된 뒤로도 학문을 멸시하는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으나 세상을 유랑하며 익힌 지혜는 이론을 능가했고, 특별히 무술을 연마하지는 않았으나 훌륭한 군인이자, 기사였다. 세상의 가장 비천한 무리들과 어울린 덕으로 그는 귀족 신하와 백성들의 희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자기 주변에 어떤 인물들을 포진시켜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었다. 그는 매우 권위적인 국왕이었으나 신민들 앞에서는 현명하고 겸허한 자세를 보이려 했다.

영국군은 월등히 우세한 사거리를 가진 장궁을 효과적으로 운용·배치하여 강력한 화망을 펼친 채 대기하며 적군을 유인해낸 뒤 병목 효과를 빚어 혼란에 빠진 프랑스군을 궤멸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군은 무기나 수적인 우세만 믿고 단순한 돌격전술을 반복함으로써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말았다.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주장

리 5세가 영국의 국왕이 된 뒤 그가 처음부터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덕망 높은 왕이 되었을 것이라 믿을 만한 근거는 별로 없다. 한때, 망나니로 소문 높았던 왕세자가 부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일쯤이야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재벌 2세와 3세에 걸친 승계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이상 당시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속의 헨리 5세는 과거와 확실한 단절을 해 보인다.

실제의 역사 속에서도 헨리 5세는 살아남은 리처드파 사람들과 화해하고, 대외적인 동맹관계를 새롭게 맺음으로써 전쟁을 준비하였다. 반면 당시 프랑스의 왕은 뇌질환을 앓고 있었고, 귀족들은 서로 분란을 일으키며 싸우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헨리 5세가 에드워드 3세처럼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요구한 것은 약간 억지스럽기는 했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영국의 노르만왕조는 프랑스 땅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의 이사벨라 공주(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소피 마르소가 연기한)를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이사벨라 공주와 결혼한 아들 에드워드 2세는 20년간 재위했고,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에드워드 3세이다. 이 무렵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세에게는 대를 이을 자손(아들)이 끊기고 말았다. 프랑스에서 귀족들의 천거를 받아 샤를 4세를 계승한 것은 에드워드 3세의 조카뻘인 필립 6세였는데, 이때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전쟁이 벌어졌다. 에드워드 3세의 모후인 이사벨라는 샤를 4세의 누이였다. 이때 벌어진 전투에서도 영국군은 장궁을 활용해 프랑스군을 패퇴시켰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크레시(Crecy) 전투(1346년)였다.

헨리 5세는 자신이 에드워드 3세의 후계자임을 자처하고, 이전에 에드워드 3세가 꿈꾼 것보다 더 넓은 영토와 프랑스 왕위 계승권에 대한 에드워드의 주장을 되살리고자 했다. 사실 이런 그의 야심은 왕 자신은 전혀 손해볼 일이 아니었으며, 왕을 따라 전장으로 나아가야 하는 귀족, 이제 막 성장하고 있는 그의 신민들이 지니고 있던 기대와 딱 맞아 떨어졌다. 귀족들은 프랑스에 영토를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얻고자 했다. 결과적으로도 헨리 5세의 이런 빛나는 승리를 통해 몸값을 지불할 수 있는 대량의 포로를 획득했고, 북부 프랑스에서의 영지획득을 가능케 했다. 1448년까지도 버킹엄 공은 프랑스의 퍼쉬(Persh) 지방에서 일년에 530파운드 이상의 수입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열정에 들뜬 대영주와 기사들의 통솔 아래 대규모 군대가 편성되었고, 왕국의 신민들은 전비 마련을 위한 세금 부과에 찬성해주었다. 프랑스를 침공하는 헨리 5세의 전략은 이전 에드워드의 전략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는데, 프랑스의 귀족들과 동맹을 맺고 그들의 분열을 부추긴 뒤 자신의 요구를 들이대는 것이었다.

셰익스피어, 로렌스 올리비에, 케네스 브래너의 헨리 5세

<헨리 5세>는 1944년과 1989년 각각 로렌스 올리비에와 케네스 브래너에 의해 영화화되었고, 그 외에도 여러 차례 연극과 영화, 드라마로 다루어졌다. 셰익스피어는 헨리 5세를 이상적인 군주로 생각했다. 헨리 5세는 현명했으며, 용감했고, 연설을 잘했으며, 명예롭고, 국민의 숭배를 받았으며, 필요할 때엔 무자비할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었다. 튜더 왕조 시대의 인물이었던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영국 왕실에 특별한 찬미를 보냈고, 그는 『리처드 2세』를 비롯한 랭커스터 4부작(Lancaster-Tetralogie,『헨리 4세』 1부, 『헨리 4세』 2부를 포함한)들을 통해 이 시기를 재조명하고 있다. 이 일련의 시리즈들은 리처드 2세의 반대파였던 ‘헨리 볼링부로크(헨리 4세)’가 추방(1398년)되었다가 귀환하여 리처드 2세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에 시작되어 헨리 5세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프랑스의 왕녀 캐더린을 왕비로 맞이하는 것까지 그리고 있다. 로렌스 올리비에와 케네스 브래너는 모두 영국의 정통 셰익스피어극 배우 출신으로 영화의 기본 스토리를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가져왔다. 헨리 볼링부로크가 리처드 2세의 왕위를 찬탈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으나 전임 왕들이 빼앗은 프랑스 영토를 되돌려주고 휴전 조약(뢸링엔 휴전협정)을 맺으려 한데에도 있었다. 프랑스에 영토를 많이 가지고 있던 영국의 귀족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고, 원정에서 얻을 수 있었던 이득을 빼앗기는 것으로 여겼다. 결국 평화를 추구했던 왕은 쫓겨난다.

셰익스피어는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연작들 속에서 헨리 5세를 최고의 인물로 부각시킬 장치들을 삽입하는데, 『헨리 4세』 1부, 『헨리 4세』 2부에서 헨리 5세는 헨리 4세의 아들 ‘핼’ 왕자로 등장하는데 그때는 상당히 방탕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그가 후에 왕이 되었을 때의 자질을 더 한층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고, 실제의 헨리 5세에 대해서도 미화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영화 속에서 헨리 5세는 원정에 나서기 직전 프랑스에 매수되어 그를 배신하려던 귀족들을 처벌한 뒤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하플러를 포위 공격한다. 헨리 5세의 영국군에게 포위당한 하플러는 5주간 버티다가 결국 함락당하고 만다. 케네스 브래너의 영화 <헨리 5세>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역사적인 사실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헨리 5세의 군대는 하플러를 함락시키는데 5주의 시간이 걸렸고, 군대 중 일부를 이곳을 수비하게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그들은 식량이 바닥난 상태에서 17일 동안 260마일을 행군해야 했고, 앞서 말한 대로 병사들은 지치고, 이질 등으로 병까지 걸려 있는 상태였다.

이제 승부수는 던져졌고, 병사들은 마지막 일전을 준비한다. 셰익스피어도, 로렌스 올리비에도, 케네스 브래너도 바로 이 순간을 위해 <헨리 5세>를 준비했을 것이다. 영화는 전날 밤 피로에 지친 영국군 진영과 활기가 넘치고 교만에 가득한 프랑스군 진영을 교차해가며 비춘다. 다음날 아침 전투가 개시되기 전 프랑스군은 헨리 5세에게 전령 몽주를 보낸다. 전령은 싸우기도 전에 영국군 병사들의 지친 몰골을 보며 자만하여 말한다. 이쯤에서 항복하여 몸값이나 내고 풀려나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다. 헨리 5세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전투를 결심한다. 헨리 5세가 전령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몽주는 말한다. “더 이상 전령이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오.” 전투를 준비하는 병사들 틈에서 왕의 사촌인 기사 웨스트모어랜드가 말한다. “본국에 남아서 오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병사들 중에서 10,000명이라도 여기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왕은 마침 성 크리스핀 축일(10월 25일; 크리스핀은 3세기 경 로마의 전설적 순교자로서 마구(馬具)의 성자로 불림)에 벌어지는 이 날의 전투에 대해 병사들을 향해 감동적인 연설을 쏟아낸다. 셰익스피어극의 백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자,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왕을 위해 칼을 잡고 싶어 질 만큼 연설은 호소력이 넘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성 크리스핀 축일의 연설(St. Crispin's Day Speech)이다.

아쟁쿠르 전투가 끝난 뒤 찾아온 프랑스측 전령 몽주를 붙들고 영국왕 헨리 5세는 이 전투에서 누가 승리했는가를 묻는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knight | 작성시간 04.10.15 오늘 비로서 헨리5세 영화를 봤네여... 15년전에 찍은 영화라 액션이나 특수효과는 별로였지만여... 그래도 아쟁쿠르 전투를 영상으로 봤다는데 의미가 있는거 가태여...^^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