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수의 말 건네기
일곱. ❝물이 포도주로 변하다.❞
글. 이해수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
1805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가나의 기적에 관한 영성적 의미에 대해 논술하라.'는 논제가 종교학 시험으로 제시되었습니다. 모두들 주어진 종이 가득히 무언가를 쓰고 나가는데 한 청년은 단 한 줄의 글만을 적어두고 나갔습니다.“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더라.”시인 바이런의 한 줄짜리 논술문이었습니다. 단 한 줄일 뿐이지만 무언가 뭉클함을 남기는 글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뭉클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글귀를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펼쳐 보인 첫 이적은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 하는 사이에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과 믿음을 받아들였고 하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 하는 채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마리아의 요청대로 항아리 가득 물을 담습니다. 그리고 항아리 속의 물은 곧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그날 잔치에서 사람들이 마시던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였습니다. 아마 그것은 사람들이 전에 맛 본 적 없는 놀라운 맛을 지닌 것이었을 터입니다. 다들 취해서 맛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는데도 맛이 더 좋다고 느낄 만큼 좋은 포도주였다니 말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예수님이 직접 만드신 포도주였으니까요.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첫 이적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시었고 사람의 몸을 벗고 떠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건네며 이것은 나의 피라, 이 잔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공생애의 시작과 끝을 예수님은 포도주를 통해 양괄식으로 정리하셨습니다.
포도주는 변화를 의미하지요. 포도가 오크통 속에 갇혀 있는 동안 포도는 숙성과정을 거칩니다. 숙성의 기간에 포도는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며 포도주가 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 포도가 없는 포도주란 있을 수 없으니까요. 포도주 만드는 오크통 속에 물만을 넣어두고 아무리 오랜 기간을 기다린다고 해도 포도주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가 아니라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분에게는 포도주를 만드는 데 포도가 필요치 않았습니다. 바이런의 표현대로 ‘그 주인을 만나 얼굴을 붉힐’물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무척 위로가 되는 생각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여주는 하나님의 세계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포도주가 되기 위해 내가 미리 포도일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포도가 못 되었지만 있는 그대로, 우리 좋아하는 노랫말처럼 이 모습 이대로 그분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를 포도주로 만들어버리십니다. 그것도 아주 향이 좋은, 귀한 포도주로 말이지요. 알코올로서의 포도주 말고 보혈로서의 포도주를 생각한다면 사망에 굴복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생명이 되는 것은 ‘그 피를 마시고’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엄청난 변화를 겪는 일이 곧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변화를 현재의 삶 속에서 항상 누리며 살아가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언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지혜의 총체이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세계에서 우리들의 세계로 건너오는 동안 하나님의 깊고 넓고 크신 지경을 떠나 우리들의 제한된 인식의 세계 안에서 한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우리들이 각자 자신의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아버지의 영상에 따라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 역시 사람마다 같은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우리는 흔히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데에는 열심을 내지만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일에는 게으름을 피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또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라.”
우리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게 해 줄 교회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힘주어 가르치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드리며 건축헌금을 드리라, 교회에 나와 헌신하고 봉사하라는 것을 더 힘주어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만일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해 낼 수 있다면, 그래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잘 자라난 사람들로 가득하다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불미한 일들은 없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교회에서 이미 천국을 누릴 수 있을 터이고 천국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가정에 돌아가서도 온전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자기 가족을 사랑으로 돌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모두 사망에 굴복된 시간의 동굴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망을 이기신 그분의 능력으로 부활한 영으로 육신을 이겨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사망의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립보 3장 7-9』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된다는 말은 얼마나 멋진 말인지요.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나를 본받으라.”고 말한 사도 바울조차도 부활의 영을 지닌 생의 모든 순간에 그리스도와 꼭 같았으리라고는 말할 수 없을 터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의 말대로 그를 본받으려 하는 까닭은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래서 이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배우고 실천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그의 은혜에만 관심 있는 시간이 나를 좌우하도록 두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께 행한 시험에 속한 일들이 바로 그의 은혜에만 관심을 두는 우리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스스로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가셨습니다. 육신으로 오신 까닭이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그것을 이기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이 시험에서 이기기 위해 사십일이나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순간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책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매일 얼마나 많이 성경을 읽고 있는가? 말씀의 토대 없이 소원하는 기도만 하고 있지 않은가? 순간순간 뒤돌아보지 않고서는 매일 새로워질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나는 비록 포도가 아니지만 내 안에 이미 포도주가 될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본질적 생명이라는 것이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본질적 생명이 없다면 우리는 사망에서 돌이켜 생명이 되지 못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내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그런데 왜 세상이 향기로워지지 못 하는 걸까요? 예수님 친히 우리를 포도주로 만들기 원하시는데 왜 또한 그분은 너희 중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믿기만 하면, 이라는 말의 반대편에 열매가 없으면,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 쉽게 믿으려 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천국 문 앞에서 “내가 너를 모른다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