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마니쿠스 (Germanicus Caesar)
BC 15~AD 19 시리아 안티오크.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AD 14~37)의 조카이자 양자.
일찍 죽지 않았다면 황제가 되었을 만큼 대단히 인기있고 성공한 장군이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의 생애를 자세히 기록하면서 그를 악랄한 독재자 티베리우스와 맞선 공화주의 원칙의 옹호자로 묘사했다.
어머니 안토니아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카였고, 아버지는 티베리우스의 형제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였다. 티베리우스에게 친아들이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쿠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고려하여 AD 4년에 그를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들였다. 그즈음에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손녀 대(大)아그리피나와 결혼했고 21세에 켄소르(감찰관)가 되어 일리리쿰(AD 7~9), 라인(AD 11) 등지에서 티베리우스를 위해 일했다. 12년에는 콘술(집정관)이 되어 갈리아와 라인 강 지역 2개 군단을 이끌었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은(AD 14) 뒤 자신의 군대에서 일어난 폭동을 개인적인 인기 덕분에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뒤 황제위에 오르도록 요청받았으나 계속 티베리우스에게 충성했다. 라인 강을 건너 3회 잇달아 출정하면서(AD 14~16) 게르만족을 격퇴했으나, 섬멸하지는 못했고 이에 황제는 질투와 두려움을 느껴 결국 그를 로마로 불러들였다.
게르마니쿠스는 로마에서 5월 17일에 개선식을 하고, 이듬해에 두번째로 콘술이 되었는데 취임에 앞서 모든 동부 속주(屬州)의 최고 통수권을 맡았다. 이후 국외에서 일하는 동안 황제가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한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갈등을 겪었다. 피소는 그의 결정을 비판하고 때로는 뒤엎기도 했으나, 게르마니쿠스는 아르메니아 후계 문제를 해결하고 카파도키아와 콤마게네를 속주로 편입시켰으며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노스 3세와 성공적으로 협상을 맺었다.
원로급 로마인이 곡창지대인 이집트에 허락없이 들어가는 것을 전(前)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엄격히 금지했는데도 19년초 이집트를 방문하여 티베리우스에게 호된 질책을 받았다. 시리아에 돌아온 후 피소와의 갈등이 매우 심각해졌고 피소는 결국 시리아를 떠나 버렸다. 바로 그후 게르마니쿠스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피소가 자기 아내 플랑키나를 시켜 그를 독살했다고 했다. 피소는 원로원에 고발당했으나 곧 자살하여 독살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황제가 살인을 부추겼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피소와 게르마니쿠스 사이의 반목을 부채질한 것만은 틀림없다.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의 자식 9명 중 3명은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고 나머지 자식 중에는 네로 황제의 어머니인 소(小)아그리피나와 황제 가이우스 칼리굴라(37~41 재위)가 있으며 황제 클라우디우스(41~54 재위)는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다.
BC 15~AD 19 시리아 안티오크.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AD 14~37)의 조카이자 양자.
일찍 죽지 않았다면 황제가 되었을 만큼 대단히 인기있고 성공한 장군이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의 생애를 자세히 기록하면서 그를 악랄한 독재자 티베리우스와 맞선 공화주의 원칙의 옹호자로 묘사했다.
어머니 안토니아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카였고, 아버지는 티베리우스의 형제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였다. 티베리우스에게 친아들이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쿠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고려하여 AD 4년에 그를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들였다. 그즈음에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손녀 대(大)아그리피나와 결혼했고 21세에 켄소르(감찰관)가 되어 일리리쿰(AD 7~9), 라인(AD 11) 등지에서 티베리우스를 위해 일했다. 12년에는 콘술(집정관)이 되어 갈리아와 라인 강 지역 2개 군단을 이끌었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은(AD 14) 뒤 자신의 군대에서 일어난 폭동을 개인적인 인기 덕분에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뒤 황제위에 오르도록 요청받았으나 계속 티베리우스에게 충성했다. 라인 강을 건너 3회 잇달아 출정하면서(AD 14~16) 게르만족을 격퇴했으나, 섬멸하지는 못했고 이에 황제는 질투와 두려움을 느껴 결국 그를 로마로 불러들였다.
게르마니쿠스는 로마에서 5월 17일에 개선식을 하고, 이듬해에 두번째로 콘술이 되었는데 취임에 앞서 모든 동부 속주(屬州)의 최고 통수권을 맡았다. 이후 국외에서 일하는 동안 황제가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한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갈등을 겪었다. 피소는 그의 결정을 비판하고 때로는 뒤엎기도 했으나, 게르마니쿠스는 아르메니아 후계 문제를 해결하고 카파도키아와 콤마게네를 속주로 편입시켰으며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노스 3세와 성공적으로 협상을 맺었다.
원로급 로마인이 곡창지대인 이집트에 허락없이 들어가는 것을 전(前)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엄격히 금지했는데도 19년초 이집트를 방문하여 티베리우스에게 호된 질책을 받았다. 시리아에 돌아온 후 피소와의 갈등이 매우 심각해졌고 피소는 결국 시리아를 떠나 버렸다. 바로 그후 게르마니쿠스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피소가 자기 아내 플랑키나를 시켜 그를 독살했다고 했다. 피소는 원로원에 고발당했으나 곧 자살하여 독살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황제가 살인을 부추겼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피소와 게르마니쿠스 사이의 반목을 부채질한 것만은 틀림없다.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의 자식 9명 중 3명은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고 나머지 자식 중에는 네로 황제의 어머니인 소(小)아그리피나와 황제 가이우스 칼리굴라(37~41 재위)가 있으며 황제 클라우디우스(41~54 재위)는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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