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로마 사회의 구조

작성자ςυllα|작성시간05.11.07|조회수1,041 목록 댓글 1
 

로마 사회의 구조  


1. 신분 구조


로마 사회에서는 신분에 따른 차별이  매우 심했다. 신분은 주로 세가지 주된 요인 즉 (1)재산(wealth)이 있느냐 없느냐 (2)자유(freedom)가 있느냐 없느냐 (3)로마시민권(Roman citizenship)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고대 로마 사회의 신분 차별은 속물적인 차별, 즉 어느 집단 안에서 암묵적으로 외부인을 배척하는 태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고대 로마의 사회적 차별은 법에 의해 유지되었고, 한 집단에 부여된 정치적, 법적 특권은 다른 집단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B.C 88년까지 이탈리아 반도내에, 그리고 도시 로마 외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즉 Municipium에 사는)은 수 세기에 걸쳐 로마 시민의 지배 하에 살았고, 로마 군대와 함께 싸웠으나 로마 시민권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로마 민회에서 투표할 수 없었고 그들을 다스리는 로마 정부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 로마인과는 결혼할 수 없었고, 사형의 집행에 복종해야 했다1). 기원전 90년에 이탈리아인들은 이러한 불평등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고2) 기원전 89년에 로마 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이탈리아 반도 내의 모든 자유인에게 완전한 로마시민권이 부여되었다. 300년후 로마 시민권은 제국 내의 모든 자유인에게 확대되었다.3)

A.D.212년에 로마 시민권이 확대된 이후 로마 제국내에서 로마시민권에 따른 차별은 사라졌다. 하지만 재산과 자유의 유무에 따른 차별은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로마 사회에는 자유의 유무와 관련하여 세 부류, 즉 (1)노예, (2)해방노예(전에 노예였던 사람들), (3)자유인이 존재했다. 노예와 해방 노예의 지위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로마시민이었던 자유인 중에서 차별은 주로 재산에 의한 것이었다. 왕정 시대에4) 비교적 부유한 가문의 사람들이 왕의 자문역5)을 맡았는데, 그들이 국가의 어른들(elders), ‘아버지들’로서 행동했으므로 귀족(patricians)6)으로, 그리고 로마의 나머지 가문들은 평민(plebeian)으로 불렸다.7) 따라서 특정한 가문들은 귀족이었고 평민 가문과는 이름으로 구별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Claudius와  Julius는 귀족 가문의 이름이고, Clodius와 Licinius는 평민 가문의 이름이었다. 따라서 귀족의 신분는 세습되었고, 평민이 귀족이 되는 것은 양자 결연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가능했다.8) 이 귀족 가문은 로마 초기 귀족이 되었고,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들의 사회적, 정치적 운동을 엄격히 제한함으로써 국가 안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고자 했다.

B.C 509년에 로마에서는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세워졌으나, 귀족들이 로마를 다스리는 것은 여전했다. 평민들은 공직을 맡을 수 없었고, 원로원 의원이나 신관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평민들과 귀족간의 혼인이 금지되어 있었다. B.C 5세기에 평민들은 더 많은 정치적 권력과 법적 권리를 요구하며 동요하기 시작했고, B.C 287년에 평민들은 최소한 법적으로는 귀족과 평등하게 되었다. 정치 활동에는 돈이 많이 들고, 대부분의 관직은 직무 수행에 따른 급료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평민들이 정치 활동을 할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정치에 참여한 평민 가문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중 소수의 평민가문들이 정치적 명성을 얻었고, 공화정 중기에 오면 새로운 귀족층,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시 로마의 부와 정치를 통제하던 평민가문과 귀족가문들로 구성된 확대된 귀족층이 발전했다. 9) 이들은 흔히 노빌레스(nobles)라 불리웠다. 이처럼 귀족층의 구성이 바뀌었지만 부유하면서 권력을 가진 소수와 가난한 다수 사이의 엄격한 사회적 계층화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공화정 초기의 대부분의 귀족 가문들의 수입은 주로 토지 소유와 농지에서의 소출물의 판매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가문들이 직접 토지를 경작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경작은 주로 노예, 계약제 예농, 고용된 자유인이나 소작인에 의해 행해졌다. 토지 소유자는 도시 로마에 살면서 가끔씩 자기 소유지에 들렀을 뿐이다.10) 전통적으로 로마의 가장 부유한 가문들이 급료가 없는 공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법적 자문인, 법무관, 집정관, 외교관, 군대 장교직, 신관과 원로원 의원직을 맡았다. 이러한 가문의 젊은이들은 모두 로마의 대내외 업무들, 즉 전체 로마의 업무를 다루는 로마 원로원의원이 되기를 원했다. 한번 원로원의원이 되면, 임기는 종신이었고, 그와 그의 가문은 원로원의원 계층 혹은 신분에 속하였다.11) 단지 제한된 사람들만이 원로원의원이 될 수 있는 시간과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여러 세대에 걸쳐 소수의 가문에 의해 다스려졌다.

공화정 초기에 로마사회는 다수(가난한 평민들)과 소수(로마사회의 모든 면을 지배하는 부유한 귀족계층과 원로원 가문들)로 나뉘었다. 그러나 B.C 3-2 세기의 군사적 팽창과 해외전쟁은 무역, 해운업, 상업, 금융업을 위한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형태의 상류 신분이 형성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일부 부유한 사람들은 공직 보다는 상업에 종사하고자 했다. 그들 중에는 원로원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도 있었으나 원로원 신분의 정치경력을 원하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기병으로 복무했기 때문에12) 이런 사람들은 에퀴테스(equites, 기사신분)라 불렸다.13)(말을 구입하고 사육하는데는 비용이 많이 들었으므로  부유한 젊은 사람들만 기사가 될 수 있었다.) 군대직무의 임기를 끝내고 공직 활동을 하는 에퀴테스는 원로원의원(senator)이라 불렸다. 그러나 군직을 그만둔 후에도 원로원 의원직에 관심이 없는 에퀴테스는 그들이 더이상 기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에퀴테스라 불렸다. 이렇게 기사라는 말은 로마원로원 의원이 아닌 부유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14)

그러나, B.C. 2 세기 경에는 부유한 정치적 가문과 부유한 비정치적 가문 사이에 더욱 명확한 구분이 생긴다. 해외 팽창으로 인해 원로원이 위탁하는 도로 건설, 건물 건축, 광산 경영, 군수품 납품, 세금 징수와 같은 “국가의 청부”분야의 수가 증가한다. 개별 상인, 혹은 상인 집단들이 이러한 분야에 대한 하청을 맡곤했고, 원로원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입찰자를 선발했다. 이러한 공적 하청을 맡은 사람은 publicans(조세징수청부업자)라 불렸다.15) 정부가 사적인 단체에 조세징수를 청부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고대의 관행이었다. 이익 충돌을 확실히 방지하기 위해서 원로원 의원들은 공적인 사업의 청부를 맡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16) 그리고 원로원 의원들은 그들의 시간과 정력을 정치와 공공분야에 몰두(공직 활동에 대한 보수는 없었다.)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무역, 상업, 산업에 종사할 수는 없었다.17) 물론 원로원 의원은 농업 이외에 상업, 무역 부문 업종에서 이러한 법적 사회적 제한에 의해 약간 방해를 받았을 뿐, 완전히 금지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리인을 고용하여 그들의 상사(商社)를 관리했고, 계약과 금융거래를 말없이 후원하였다.18)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원로원의원들이  공적으로는 엄숙하게 상업이란 더럽고 고귀하지 못한 것이라고 매도했으나, 사적으로는 그들의 가장 최근의 투자가 성공한 데 대하여 그들의 신들에게 감사드렸다. 게다가 또다른 사람들, 흔히 원로원의원의 형제들이나 사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관직에 들어가려하기 보다는 공개적으로 돈버는 일에 나선 사람들이었다. 이리하여 기사신분이라는 말은 상업이나 거래에 종사하는 부유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또한, 정치적 지위는 구 원로원의원계층에 의해 독점되었기 때문에 기사신분이 로마의 정치직에 종사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되었다.19)

원로원신분(senatorial order)과 기사신분(equestrians) 사이의 공식적 구분은 기원전 122년 경 배심원 제도에서 원로원의원들 대신에  기사들로 채워졌을 때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 조처는 원로원 의원과 기사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는 수단이 벌써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B.C 100년 경에는 어떤 이가 400,000 세스테르티우스의 재산을 갖추면 공식적으로 기사 명부에 등록될 수 있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것은 원로원 신분이 되는 재산 자격 요건인 800,000 세스테르티우스 보다는 상당히 적은 것이지만 여전히 보통의 가정에서 가질 수 있었던 돈보다는 충분히 많은 것이었다.20)

기사 신분의 구성원들은 로마 제국의 팽창과 유지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고, 이 역할은 제정시대에 증가하였다.21)  대를 이어 제위에 오른 황제들은 원로원 신분의 공직 참여를 막음으로써 원로원 신분의 권력을 축소시키려 했기 때문에 재정분야, 행정분야, 군대의 요직에 기사들을 임명했다.

원로원과 기사신분은 로마사회에서 상류층을 형성했고 그들의 훨씬 밑에 하류층이 있었다. 부자와 빈자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 커서 사회적 이동의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들이 태어난 계층에 남아 있었고, 더 나아가 엄격히 조직된 사회의 불평등을 감수하는 듯했다. ‘중간계층(middle class)’라는 용어는 이 교재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개념은 로마의 중간계층과 현대 미국의 중간계층을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잘못을 낳기 때문이다. 현대 미국의 중간계층은 높은 생활수준을 가지고, 인구의 많은 부분을 나타내며, 직업의 많은 다양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대로마에서 인구의 다수는 생활 수준이 낮았고, 오늘날 중간계층이 차지하는 직업들을 고대로마에서는 하류계층이 차지했다. 상류계층 사이에 부의 정도가 다양했던 것처럼, 역시 하류계층 사이에서도 빈곤의 정도도 다양했다. 어떤 가정은 비참하게 살았고 어떤 가정은 검소하지만 편안하게 살았다. 그러나 어떤 가족도 현대 미국의 중간계층이 누리는 풍요를 향유하지는 못했다.22)


1) 귀족계층

로마 사회의 부유한 성원들은 그들이 모든 면-富뿐 만이 아닌 지능, 재능, 그리고 도덕적 행위-에서 월등하다고 확신했다. 로마가 공화정치23)라고 불렸을 지라도 그것은 사실상 원로원 가문들로 구성된 귀족 신분에 의해 통치되었다. 키케로와 그의 동료 원로원의원들은, 물론 그들이 귀족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귀족정치가 최상의 정부형태라고 믿었다.24)

여기에 번역된 문장에서 키케로(B.C 1세기에 저술 활동을 하였던)는 군주정이나 민주정에 대한 귀족정의 우위를 논한다. 그가 로마사회의 평민들을 무지하고 경박한 것으로 간주한 것에 주목하라.


* 키케로, ꡔ국가론ꡕ, 1,34,52-53.

탁월함(excellence)과 덕(virtues)25)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보다 더 나은 상황이 있겠는가?26) 다른 이를 통치하는 사람 자신이 어떤 천박한 감정의 노예가 아니라면, 그리고 그의 시민들에게 지시하고 가르친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긴다면, 그리고 그 자신이 자기가 가르치고 또 그의 동료 시민에게 훈계하는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긴다면, 그때 그는 자기 자신은 복종하지 않는 법률을 사람들에게 강제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동료 시민들에게 법률을 준수하는 그 자신의 삶을 모범을 보일 것이다. 만일 한 개인이 이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수행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한 사람 이상의 통치자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전체로서의 모든 시민들이 가장 훌륭한 행동 방식을 알고 그것에 동의할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소수의 통치자 집단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책을 고안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권력은 한 사람의 왕으로부터 하나의 집단으로 이전되었고, 대중의 무지와 성급함 때문에 권력은 다수에서 소수로 이전되었다.27) 이와 같이 일인 통치자의 약점과 대중의 경박함 사이에서 귀족들은 중간적 지위에 있고, 그것보다 더욱 적합한 지위는 없는 것이다.28) 그런 사람들이 국가를 돌본다면 시민들은 필연적으로 매우 행복하고 기쁠텐데, 왜냐하면 이제 그들은 걱정하고 근심할 필요가 없게 되며, 그들의 안전을 이 사람들―이들은 인민의 최상의 이해 관계가 통치자들에 의해서 무시당하고 있다고 인민이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행동하지 않으며, 단지 인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을 최고의 의무감으로 간주하는―에게 맡기기 때문이다.

실로 자유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권리인 법 앞에서의 평등은 사실상 유지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유롭고 제어되지 않지만, 그들은, 예를 들면, 많은 사람에게 관직들을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과 관직의 많은 계서제를 창조했기 때문이다.29)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평등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상 매우 불평등하다. 다른 한편 최상류층과 최하류층(이러한 양 집단은 어느 국가에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에게 동등한 명예와 지위가 주어진다면 소위 이러한 평등 역시 매우 부적절하다. 그러나 후자의 유형의 불평등은 가장 ‘선한’ 시민들이 통치하는 그런 국가에서는 나타날 수 없다.


(1) 正義와 法律에 대한 定義 (Definition of Justice and Law)


앞의 글에서 키케로는 “법 앞의 평등이라는 것은 자유인이 소중히 여기는 권리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로마법 이론은 이러한 제안을 정의와 법에 대한 규정에 있어 하나의 기본적인 전제로 받아들였다.


* 키케로, ꡔ국가론ꡕ, 3,22,33.

진정한 법은, 사실상 아무런 잘못을 전혀 범하지 않는 이성으로, 그것은 자연에 부합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며 변하지 않고 영원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무를 완수할 것을 요구하며 그들이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게 끔 방지하고 막아준다. --- 로마의 법이 따로 있고, 아테네의 법이 따로 있을 수 없으며, 현재의 법이 있고 미래의 다른 법이 있을 수 없다. 그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하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법에 의해 규제받을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문장은 유스티니아누스 로마법대전 중에서 ‘學說類集(Digesta, Digest of Laws)’에서 발췌한 것이다.30)

* Digesta, 1,1,10. (Ulpianus)

정의는 끊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법적인 권리들을 주도록 끊임없이 결정하는 것이다. 법은 다음을 권고한다. 정직하게 살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각자에게 그의 권리를 인식시켜 주도록 하라.


ㄱ 형벌 부과의 차별(Discriminination in assigning penalties)

로마의  법률가들은 비록 모든 시대에,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정의(justice)를 명확하게 정의(defination)하려고 노력했지만, 실제로 로마의 법률체계―물론  상층신분에 의해  지배되는―는 로마사회에서  신분간의 차별을  강화했다.31)  예를 들면32) 로마 시민과 비시민, 노예와 자유인, 그리고 심지어 자유인 안에서 부자와  빈민 사이에 형벌이 달랐다. 로마 제국에서 로마 시민권이  모든 자유인에게로 확장된 시기인 3세기 초에 범죄에 대한 재판을 위해  시민단은 두 계층, 즉 원로원 신분과 기사 신분, 지방 관리, 군장교가 포함되는 honestiores와 나머지 대부분의 자유 시민을 뜻하는 humilliores33)로 양분되었다. humilliores에 대한 처벌은 honestiores에 대한 처벌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상층 신분은, 부자들이 국가에 정무관들, 법률가들, 군장교들, 지방관들 등 국가를 위한 인적 자원을 공급하고 또한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면서 자신들의 돈을 공적인 청부 계약에 투자하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서 더욱 유용한 계층이며, 그래서 부자들은 형벌의 척도를 달리해서 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차별을 정당화했다. 호네스티오레스의 이러한 우월성에 대한 태도는 로마의 정의에 대한 이론과 실정법 사이의 명백한 불일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불일치는  아래  번역문에서 알 수 있다.


* Fontes Iuris Romani Anteiustiniani, 2, p.405 (paulus, opinions, 5,19-19a)


약탈이나 훔치기 위해서 밤에 신전에 침입하는 자들은 맹수에게 던져 버린다(thrown to wild animals).34) 그러나 그들이 낮에 신전에서 사소한 물건 몇 개를 훔쳤을 때, 그들이 honestiores일 경우는 추방되고35), 그들이 humilliores인 경우는 광산 복역이 선고된다.36)

성소를 범햇다고 고소된 사람의 경우 그들이 실제로 시체를 움직였거나 뼈를 이동했다면,그들이 humilliores일 경우 철저한 고문을 당했다.37) 그들이 honestoires인 경우 섬으로 추방됐다.다른 범법자의 경우, honestiores는 추방됐고38) humilliores는 광산복무의 판결을 받았다.


* Fontes Iuris Romani Anteiustiniani, 2. p.407 (Paulus,Opinions 5.22.1-2)

폭동과 소요를 음모하거나 군중을 선동한 사람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맹수에게 던져지거나, 섬으로 추방당했다. 국경 표지판을 파거나 쟁기로 갈아엎은 사람, 국경의 나무를 벤 사람은 (1)해방노예인 경우 광산으로 보내졌고 (2) humilliores인 경우 공공 건설 사업에 종사하도록 선고됐고 (3) honestoires인 경우 자신의 재산의 ⅓을 벌금으로 내고 섬으로 추방되거나 국외 추방됐다.


2. 보호 피보호제도(PATRONAGE)


가족은 로마 사회의 기본 단위였고, 가족의 확실한 우두머리는 아버지(pater)였다. 가족의 나머지 사람들 즉 아내와 자식들의 행복(welfare)을 보호하는 것이 아버지의 임무였으며, 반면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의 의무는 아버지에게 전적인 복종과 경의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족관계를 표현하는 데 있어 가장 자주 사용되는 라틴어가 pietas이다.39) 국가는 로마 사회의 가장 큰 단위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전통적으로 국가(공동체)40)의 구성원을 확대한 가족 내의 구성원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런 유추를 강조하듯, 국가의 우두머리들인 원로원 귀족들은 아버지들(patres)로 불리웠고 그들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 즉 다수의 하층민 대중의 복지에 그들의 에너지, 돈, 시간을  바치는 것과 대가없이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로 간주되었으나 그들은 그 댓가로 감사와 복종, 존경을 요구했다. 제정시대의 국가의 지배자는 황제였으며, 그는 국부(Pater patriage)라고 불리워졌다. 다시 한번 pietas는 로마 국가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이상적 관계를 가장 잘 묘사한 단어이다. 물론 실제에 있어서 그 관계는 이상적인 적은 거의 없었다. 원로원의 아버지들(patres)은 자신들의 복지를 평민의 복지보다 우선시했고, 평민을 지속적인 보호를 필요로 하는 성가신 어린애로써, 순진하고 교육받지 않고 미숙하고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평민에 대한 이러한 오만하고 깔보는 태도는 앞에서 언급된 키케로의 귀족계층에 대한 글에서 아주 명백하게 나타난다.

가부장적 관계의 또 다른 유형이 로마사회에 존재했다. 한 개인은 자신보다 좀더 교육받고 권력있는 자에게 충고와 보호를 요청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그는 피호민이 됐고 그의 보호자를 위하여 다양한 봉사를 제공했다. 피호민은 cliens(피보호자)로, 그의 보호자는 patronus(보호자)로 불렸다. 이렇듯 상층민과 하층민들은 소수에 대한 다수편에서의 존경과 순종이 강조되었던 관계 속에서 서로 서로가 속박되었다. 피호 관계는 고대 로마사회에 아주 깊게 뿌리를 밖았고 편만했던 관행 중의 하나였다. -- 그것은 대부(padrone, godfather)가 그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보호와 도움을 제공하고, 대신에 충성스러운 지지자인 부하들을 얻는 현대 이탈리아 사회로 그 전통이 이어져왔다.


1) 귀족과 평민  (Patrician and plebeian)


왕정 시대에 보호자는 귀족 가문의 일원이었다.41) 아래 글은 귀족 보호자와 평민 피호민 양자의 다양한 의무들을 묘사하고 있다. 로마사가들에 의하면 피호관계를 처음 제정한 것은 로마의 전설적인 시조이며 첫 왕인 로물루스이다. 그러나 사실상 로마의 피호관계의 엄밀한 기원을 확인할 수는 없다.


* Fontes Iuris Romani Anteiustiniani,1.p.4 (Dionysius of Halicarnassus, 2,9.-10.)

로물루스는 사회에서 좀더 힘이 있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구별한 후에 법률을 제정하고, 두 집단 각각이 해야할 일을 정했다. 귀족은 신관, 정무관, 변호사, 법관으로서 종사했고, 평민은 땅을 갈고 가축을 키우거나, 숙련공, 점원, 노동자처럼 임금을 얻기 위해 일해야 했다. 로물루스는 평민을 귀족의 보호에 위임했지만 각각의 평민에게 자기가 바라는 자를 보호자로서 선택하도록 허용했다. 이 체제는 patronage로 불린다.

그리고나서 로물루스는 피호 제도에 대한 다음의 규칙을 제정했다. 귀족의 임무는 그들의 피보호자에게 법률을 설명하고, 그들이 잘못되거나 해를 당하면 그들을 위해 소송을 제기하고, 그들이 고소당하면 피호민을 위해서 변호를 하는 것이었다. ---

귀족과 피호민이 서로에 맞서서 고소하고 법정에서 서로 반대 증언하거나 혹은 서로에 반대 의사를 표하는 것은 불법이고 신성하지 않은 것이었다. 누군가 어떠한 그런 비행으로 유죄 선고를 받는다면, 그는 반역법의 위반이었고,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2) 로마 공화정시대의 보호자와 피호민(Patrons and Clients in Republican Rome)


공화정 중기에는 단지 귀족들만이 보호자였던 것은 아니다. 어떤 평민 가문들이 권력과 부를 얻으면 그들도 보호자가 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원로원의원 신분이었고 그들 자신의 정치적 출세에 생애를 바쳤다. 그들은 그들의 피호민들에게 무료로  법률상,사업상의 도움을 준 대신, 그 답례로 그들의 피호민들이 그들의 정치 운동을 위해 일하고 그들에게 찬성 투표하며42)  충실한 피호민으로서 그들과 함께 공중 앞에 나타나 줄 것을43) 기대했다. 많은 피호민들로 둘러싸인 사람은 단지 몇 명만을 동반하는 사람보다 더 성공한 것으로 여겨졌다. 다음의 인용문에서 제정 초기의 저술가인 Tacitus는 공화정기 로마의 한 장면을 묘사한다.



* 타키투스, 『연설론』(Tacitus, A Dialogue on Orators), 39,4.


오늘날의 연설가는 찬성의 박수와 환호성, 즉 말하자면 극적인 무대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 옛날의 연설가들은, 다수의 명망있는 사람들이 로마 광장(Forum)을 가득 메웠을 때, 그리고 로마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들로부터 파견된 44) 그들의 피호민들이 자신들을 지지하러 왔을 때, 그리고 로마 사람들이 많은 소송 사건들의 평결에 개인적인 관심을 가졌다고 느꼈을 때마다 수준높은 청중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3) 제정시대의 보호자와 피호민(Patrons and Clients in Imperial Rome)

피호제도(patronage system)는 원래 처음에는 자유 시민들간의 관계로서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 사람들은 전 주인들의 피호민이 되었고, 이전 주인들은 이전 노예들의 보호자가 되었다. 제정 초기에 많은 피호민들은 본토 로마인이 아니었고 보호자-피호민 관계도 본토 로마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보지 않았다. 다수가 이전의 주인들에 대하여 노예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특히 노예가 되기 전에 동방ꠏꠏ그리스와 소아시아 ꠏꠏ에서 태어나고 자란 해방 노예들은 종종 피호민의 역할을 아첨꾼의 역할로 보았다. 더구나 제정시대에는 정치 운동의 기회가 아주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전처럼 보호자들의 정치 운동을 지지함으로써 자기들의 의무를 다했던 피호민들은 이제 그 관계를 유지할 다른 방법들을 찾았다. 피호민(client)라는 말은 때때로 아첨꾼(flatterer)이나 식객(parasite)과 같은 것을 의미했다. 피호민들은 보호자에게 문안하기 위해서 아침에 그의 집으로 떼지어 왔다.45)  그들은 아첨의 말을 하고 알랑거리면서, 법률적인 도움보다는 선물, 수당, 식사 초대, 혹은 상속을 기대하며 하루 종일 보호자 근처에 죽치고 있었다. 다음에 인용문에서, 서기 1세기에 글을 썼던 Seneca는피호제도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한탄한다.


* 소 세네카(Seneca the Younger), Letters 19.4


피호민들이라고요? 그들 중에서 아마도 단 한 명도 당신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그가 당신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을 섬깁니다. 옛날에는 피호민들이 정치적으로 힘을 쓰는 친구를 찾았으나, 이제는 전리품을 찾습니다. 한 외로운 노인이 그의 유언장을 고치면, 그의 아침 방문객은 다른 사람의 집 문간으로 갑니다.


(1) 돈을 요구하기(Seeking a Handout)


제정 초기의 시인 마르티알리스(Martial)의 다음의 인용문에는 한 탐욕스러운 피호민과 한 거만한 보호자가 잘 묘사되어 있다.


* 마르티알리스(Martial), Epigrams 6.88


Caecilianus, 어제 제가 당신께 아침 인사하러 왔을 때 저는 당신께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잊고 우연히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했습니다. 이러한 ‘자유’ 때문에 저는 얼마나 손해를 보았는지요? 당신은 저의 수당에서 100 콰드란테스(quadrantes)를 깎았습니다.46)


(2) 보호자들과 보호자들 Patrons and Patrons

salutatio, 즉 “아침 문안 인사”는 보호자의 우월과 피호민의 복종과 아첨을 공공연하고 규칙적으로 인정하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상류 시민들 중에서 다소 등급이 낮았던 사람도 소수나마 자신의 추종자들을 거느렸지만, 다른 한편 그는 상류 시민들 중에서 좀더 상층에 있었던  사람의 피호민이 되었다. 즉 그는 자신의 피호민들에게는 보호자였지만 그의 보호자에게는 피호민이었고, 후자의 관계에서 그는 아침 문안 인사에 다녀와야 했다. 그러면 자신의 피호민들은 그에게 문안 인사를 왔다가 그를 집에서 못만나는 경우도 생기곤 했다.


(3)  Martial, Epigrams 5.22


파울루스여 !. 만약 제가 오늘 아침에 ‘당신의 집에서’ 만나고 싶지 않았다면 그리고 당신을 만날만한 가치가 없었다면, 저는 제가 사는 곳보다도 에스퀼리누스 언덕(Esquiline)에 있는 당신의 집으로부터 훨씬 더 멀리서 살았을 것입니다.47) 그러나 실제로는 퀴리날리스(Quirinal)의 Flora 신전과 Jupiter 신전 근처에 삽니다.48) 저는 Subura로부터 언덕 위로 통하는 가파른 오솔길과 미끄러운 계단이 있는 더러운 포장길을 올라가야만 합니다. 저는 노새  떼의 긴 행렬과 많은 밧줄들 끝에 매여 끌려가는 대리석 덩어리들을 겨우 뚫고 나갈 수가 있습니다.49) 그런데 이러한 무수한 노고 끝에는 훨씬 더 황당한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Paulus ! 당신의 집 문지기가 완전히 녹초가 된 저에게 이르기를 당신께서 “집에” 안 계시답니다. 이것이 제가 헛된 노력을 하고 작은 toga를 흠뻑 적신 결과입니다. 저는 아침에 Paulus를 만나는 것이 정말 그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의무를 다하는 피호민에게는 언제나 매정한 보호자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당신께서 침대에50)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면 당신은 “저의 주인님”일 수 없습니다.


(4) 거친 보호자들 Rude Patrons

* Seneca the Younger, An Essay about the Brevity of Life, 14,4.


피호민들이 방문했을 때 잠자리에서 나오지 않거나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또는 그들을 무례하게 대함함으로써 피호민들을 쫓아 버리는 보호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급한 일을 핑계로 불쌍한 피호민들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놔 둔 채 급히 나가 버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마치 피호민을 피하는 것이 그를 돌려 보내는 것보다 더 무례하지 않다는 듯이 피호민들로 가득찬 atrium51)을 피해서 남이 모르는 뒷문을 통해 빠져 나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전날 밤의 음주로 인하여 여전히 숙취 상태이고 반쯤 잠든 채 그가 깨는 것을 시중들기 위해 자신의 잠을 중단한 사람들에게 거만하게 하품을 해 대고, 반쯤 열린 입술을 통해 인삿말을 중얼거리며, 그 피호민의 이름이 천 번씩 일깨워질 필요가 있을 것인가?


(5) No Free Lunches (or Dinners)

시인 유베날리스(Juvenal)은 A.D.1세기 말에 살았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의 피호민-보호자 관계는 종종 지루한 사회적 잡일, 혹은 더 심하게는 자비심의 타락한 형태였다.

2-2-7-1  Juvenal, Satires, 5,12-22, 24, 25, 67-71.

우선 다음을 기억하라. 당신이 만찬에 초대 받았을 때, 당신은 당신이 그 전에 한 모든 봉사에 대해 전부 보답받고 있는 것이다. 음식은 높은 사람에게 피호민으로서 봉사한 데 대한 당신의 보수이다. 당신의 주인, 즉 보호자는 이렇게 이따금 있는 만찬 초대를 “갚은 빚”항목 하에 기록한다. 그리고 이리하여 두 달쯤마다 그가 가장 낮은 소파52)의 빈 자리를 채우는 데에 평소에 무시했던 피호민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와서 우리와 함께 하여라.” 당신의 가장 큰 소망은 이루어졌다! 당신이 그 이상 무엇을 청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피호민 무리의 다른 모든 이들이 새벽이 밝기 전에 이미 한바탕 했는지에 관해 걱정하면서 당신의 잠을 줄이고 신발끈도 안 묶은 채 달려나온 데 대한 보상이다....

아, 그리고 당신이 받은 식사는 무엇인가! 포도주는 너무 고약해서 심지어 새 모직물조도 그것을 빨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빵은 너무 딱딱해서 당신은 거의 그것을 조각낼 수 없고, 딱딱해진 반죽으로 만든 곰팡이가 핀 빵껍질은 이를 깨지 않고는 베어 물 수 없다. 물론 그  주인에게는 가장 좋은 밀가루로 만든 부드럽고 흰 빵이 제공된다.

 

출처: 목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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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Lucius Cornelius sull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4.09.05 아 정말 좋은 글인듯 하네요..특히 이부분 "상류계층 사이에 부의 정도가 다양했던 것처럼, 역시 하류계층 사이에서도 빈곤의 정도도 다양했다." 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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