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리뷰]썬더와 카이사르 : 13. 프린켑스 폼페이우스

작성자ThundeR[GP]|작성시간08.07.30|조회수240 목록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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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폼페이우스라면서요? ^^

 

 

기원전 60년의 차기 콘술 선거는 뇌물살포가 대단했습니다. 카이사르는 물론이요, 청렴의 상징(?)인 카토도 돈을

뿌렸습니다. 이렇게 당선된 카이사르와 그의 동맹자들은 정치폭력을 일상화시키면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어냈

습니다. 이 '머리 셋 달린 괴물'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머리는 역시 폼페이우스였다는 것이 썬더의 생각입니다.

카이사르는 행동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댓가로 갈리아에 대한 전권 - 그것도 5년간이나 - 을 얻어냈

습니다. 역사가 알려주듯이 카이사르는 죄없는 갈리아를 초토화시키면서 보스가 되기 위한, 프린켑스가 되기위한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지요. 크랏수스가 계획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후원하에 있는 일부 부유한 기사계층을

옵티마테스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다였을까? 그것은 두고 볼 일입니다.

 

폼페이우스의 야망은 공화정 로마의 제1인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최고 권위를 원했습니다. 시골

기사 가문 출신의 폼페이우스에게 이것은 필생의 목표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콘술이었지만 귀족들로부터

도 대중들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했었지요.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이제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자

그의 붕당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고귀한 혈통의 소유자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 원로원의 그늘진 곳에

움추리고 있었던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문,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 그리고

최근 그 세가 약해졌던 메텔루스가의 인물들이 기꺼이 폼페이우스에게 그들의 전통을 빌려주겠다고 나섰습니다.
(역시 몰락귀족이었던) 카이사르를 보라, 우리도 폼페이우스의 어깨를 빌려 일어서리라!

 

기원전 58년과 57년의 콘술들을 살펴보면 폼페이우스가 바야흐로 그의 야망을 겉보기에는 완전히 성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 58년의 콘술은 카이사르의 장인인 루키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와 폼페이우스의 가신인

"신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였고, 기원전 57년의 콘술은 푸블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와 퀸투스 메텔루스 네포스

였습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스핀테르의 당선을 지원하므로써 여전한 소속감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카이사르

가 집권한 기원전 59년부터 기원전 57년까지 3년간 폼페이우스는 정부를 좌지우지하는 붕당의 수장이었던 것은 확실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폼페이우스가 장악한 원로원은 그 자신이 민중의 힘을 빌려 무력화시켰던 바로 그 원로원이었다는데

있었습니다. 원로원에서 폼페이우스가 기를 펴지 못할 때 폼페이우스는 이에 대항했고 그런 이미지 때문에 로마 대중

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폼페이우스가 마침내 원로원을 장악했을때 로마 대중은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까?

폼페이우스만은 그것을 바랐을 것입니다. 그는 로마의 전통에 입각한 프린켑스가 되고 싶었을 뿐 혁명과는 아주 거리

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말입니다.

 

폼페이우스가 전형적 로마 귀족이다라는 사실, 즉 그는 알려진 바와 달리 혁명파가 아니라는 사실이 피소, 메텔루스,

마르켈루스와 같은 귀족 가문뿐 아니라 렌툴루스와 같은 파트리키이 가문까지 그와 연대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죠. "그의 권위만 인정해준다면 그는 원로원 과두 정치에 큰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옵티마테스 주도하의

원로원 지배보다는 조금 양보를 해야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후원한 콘술들은 가비니우스를 빼면 모두 콘술에 어울리는 이름의 소유자들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이 새로운 동맹자들과의 우호관계를 위해서는 가비니우스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미 일찍부터 이러한 성향을 알고 있었기에 키케로는 카토와 폼페이우스 사이에서 나름 균형을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자면 폼페이우스 붕당의 정치적 우파로서 붕당의 정치적 좌파인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국정을 좌지우지 하는 사람은 콘술도 아니고 프린켑스도 아닌 한 호민관, 매우 별난 한명의 호민관이었

습니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다가오는 시대가 원로원의 시대가 아닌 트리부스 평민회의 시대 - 그러나

카이사르 집권이후로 누가 더 강한 폭력집단을 동원할 수 있는가가 트리부스 평민회의 결정을 좌우했습니다 - 임을

일찍 파악했었는지 "클라우디우스"라는 유명한 이름을 포기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매부인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의 양자가 되기를 시도한 적도 있지만 결국은 이름없는 평민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기원전 58년의

호민관이 되었지요. 이는 카토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카이사르와 그 동맹자들이 후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평민 신분으로서 "클로디우스"라 불린 이 사람은 카토에게는 정치적인 증오를, 키케로에게는 사적인 증오를 품고 있었

으며, 로마 대중에 대한 곡물의 무상 배급이라는 포풀라레스적 정책으로 말미암아 한편으로는 폼페이우스-카틸리나-

카이사르의 뒤를 잊는 대중의 "왕"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옵티마테스와 유산계급의 철천지 원수가 되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그의 붕당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전통적 프린켑스의 권위를 얻고 싶은 자신의 이해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정치적 갈등을 빚는 모든 이가 그의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클로디우스는 카토를 2년간이나 로마정계에서

제거해버림과 동시에 키케로마저도 추방시켜버렸습니다. 폼페이우스는 키케로를 구할 수 없었거나 구하려하지 않았

습니다. 또한 클로디우스는 포풀라레스적 정치행보에 폼페이우스의 권위를 빌리면서도 폼페이우스를 조롱하고 망신을

주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폼페이우스는 평민회의 대표이기도 하고 원로원의 대표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임경은 "클로디우스는 크랏수스에게 매수당했다"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매수"와 "후원"은 동일한

행위를 표현하는 두개의 단어일 뿐입니다. 은밀한 야심가 크랏수스는 카틸리나와 카이사르의 후원자였던 것과 마찬

가지로 클로디우스의 "배후"였습니다. 크랏수스는 카토일파에 대항하기 위해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았지만 폼페이우스

가 제1인자가 되는 일에 기꺼이 박수를 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클로디우스와의 갈등은 폼페이우스를 크랏수스와 카이사르에게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그의 붕당의 넓은

스펙트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어낸 것이 그의 이른바 "민중적 토대"였습니다. 쑬라는 원로원 지배층에

기대 원로원의 세력을 복원,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민중의 힘 - 그를 포함하여 민중이 지지한 사람들과 연합

하여 - 을 등에 엎고 원로원을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폼페이우스에게 원로원 제1인자라는 지위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그의 붕당을 배신해야 했던 것이지요. 이 "배신적" 성격은 정치적 붕당의 수장에게는 매우

치명적 약점이라 할 수 있겠는데 실제로 폼페이우스는 개인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에게 충실했던 사람들을 여럿 희생시켰

습니다. 휩사이우스, 키케로, 가비니우스, 그리고 카이사르까지 말이지요. 훗날 카이사르는 적어도 이점에 있어서 경쟁자인

폼페이우스를 능가했습니다. 그는 그의 친구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신뢰를 얻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56년의 콘술은 그나이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입니다. 마르켈리누스는

폼페이우스의 사람이지만 필리푸스는 카토의 장인입니다. 비록 필리푸스는 중립적 인물이었다고 하더라도 카토가 다시

로마의 정계로 돌아오는 시기와 일치하는군요. 카토는 기원전 58년 말부터 클로디우스의 명령으로 시칠리아에 반귀양살이

신세였습니다. 그 다음해의 콘술직 선거에는 카토의 동지인 루키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당선이 확실시 되었고, 법무관

선거에는 카토가 직접 입후보하고 있었습니다.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은 갈리아에 대해 상당한 피호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에 대해 직접적인 피해자였습니다. 이러한 정황은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성격이 4년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음을 짐작케 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썬더는 언젠가 "러시아 혁명"에 대한 글을 쓰면서 지도자와 지지자들의 이해관계가 동일하지 않을 수 있음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전에도 한번 언급된 적이 있었고, 이번 글에도 중요하게 언급된 폼페이우스의 배신적 성격은 개인적 성격이외

에도 대중을 이용하고자 하는 정치지도자가 있는 곳 - 그런 지도자가 없는 곳이 있을까 - 에서 항상 발견할 수 있는 보편

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카이사르는 과연 다른 인물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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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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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율리아 | 작성시간 08.07.30 ㅋㅋㅋ...저 사진 웬지 박상면 닮았는데요~
  • 작성자SVLLA | 작성시간 08.07.31 시오노 나나미가 카이사르를 쓰기 위해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했듯 썬더와 카이사르도 카이사르와 그의 친구들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연재한 것이라면....드디어 카이사르가 다음편 쯤에는 등장할 것 같군요. 지도자와 지지자들의 이해관계가 동일한 경우가 역사에 몇 장면이나 있겠습니까? 이해관계가 걸리는 순간...인간들은 각자 다르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이해를 뛰어 넘는 신뢰관계가 있다? 오늘날 저는 이점에 있어 굉장히 회의적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할 뿐입니다. 카이사르 역시 정치적 인간이므로...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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