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인 이야기]양피지와 수제작 서책 Codex

작성자sulla|작성시간06.03.17|조회수1,011 목록 댓글 3

양피지는 이집트가 지중해 연안으로의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하자, 소아시아의 페르가몬(Pergamon)에서 파피루스 대체품으로 개발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그래서 Pergamon →pergamentum 라틴어), 이는 그다지 믿을 만한 설화가 못된다.

 

그러나 짐승, 특히 양이나 염소, 어린 송아지의 가죽을 가공해서 제작한 필사재료로서 급속히 파피루스를 대체, 특히 파피루스의 원료를 구하기 어려운 알프스 이북 지방에서 널리 애용. 중세유럽의 대표적인 기록매체가 되었다. 기록 및 채색효과에 보존성이 뛰어난 장점이 있으나,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다.

 

 

 

중세유럽에서 오랫동안 책이 귀했던 이유의 하나로서, 가령 성서 한 권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히 자란 양이나 송아지 약 2-300 마리 분의 가죽이 필요했다. 양피지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은 교배하지 않은 암양가죽(Virgin Parchment)이며, 그 다음이 숫양가죽(Vellum)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보통 100페이지의 양피지로된 책 한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10마리의 양이 필요로 하였다고 한다.

 

12세기말에 이르면 교육분야에 대한 교회의 독점적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수도사와 함께 일했던 세속 필경사들이 그들 나름대로 길드나 직인조합을 만들었다. 그들은 새로 진출한 상공업 계층인 부르주아를 위해 공식문서를 작성해 주었고 또 직접 책을 필사하기도 했다.
 

왼손에 든 칼로 거위 깃 펜의 끝을 가끔 뾰족하게 손질하거나, 오자를 긁어내어 교정하면서(!) 기록을 한다. 양피지는 이렇게 편리한 필사재료였다. 심지어 효용가치가 없어진 기록면을 전부 긁어내고 새로운 기록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다. 운이 좋을 때, 새로운 기록면 밑에 잠재된 긁어낸 과거의 기록을 식별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기록을 전문용어로 Palimpsest라고 한다. 유명한 예로 Cicero의 De re publica(공화국론)은 19세기 후엽 Palimpsest에서 발견, 복원된 것이다.

 


복음서의 저자 중 1인 '마가 Marcus'가 서기로서 그려진 10세기말(980-1000 경)의 필사본 삽화. 즉 이 그림의 작자인 수도사는 복음서의 저자와 자신을 기록능력이라는 점에서 동일시하고 있다.

 

 

양피지에는 문자기록 외에 이렇게 호화로운 채색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또한 양피지에 작성한 기록은 서책의 형태로 용이하게 제본할 수 있었다. 이 제본한 책을 Codex라고 하는데, 중세 및 근대초기의 특수한 수제작 서책, 즉 Codex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codicology라고 한다.

 

당연히 이런 Codex의 주요한 생산처와 그 수요처는 교회였으며, 기록문화의 주된 담당자는 성직자들이었다. 심지어 세속의 귀족이나 군주들도 자신들의 서기, 행정관료를 거의 모두 성직자로부터 충원했다.

 

기록의 생산, 취급은 소수의 성직자가 독점하는 고급의 전문기술이었다. 그리하여 성직자를 의미하는 clericus라는 라틴어는 clerks, 서기라는 뜻으로 전화되었고, 기록의 생산을 관장하는 cancellarius (역시 성직자인 경우가 대부분)에서 정부의 수반, 수상을 의미하는 Chancellor라는 말이 나왔다. 문자와 기록은 지배수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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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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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sull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6.03.17 중세 지식의 대중적 보급이 늦은 이유로는 문자와 기록의 지배수단화도 한 몫하였지만 양피지 생산의 치명적인 비용 때문이겠죠...효용가치가 없어진 기록면을 전부 긁어내고 새로운 기록을 작성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 작성자Nero | 작성시간 06.03.18 수업 시간에 배운 죽간(/간독)이 생각나네요
  • 작성자Apianus Romanius | 작성시간 06.03.18 고선지장군께서 아랍에 지지 않으셨다면 종교혁명같은건 안일어났을수도 있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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