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인 이야기]흑인 노예무역

작성자SVLLA|작성시간06.11.21|조회수958 목록 댓글 3

고대 그리스.로마와 중세의 노예무역과는 달리, 근세의 것은 지리상의 개척 이후 아메리카 대륙 및 서인도제도의 산업개발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흑인을 수입한 무역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포르투갈의 B.디아스 이래의 유럽 제국(諸國)의 아프리카 서해안 정복과 밀접하게 결부하여, 식민지에서 형성된 노예제도에 기반을 둔 것이다.

 

C.콜럼버스(1451?∼1506) 이래 에스파냐의 식민은 아메리카 인디언을 정복, 노예화하여 라틴아메리카.서인도제도의 광산개발, 사탕수수와 담배재배의 대농장 등에서 혹사했기 때문에 인디언의 사망.도망.반항 등으로 원주민의 수는 격감하였다. 16세기 초엽 에스파냐 정부는 선교사 B.라스카사스(1474~1566)의 권유를 받아들여 강건하고도 염가인 아프리카 흑인노예를 인디언 대신 사용하였고, 포르투갈의 모험가가 인도항로의 개척 도상에 아프리카 서안의 흑인을 사로잡아 노예무역을 시작하였다.

 


Sugar-cane Plantation

 

 

특히, 아메리카 인디언의 노예화 사역이 1530년에는 에스파냐령에서, 1570년에는 브라질에서 법규로 금지되자, 이러한 추세 속에서 에스파냐왕 특허하에 아프리카 흑인 4000명의 수입권이 주어진 것을 비롯하여, 특약으로 흑인을 수입하는 독점특허권인 아시엔토(Asiento)가 설정되었다. 1702년에는 프랑스의 기네아 회사가 4800명의 흑인 수입권을 얻었으나, 1713년에 영국의 남해 회사(South Sea Company)가 이것을 계승하여 1743년까지 30년 동안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 14만 4000명을 수송한다는 요지의 계약이 체결되기도 하였다.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이 급속히 확대되고,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인의 식민지가 확장됨에 따라 흑인노예의 수요도 격증하여 노예무역은 점점 성대해졌다. 16세기 말~17세기 후반에 걸쳐 네덜란드.프랑스.영국 등이 신대륙과 아프리카 서안의 에스파냐.포르투갈 두 나라의 독점권에 침투하여 경합을 벌이면서 무역기지.식민지를 건설하였다. 특히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브라질에 진출하여 사탕수수와 노예무역을 장악하였다.

 

17세기 후반부터 영국령 자메이카섬이 브라질에 대신하여 사탕수수 생산의 중심지가 되자, 영국은 1672년에 노예무역의 독점회사로 설립한 왕립 아프리카 회사를 중심으로 하여 영국.아프리카.서인도를 연결하는 이른바 삼각무역(三角貿易)을 경영하여 네덜란드를 압도한 다음, 이어서 프랑스를 제압한 끝에 1713년의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에스파냐령에 대한 노예수출의 독점특허권인 아시엔토도 획득하였다.

 

 삼각무역(Triangular Trade)

 

 

노예무역에서 삼각무역의 내용을 살펴보면, 본국에서 노예를 사는 데 필요한 물건인 럼주(酒).총포.화약 등을 싣고, 아프리카 서해안에 이르러 흑인노예와 교환한 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노예를 팔고, 그 대금으로 식민지 물산을 구입하여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예무역을 통하여 영국에서도 특히 브리스틀.리버풀의 상인은 정부의 보호를 배경으로 사탕수수와 노예무역을 독점하여 항시(港市)의 번영과 아울러 막대한 이익을 올림으로써, 서인도는 영국의 중상주의적 식민제국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더욱이 17세기 후반 이래 북아메리카 남부의 담배.쌀.미곡(米穀).인디고 생산의 대농장에서도 흑인노예를 사용하여, 아메리카 독립 당시 그 수효는 50만 명에 이르렀다.

 

1771년에는 영국의 노예무역선의 총수가 190척이나 되었고, 연간 4만 7000명을 운반하여 이윤은 30∼100%에 이르렀다. 그 반면 100 t의 노예선에 400명 이상 적재하여 항해 중에 1/6이, 길들이는 동안에 1/3이 죽었다고 하며, 중간 항로에서의 잔혹하고 비참한 실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일명 흑색 다이아몬드라고 불린 흑인노예를 아프리카에서 매입할 때는 보통 럼주.화약.직물(織物) 등을 추장에게 지불하였으나, 1750년 이후에는 노예수렵의 약탈.거래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유럽의 상인에 의해서 신세계에 운송된 흑인노예는 300년 동안에 150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The Slave Trade" by George Morland, 1791

 

 

식민지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은 유럽 상업자본의 식민지 착취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유럽 제국의 번영에 기여도가 컸다. 교회도 이교도에 자행한 일이므로 이것을 인정하는 편이었고, 정부 ·일반도 이것을 비난하지 않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자본주의의 발달과, 인도주의.복음주의.민주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인간수렵’의 비인간성과 노예선의 비참한 실정이 전해지자 점차 식자(識者)의 비난이 일어났다.

 

특히, 퀘이커교도 측에서는 1727년에 노예무역을 ‘허용할 수 없는 관행’이라고 선언, 1783년에는 서인도의 노예해방과 노예무역의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협회를 설립하여 일반 민중에게 호소하였다. 정계에서도 1772년에 국회의원인 D.하틀리(1732∼1813)가 처음으로 하원에서 비난동의(非難動議)를 제출하였으나 부결되었다. 그러나 1786년에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의 학구적인 청년인 T.클라크슨(1760∼1846, 노예제폐지론자)의 《노예제도 ·인간매매론》 발간을 계기로 하여 G.샤프(1735∼1813), W.딜윈, J.람제이(1733∼1789) 등이 노예폐지위원회를 창립함과 아울러 하원의원 W.윌버포스(1759∼1833)와 협력하여, 1788년에 전원위원회(全員委員會)의 설립에 성공함으로써 노예무역은 겨우 정치문제화되었다.

 

그러나 리버풀 ·브리스틀 등의 상인층과 서인도의 플랜터 출신의 서인도 세력으로 불리는 의원이 직접 ·간접으로 노예무역에 중대한 이해관계를 갖는 광범한 세력으로서 방해하여, 의회에 제출된 결의안은 계속 부결되었다. 그러나 1792년에 윌버포스가 제출한 노예무역의 점차적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결의안이 비로소 하원을 통과하였다. 그 발효기일이 1796년 1월 1일로 되었으나, 때마침 프랑스 혁명으로 빚어진 보수세력의 대두로 실현되지 못한 끝에 1807년 W.그렌빌, C.J.폭스의 연립내각 때 노예무역 폐지법안이 양원을 통과하였다.

 


노예선 종(Zong)의 선장은 대서양 중앙항로에서 길을 잃고 위기에 빠지자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살아있는 노예 132명의 다리에 족쇄를 채운 뒤 바다로 던져 버렸다.

 

 

* 관련 게시물: 노예무역

 

또한 1802년에 덴마크가, 1807년에 미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하였고, 1814년에 프랑스도 1819년부터 금지한다는 요지의 협정을 영국과 체결하였으며, 기타 유럽 여러 나라와 새로 독립한 라틴아메리카 제국(諸國)도 노예무역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서인도제도와 미국 남부의 노예제가 존속하는 한 노예무역의 근절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윌버포스와 T.F.벅스턴(1786∼1845) 등은 노예제도 그 자체의 폐지운동을 전개하여, 1838년 8월 1일을 기하여 유상방식(有償方式)으로 서인도제도의 노예를 풀어주는 노예해방령을 통과시켰다.

 

이어서 프랑스에서도 1848년의 2월혁명에 즈음하여 노예제 폐지를 실현하였고, 최후로 미국이 남북전쟁의 국내 유혈(流血)을 통하여 1863년 대통령 A.링컨이 ‘노예해방 선언’을 함으로써 사실상?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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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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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sull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6.11.21 노예무역선 종에서의 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단 한사람의 생존자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곧 보험업자들이 선장을 고소했고 이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시선이 법원으로 쏠렸죠. 그러나 법원은 선장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판결합니다. 노예들은 '가제도구'로 취급됐고, 선장이 '자기 소유물을 버리든 취하든 그것은 자유'라고 판시한 것이죠. 이것이 당시의 양심이였습니다.
  • 작성자ThundeR[GP] | 작성시간 06.11.22 19세기 초반에도 몰락한 젊은이가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도로 떠나 노예무역에 한 10년 종사하는 것이 하나의 바람직한 상이었나 봅니다. 외제니 그랑데의 속물 애인이 그랬던 것처럼 ^^
  • 작성자seeker | 작성시간 06.11.25 근세 노예라는 가제도구로 사람들이 윤택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네요 고대 그리스.로마가 그랬던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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