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런던-사회사적 풍경들
이영석
1. 런던의 성장
1851년 '만국박람회' 안내책자는 첫머리에 런던을 이렇게 소개한다. "런던은 세계의 도시들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가장 크고 부유하다." 이 말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이미 19세기초에 런던은 상주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선 거대도시였다. 뱀처럼 흐르는 탬즈 강을 끼고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이 도시는 영 제국의 번영과 함께 국제무역 및 금융의 근거지로 자리잡았다. 동시대 사람들은 런던을 영국의 중심, 나아가서 세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생각했다. 예컨대 1841년에 '대서부철도회사'(Great Western Railway)가 런던의 시각을 영국 모든 철도역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나, 런던 외곽의 그리니치 천문대가 본초자오선의 기점이 된 것도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1)

웨스트민스터 브리지, 빅벤(시계탑)이 보인다(1890)
사실 18세기초까지만 하더라도 런던은 유럽의 중요한 도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이 시기에 런던의 인구는 50만 명 가량이었는데, 이것은 파리의 인구와 비슷한 규모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런던은 급속하게 팽창하기 시작했으며, 다음 세기에 이르면 이전과는 아주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19세기 런던의 인구는 매 10년마다 21∼56%의 증가율을 보여준다.2) 여기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런던으로의 인구 집중현상이다. 19세기초에 런던의 상주인구는 잉글랜드 및 웨일즈 전체 인구의 10% 수준이었다. 그러나 같은 세기말에 그 비율은 20%에 이르고 있다. 이는 런던 인구 증가의 상당한 몫이 다른 지역 사람들의 유입에 따른 결과임을 알려준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런던으로 몰려든 것은 무엇보다도 그 경제력 때문이었다. 국제무역의 중심지로서, 그리고 사치재나 일반 생활자료의 생산 및 소비 중심지로서 런던은 무수하게 많은 일자리를 제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런던으로 흘러들었다. 19세기에 런던 유입인구는 매 10년마다 20∼30만 명 규모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입 패턴은 19세기 전반과 후반에 차이를 드러낸다.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이주민의 대다수는 잉글랜드 동남부 출신이었다.
1840년대 이주민에 대한 분석 결과는 그들이 주로 에식스, 서리, 켄트 등 런던 인근의 주 출신임을 보여준다. 그 반면에 1870년대 이후에는 주로 미들랜드, 잉글랜드 북서부,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 장거리 이주민의 비율이 높았다.3) 특히 이 시기에 유입인구가 이전에 비해 더 급증하는데, 그것은 농업공황으로 파산한 이농민들이 런던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런던 1889
인구증가와 더불어 런던의 도심과 교외(郊外)도 팽창하기 시작했다. 물론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런던은 중세적 전통을 이어받은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도심이 좁았다. 좁은 시내를 벗어나면 빈민층의 슬럼 지역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같은 세기말부터 런던은 인구 증가와 함께 공간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도심지가 넓어지고 새로운 교외가 형성되었다. 탬즈 강 남북으로 도심과 교외가 점차로 넓어지고 있다. 18세기 후반이래 다음 세기 중엽까지는 주로 강북지역의 서쪽 방향으로 개발이 이루어졌다. 도시 개발에 눈을 뜬 지주와 건축업자들이 주택단지를 조성하여 새로운 교외지역을 만들었다.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탬즈 강 남쪽에도 개발의 바람이 일었다. 이와 함께 템스강 하구의 런던 항 주변에는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가 확대되었으며, 이 지역은 런던의 대표적인 슬럼가로 널리 알려졌다.
거대도시 런던은 국제무역과 상업에 긴요한 기반시설을 증설할 필요가 있었다. 그 건설 연대기에는 주로 교량·철도·항만 등이 등장한다. 우선 탬즈 강 남북을 잇는 기존의 교량들을 개축하고, 이에 덧붙여 사우스워크 교, 홀본 교, 타워브리지 등을 새로 지었다. 또 국제무역량이 폭증하면서 기존의 런던 항 외에 웨스트인디아, 이스트인디아, 로열 빅토리아, 밀월 부두 등을 차례로 건설하였다. 한편 거대도시 런던의 외관(外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철도를 빼놓을 수 없다.
런던에 철도가 처음 깔린 것은 1836년의 일이다. 그후 영국의 철도망은 런던을 출발점으로 삼아 사방으로 부채살처럼 뻗어나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 각 방향의 철로 개설과 운영은 독립된 개별 철도회사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런던은 유럽의 다른 대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앙역(Hauftbahnhof)이 없다. 각 노선의 터미널 역이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19세기 말 런던에는 브라이튼 방향의 빅토리아 역, 콘월 방향의 워털루 역, 도버 방향의 채링크로스 역, 브리스톨 방향의 패딩턴 역, 버밍엄·맨체스터 쪽의 유스턴 역 등 모두 15곳의 터미널 역이 있었다.4)
19세기 런던의 급속한 성장, 그 이면에는 전산업적인 모습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이는 영국이 너무나 일찍 자본주의와 상업화의 길에 들어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무역 및 상업 중심의 도심과 전원풍의 교외, 서부의 부와 동부의 빈곤, 시티의 해외투자가와 거리의 뜨내기며 날품팔이며 빈민들의 모습이 서로 대조를 이룬다. 말하자면 런던은 자본주의 세계의 중심이면서도 너무나 '고졸적인'(archetypal) 근대도시였다.

낭만파 시인 Percy Bysshe Shelley(1792-1822)
런던의 이 모순된 외관은 동시대 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런던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을 지녔다. 런던의 희뿌연 안개와 매연은 그 신비한 심연 속으로 모든 것들을 삼키는 능력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제공했다. 런던의 번영 뒤에는 빈곤, 불행, 범죄, 질병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 어둠을 퍼시 셸리(Percy B. Shelly; 1792∼1922)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지옥은 런던과 똑같은 도시, 사람으로 혼잡스럽고 연기 자욱한 도시."5) 스코틀랜드의 저널리스트 로버트 무디(Robert Mudie)가 보기에 런던은 "현대의 바벨탑"이었다.6)
이제 다음에서 19세기 런던에 관한 자료들을 통해 이 도시의 겉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재구성하려고 한다. 그것은 근대와 고졸적 인상, 부와 빈곤, 고급문화와 민중문화가 기묘하게 공존하는 외관으로 나타난다. 이는 일종의 사회사적 풍경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회사 서술에서 그 풍경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적 분위기와 삶의 흔적들을 집어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이 글은 각 풍경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나 내적 연관성은 별로 고려하지 못한 채 단지 모자이크처럼 나열했을 뿐임을 밝혀둔다.
2. 도심에서 교외로
오늘날 런던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 도시의 겉모습이 다른 나라의 거대도시들에 비해 초라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시티'(The City of London)와 웨스트민스터 시를 중심으로 널려있는 번화한 거리며 빅토리아풍의 석조건물군이며 일부 현대식 빌딩을 뒤로하고 좁은 도심을 벗어나면 전원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단조로운 일반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들이 숲과 공원을 경계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이 교외 주택단지는 상인과 중간계급의 주도로 세워졌다. 이것은 이전의 양상과는 다르다. 전통적인 도시에서 상인은 도심에서 살았고 교외는 단지 빈민의 거주지였을 뿐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도시의 팽창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런던 상인들은 구舊도심인 '시티'에서 경제활동에 종사했다. 상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도심에서 세계시장에 관한 여러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었으므로, 롬바르드 가를 중심으로 하는 구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살 수 없었다. 상인층 위계의 정점은 해외무역 및 금융업 분야에서 영업하는 사람들이 차지하였다. 그들은 설탕·차·모피·향료와 같은 해외 상품을 취급했으며, 대부분 특허회사 경영자, 유명한 상인길드의 조합원, 참사회 의원, 시의회 의원들이었다. 그 다음에는 국내상인과 여러 직종의 숙련장인들이 뒤를 이었다.
상인이든 수공업자든 전통적인 도시에서 주거공간과 영업장은 분리되지 않았다. 가정생활과 영업이 한 지붕 아래서 이루어졌다. 상인들은 자신의 집 아래층에서 일하고 2층에서 가정을 꾸렸다. 다락방에는 주로 도제들이 기숙하였고 지하실은 거래 상품의 저장소로 쓰였다. 부르주아의 가족은 정서적 차원을 넘어서 경제적 기능도 지녔다. 상인의 영업장에 필요한 노동력은 상인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도제들로 충원되었다. 특히 점포를 관리하는 일은 대부분 상인의 아내가 맡았다.7) 가족은 열린 세계였고 영속적이지도 않았다. 다른 가족구성원, 길드 동료, 도제, 친구와 이웃들 또한 정서적으로 가까울 수 있었다. 상인과 그의 가족이 집밖의 교제와 사교생활에 익숙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술집과 커피하우스, 코번트 가든의 극장, 기타 유명한 유원지들이 사교모임의 장소였다.
이것이 전산업시대 런던 부르주아지의 세계였고,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1709∼84)이 그린 런던의 모습이었다.8)

Samuel Johnson은 "런던에 싫증난 자는 인생에 싫증난 자다" 라고 할 정도로 런던을 사랑했다
18세기 후반 이래 이전과는 달리 교외에 부르주아의 주택단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물론 런던의 좁은 도심이 생태적 한계에 이르러 더 이상 인구 과밀을 감내할 수 없었던 데서 찾아야 한다. 특히 불량한 하수시설과 더러운 개천은 도심의 상인과 수공업자들에게 매우 혐오스러운 환경이었다. 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도심을 재개발하려는 노력이 일찍부터 있었다. 스퀘어 가든이나 코번트 가든과 같은 이탈리아 풍의 광장(plaza)이나 공원 개발은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교외 개발의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부르주아지가 이를 주도하였다.
부르주아의 탈중심화 현상은 무엇보다도 가정과 영업장의 분리를 전제로 한다. 이 분리는 부의 축적에 따른 영업장 고용인력의 증가와 새로운 가족윤리의 대두가 서로 맞물려 전개된 것이었다. 이전의 가족은 그것이 경제적 단위인 만큼 친족집단, 길드 동료, 이웃, 도제와 수련공 등 다른 경제 단위보다 훨씬 더 친밀한 결합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남편이며 아내의 잦은 불행에 따라 깨어지기 쉬운 것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이래 특히 상층 부르주아지 가정에서부터 점진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로런스 스톤(Lawrence Stone)의 표현에 따르면, "폐쇄적인 가정 중심의 핵가족"이 출현한 것이다.9)
자본주의의 발전과 개인의 자율성 신장은 밀접하게 관련된다. 개인이 자신의 선호에 따라 배우자를 고를 기회가 많아졌다. 부부 사이의 결합은 더 굳어졌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보호와 애정에 토대를 두었다. 17세기 이래 부르주아의 가정은 대체로 감성적 유대가 강했으며 가족 자체가 이전의 개방성 대신에 폐쇄성의 특징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기존의 도심생활은 가족의 폐쇄적인 사생활을 꾸리기에는 너무나 개방적이었다. 도심의 개방성과 새로운 가족 윤리는 양립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더욱이 빈민층이 도심까지 몰려들자, 부르주아지는 그들과 공간적으로 떨어지려는 경향을 강하게 나타냈다. 빈민과 섞여 사는 것은 그들의 사회적 위계를 고려할 때 감내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도심을 떠나 도시 변두리에 가족의 보금자리를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18세기 복음운동(evangelicalism) 또한 부르주아지의 도심 탈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복음운동은 평화로운 기독교 가정에서 구원의 길을 찾았다. 가족의 유대와 사랑은 축복이며, 그 적은 가정의 밖에 널려 있는 온갖 유혹이었다. 이 때문에 복음운동가들은 도심의 쾌락과 오락에서 격리된 가정과 그 가정에 대한 수호자로서 아내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아이들 또한 엄격함보다는 부모의 애정 속에서 자라나야 할 것이었다.10) 이제 아이들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부모는 런던 도심의 위험들에서 벗어나야만 하였다. 복음운동의 가족 이미지와 도심의 모순이야말로 교외 형성의 동력을 제공한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복음운동과 새로운 가족윤리는 이전보다 더 광범한 '중간계급' 사이에 널리 퍼졌다(여기에서 중간계급은 양도이윤이나 생산이윤을 취득하는 기업가와 상인은 물론, 전문관리나 전문직업인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같은 세기 중엽에 이르면 고급직종의 숙련 장인들인 '노동귀족'(labour aristocracy)까지도 복음운동의 영향을 받아 독립되고 건전한 가정의 이미지를 적극 받아들였다.

William Wilberforce(1759~1833)는 노예무역폐지법을 성립시키고 노예제도의 폐지에 공헌했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런던의 교외화는 상층 부르주아지를 시작으로 광범한 중간계급, 그리고 더 나아가 노동귀족 등이 차례로 호응함으로써 한층 더 가속되었다. 그렇다면 런던의 교외 개발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먼저 18세기 후반 상층 부르주아지 교외화의 한 사례로서 클래펌을 꼽을 수 있다. 처음에는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와 그의 복음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저명인사들―동인도회사의 대표이사를 역임한 존 그랜트(John Grant), 성서공회 회장 존 쇼어(John Shore), 은행가 존 손튼(John Thornton) 등―이 이곳에 함께 집을 지었다.11) 그후 이들의 저택 부근에 런던 상인들이 옮겨오기 시작했다.
당시 지주들은 땅을 택지로 분할하여 시장에 내놓았다. 클래펌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집과 영업장이 공간적으로 서로 겹치는 전통적인 주택 개념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클래펌 개발 이후 여러 곳에서 부르주아지의 교외 주택단지가 잇달아 건설되었다. 탬즈 강 북쪽에는 햄스테드, 하이게이트, 홈시, 월덤스토우에서, 남쪽에는 덜리치, 월워스, 캠버웰 등지에서 새로운 교외가 조성되었다. 이들 지역은 도로를 따라 띠처럼 집들이 들어서는 리본식 개발의 특징을 보여준다.
19세기의 교외 개발은 상층 부르주아지의 경계를 넘어 좀더 광범한 중간계급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12)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지주나 건축업자가 다같이 개발의 적절성 및 인근 지역과의 조화를 고려하면서 계획을 세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튼학교 소유의 땅인 챌코트(Chalcots) 개발 사례를 살펴보자.13) 1822년 건축가 존 쇼(John Show)는 약 230에이커의 택지를 분할하여 독립주택 34채를 지였다. 그후 개발은 그의 아들(이름이 같음)이 이어받았다. 챌코트는 그 시대 경험 있는 건축가들의 도시계획에 대한 구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존 쇼 2세는 "더 개발을 하기 전에 일반적으로 주택공급의 목적에 맞도록 택지를 조성하는 가장 편리한 양식이 무엇인가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그는 도로와 주택군의 패턴을 미리 밝히고 특히 일부 지역을 공적 개방공간으로 유지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3개의 도로변에 주택단지를 조성하면서 그와 함께 교회와 주점(pub house) 등을 차례로 세웠다. 이튼학교 측은 이 지역을 전형적인 중간계급 거주지로 개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주택업자들에게 적용할 엄격한 지침을 마련했다. 챌코트의 택지는 저밀도 주택단지를 염두에 두고 분할되었다. 주택의 형태는 단독 이층집(detached house) 외에 한 지붕 아래 두 가구가 붙어 있는 '두 가구 이층집'(semi-detached house)이 주류를 이루었다.15)
19세기 후반에 사람들은 급속하게 거대도시로 변모하는 런던을 가리켜 '그레이트 웬'(Great Wen)이라 불렀다.16) 1858년 지방정부법(The Local Government Act)에 뒤이어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를 통해 주택에 대한 표준적인 규제조항이 만들어졌고, 새로운 건축 기준과 위생 기준을 적용한 주택들이 대량으로 공급되었다. 노동계급 상층을 대상으로 하는 주택들은 '두 가구 이층집'도 있었지만, 여러 가구가 연이어 있는 '연립 이층집'(terraced house)이 대부분이었다. 이 표준적인 주택들은 매년 5%씩 분할상환하는 방식도 나타났다.17)
그렇다면 새로운 교외지역은 도심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는가. 19세기 교외 개발은 철도망의 발전이 없었다면 뒤늦어졌을 것이다. 칼라일은 철도망의 중심도시를 '중핵도시'(ganglion)로 표현한다. 산업화를 우려의 눈길로 바라보았던 그는 철도망의 발전에 뒤이어 찾아올 어떤 혼란을 예견했다. 중소도시는 중핵도시와 연결됨으로써 활력을 잃고 불행의 나락에 떨어질 것이다. "나는 인구의 새로운 중핵도시가 세워지는 것을 본다. 이전에 들은 적이 없는 금속야금 도시라는 예언 말이다. 리딩이나 베이싱스토크 또는 기타 불행한 도시들은 철도를 놓는 데 돈을 퍼붓고, 급기야는 자멸하기에 이른다."18) 그의 진단은 부분적으로는 맞았다고 할 수 있다. 런던의 교외지역도 갈수록 철도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런던은 칼라일의 예견과는 좀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철도는 오히려 교외의 발전을 자극했다. 물론 처음에 철도는 도시생활에 곧바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1836년 런던에 최초의 철도가 개설된 이래 상당한 기간동안 통근관행은 정착되지 못했다. 1850년대에도 매일 열차로 통근하는 사람은 2만7,000명 수준이었다.19) 그러나 1870년대 이후 통근관행은 급속하게 퍼졌다. 런던브리지 역은 처음으로 통근자를 염두에 두고 세운 역이다. 이 역의 성공은 교외와 도심간의 여객수송 능력을 보여주었다. 도심으로의 통근관행은 주요 철도노선에 여러 지선을 멋붙여 개설하면서 정착되었다. 이러한 운행은 경우에 따라서는 이윤을 남기지 못할 수도 있었다.20) 그럼에도 지선의 개통과 운행이 확대된 것은 도심과 교외의 연결에 대한 사회적 압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3. 부와 빈곤
'수정궁'(Crystal Palace)은 1851년 만국박람회를 개최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었다. 투명한 유리와 철골로만 이어만든 이 조립식 건물은 당시 영국의 기술과 부,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런던의 부와 번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빅토리아 시대 중기 영국의 번영은 산업혁명과 해외 식민지를 통한 자본축적의 당연한 결과로 여겨졌다. 산업자본과 국제 무역 중심지로서 영국의 위상을 강조해온 것이다. 런던의 팽창과 번영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해왔다. 그러나 최근 이 같은 견해는 도전을 받고 있다. 영국 경제는 지역적 차원에서 너무 다양하였고, 특히 런던의 경우 산업자본과의 연결이 매우 낮았다는 것이다. 영국 경제에서 산업자본의 역할과 비중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윌리엄 루빈스타인(William Rubinstein)에 따르면, 19세기 영국 경제는 지역적으로 런던 및 동남부의 상업-금융경제와 북서부의 산업경제라고 하는 '이중경제'의 모델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18세기 이래 런던은 해외 무역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영국은 물론 유럽 여러 나라 자본의 해외 투자를 처리하는 금융기지였다. 제국의 확대와 함께 금융·투자·보험·해운 등 중간계급 직종에서 고용이 증가했다. 그러면서도 런던의 투자자본은 북부 산업자본에 대한 투자와 관련이 적었다.
다음으로 런던은 빅토리아 시대의 주요 산업(섬유·탄광·제철·기계)에 동력을 제공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경공업이든 중공업이든 그 무게중심은 미들랜드와 북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런던 및 근교의 근대적 산업기반은 매우 약했다. 그럼에도 두 지역의 경제력을 비교하면, 북부의 산업경제는 런던 중심의 상업-금융경제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뒤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19세기 영국 경제의 특징은 '세계의 공장'(factory of the world)보다는 '세계의 어음교환소'(clearing house of the world)라는 표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이다.21)
런던의 번영은 무엇보다도 해외부문의 확대에 힘입은 것이지만 이에 덧붙여, 런던 자체의 광범한 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소비재 생산직종 및 서비스업의 활력에 주목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선 소비재 생산에서 양복공·제화공·목공·가구공 등 수공직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대부분 하청제 아래서 숙련기술이나 고한노동(sweating labour)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생산방식이 지배적이었다. 이와는 달리 광범한 시장을 겨냥하는 생활자료 생산부문은 대규모 생산조직을 갖추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식품가공업이 두드러졌다. 빵·곡물·설탕 수요의 증가에 따라 거대한 제분소와 제당공장이 호황을 누렸다. 양조장을 포함하여 식품가공업은 19세기 런던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산업부문이었다. 이밖에 육류와 야채를 거래하는 대규모 시장이 곳곳에 들어섰다.
19세기 내내 호황을 누렸던 제분소
서비스업이야말로 런던의 경제성장에 가장 중요한 활력을 제공한 부문이었다. 1841∼1911년 사이에 영국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일자리 가운데 50% 이상이 서비스부문에서 나왔고 지역적으로는 대부분 런던 및 그 인근의 여러 주(Home Counties)에 몰려 있었다. 부유층의 증가와 함께 소매업·화물 운송·교통 등의 서비스업은 물론, 청소원·정원사·침모·하인 등 가내서비스 종사자가 늘었다.
런던 항 또한 물동량의 증가와 더불어 다양한 일자리를 창출했다. 19세기에 크게 확장된 여러 부두에는 통메장이(cooper), 밧줄제조공, 목공, 하역일꾼 등 정규적인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들은 부두 노동력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부두 노동자의 60% 이상은 저임금을 받고 임시로 일하는 날품팔이였다. 그들의 일거리는 계절에 따라 변동이 심했다. 예를 들어 중국 차는 6월과 11월, 양모는 2월과 7월, 설탕 및 곡물은 9월과 4월에 집중적으로 몰렸다. 런던 항의 번영과 더불어 부두 인근에서 제철 및 조선업이 활황을 누렸다. 이밖에 뉴캐슬의 석탄을 실어 나르는 배에서 작업하는 선탄부, 가스사업 종사자 등 여러 서비스부문의 노동자들이 부를 창출하였다.22)
19세기 후반의 런던 경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같은 시기의 인구조사 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들 자료는 런던의 다양한 직업군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테면, 1851년 자료에서 런던의 가내서비스 종사자는 약 20만 명, 건축노동자 6만 명, 양복·양장·모자제조공 6만 명, 제화공 4만 명 등으로 나타난다.23) 1851년과 1861년 인구조사 자료의 요소분석(factor analysis) 결과에 따르면, 동남부 주 가운데서도 런던과 경제관계가 더 밀접하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일수록 경제성장률이 더 높았다.24) 특히 1870년 이후에는 이들 지역은 다같이 수도권 경제로 통합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들 지역의 구조변화는 주로 소비와 노동집약적 서비스부문의 확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부문은 전통적인 가내서비스에서 전문직업(의약, 법률, 교육)까지 다양하였다. 런던은 서비스부문이 제조업의 부산물이라는 통념과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그보다는 오히려 서비스부문의 확대가 소비지향적인 제조업, 이를테면 제지·출판·인쇄·목재·가구·의류·화학·전기 등의 업종을 자극하였다. 요컨대 런던 경제의 특징은 그 다양성에 있었다. 런던은 다른 도시와는 달리 특정한 산업부문에만 의존하지 않았던 것이다.
번영하는 경제일수록 그만큼 부와 빈곤의 대조적인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강북의 서쪽 방향으로 대대적인 교외화가 이루어지면서 패딩턴, 켄싱턴, 세인트 존스 우드를 비롯한 런던의 서부 지역은 '웨스트엔드'(West End)라고 불렸다. 이 표현은 런던의 부와 번영을 상징하는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중간계급의 교외 개발은 도심으로의 빈민 유입과 거의 동시에 진행된 것이었다. 왜 빈민층은 도심 가까운 곳으로 몰려왔는가.
빅토리아 시대에 런던의 도심은 역이나 도로와 같은 교통시설, 백화점, 공원, 박물관을 비롯한 대형 전시관 등의 신축과 개축이 잇달았다. 그에 따라 일시적으로 건축분야의 일용노동자들이 도심으로 모여들었다. 런던 항의 경우도 새로운 부두를 개설하면서 공사장 인부, 부두 하역작업에 필요한 노동자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베스널그린을 비롯한 부두 인근지역은 '이스트엔드(East End)'로 불렸으며, 도시 빈곤을 상징하는 언어로 자리잡았다. 런던으로 이주한 빈민들의 삶은 대체로 비슷한 패턴을 보여준다.
아일랜드 이민을 추적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이주민들은 처음에는 미숙련노동시장에 진출하게 마련이었다. 그들은 뜨내기 노동자로서 궁핍에 시달렸으며 그에 따라 항상 범죄에 가까이 있었다. 남자들은 부두 하역이나 시장 가판, 또는 벽돌쌓기와 같은 단순 노동에 종사하였다. 여성의 경우 대부분 하녀나 매춘에 매달렸다.25)
19세기 중엽 이후 빈곤은 중요한 사회문제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동시대 사람들이 남긴 자료 가운데 특히 빈민의 상태를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으로는 헨리 메이휴(Henry Mayhew)의 기록과 찰스 부스(Charles Booth)의 사회조사 자료를 꼽을 수 있다. 먼저 메이휴가 기술한 빈민의 모습을 살펴보자.
1849년에 메이휴는 양복공·제화공·목공·가구공 등 런던의 숙련장인과 수련공들을 인터뷰했는데, 이 기록은 19세기 중엽 수공생산의 실태를 알려준다.26) 대부분의 수공직종은 하청제 아래서 생산활동이 이루어졌다. 이 경우 고급직종은 노동조합을 통해서 일당이나 작업물량당 가격을 자본가와 합의하는 관행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싸구려직종27)은 그렇지 못했다. 이들 직종 종사자들은 서로간의 극심한 경쟁에 시달렸으며 불경기가 되면 경쟁은 더 심해졌다. 예컨대 1849년 당시 런던에서 일하는 양복공은 2만 1,000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고급직종에서 일하는 사람은 3,000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 나머지는 싸구려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28)
메이휴는《모닝 크로니클》지 첫기사 서두에서 빈민에 관한 정의와 함께 자신의 조사계획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수입으로는 그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데 모자라는 온갖 사람들"을 빈민으로 규정한 후에 다음과 같은 분류기준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정의에 포함되는 다수의,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일단의 사람들을 나는 서로 구별되는 두 계급으로 나누어 성찰하려고 한다. 즉 '정직한 빈민'(the honest poor)과 '부정직한 빈민'(the dishonest poor)이 그것이다. 정직한 빈민을 나는 '노력하는 빈민'(the striving)과 '무능력한 빈민'(the disabled)으로 다시 나누려고 한다. 달리 말하면, 나는 수도 런던의 빈민을 서로 다른 세 가지 측면, 즉 일하려는 사람과 일할 수 없는 사람과 그리고 일하지 않으려는 사람에 따라 성찰하려는 것이다."29)
그후 메이휴는 싸구려직종의 수공노동자들을 넘어서 거리의 부랑민과 날품팔이의 삶을 관찰하여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가 후에 편찬한『런던 노동자와 런던 빈민』은 거리의 뜨내기 인생에 관한 조사기록이다. 그는 이들을 가리켜 '거리의 민중'(street's folks)이라 불렀다. 사실 이들은 근대적 프롤레타리아라기보다는 사회적 일탈자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메이휴는 그들을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런던이라는 거대도시의 모순, 부와 빈곤사이의 모순이 낳은 구조적 산물로 파악하고 있다.
찰스 부스는 1890년대 노동자 파업의 고조되던 불온한 시기에 빈민층에 대한 사회조사활동을 펼쳤다. 당시 중간계급 출신 지식인 사이에는 빈곤, 실업, 인구과밀이 혁명으로 나아가리라는 두려움이 널리 퍼져 있었다. 사실 엥겔스는 이 시기에 '진정한 혁명의 도래'를 예감하기도 했다.30) 실제로 1889년 부두노동자 파업(Dock Strike)은 이스트엔드 주민들의 투쟁성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1889년의 부두 노동자 파업
런던 동부 지역을 다룬 부스의 책『런던 민중의 생활과 노동』1권이 바로 그 해에 출간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31) 그는 사회조사를 시작하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스트 런던은 가공스러운 그림이 그려진 커튼 뒤에 숨어 있다. 그 그림이란 굶주리는 아이들, 고통받는 여인, 일자리가 없는 남성들, 만취와 악덕의 공포, 잔악한 유령과 악마, 질병과 절망이라는 괴물 등이다. 이러한 그림들이 진정 그 뒤에 숨은 것을 보여주었는가? 이 커튼을 이제 우리는 들어올리려고 했다."32) 그는 빈민이 아니라 빈곤 그 자체, 개인이 아닌 대중을 연구대상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부스는 이스트엔드의 서민을 소득 정도에 따라 A에서 H까지 8개 집단으로 등급을 매겼다. 이 가운데 A∼D 등급이 빈곤선 이하의 집단이었다. 이스트엔드의 주민 90만8,959명의 43%를 차지하는 등급은 빈곤선 바로 윗선인 E등급으로서 이들은 대체로 정규적인 임금소득자라고 할 수 있었다. 중간계급 상층에 해당하는 H등급은 5%였다. 또 이들의 3분의 2는 해크니에 살았다. 부스의 결론에 따르면, 빈곤선 이상의 주민과 그보다 못한 주민의 비율은 65% 대 35%였다.33) 부스의 연구의 중요성은 그 신화파괴적인 결론에 있다.
즉 이스트엔드 빈곤층의 비율(35.2%)이 런던 전체의 비율(30.7%)과 커다란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왜 이스트엔드가 빈곤의 상징처럼 알려졌을까. 아마도 고소득 부르주아지나 중간계급의 비율이 매주 낮았던 데서 이유를 찾아야 하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부스의 연구는 빈곤 문제가 사회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웠다. 세계에서 가장 개화된 문명국에서 40%에 가까운 사람들이 빈곤선 밑을 맴돈다는 사실은 많은 지식인 사이에 엄청난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