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트섬[島] 프레시워터 출생.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를 졸업하였다. T.윌리스의 화학실험 조수를 거쳐, R.보일의 배기펌프 실험 조수가 되어 기체법칙의 발견에 기여하였다. 1663년 런던 왕립학회의 실험관리자가 되어 학자간의 통신교류를 추진하였고, 1678∼1682년 동 회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1665년에는 옥스퍼드대학 기하학 교수가 되었다. 현미경의 조명장치를 고안해서 개량한 현미경으로 동식물을 상세하게 관찰하는가 하면, 코르크 조각을 관찰재료로 해서 식물의 세포구조를 발견하기도 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연구하였다. 화석(化石)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자연과학적 고찰을 해서, 그것이 동식물에서 유래한다면서 그 생성과정을 논하여 지구의 역사와 관련지었다.
연소(燃燒)와 호흡에 관해서는 ‘연소설’을 주장하여 열(熱)의 플로지스톤설(說)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였다. 1667년의 저서 《미크로그라피아 Micrographia》에는 이들 성과가 실려 있는데, 물리학면에서는 박막(薄膜)의 색에 관한 연구가 중요하다. 이것은 빛을 진동이라 생각하고, 박막의 경계면에서 진동의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빛이 발생한다는 것인데, 파면(波面)이란 생각을 포함해서, 빛의 간섭 ·분산을 설명하여, 파동설(波動說)의 선구(先驅)가 되었다.
천문학 분야에서는 오리온자리의 관측, 목성(木星)의 회전, 연주시차(年週時差)의 측정 등이 있는데, 특히 연주시차 문제에 관해서는 지구의 운동을 분석해서 인력에 관한 역제곱의 법칙을 제출(1674), 만유인력론(萬有引力論)의 뉴턴에 의한 수리적(數理的) 전개를 촉진시켰다.
또한, 천문학·기상학·해양학 등에서의 필요 때문에 시계의 개량, 풍력계(風力計)의 제작, 그 밖에 각종 측정기구를 개량·창안하였으며, 1678년 탄성(彈性)에 관한 훅의 법칙을 제시하였다. 1666년 런던의 대화재 이후 시(市)의 측량감독관으로서 도시부흥계획에 종사하였다. 항상 뉴턴의 논적(論敵)이었으며, 특히 만유인력법칙에 관한 선취권(先取權)의 문제는 화제를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