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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朝鮮王朝實錄)세조실록(34권10년)[23]

작성자山房山(榮國)|작성시간11.05.05|조회수16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4. 세 조 실 록[23]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8월 16일(정유)

강순이 야인의 동태와 수어를 엄하게 하여 적변에 대응하고 있음을 아뢰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강순(康純)이 아뢰기를,

“회령진(會寧鎭) 성밑에 사는 알타리 만호(斡朶里萬戶) 마가롱합(馬加弄哈)이 고(告)하기를, ‘우리가 동량북(東良北)에 들어가서 허수라(虛水剌)에 입구(入寇)한 자를 은밀히 물으니 중동량(中東良)에 사는 올량합(兀良哈)의 다량합(多良哈)·장가(將家)·다양합(多陽哈)과 박가별라(朴加別羅)에 사는 자리(者里), 벌인(伐引)에 거주하는 수허대(愁虛大) 등이 같은 마을 사람들을 청(請)하여 거느리고 허수라동(虛水剌洞)에 이르렀다가, 체탐(體探)하는 사람 5명을 만나서 2인을 쏘았습니다. 또 다량합(多良哈) 등이 말하기를, 「갑산군(甲山郡)은 인가(人家)가 널리 흩어져 있어서 도둑질하기가 매우 쉽다.」고 하였습니다. 신(臣)이 이미 경성(鏡城) 이남의 갑산(甲山) 여러 진(鎭)으로 하여금 봉수(烽燧)에 조심하고 척후(斥候)를 멀리 하여 수어(守禦)를 엄하게 하여 적변(賊變)을 대응(對應)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9월 24일(갑술)

함길도와 평안도에 야인에 대한 체탐은 대병으로 할 것을 명하다.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 강효문(康孝文)과 도절제사(都節制使) 강순(康純)과 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 김겸광(金謙光)·도절제사(都節制使) 양정(楊汀)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체탐(體探)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대병(大兵)으로 체탐(體探)하는 것이요, 하나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체탐(體探)하는 것이다. 두 가지 종류의 체탐은 각각 이익(利益)과 해(害)가 있으니, 대병(大兵)이면 적을 위협하는 것이 이익이다. 깊이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 해(害)이고, 능히 자주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해(害)이다. 몰래 사람을 보내면 깊이 들어가는 것이 이익이고 자주 가는 것이 이익이다. 적에게 사로잡히는 것이 해(害)이다. 그 장단점(長短點)을 비교하면 대병(大兵)이 좋은 것 같다. 군사를 정비하고 방어(防禦)를 갖추는 것은 항상 적(敵)을 보는 듯이 하고, 그들이 오지 않으리라고 믿지말고 우리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라. 기회를 틈타서 형세를 맞아 변화하는 것은 경(卿)에게 있다.”

하였다.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10월 29일(기유)

강순이 제종 야인이 입조를 허락해 줄 것을 청해왔음을 아뢰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강순(康純)이 아뢰기를,

“제종 야인(諸種野人)들이 와서 고(告)하기를, ‘근자에 조현(朝見)할 수가 없었는데, 빌건대 금년에 입조(入朝)를 허락하여 주소서.’ 하므로 신이 예조(禮曹)의 수교(受敎)를 상고하니 ‘야인(野人) 등이 일시에 나온다면 반드시 역로(驛路)의 폐단을 끼칠 것이다. 입조(入朝)를 들어 주지 않으면 무수(撫綬)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숫자를 정하여 서울[京師]로 보내되 매 1년에 올량합(兀良哈)은 10명, 골간(骨看)은 7명, 알타리(斡朶里)는 7명, 화라온(火剌溫)은 5명으로 하며, 추장(酋長)이면 정관(正官) 1명에 겸종(傔從) 4명으로 하고 그 나머지는 정관(正官) 1명에 겸종(傔從) 2명으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청컨대 이것에 의거하여 공로(功勞)의 대소(大小)와 귀순(歸順)하는 정성(精誠) 여부를 따져 액수(額數)를 정하여 올려 보내게 하소서.”

하니, 회유(回諭)하기를,

“지금 경의 아뢴 것을 보고 이미 자세히 알았다. 여러 차례 내린 유서(諭書)에 의하여 공(功)이 있는 둔장(屯長)을 약수(約數)에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11월 11일(경신)

강순이 야인 올량합의 변경 침범에 대비하고 있음을 아뢰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강순(康純)이 치계(馳啓)하기를,

“지금 10월 28일에 수주(愁州)의 올량합(兀良哈) 유상동합(柳尙冬哈)·요시로(要時老) 등이 와서 고(告)하기를, ‘물건을 판매(販賣)하는 일로 인하여 고배(古背) 지방(地方)에 이르러 니마거 올적합(尼麻車兀狄哈) 우두(亐豆)·야다우(也多右)가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같은 부족 사람 지을개(之乙介)가 알타리(斡朶里)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 2백여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포주(蒲州)로 갔다.」고 하였고, 또 모리안(毛里安)에 사는 어허두(於虛豆)가 나에게 말하기를, 「같은 마을 사람 아을두(阿乙豆)가 나에게 이르기를, 근일에 벌춘(伐春) 등지에서 사냥하다가 지을개 등 2백여 명의 군사가 포주(蒲州)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유상동합·요시로의 말을 비록 믿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동쪽으로 간다고 성언(聲言)하고 서쪽을 치는 적(賊)의 음모(陰謀)는 예측하기 어려우므로, 신이 즉시 여러 진(鎭)·보(保)에 이문(移文)하여 이르기를, ‘올량합(兀良哈)이 만약 변경(邊境)을 범(犯)하거든 가볍게 쉽사리 나가서 싸우지 말고, 우선 이들을 일일이 타일러서 스스로 물러가도록 하여 혐의나 틈이 생기지 않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읽어보고 1본(本)을 베끼도록 하여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 양정(楊汀)에게 말을 달려 붙여 보내게 하였다.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12월 14일(갑오)

함길도 도절제사 강순에게 입조할 수 있는 야인들에 대해 유시하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강순(康純)이 치계(馳啓)하기를,

“올량합(兀良哈)·알타리(斡朶里)·골간(骨看) 등이 많이 입조(入朝)하고자 하니, 청컨대 그 충성(忠誠)의 진위(眞僞)를 보고, 그 공로(功勞)를 상고하여 전일의 정한 숫자에 의하여 올려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여 유시(諭示)하기를,

“지금 종성(鍾城)에 도착할 올적합(兀狄哈) 김우두(金亐豆)·사연 첩목아(沙延帖木兒) 등 25인을 모두 운(運)을 나누어 올려 보내라. 또 내조(來朝)하고자 하는 자가 있거든, 그 충성의 간절(懇切)함을 보고 그 되돌아가는 자는 모두 후하게 대접하여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게 하라. 전에 경(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공(功)이 있는 자 이외에는 올려 보내지 말라.’고 한 것은 도둑질한 자를 일컫는 말일 뿐이다. 올적합·골간은 본래 도둑질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그들을 박(薄)하게 대접하여 다시 한번 적(敵)이 되게 할 수 없다. 만약 다시 독약(毒藥)이나 박대한 사건과 고령(高嶺)의 알타리(斡朶里) 사건 따위를 말하는 자가 있거든 대답하기를, ‘너희들을 해(害)치려고 할 것 같으면, 어찌 반드시 독약을 설치하겠는가? 왕래하는 자가 많은데, 어찌 홀로 시시한 한 사람을 해쳤겠느냐! 한 사람의 병사(病死)로 인(因)하여 원망하는 것도 매우 말도 안된다. 너희들이 대접하는 것이 하나같지 아니한 것은 실제로 여러 진(鎭)의 풍년들고 흉년든 것에 기인한 것뿐이다. 어찌 전(前)에는 후하게 대접하다가 뒤에는 박하게 대접하겠는가? 고령(高嶺)의 사건은 알타리가 실로 너희를 두려워하여 숨을 곳을 찾아서 투항(投降)하여 들어온 것뿐이고 우리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이것을 가지고 우리를 원망하고 또한 멀리 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이와 같은 말을 들려 주어서 그 어리석은 의혹(疑惑)을 풀어 주라.”

하였다.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12월 17일(병신)

강순이 올적합 등이 와서 조현하기를 간청하는 일 등에 대해 아뢰다

함길도 절제사(咸吉道節制使) 강순(康純)이 종성 절제사(鍾城節制使) 배맹달(裵孟達)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성(城) 밑에 사는 올량합(兀良哈) 상호군(上護軍) 동랑개(同郞介)가 와서 고(告)하기를, ‘니마거 올적합(尼麻車兀狄哈) 도만호(都萬戶) 사영 첩목아(沙迎帖木兒)가 우리 집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보다 앞서 조선(朝鮮)에서 우리를 지극히 후하게 대접하였고, 또 여러 진(鎭)에 알현(謁見)하면 포(布)·염(鹽)을 많이 주었고, 또 정원(情願)에 따라서 입조(入朝)를 허락하여 면포(綿布)·의대(衣帶)에서 안마(鞍馬)에 이르기까지 주시어서 성상(聖上)의 은혜가 매우 무거웠다. 근년 이후로 접대(接待)하는 것이 조금 박(薄)하다가 약초(藥草)로써 독살(毒殺)하기에까지 이르니, 원한(怨恨)이 매우 깊다. 또 우리들이 알타리(斡朶里)를 공격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였는데, 그때 고령(高嶺)의 수장(守將)이 알타리(斡朶里)를 성(城) 안에 숨겨 두었다. 그러므로 추장(酋長)들이 의논하기를, 복수한다고 핑계하고 아울러 고령(高嶺)을 침구(侵寇)하고자 하였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만일 분원(忿怨)을 이기지 못하여 기병(起兵)하여 온다면 가볍게 더불어 싸우지 말라.’고 하고 전에 내린 유서(諭書)에 의하여 임시 핑계를 대고 일일이 타일러서 혐의와 틈이 없도록 하고, 만약 억지로 싸우자고 하더라도 형세가 부득이한 다음에야 임기응변(臨機應變)해야 할 일을 여러 진(鎭)·보(堡)에 이문(移文)하였습니다.”

하고, 강순이 또 아뢰기를,

“구주(具州)의 니마거 올적합(尼麻車兀狄哈) 김우두(金亐豆)가 그 관하(管下) 25인을 거느리고 종성진(鍾城鎭)에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들이 군사 3백명을 거느리고 이만주(李滿住) 관하(管下)의 사하치(沙下致) 부락(部落)을 지나 오는데, 남자는 모두 산에 올라갔으므로 여인(女人)·소동(小童) 53명과 우마(牛馬)55마리를 사로잡았습니다.’고 하고, 또 조현(朝見)하기를 청(請)하였기 때문에 신이 이미 여러 진(鎭)으로 하여금 그 공로(功勞)에 등급을 매겨 약수(約數)에 따라 올려 보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올적합(兀狄哈) 등이 수다(數多)하게 나와서, 조현(朝見)하기를 간청(懇請)한다면 이를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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