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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朝鮮王朝實錄)세조실록(43권13년)[32-1]

작성자山房山(榮國)|작성시간11.05.05|조회수51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4. 세 조 실 록[32-1]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3일(병인)

도총사의 군관 황사윤 등이 함길도 사세를 자세히 아뢰니 가자하다

도총사(都摠使)의 군관(軍官) 황사윤(黃斯允)·평로 장군(平虜將軍)의 종사관(從事官) 손소(孫昭)가 와서 아뢰기를,

“북청(北靑)의 싸움에서 적(賊)은 많고 우리는 적었으나, 우리가 능히 굳게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적은 매양 가볍게 싸웠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1인도 죽은 자가 없었으나, 적군은 사상자(死傷者)가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으며, 이시합(李施合)이 유시(流矢)에 맞아 죽으니, 이시애(李施愛)가 기운이 저하되어 항복하겠다고 빌다가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는데, 우리 군사들이 화살이 다하여 추격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들으니, 적세가 매우 성하여 소재지의 군관(軍官)이 모두 적에게 붙였고, 혹은 산골짜기에 떼지어 모여서 적의 지휘를 받으며, 비록 동향(同鄕)의 이웃이라 하더라도 자기에게 붙지 아니하는 자는 이를 죽이기 때문에 1인도 관군(官軍)에 내부(來附)하는 자가 없으며, 관군의 치중(輜重)과 초목(樵牧)은 도리어 겁략(劫掠)당한다고 합니다. 북청(北靑) 이북의 군수물(軍需物)은 적에게 점거(占據)당하였고, 홍원(洪原)의 군수물도 또한 적에게 털려서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므로, 지금 한 번 군사들을 먹이면 이미 다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염려스럽습니다. 또 이시애가 싸울 때를 당하여 항복하겠다고 빌다가, 강순(康純)과 하늘을 가리키면서 맹세하기를, ‘만약 장군이 군사를 물리시고 주상께서 유서(諭書)를 내리신다면, 즉시 마땅히 예궐(詣闕)하여 스스로 진술(陳述)하겠습니다.’고 하였으나, 이 그 거짓을 알고도 또한 병세(兵勢) 때문에 그대로 머물기가 어려워서 물러나 홍원(洪原)에 주둔(駐屯)하였고, 이준(李浚)도 또한 함흥(咸興)에 머물면서 말을 달려 종사관(從事官)을 보내어 남도(南道)의 군수물(軍需物)을 조전(漕轉)하여 사졸(士卒)을 휴양(休養)시켜서 후일의 거병(擧兵)을 꾀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적이 이미 북쪽으로 물러갔는데 어찌하여 능히 추격(追擊)하지 아니하고 물러나서 주둔(駐屯)하였는가? 이것은 매우 비겁(卑怯)한 짓이다. 그러나 병사(兵事)는 멀리서 제어하기 어렵고 승세(乘勢)를 틈타 변화하니 한 가지로 고집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고, 황사윤·손소 등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와서 이시애와 군관(軍官)이 항전(抗戰)한 상황 및 병마(兵馬)의 강약(强弱)과 기고(旗鼓)의 많고 적음을 자세히 진술하게 하고, 말하기를,

“이것이 이른바 아들이 아비를 희롱하는 군사이다.”

하였다. 황사윤이 잘 설명하고 핑계하여 대답하면서 자못 왕지(王旨)를 맞추었고 손소도 아뢰고 대답하는 것이 또한 상세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서 즉시 황사윤에게 당상관(堂上官)을 임명하고, 손소에게 작(爵)을 1급 더하였다. 이어서 내탕(內帑)의 궁검(弓劍)을 내어서 손소와 황사윤으로 하여금 스스로 골라서 차고 가게 하였다. 어찰(御札)을 황사윤과 손소에게 내려 주어 준(浚)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손소·황사윤의 말을 듣고서 사세(事勢)를 잘 알았다. 그대들이 모두 잘 처리하고 있으나 적세가 꺾여 약하기 때문에 물러갔는데, 이것은 틈을 탈 만한 기회(機會)였다. 다만 화살이 다하고 잇달은 후원(後援)이 없었기 때문에 추격할 수 없었다니, 이것 또한 가(可)한 것인가? 그대들은 마땅히 급히 위세(威勢)를 다시 떨쳐 현장에서 섬멸(殲滅)하는 일을 늦출 수가 없다. 그대들은 자세히 살펴 깊이 헤아리고, 이와 같은 유시(諭示)에 구애되지 말라.”

하고, 또 유시하기를,

“그대가 근로(勤勞)하여 한 가지 일도 착오(錯誤)가 없이 능히 여러 군사를 지휘하는데, 역적을 격파하여 쫓고 위세(威勢)를 크게 떨치도록 하라. 이에 특별히 우두머리되는 여러 장수들에게 약간 상을 주어서, 조정에서 가상히 여기고 위로하는 정(情)을 보이도록 하라. 그대는 이 뜻을 여러 장수에게 유시(諭示)하라. 나머지 군민(軍民)의 상벌(賞罰)은 그대가 그 등급을 상세히 기록하였다가 사건이 평정되거든 곧 아뢰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3일(병인)

도총사 이준에게 주군의 군민을 통유하는 방문을 지어 보내다.

함길도(咸吉道)의 군민(軍民) 등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너희들은 처음에 비록 적(賊)을 따랐지만, 실로 모두 정실(情實)을 알지 못하였고, 이시애(李施愛)에게 유인(誘引)당하고 협박(脅迫)당한 것이므로, 내가 일찍이 여러 차례 유서(諭書)를 내리어 협박당하여 따른 자들은 모두 죄를 면방(免放)한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나의 뜻을 다 알지 못하는 점이 있는 듯하여, 이제 또 유서(諭書)를 내리니, 유서가 도착하는 날에 처자(妻子)를 보호하고자 하는 자는 흩어져 본가(本家)로 돌아가서 생업(生業)에 안정되고, 종군(從軍)하여 공을 세우고자 하는 자는 군전(軍前)에 와서 투항하여 우리의 장졸(將卒)과 함께 할 것이다. 그 포상하는 절목(節目)은 앞에 내린 유서와 같다.”

하였다. 또 신숙주(申叔舟)에게 명(命)하여 도총사(都摠使)가 주군(州郡)의 군민(軍民)에게 통유(通諭)하는 방문(榜文)을 짓게 하여 보내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처음에 이시애(李施愛)가 요망한 말로 군중(群衆)을 현혹(眩惑)하여 말하기를, ‘후라토도(厚羅土島)의 수군(水軍)과 설한령(雪寒嶺)의 육군(陸軍)들이 인민(人民)을 모두 죽이고자 한다.’ 하고, 반역(反逆)을 토벌(討伐)한다고 성언(聲言)하고 당여(黨與)를 널리 모아서 절도사(節度使)와 왕인(王人)의 수령(守令)·교관(敎官)·만호(萬戶) 등을 마음대로 죽이고, 노예(奴隷)에 이르기까지 죽여 없애어 하나 남김이 없었다. 위세(威勢)가 부엉이가 날개를 활짝 펼치듯이 성(盛)하자 유서(諭書)를 거역하는 말이 불손(不遜)한 데 이르니, 그 대역 부도(大逆不道)함이 이보다 더 심함이 없었다. 도총사(都摠使)가 성상의 위명(威命)을 받들고 4도(道)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와서 역적(逆賊)을 토벌(討伐)하고, 본도(本道)의 인민(人民)을 초무(招撫)하고,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을 먼저 보내어 북청(北靑)에서 군병(軍兵)을 시위하고 국가의 위엄(威嚴)을 선양(宣揚)하였다.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가 우리의 우민(愚民)들을 몰아붙여 위협하고 우리의 관군(官軍)을 능멸(凌蔑)하더니, 선봉(先鋒)이 한 차례 접전(接戰)하자 패(敗)하여 물러갔다. 진북 장군(鎭北將軍)이 마땅히 군사를 놓아서 길이 구축(驅逐)하여 기어이 섬멸(殲滅)한 후에야 그칠 것이다. 다만 전에 내린 유서에 위협당하여 따른 자는 치죄(治罪)하지 말라고 한 것은 풍패(豊沛)7935) 의 고을 백성(百性)으로 하여금 봉적(鋒鏑)에 잘못 걸려서 옥(玉)과 돌[石]이 함께 불타버리도록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우선 군사를 거두고 위엄(威嚴)을 그쳐 우민(愚民)들이 화(禍)와 복(福)을 알아서 스스로 의혹을 풀도록 기다리려고 한 것인데, 하물며 6진(六鎭)의 군사(軍士)들이 순역(順逆)을 밝게 알아, 이미 진북 장군(鎭北將軍)과 더불어 이시애(李施愛)의 머리를 베어 공(功)을 세우고 스스로 속죄할 것을 약조(約條)하였으므로, 모든 장수(將帥)들이 점차 물러가 주둔하여 적(賊)의 평정(平定)되기를 기다렸다. 이제 또 유서(諭書)를 내리어, 적(賊)을 따른 군민(軍民)으로서 처자(妻子)를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집으로 돌아가고, 종군(從軍)하여 공을 세우려고 하는 자는 군문(軍門)에 와서 투항하라고 하였다. 오로지 그대들 군민들은 함께 이 뜻을 알아서 서로 알도록 하고 전화위복(轉禍爲福)하여 후회(後悔)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註 7935]풍패(豊沛) :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군사를 일으킨 땅으로서, 고조는 천자(天子)의 자리에 즉위하여 그 백성의 부역(賦役)을 면해 주었으므로, 후세의 사람들이 제왕(帝王)의 고향을 칭하는 말이 되었음. ☞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3일(병인)

병조에서 방을 붙여 군기를 수송할 사람을 모집하게 하다

임금이 강순(康純)의 군사가 화살이 다하였다고 하므로 군기(軍器)를 많이 보내고자 하여, 병조(兵曹)로 하여금 방(榜)을 붙여 사람을 모집하여 수송하게 하였다. 양인(良人)으로 3바리[駄]를 수송한 자는 2자급(資級)을 뛰어 올리고, 천인(賤人)으로 4바리[駄]를 수송한 자는 종량(從良)하게 하고, 그 응모(應募)하고자 하는 자는 병조(兵曹)에 고(告)하게 하였다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4일(정묘)

진북 장군 강순이 친정하겠다는 유서를 보고 탄식하다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이 임금의 친히 정벌(征伐)하겠다는 유서(諭書)를 보고 제장(諸將)과 더불어 탄식하기를,

“우리들이 하잘것 없어 적(賊)에게 군부(君父)를 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고, 이 때문에 눈물을 흘리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고, 사졸(士卒)들도 이 소식을 듣고서 더욱 스스로 분발(奮發)하였다.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8일(신미)

진북 장군 강순이 적정을 도총사에게 치보하다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이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에게 치보(馳報)하기를,

“홍원(洪原) 사람 진구성(陳九成)·조명세(曹命世)·서처중(徐處中)이 와서 고하기를, ‘본 고을의 관노(官奴) 거대(巨大)·건이(件伊)·우질지(牛叱知) 등이 이명효(李明孝)의 비밀 사주를 받고, 신 현감(新縣監) 김활(金活)을 죽이려 하여 방어도(魴魚島)에 이르렀습니다.’고 하므로, 즉시 군관 오자선(吳子善)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를 포위하였습니다. 잇달아 박중선(朴仲善)·김교(金嶠)·남이(南怡)를 보내어 거대 등을 체포하여 신문하니, 말하기를, ‘우리는 일찍이 이명효의 말을 듣고 우창신(禹昌新)을 죽이고 뒤따라 북청으로 갔더니, 이명효가 또 사주하기를, 「관군에 투항(投降)·의탁(依托)하는 진구성(陳九成) 등과 김활을 만나거든 아울러 격살(擊殺)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우리들이 작은 배를 타고 왔습니다. 거대·건이는 섬에 머물고 우질지는 뭍에 내려 속여서 말하기를, 「신관(新官)을 배알(拜謁)하려 왔다.」고 하고 밤을 틈타서 이를 죽이려 하였으나, 마침 신관이 진중(陣中)에 갔으므로, 우질지는 수청(隨廳)7941) 하면서 틈을 엿보다가 미처 해치지 못하고 붙잡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준(浚)이 명하여 다 목베도록 하였다.

[註 7941]수청(隨廳) : 조선조 때 종친부(宗親府)의 대군(大君)·군(君)과 의정부(議政府)의 의정(議政)·찬성(贊成)·참찬(參贊)과 기타 육조(六曹) 등 여러 관아의 고관(高官)에게 각각 녹사(錄事)·서리(書吏) 몇 사람을 배속(配屬)하여 사무를 보조하게 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집사(執事)라 하여 사저(私邸)에서 공무를 보게 하고, 다른 사람은 상관이 근무하는 관청에서 사무를 보게 하였는데, 이를 수청이라함. ☞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9일(임신)

종사관 김관이 적과의 대치 형세를 아뢰다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의 종사관(從事官) 김관(金瓘)과 윤산(尹山)이 왔다. 김관이 아뢰기를,

“홍원(洪原) 사람 진구성(陳九成)·김복중(金福中)·서처중(徐處中)·위인경(魏仁敬)·조명세(曹命世)·이중손(李仲孫)·서건중(徐建中)·신처인(申處仁)·진경의(陳敬義)·임흥달(任興達)·이종례(李宗禮)·강효맹(康孝孟)·김수강(金守江)·김중산(金仲山)·김중생(金仲生) 등이 적중(賊中)에서 와서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에게 투항(投降)하고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시애에게 유혹(誘惑)당하여 적중(賊中)에 잘못 빠졌습니다. 지금 장군(將軍)을 보니, 어찌 감히 귀순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 형세(形勢)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시애가 싸우다가 불리(不利)하고 사졸(士卒)이 많이 죽으니 물러가서 이성(利城)에 주둔(駐屯)하고 있으며, 전에 말한 이시합이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다만 이시애의 가족 2인이 죽었을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하고, 김관이 인하여 주사(舟師)를 청하고, 또 진구성 등이 적(賊)을 벗어나 와서 투항(投降)하였으니, 아름다운 상(賞)을 더하여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윤산이 아뢰기를,

“제가 처음에 강순(康純)의 글을 가지고 이시애의 진중(陣中)으로 가니, 이약동(李約同)·이명효(李明孝) 등이 1천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청(北靑)에 주둔(駐屯)하다가 저를 보고 길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너는 누구냐?’고 하므로, 대답하기를, ‘대전 별감(大殿別監)이다.’고 하였더니, 말하기를, ‘네가 진짜 대전 별감(大殿別監)이 아니면 마땅히 죽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말하기를, ‘이 길로 사람들이 서울에 내왕(來往)하는 자는 누구인들 나를 알지 못하겠는가?’고 하니, 이명효가 인우(仁佑)를 불러 보고, 그 진짜인 것을 알고서 곧 놓아 주어 드디어 이시애의 진중(陣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거느린 군사를 보니, 약 5, 6천여 명이었고, 사졸(士卒)이 모두 칼날을 드러내고 몇 겹으로 빙 둘러서고, 이시애는 장막(帳幕) 가운데 있다가 저를 보고 답배(答拜)하고 이어서 궤향(饋餉)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위하여 적(賊)을 토벌(討伐)하다가 끝내 반역(反逆)의 이름을 얻었는데, 예궐(詣闕)하여 스스로 진달(陳達)하고자 하나, 중로(中路)에서 해(害)를 입을까 두려워서 감히 실행하지 못한다. 만약 자제(子弟)를 골라서 본도(本道)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임명하여 민심(民心)이 안정(安靜)된다면, 내가 곧 말을 달려 대궐(大闕) 아래로 나아갈 것이다. 네가 이러한 뜻을 강영공(康令公)에게 자세히 고(告)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필상(尹弼商)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전일에 내가 말하기를, 강순(康純)이 군사를 후퇴(後退)하면 적(賊)이 반드시 군사를 전진(前進)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약동(李約同)이 나와서 북청(北靑)에 주둔하였다니, 내 말이 빈 말이었는가? 군사를 쓰는데 기회를 놓친 것이 이보다 심한 경우가 없다.”

하였다.

”그때 함길도(咸吉道) 사람들이 유혹당하여 남쪽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죽이었고, 관군(官軍)을 보면 모두 ‘우리들을 남김없이 죽일 것이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서로 거느리고 적(賊)에 붙었고 여러 장수들이 비록 은혜(恩惠)와 신의(信義)로써 무수(撫綏)하여도 저들이 모두 말하기를, ‘간신(姦臣)이 보낸 것이다’ 하고 원수처럼 보았다. 다만 강순(康純)만이 오래도록 북방(北方)에 있으면서 본래 은혜와 신의(信義)가 드러났는데, 군사를 거느리고 선발로 이르게 되자, 저들이 서로 이르기를,

“강영공(강영공)이 또한 다시 오는가?”

하고, 그 중에 옛날에 부리던 자들이 서로 거느리고 와서 보고 감히 오만[慢]한 말을 하지는 아니하였다. 윤산이 가자, 이시애가 여러 사람의 정(情)을 두려워하여 감히 해(害)하지 아니하고 궤향(饋餉)하여 보내왔다.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11일(갑술)

진북 장군 강순이 도총사에게 수군의 사용과 봉화 표시에 대해 치서하다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이 이준(李浚)에게 글을 보내기를,

“마운령(磨雲嶺)·마천령(磨天嶺)의 험조지(險阻地)는 한 사람이 관문(關門)을 막으면 만명이 대적(對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수군[舟師]을 사용하여 수륙(水陸)으로 아울러 전진하여야 싸움에 이길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군[舟師]이 이르지 않으니, 앉아서 사기(事機)를 놓치는 셈입니다. 또 듣건대, 적(賊)들이 두 영(嶺)에다 보(堡)를 쌓고 관문(關門)을 만들어 방어(防禦)가 견고하다니, 이것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원컨대 속히 치계(馳啓)하소서.”

하고, 또 글에 이르기를,

“본진(本陣) 앞의 홍원(洪原) 북봉(北峯)에서 함흥(咸興) 북봉(北峯)에 이르기까지 봉화(烽火)가 서로 연락되는데, 보통 때에는 봉화를 올리지 아니하고, 적변(賊變)이 있으면 봉화를 2번 올리고, 적(賊)이 30여 리(里)에 들어오면 봉화를 3번 올리고, 본진(本陣)과의 거리가 5리(里) 내이면 봉화를 5, 6번 올리며, 낮에는 연기(烟氣)로써 서로 연락하겠습니다.”

하였다.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13일(병자)

이준이 유자광을 보내어 적의 형세를 자세히 아뢰게 하고 원병을 청하게 하다

겸사복(兼司僕) 유자광(柳子光)이 함길도(咸吉道)에서 와서 아뢰기를,

강순(康純)이 적(賊)을 쫓아가서 잡은 나졸(邏卒)에게 그 형세를 신문(訊問)하게 하니, 말하기를, ‘이시애(李施愛)가 5진(五鎭)의 군사를 더 뽑아 와서 주둔하는데, 관군(官軍)과의 거리가 20리쯤이고, 적의 형세도 매우 강하여 다시 더불어 싸우고자 합니다.’고 하니,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이 이를 듣고서 신(臣)에게 이르기를, ‘서울에서 오는 자는 모두 이르기를, 「조정의 의논은 적의 형세가 이미 쭈그러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이보다 앞서 글을 가지고 가서 계달(啓達)한 사람들이 모두 적(賊)을 쉽게 여겨서 족히 평정할 것도 못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군사의 형세가 매우 어려우니, 그대가 그것을 자세히 아뢰어라. 다만 적들이 대중(大衆)인 것을 믿고서 물러가지 않고 천험(天險)을 지키면서 가볍게 나와서 싸우기를 구하니, 이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함흥(咸興) 이남의 백성들은 지금 비록 효유(曉諭)하여 순역(順逆)을 밝게 안다고 하나, 아직 미혹을 고집하고 반측(反側)하는 자가 많으니, 우리가 만약 군사를 모조리 동원하여 입공(入攻)하고 후원(後援)이 없다면, 반측하는 자가 뒤에 있다가 정세를 틈타서 변(變)을 일으킬까 염려된다. 이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원병(援兵)을 더하도록 청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군사를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군량이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이부(李溥)·김국광·윤필상 등에게 명하여 계책을 세우게 하니, 군량이 남은 것이 있었으므로, 명하여 정병(精兵) 1천 명을 더 뽑아서 구문신(具文信)을 시켜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13일(병자)

강순 이준에게 적의 형세와 구원병 파견을 청하는 글을 보내다

강순(康純)이 이준(李浚)에게 글을 보내기를,

“홍원(洪原)의 향리(鄕吏) 석유(石留)가 이명효(李明孝)의 군정(軍丁)을 불러 모아서 탕구령(湯口嶺)에 이르렀다가 나졸(邏卒)들에게 체포되어 왔습니다. 내가 그 형세를 물으니, 이르기를, ‘적이 갑술일(甲戌日)에 더불어 싸우고자 하다가, 다시 정축일(丁丑日)로 의논하였습니다. 이명효가 본고을과 북청(北靑)·갑산(甲山)·삼수(三水)의 군사를 거느리고 탕구령(湯口嶺)을 넘어서 본현(本縣)의 서쪽 신익평(申翼平)에 주둔하여, 함흥(咸興)의 왕래하는 길을 끊었고, 이시합(李施合)이 이성(利城) 이북의 군사를 거느리고 마어령(麽於嶺)을 넘어서 이명달(李明達)의 집 앞들에 주둔하였고, 이시애(李施愛)가 회령(會寧) 이북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문령(大門嶺)을 넘어서 열녀문(烈女門) 들에 주둔하여, 여러 날 오랫동안 버티면서 그 초채(樵採)7950) 의 길을 끊고서, 관군(官軍)이 자멸(自滅)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구원(救援)하는 군사를 마땅히 급히 들여 보내고, 또 군사들로 하여금 갑옷 위에 모두 흰 옷을 입게 하소서.”

하였다.

[註 7950]초채(樵採) : 나무하고 나물캐는 것.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17일(경진)

도총사 이준이 군사를 3진으로, 맹패를 9장으로 만들어 제장이 거느리게 하다

이준(李浚)이 군사를 나누어 3진(三陣)으로 만들었는데, 강순(康純)이 3천 명을 거느리고, 김교(金嶠)가 6백 28명을 거느리고, 박사형(朴思亨)이 2백 명을 거느리고, 남이(南怡)가 1백 며을 거느리고, 정준(鄭俊)·우공(禹貢)이 총통군(銃筒軍) 6백 명을 거느리고 1진(一陣)을 만들었으며, 어유소(魚有沼)가 6백 40명을 거느리고, 허종(許琮)이 2천 2백 80명을 거느리고 김숭해(金崇海)가 1천 2백 명을 거느리고, 민효원(閔孝源)이 6백 명을 거느리고, 정종(鄭種)·유흥무(柳興茂)가 총통군(銃筒軍) 6백 명을 거느리고 1진(一陣)을 만들었으며, 선형(宣炯)·오자경(吳子慶)·한계미(韓繼美)가 각각 1천 명을 거느리고, 이종(李徖)·민발(閔發)이 총통군(銃筒軍) 6백 명을 거느리고 1진(一陣)을 만들었다. 또 준(浚)이 거느린 군사를 가지고 3상(三廂)으로 만들었는데, 한계미를 중상(中廂)으로 삼고, 선형을 좌상(左廂)으로 삼고, 오자경을 우상(右廂)으로 삼았다. 또 맹패(猛牌)를 나누어 9장(九將)으로 만들었는데, 정숭로(鄭崇魯)에게 좌사대(左射隊)를 거느리게 하고, 서초(徐超)에게 우사대(右射隊)를 거느리게 하고, 노윤필(盧允弼)에게 전사대(前射隊)를 거느리게 하고, 홍윤청(洪允淸)에게 후사대(後射隊)를 거느리게 하고, 손효윤(孫孝胤)에게 좌사자위(左獅子衛)를 거느리게 하고, 경정(慶禎)에게 우사자위(右獅子衛)를 거느리게 하고, 김효조(金孝祖)에게 좌해청위(左海靑衛)를 거느리게 하고, 김효선(金孝先)에게 우해청위(右海靑衛)를 거느리게 하고, 경유공(慶由恭)에게 맹호위(猛虎衛)를 거느리게 하고, 오자치(吳子治)에게 팽배(彭排)를 거느리게 하고, 유자광(柳子光)에게 파적위(破敵衛)를 거느리게 하였다.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17일(경진)

이시애 토벌에 관한 성균관 사성 민정의 상서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민정(閔貞)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지난해에 윤자운(尹子雲)을 따라 함길도(咸吉道)에 가서 5진(五鎭)을 두루 지나면서 그 수륙(水陸)이 험(險)하고 평탄한 것과 군병(軍兵)의 강하고 약한 것과 인심(人心)의 속(俗)되고 고상한 것을 대략 일찍부터 알았습니다. 이제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의 변(變)을 듣고 천려일득(千慮一得)의 어리석음을 바치고자 원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재량(裁量)하여 주소서. 이제 이시애가 그 조부(祖父) 때부터 한쪽 변두리에 멀리 살면서 관작(官爵)을 세습(世襲)하였고, 수령(守令)을 역임(歷任)하였습니다. 여러 번 병권(兵權)을 맡고 양민(良民)을 많이 점령(占領)하여 노예(奴隷)로써 기르며 인아(姻婭)와 척당(戚黨)들이 그 지방(地方)에 반거(盤據)하여 그 은혜와 신의를 맺기를 두터이 하였으며, 그 위령(威令)을 행한 지 오래입니다. 그 병력(兵力)이 강함과 지리(地理)의 험함을 믿고, 불신(不臣)의 마음을 몰래 기르고 먼저 뜬소문[浮言]을 선동하며, 민심(民心)을 놀라게 하여 뒤흔들고, 이어서 의거(義擧)라고 핑계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들을 달려가서 죽였습니다. 그 흉악한 음모(陰謀)와 간사한 계책의 조짐이 있었으나, 길주(吉州) 이북 5진(五鎭)의 군사들은 성격이 본래 사납고 어리석어 흉한 음모에 현혹되어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관군(官軍)이 먼곳에서부터 급히 달려가서 사람과 말이 피곤하여 경솔히 나아가지 못하는데도, 이들 적(賊)들은 대중(大衆)을 거느리고 험한 산을 넘어서 대군(大軍)과 응전(應戰)하니, 그 형세가 반드시 지경을 휩쓸어 왔을 것입니다. 저들 협종(脅從)하는 무리들이 처음에는 간사한 음모에 현혹되어 역순(逆順)을 알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비록 점점 그것이 흉모(兇謀)인 줄을 알고 있으나, 능히 창을 거꾸로 잡지 못하는 것은 이는 반드시 그 심복(心服)들이 공격할까봐 두려워하는 때문이요, 능히 와서 투항(投降)하지 못하는 것은 그 처자(妻子)들이 해(害)를 입을까 두려워하는 까닭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서는, 수군[舟師]을 써서 적의 배후에서 형세를 보다가 적을 따르는 자의 족속(族屬)들에게 선언(宣言)하여 동요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와해되게 할 것이요, 그 허실(虛實)을 엿보아 혹은 큰 고개[嶺]에 의거하기도 하고 혹은 성읍(城邑)에 의거하기도 하면 이는 앞뒤에서 적을 받게 되는 것이니, 저들 군사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사람마다 각각 스스로 살려는 계책을 쓸 것이니, 이시애(李施愛)를 사로잡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수군[舟師]을 쓰지 않고 한갖 육지(陸地)로만 진군하기를 힘쓰면 이성(利城)과 단천(端川) 사이에서는 비록 승리할 것 같으나, 적이 만약 형세가 궁(窮)하면 반드시 고개[嶺]에 의거하여 굳게 지킬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비록 수만의 대군을 고개 아래로 내몰아서 오르려고 하더라도 오르지 못할 것이며 싸우려 하더라도 싸우지 못할 것인데,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 수만의 대군들이 어찌 모두 의갈(衣褐)을 입고 추위를 막겠습니까? 단천(端川)과 이성(利城)에 비록 일찍이 창고에 곡식이 있었으나 이제 이시애가 점거한 지 오래 되었으니, 어찌 한말 한되의 남은 곡식이 있겠습니까? 수만의 대군들의 군량(軍糧)을 반드시 능히 지탱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남방(南方)의 찬 눈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래도록 궁음 호한(窮陰冱寒)의 땅에서 머물게 하면 어찌 그 굶주리고 추운 것을 면하여 적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른 다음에야 비록 수군[舟師]을 쓰고자 한들, 몇 달 사이에 전함(戰艦)을 졸지에 준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이제 이시애가 큰 고개 넘어서 대장(大將) 강순(康純)과 더불어 서로 싸우다가 불리한데도, 아직도 머뭇거리면서 돌아가지 않고 있으니, 큰 고개의 요해처(要害處)에 성보(城堡)를 설치하고 함정(陷穽)을 판 뒤에 물러나서 굳게 버틸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은 보루(堡壘)를 높이 쌓고 성벽(城壁)을 굳게 하여 그 군사를 훈련하고, 역순(逆順)으로 거듭 타일러서 그들 마음을 이산(離散)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경상도(慶尙道)와 강원도(江原道)의 전함(戰艦)을 돌려서 독촉하여 모아서 정박(碇泊)시키고, 만약 또 부족하면 속히 조관(朝官)을 강원도와 함흥 이남으로 보내어, 연해(沿海)의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전함(戰艦)을 만들게 하고, 또 가까운 도의 포구(浦口)에다 배타는 데 익숙하고 효용(驍勇)한 병졸(兵卒)을 뽑아서 대장(大將)을 골라서 이들을 주고, 관군(官軍)의 곁에 둔(屯)치게 하였다가, 그 바람과 물의 편리한 때를 살펴서, 그 시기와 형세의 마땅함을 짐작하여 수륙(水陸)에서 일제히 진군(進軍)하면, 저들 적들은 반드시 군사를 나누어 막을 것입니다. 군사를 나누면 힘이 약해질 것이고, 힘이 약해지면 능히 안보(安保)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험애(險隘)에 의거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환난(患難)을 방비(防備)하는 방책입니다. 길주(吉州)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5개 험애(險隘)가 있으니, 마천령(磨天嶺)이 하나의 험애이고, 마운령(磨雲嶺)이 하나의 험애이고, 함관령(咸關領)이 하나의 험애이고, 철령(鐵嶺)이 하나의 험애이고, 대관령(大關嶺)이 하나의 험애입니다. 함관령(咸關嶺) 이북은 진실로 크게 염려되나, 그 이남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회양(淮陽)의 철령(鐵嶺)과 강릉(江陵)의 대관령(大關嶺)은 모두 다 천작(天作)의 험애(險隘)이니,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 거진(巨鎭)을 설치하여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저축하고 장수를 보내어 지켜서, 불우(不虞)의 변(變)을 방비(防備)할 것이니, 이것이 이에 주무 유호(綢繆牖戶)7952) 하여 나라를 보호하는 길입니다. 이제 북정(北征)의 일로 인하여 숙위(宿衛)하는 병졸(兵卒)이 전날보다 감(減)하여졌으니, 곧 하삼도(下三道)에서 바다 연변(沿邊)의 수졸(戍卒)들을 짐작하여 없애고 남은 병졸을 더 징발하여 서울을 굳게 지키면, 거의 근본을 굳게 하고 줄기도 강하게 하는 뜻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읽어보고 전지(傳旨)하기를,

“그대의 말이 매우 좋다. 내가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사람들이 민정(閔貞)이 상서(上書)하였다는 말을 듣고, 모두 말하기를,

“유자광(柳子光)의 뒤에는 한결같이 어찌 상서(上書)가 많은가?”

하였으니, 대개 그의 사진(仕進)하기를 구(求)하는 것을 비난한 말이었다.

[註 7952]주무 유호(綢繆牖戶) : 미리 환(患)을 예방하는 것을 말함. 《시경(詩經)》 빈풍(豳風) 치효(鴟鴞)편에, 새는 비가 오기 전에 뽕나무 뿌리를 물어다가 새둥우리의 빈틈을 막는다고 하였음. ☞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17일(경진)

강순이 북청 진입 때의 후방 수비에 관한 글을 이준에게 보내다

강순(康純)이 이준(李浚)에게 글을 보내기를,

“지금 날씨가 점차 추워지는 때를 당하여 여러 날 동안 군사 일에 고생하면서, 앉아서 양향(糧餉)만을 낭비하고 적(賊)을 쳐부술 기약(期約)이 없습니다. 18일 19일에 바로 북청(北靑)으로 깊이 들어가 끝까지 탐색하려고 계획하나, 다만 조을포(照乙浦)의 군채(軍寨)를 텅빈 채 내버려두고 지키지 않는다면, 적(賊)이 반드시 빈 틈을 타서 불태워 없애버려, 잇달아 후원(後援)하는 병사들이 의거할 만한 곳이 없어질까 두려우니, 모름지기 속히 군사를 보내어 와서 지키게 하소서.”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21일(갑신)

도총사의 종사관 김순명이 적과 대치하고 있는 사세를 아뢰다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의 종사관(從事官) 김순명(金順命)이 와서 아뢰기를,

“이시애(李施愛)가 군사를 주둔(駐屯)하여 홍원(洪原)·북청(北靑)의 땅 경계에 의지하고 있는데,

강순(康純)이 홍원(洪原)에 진을 치고, 준(浚)이 함흥(咸興)에 진을 치고 있으나, 원병(援兵)이 아직 오지 않고 군기(軍器)도 또한 적기 때문에 적(賊)과 서로 버티면서 즉시 들어가 공격하지 못합니다. 신이 길에서 군사(軍士)와 군기(軍器)를 보니, 이만하면 풍족히 쓸 만합니다. 선운(先運)이 이미 도착하면 마땅히 들어가 공격하겠습니다.”

하였다.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23일(병술)

병조 판서 이극배가 평안도의 군사 상황과 징병에 관해 아뢰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극배(李克培)가 평안도(平安道)에 있으면서 글을 승정원(承政院)에 받들어서 아뢰기를,

“본도(本道)의 군사 정원(定員)은 본래 넉넉하지 못한데,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이 거느리고 간 군사가 3천 1백 64명이고 절도사(節度使) 한계미(韓繼美)가 거느리고 간 군사가 3천 3백 82명이고 변진(邊鎭)에서 수자리사는 군사가 9백 65명이고, 진응사(進鷹使) 성윤문(成允文)을 맞아 올 군사가 5백여 명입니다. 군사가 많지 않으므로, 다만 보병(步兵)·정병(正兵) 가운데 장실(狀實)한 자 1천 명과 스스로 응모(應募)한 향리(鄕吏)·공사천(公私賤) 아울러 50인을 뽑아서 군사 장비[軍裝]를 정제(整齊)하여, 영원 군수(寧遠郡守) 허정(許偵)에게 주어서 거느리고 함길도(咸吉道)로 가게 합니다.”

하였다.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24일(정해)

도총사 이준이 강순과 더불어 크게 거병하여 입공하기로 하다

도통사(都統使) 이준(李浚)이 홍원(洪原)의 객사(客舍)에 군사를 주둔(駐屯)하니 강순(康純) 진영(陣營)과 거리가 10리쯤이었다. 준(浚)이 종사관(從事官) 이서장(李恕長)·김관(金瓘)을 보내어 강순(康純)과 더불어 크게 거병(擧兵)하여 입공(入攻)하기로 약속하고, 강순(康純)을 선봉(先鋒)으로 삼고, 어유소(魚有沼)를 그 다음으로 하고, 준(浚)을 또 다음으로 하였다. 강순이 준(浚)에게 치보(馳報)하기를,

“홍원(洪原) 사람 유흥달(劉興達)·동지(童知)·변섬(邊澹) 등이 이명효(李明孝)의 진영(陳營)에서 도망하여 와서 말하기를, ‘이명효가 1천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청(北靑)에 주둔(駐屯)하였고, 이시애(李施愛)가 2천 명을 거느리고, 이시합(李施合)·맹숭인(孟崇仁)이 각각 1천 명을 거느리고 모두 단천(端川)에 주둔하였는데, 이시애 등은 25, 26일간에 군사를 출발시켜 북청(北靑)에 모여서 관군(官軍)과 결전하기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시애가 온성(穩城) 사람 유득지(劉得之)를 부절도사(副節度使) 겸 북청 부사(兼北靑府使)로, 경원(慶源) 사람 최득경(崔得京)을 북청 판관(北靑判官)으로 가짜 임명하고 아전(衙前)을 거느리고 인신(印信)을 사용하여 공사(公事)을 행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7월 25일(무자)

이준이 강순·어유소와 함께 적을 무찌르고 연달아 진을 치다

이날 밤 3고(鼓)에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이 먼저 산개령(山介嶺)을 넘으니, 대장 어유소(魚有沼)가 다음으로 종개령(鍾介嶺)을 넘고,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이 잇달아 평포(平浦)에 이르렀다. 순(康純)이 준(浚)에게 보고하기를,

“내가 사자 위장(獅子衛將) 남이(南怡)·맹패장(猛牌將) 이숙기(李淑琦)를 전봉(前鋒)으로 삼아 종개동(鍾介洞)에 이르니, 적(賊)이 목채(木寨)를 설치하고, 북청(北靑) 사람 장봉(張奉)으로 하여금 1백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지키게 하였는데, 남이(南怡)가 먼저 목채(木寨)를 부수고 돌격(突擊)하여 2급(級)을 참수(斬首)하고 20여 인을 사로잡고 치중(輜重) 10여 바리[駄]를 빼앗으니, 나머지 잔당(殘黨)이 도주하였습니다. 위협받아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않겠다는 뜻을 가지고 타이르고, 사로잡은 자들을 놓아서 돌려보냈습니다. 산개령(山介嶺) 위에 이르니, 적(賊)이 또 목채(木寨)를 설치하고 관군(官軍)이 이르는 것을 망(望)보다가, 요새(要塞)를 막기를 더욱 튼튼히 하였는데, 이숙기(李淑琦)가 돌격하여 목채(木寨)의 문을 쳐부수고 고개를 넘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어유소(魚有沼)가 또 준(浚)에게 보고하기를,

강순(康純)과 더불어 길을 나누어 북청부(北靑府)로 들어가니, 가짜 부절도사(副節度使) 유득지(劉得之)가 재상(宰相)의 의물(儀物)을 갖추고 가짜 판관(判官) 최득경(崔得京)·사마동 만호(斜麽洞萬戶) 김극효(金克孝)와 이명효(李明孝)·이약동(李約同)·이양조(李陽祚)가 누(樓) 위에 모여서 연음(宴飮)하면서 사포[侯]를 쏘고 관비(官婢)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다가, 대군(大軍)이 갑자기 이르는 것을 바라보고, 황급히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대군(大軍)이 이를 틈타서 추격하여 30리 무회태(無懷台)에 이르러 9급(級)을 참수(斬首)하고 56인을 사로잡았으나, 위협당하여 따른 자는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타이르고, 사로잡은 자들을 놓아서 돌려보냈습니다. 북청부(北靑府)에 들어가니, 창고(倉庫)에 남은 곡식이 아직도 많았으나, 다만 전일에 쌓았던 목채(木寨)는 이미 적(賊)에게 불타 허물어졌으므로, 다시 새로운 목채(木寨)를 쌓았는데 잠깐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하였다. 준(浚)이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와 더불어 군영(軍營)을 연달아 진(陣)을 쳤다.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8월 1일(갑오)

북청에서 도총사 이준이 장수들과 입공책을 의논하다

관군(官軍)이 북청(北靑)에 머물렀다.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입공(入攻)할 계책(計策)을 의논하니,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절도사(節度使) 허종(許琮)·평로 장군(平虜將軍) 박중선(朴仲善)·대장(大將) 어유소(魚有沼) 등이 모두 말하기를,

“진북 장군(鎭北將軍)·평로 장군(平虜將軍) 두 장수가 선봉(先鋒)이 되고 우상 대장(右廂大將)이 후원(後援)이 되어 고사리 포로(高沙里鋪路)를 경유하고, 절도사(節度使)와 중상 대장(中廂大將)이 선봉(先鋒)이 되고, 도총사(都摠使)가 후원(後援)이 되어 거산 역로(居山驛路)를 경유하여 바로 이성(利城)으로 내달아서 이를 공격하소서.”

하고, 위장(衛將) 신주(辛柱)가 말하기를,

“적(賊)이 오래도록 북청(北靑)에 머물러 있고, 또 대군(大軍)이 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 창름(倉廩)이 아직도 완전하므로 양향(糧餉)을 가지고 우리 군사들에게 미끼를 삼아 들어가 점거(占據)하기를 엿보다가 맞아서 공격할까 두려우니, 가볍게 움질일 수가 없습니다. 다시 며칠을 머물면서 적정(賊情)을 살펴본 다음에 대거(大擧) 입공(入攻)하소서.”

하고, 총통장(銃筒將) 민발(閔發)이 말하기를,

“적(賊)이 먼저 고사리포(高沙里鋪)의 험애(險隘)를 점거하고 공고하게 한다면, 진북 장군(鎭北將軍)으로 하여금 먼저 고사리포(高沙里鋪)를 공격하여 적(賊)으로 하여금 이성(利城)으로 후퇴하여 달아나게 한 뒤에, 도총사(都摠使)가 거산(居山)을 경유하여 이성(利城)을 공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8월 1일(갑오)

도총사 이준이 군사들의 간청으로 북청 싸움에서 유공 자의 포상을 치계하다

정벌(征伐)에 따라간 여러 군사(軍士)들이 전날 북청(北靑)의 싸움에서 모두 공이 있었으나, 남이(南怡)·이숙기(李淑琦)만이 홀로 포상(褒賞)을 먼저 받고, 다투어 자기의 공(功)을 과시(誇示)하여 강순(康純)게 고(告)하기를,

“청컨대 속히 우리들의 공(功)을 등급매겨서 도총사(都摠使)에게 보고하고 치계(馳啓)하게 하소서.”

하니, 이 그 등급을 갖추어 준(浚)에게 보고하였다. 준(浚)이 말하기를,

“큰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먼저 그 공(功)을 과시하여 치계(馳啓)하는 것은 매우 불가(不可)하다.”

하였으나, 여러 군사들이 이를 다투어 마지 않으니, 준(浚)이 부득이하여 치계(馳啓)하였다. 군관(軍官) 구겸(具謙)·유포(柳晡)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분주(奔走)하면서 주장(主將)의 휘하(麾下)에서 몇 달을 고생하였는데, 공이 도리어 진북 군사(鎭北軍士)의 아래에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조정(朝廷)의 친속(親屬)들이 반드시 비웃고 책망하기를, ‘일을 매우 힘써 하고도 군공(軍功)을 세우지 못하였는가?’고 하면 오히려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우리들의 공(功)을 기록하여 주소서.”

하니, 준(浚)이 말하기를,

“북청(北靑)에서 싸운 군사들도 오히려 논공(論功)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전공(戰功)이 없는 자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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