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예종실록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예종실록(1권즉위년)[2]

작성자山房山(榮國)|작성시간11.05.05|조회수387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5. 예  종 실 록 [2]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0월 24일(경술)

유자광이 남이의 역모 사실을 고하니 남이를 붙잡아 실상을 묻다

어두울 때에 병조 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이 승정원에 나아가서 입직(入直)하는 승지 이극증(李克增)·한계순(韓繼純)에게 고하기를,

“신이 급히 계달할 일이 있습니다.”

하니, 이극증 등이 유자광과 더불어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서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으로 하여금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유자광을 불러서 보니, 유자광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신이 내병조(內兵曹)154) 에 입직하였더니 남이(南怡)도 겸 사복장(兼司僕將)으로 입직하였는데, 남이가 어두움을 타서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세조께서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이 아들과 다름이 없었는데 이제 나라에 큰 상사(喪事)가 있어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우니, 아마도 간신(姦臣)이 작란(作亂)하면 우리들은 개죽음할 것이다. 마땅히 너와 더불어 충성을 다해 세조의 은혜를 갚아야 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어떤 간사한 사람이 있어 난(亂)을 일으키겠는가?’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이 정사를 오로지하여 재물을 탐하니 이같은 무리는 죽이는 것이 옳다. 또 노사신(盧思愼)은 매우 불초(不肖)한 자인데, 너도 아느냐?’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하였습니다. 오늘 저녁에 남이가 신의 집에 달려와서 말하기를, ‘혜성(彗星)이 이제까지 없어지지 아니하는데, 너도 보았느냐?’ 하기에 신이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이제 천하(天河)155) 가운데에 있는데 광망(光芒)이 모두 희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없다.’ 하기에 신이 《강목(綱目)》을 가져와서 혜성이 나타난 곳을 헤쳐 보이니, 그 주(註)에 이르기를, ‘광망이 희면 장군(將軍)이 반역(叛逆)하고 두 해에 큰 병란(兵亂)이 있다.’고 하였는데, 남이가 탄식하기를, ‘이것 역시 반드시 응(應)함이 있을 것이다.’ 하고, 조금 오랜 뒤에 또 말하기를, ‘내가 거사(擧事)하고자 하는데, 이제 주상이 선전관으로 하여금 재상의 집에 분경(奔競)하는 자를 매우 엄하게 살피니, 재상들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수강궁(壽康宮)은 허술하여 거사할 수 없고 반드시 경복궁(景福宮)이라야 가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같은 큰 일을 우리들이 어찌 능히 홀로 하겠는가? 네가 또 어떤 사람과 더불어 모의(謀議)하였느냐? 또한 주상이 반드시 창덕궁에 오래 머물 것이다.’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내가 장차 경복궁으로 옮기게 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남이가, ‘이는 어렵지 않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이런 말을 내가 홀로 너와 더불어 말하였으니, 네가 비록 고할지라도 내가 숨기면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고, 내가 비록 고할지라도 네가 숨기면 내가 죽을 것이므로, 이같은 말은 세 사람이 모여도 말할 수 없다. 또 세조가 민정(民丁)을 다 뽑아서 군사를 삼았으므로 백성의 원망이 지극히 깊으니 기회를 잃을 수 없다. 나는 호걸(豪傑)이다.’ 하였는데, 신이 술을 대접하려고 하자 이미 취했다고 말하며 마시지 아니하고 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니, 유자광이 대답하기를,

“밤을 타서 가서 잡으면 혹시 도망해 숨을까 두려우니,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한 사람을 시켜 명패(命牌)156) 를 가지고 부르면 나치(拿致)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고, 곧 명하기를,

“어찌 반드시 날이 밝기를 기다릴 것인가?”

하고, 곧 명하여 이극증과 한계순을 불러, 한계순에게 명하여 입직(入直)한 사복장(司僕將) 거평군(居平君) 이복(李復)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잡게 하고, 또 환관(宦官) 신운(申雲)에게 명하여 같이 가게 하였다. 이어서 입직한 도총관(都摠管) 노사신(盧思愼)·강곤(康袞), 병조 참판 신승선(愼承善) 등을 불러 입시하게 하고, 도총부(都摠府)에 명하여 군사로 하여금 갑옷을 두르고 궐문(闕門)을 지키게 하였으며, 선전 표신(宣傳標信)을 선전관(宣傳官)에게 주어 입직한 위장(衛將)으로 하여금 병기(兵器)를 정돈하여 각소(各所)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고, 또 병조로 하여금 군사를 나누어 도성문(都城門)과 성(城)을 지키게 하였다. 명하여 밀성군 이침(李琛)·하동군 정인지(鄭麟趾) 등 여러 종친과 재추를 부르고, 또 안중경(安仲敬)으로 하여금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우참찬 윤필상(尹弼商)을 불러서 입시하게 하였다. 부(溥)가 아뢰기를,

“7, 8일간을 격하여 남이가 신의 입직한 곳에 이르러 신에게 묻기를, ‘종친이 입직하는 것은 예전 예(例)대로 하는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주상께서 나와 귀성군(龜城君)·하성군(河城君)이 졸곡(卒哭) 전까지 날을 번갈아 직숙(直宿)하도록 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남이가, ‘낮에는 어떻게 하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낮에는 상직(常直)하되 연고가 있으면 나간다.’고 하였더니, 남이가 말할 것이 있는 듯 머뭇머뭇하다가 나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형편을 엿본 것이다.”

하였다. 한계순·이복(李復)·신운(申雲)이 겸사복(兼司僕) 박지번(朴之蕃)·유정(柳) ·조한신(曹漢臣)과 위사(衛士)를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남이의 집에 가서 에워싸고 사람을 시켜 명패(命牌)를 가지고 부르기를 심히 급하게 하였다. 남이가 일이 발각되었는지 의심하여 없다고 속였는데, 잠시 후에 남이가 칼을 차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담을 넘어서 나갔다. 군사들이 그 머리털을 꺼두르므로 남이가 칼을 뽑으려고 하자 군사들이 함께 잡아 묶고 첩기(妾妓) 탁문아(卓文兒)를 잡아 왔다. 삼경(三更)에 임금이 수강궁의 후원(後苑) 별전(別殿)에 나아가 밀성군 이침(李琛)·영순군 부(溥)·영의정 준(浚)·하성군 정현조(鄭顯祖)·하동군 정인지(鄭麟趾)·봉원군 정창손(鄭昌孫)·고령군 신숙주(申叔舟)·상당군 한명회(韓明澮)·중추부 영사 심회(沈澮)·좌의정 박원형(朴元亨)·창녕군 조석문(曹錫文)·좌참찬 김국광(金國光)·병조 판서 박중선(朴仲善)·우참찬 윤필상(尹弼商)·파산군 조득림(趙得琳)과 노사신(盧思愼)·강곤(康袞)·신승선(愼承善)·복(復)과 승지(承旨)·주서(注書)·겸사복(兼司僕)·선전관(宣傳官) 등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남이에게 묻기를,

“네가 요사이 어떤 사람을 보고 어떤 일을 말하였느냐?”

하니, 남이가 대답하기를,

“신이 신정보(辛井保)를 보고 북방(北方)의 일을 의논하였고, 다른 말한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네가 문치빈(文致彬)을 며칟날 보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문치빈을 본 것이 며칠 되었습니다. 신이 시폐(時弊)를 진달하고자 하여 상소를 초하는데 문치빈으로 하여금 교정하게 하였을 뿐이고 다른 말한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어제 오늘 중에 네가 어떤 사람을 보았느냐?”

하니, 남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망연(茫然)히 오래 있다가 말하기를,

“오늘 이지정(李之楨)의 집에 가서 서로 바둑을 두다가 인하여 말하기를, ‘북방에 일이 있으면 나라에서 반드시 나를 장수로 삼을 것인데 누가 부장(部將)을 맡을 만한가?’ 하니, 이지정이 말하기를, ‘민서(閔敍)·김견수(金堅壽)·장효손(張孝孫)이 모두 겸인지용(兼人之勇)157) 이 있으나, 장효손은 외방에 있고 김견수는 이미 현용(顯用)되었고 또 외방에 있으니, 오직 민서가 좋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드디어 민서의 집에 가서 지난해 거산(居山)의 싸움을 서로 말하고 또 북방의 성식(聲息)을 말하니, 민서도 방수(防戍)할 요지를 말하고 인하여 성변(星變)158) 을 말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성변이 이와 같으면 사람이 유리(流離)되는데 근심이 없겠는가?’ 하고 인하여 술을 마시고 나왔습니다. 또 유자광의 집에 가서 이야기하다가 곁에 있는 책상에서 《강목(綱目)》을 가져다가 혜성이 나타난 한 구절(句節)만 보았을 뿐이고 다른 의논한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여러 재상에게 명하여 국문(鞫問)하게 하였으나 실정을 다 말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유자광과 남이를 면질(面質)하도록 명하니, 유자광이 남이를 불러서 남이가 말한 것을 갖추 말하였다. 남이가 비로소 유자광이 와서 계달한 것을 알고 놀라, 머리로 땅을 치며 말하기를,

“유자광이 본래 신에게 불평을 가졌기 때문에 신을 무고(誣告)한 것입니다. 신은 충의(忠義)한 선비로 평생에 악비(岳飛)159) 로 자처하였는데,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민서가 마침 순장(巡將)으로서 부름을 받고 왔는데, 임금이 민서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남이가 신의 집에 이르러 지난해 거산(居山)의 싸움을 말하고 또 북방의 성식(聲息)을 말하였는데, 신도 북방 장성(長城)의 이로움을 논하기를, ‘황보인(皇甫仁)이 성을 쌓을 당시에는 잘못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혜택을 입는다. 옛사람 가운데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서산(西山)에 심어서 오랑캐[胡]를 방어한 이가 있으니, 지금도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성을 쌓지 아니한 곳에 심어서 야인(野人)의 충돌을 막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고 남이도 그 이해(利害)를 진술하였는데, 인하여 말하기를, ‘천변(天變)이 이와 같으니 간신(姦臣)이 반드시 일어날 것인데, 나는 반드시 먼저 주륙(誅戮)을 받을까 염려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듣고 놀라며 말하기를, ‘간신이 누구인가?’ 하니, 남이가, ‘상당군 한명회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어찌하여 일찍 계달하지 아니하는가?’ 하니, 남이가, ‘하는 것을 자세히 들은 뒤에 계달하겠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이 말은 세 사람이 모여도 발설할 수 없다.’ 하고서 인하여 술을 마시고 갔는데, 신이 즉시 치계(馳啓)하고자 하였으나 자세히 듣지 못하였고, 또 순장(巡將)으로서 행순(行巡) 때가 급박하고 꾀함이 익숙하지 못해서 미처 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남이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이 과연 민서와 더불어 말하였습니다. 한명회가 일찍이 신의 집에 이르러 적자(嫡子)를 세우는 일을 말하기에 신은 그 난(亂)을 꾀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니, 한명회가 자리를 피하며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남이의 집에 가서 남이와 더불어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청컨대 대변(對辨)하게 하소서.”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남이가 꾸민 말이니 족히 분변할 것이 못된다. 경은 자리에 나아가라.”

하였다. 문치빈(文致彬)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번에 남이가 상소의 초안(草案)을 신에게 주어 교정하게 하였는데, 초안은 지금 신의 집에 있고 다른 말을 들은 바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지정(李之楨)에게 물었으나 이지정의 대답이 바르지 아니하므로, 곤장 30여 대를 때리자 다만 말하기를,

“남이가 말하기를, ‘만약 올량합(兀良哈)을 치는데 나를 장수로 삼으면, 누구에게 위장(衛將)을 맡길 만하냐?’고 하기에 신이 민서·장효손을 들어 말하자 민서가 좋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탁문아(卓文兒)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남이가 요즈음 북방에 성식(聲息)이 있다고 말하고 사람을 시켜 갑옷을 수리하게 하고, 또 박자하(朴自河)·박자전(朴自田) 형제가 와서 활과 화살을 만들며, 남이는 항상 야행(夜行)의 금지를 범하고 출입하는데 물으면 꾸짖고 말하지 아니합니다. 일찍이 강 정승(康政丞)이 집에 왔는데 남이가 외청(外廳)에서 마주 대해 술을 마시었고, 또 선전관(宣傳官) 이계명(李繼命)이 교위(校尉) 5, 6인을 데리고 집에 왔다가 갔는데, 남이가 그 어미에게 고하기를, ‘첨지(僉知) 정숭로(鄭崇魯)가 이계명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달아났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이지정에게 묻기를,

“네가 어려서부터 남이와 사귀어왔으니, 남이의 하는 것을 네가 모르지는 아니할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남이가 겸 사복장(兼司僕將)으로서 입번(入番)하였는데, 신이 가서 보니 남이가 《고려사(高麗史)》를 읽다가 인하여 말하기를, ‘내가 상소하여 불법(佛法)과 병위(兵衛) 등의 일을 진달하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또 남이가 일찍이 신에게서 《병요(兵要)》를 배웠으나, 남이의 꾀하는 바는 신이 진실로 알지 못합니다.”

하므로, 또 곤장 30여 대를 때렸으나 불복하였다. 남이의 서삼촌[孽叔] 남유(南愈)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번 신이 남이의 집에 가니 김창손(金昌孫)·이중순(李仲淳)이란 자가 먼저 이르렀는데, 서로 바둑도 두고 작은 과녁에 활을 쏘았으며, 다른 것은 들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곤장 20대를 때려도 불복하였다. 또 남이에게 묻기를,

“남유가 말하기를 네가 활쏘고 바둑을 두었다고 하는데, 네가 어찌하여 졸곡(卒哭) 전에 활을 쏘고 바둑을 두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무인(武人)이므로 활힘[弓力]이 장차 줄어질까 두려워하여 김창손(金昌孫)·박자하(朴自河)·이중순(李仲淳)의 무리들과 더불어 활을 쏘았고, 또 조영달(趙穎達)·강이경(姜利敬)과 더불어 활을 쏘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조의 영(靈)이 소소(昭昭)하게 빈전(殯殿)에 계시니, 너는 사실대로 말하라.”

하고, 드디어 경복궁으로 옮기겠다는 등의 말은 무엇을 이르는 것이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신이 어찌 능히 주상을 경복궁으로 옮기게 하겠습니까?”

하므로, 곤장을 치도록 명하였으나 그래도 불복하자 한명회가 아뢰기를,

“먼저 남이의 집 노복(奴僕)을 국문하여 상시로 왕래하는 사람을 묻게 하소서.”

하였다. 명하여 곧 노비 5, 6명을 나치하여 일일이 물으니, 계집종 막가(莫加)가 대답하기를,

“요사이 정승(政丞)이라 일컫는 이가 왔었습니다.”

하니, 한명회가 묻기를,

“지금 정승이 많은데 네가 본 이는 누구냐?”

하니, 막가가 말하기를,

“성명은 알지 못하고 검은 수염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자, 강순(康純)이 앉아 있다가 자리를 피하며 말하기를,

“신이 강 태감(姜太監)의 집을 사고자 하여 남이의 집을 지나면서 들어갔었습니다.”

하였다.

[註 154]내병조(內兵曹) : 조선조 때 궁중에서 시위(侍衛)·의장(儀仗)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던 병조에 딸린 관아. ☞

[註 155]천하(天河) : 은하수. ☞

[註 156]명패(命牌) : 위쪽에 ‘명(命)’자를 쓰고 붉은 칠을 한 나무패. 임금의 명으로 3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부를 때, 이 패에 성명을 써서 돌렸음. 이 패를 받고 올 뜻이 있으면 ‘진(進)’, 안 올 때는 ‘부진(不進)’이라고 써서 도로 바치었음. ☞

[註 157]겸인지용(兼人之勇) : 많은 사람을 당해낼 만한 용기. ☞

[註 158]성변(星變) : 혜성이 나타난 일. ☞

[註 159]악비(岳飛) : 남송(南宋) 때의 무장으로 충의가 뛰어났음.☞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0월 26일(임자)

전 판관 이수붕의 말에 따라 문효량과 이계명 등 역당을 하옥시키다

전(前) 판관(判官) 이수붕(李壽朋)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외방(外方)에 있을 적에 겸사복(兼司僕) 문효량(文孝良)이 신의 집 지키는 계집종 덕지(德只)를 첩으로 삼아 신의 집에 우거(寓居)하였는데, 이 먼저 10여 일 사이에 들어와서 호도(胡桃)를 신숙주(申叔舟)에게 주고자 하여 문효량을 시켜 편지를 쓰게 하였더니, 문효량이 붓을 잡고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요즈음 나라에 일이 있으니 아직 천천히 하라.’고 하기에, 신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남이가 말하기를,「성변(星變)이 바야흐로 나타나니, 반드시 간신(姦臣)이 난(亂)을 꾀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기에, 내가 간신이 누구냐고 물으니, 남이가 말하기를, 「한명회이다. 그러나 그 자세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감히 계달하지 못한다. 너도 떠들지 말고 서서히 그 형세를 보라.」고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저물어 문효량이 바깥에서 술이 취해 돌아와 취침하였는데 더불어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신이 묻기를, ‘네가 어제 어디에서 술을 마시고 취하였느냐? 그리고 먼젓날 말하던 일을 자세히 들려 주겠나? 이러한 큰 일은 빨리 계달함이 마땅하고, 늦추거나 머무를 수 없다.’ 하니, 문효량이 말하기를, ‘남 판서(南判書)162) 가 전균(田畇)으로 인하여 계달하니, 성상이 이르기를, 「누설하지 말라. 내가 마땅히 자취없이 도모하여 근일(近日)을 보전하게 하겠다.」 하고, 성상이 드디어 병위법(兵衛法)을 더욱 엄하게 하였다.’ 하고, 이에 전사(傳寫)한 전지(傳旨)를 신에게 보였는데, 거기에 있기를, ‘병위(兵衛)는 엄하게 아니할 수 없는데, 자질구레한 무리가 한갓 조석(朝夕)의 영화를 다투어 권문(權門)의 붕당(朋黨)이 되어서 임금의 어리고 약함을 가볍게 여기고 자기의 영달을 다행으로 여긴다.’는 등의 말이 있으므로, 신은 생각하기를 과연 성상이 이미 알고 계신다고 여겼는데, 이제 변이 있음을 듣고 감히 계달합니다.”

하므로, 이수붕에게 술과 음식을 먹이도록 명하였다. 이 먼저 문효량이 남이의 집에 왕래한 까닭으로 나치(拿致)되었는데, 이수붕이 와서 계달함에 미쳐 임금이 문효량에게 묻기를,

“네가 남이와 더불어 무엇을 꾀하였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10월 초7일에 겸사복(兼司僕)으로서 입번(入番)하였고, 남이도 사복장(司僕將)으로서 입직(入直)하였는데, 밤에 신이 남이의 침소에 나아가니, 남이가 《고려사(高麗史)》를 읽다가 신돈(辛旽)·신우(辛禑)의 일에 이르러 슬퍼하기를 그만두지 아니하며 인하여 신에게 이르기를, ‘혜성(彗星)이 지금도 있느냐?’고 하기에 신이 아직 있다고 대답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천변(天變)은 헛되지 아니하는데 어찌하여 오랫동안 없어지지 아니하는가?’ 하였습니다. 이 때 운수군(雲水君) 효성(孝誠)이 오위장(五衛將)으로서 입직하여 남이와 벽이 가로막혔는데, 남이가 말이 들릴까 두려워하여 두세 번 불렀으나 응답이 없었다. 남이는 그가 깊이 잠든 것을 알고 신에게 이르기를, ‘이제 천변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간신이 난(亂)을 꾀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기에, 신이 간신이 누구냐고 물으니 남이가 대답하지 아니하므로, 신이 억지로 물어보니, 남이가 말하기를, ‘한명회가 어린 임금을 끼고 권세를 오로지하려고 한다.’ 하고, 인하여 탄식하기를, ‘내가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입었고 너도 해외(海外) 사람으로 겸사복에 이르렀으니, 나라의 은혜를 갚기를 도모할 마음이 없겠는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내가 본래 공이 없는데도 겸사복이 되었으니, 은혜를 갚기를 도모할 마음이 어찌 우연하겠는가?’ 하고, 인하여 묻기를, ‘이는 작은 일이 아닌데, 누구와 더불어 하려는가?’ 하니, 남이가 대답하기를, ‘강순(康純)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나 나는 늙었고 자네는 바야흐로 굳세고 씩씩하니, 난을 평정하는 일은 자네가 마땅히 맡아야 한다.」라고 하더라.’ 하였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강순이 반드시 참여해 안다고 생각합니다.

초10일에 신이 출번(出番)하여 겸사복(兼司僕) 신양(辛良)과 더불어 남이의 집에 가서 서로 만나보고 장차 돌아오려고 하는데, 남이가 신을 만류하기를, ‘자네와 더불어 의논할 일이 있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아무리 올바른 사람이라도 권세를 잃으면 해를 당하고, 아무리 간사한 사람이라도 권세을 얻으면 날개를 편다. 만약 이 일을 비밀히 못하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니, 비록 처자(妻子)라 할지라도 조심하여서 더불어 말하지 말아라.’ 하기에 신이 묻기를, ‘저 사람들이 어느 때에 거사(擧事)하겠는가?’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산릉(山陵)에 나아가는 날에 거사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제 미리 계달하지 아니하면 때에 임하여 창졸간에 어떻게 사변에 응하겠는가?’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때에 임하여 먼저 두목들을 없앤 뒤에 계달하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무슨 까닭으로 곧 계달하지 아니하는가?’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형적이 나타나지 아니하였는데 무슨 근거로 계달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그러면 먼저 전균(田畇)에게 말하기를, 「이같은 일이 있음을 들었으나, 다만 형적이 드러나지 아니한 때문에 즉시 계달하지 못한다.」라고 하여, 전균으로 하여금 또한 알게 하지 아니하는가? 또 거사하는 기일을 자네도 알면서 어찌하여 형적이 나타나지 아니하였다고 이르는가?’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기일을 비록 정하였을지라도 저들이 만약 숨기면 내가 한 몸으로 증거를 밝힐 수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19일에 신이 출번(出番)할 때에 사복장청(司僕將廳)에 가니, 문원군(文原君) 유사(柳泗)·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 및 정숭로(鄭崇魯) 등이 자리에 앉았는데, 남이가 김국광(金國光)이 겸 병조 판서에서 파면된 것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주상의 성명(聖明)하심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이다. 어찌 능히 그 하는 바를 알고서 바꾸었겠는가?’라고 하자, 유사가 말하기를, ‘동맹(同盟)163) 의 일을 어찌 이처럼 말하는가?’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것이다. 성상과 동맹이 어찌 같을 수 있는가?’ 하였습니다. 그날 신이 남이의 집에 가니 유계량(柳繼良)이 먼저 가서 문(門)에 있는데, 남이와 서로 만나보고는 유계량은 먼저 나가고 신은 그대로 머물러서 남이에게 말하기를, ‘이제 전지(傳旨)를 보니, 「뜻밖에 자질구레한 무리가 조석(朝夕)의 영화를 다툰다.」라고 하였으므로 주상께서 반드시 이미 알았을 것이다. 만약 영공(令公)이 계달하지 아니하고 일이 드러나면 발명(發明)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모름지기 속히 먼저 계달하라.’고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군무(軍務)의 모든 일을 성상께서 엄하게 계칙(戒飭)하므로, 헤아리건대 저 군흉(群兇)들이 점차 저절로 소멸될 것이다. 지금 이 전지는 반드시 성상께서 보전하게 하려고 한 것인데 만약 저 흉도들의 모의가 저절로 사라지면 반드시 일을 좋아해서 계달할 것인가? 삼가하여 누설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성상께서 이미 아신다고 생각하고, 신 등의 고함으로 인하여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문효량이 오히려 남이를 돕고자 하여 말이 바르지 아니함이 많으니, 곧 곤장 50대를 때리자 이에 말하기를,

남이가 말하기를, ‘산릉에 나아갈 때에 중로에서 먼저 두목격인 장상(將相) 한명회 등을 없애고, 다음으로 영순군(永順君)·귀성군(龜城君)에게 미치며, 다음에는 승여(乘輿)164) 에 미쳐서,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서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재상 중에 더불어 도모한 자는 누구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강순(康純)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곧 명하여 강순을 항쇄(項鎖)하게 하여 물으니, 강순이 울며 대답하기를,

“신이 처음에 갑사(甲士)로서 외람되게 성은(聖恩)을 입어 벼슬이 극품(極品)에 이르렀으며 또 공신이 되었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모반(謀反)하겠습니까?”

하니, 명하여 항쇄를 풀고 다시 앉게 하고, 인하여 술을 내려주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경을 의심하겠는가? 경은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다. 이계명(李繼命)에게 묻기를,

“네가 어찌하여 전지를 받아 분경(奔競)을 살피면서 사사로이 남이를 보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마침 그 집을 지나다가 물이 먹고 싶어서 들어갔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이준(李浚)이 말하기를,

“이계명이 ‘머리를 쳐부순다.’는 말을 숨기니, 그 뜻이 매우 간사합니다.”

하여 다시 물으니, 그제야 그 사실을 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행왕(大行王)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이계명은 근시(近侍)에 마땅치 못하다고 하시더니, 이제 과연 그렇다.”

하고, 명하여 역당(逆黨)을 의금부에 하옥(下獄)시키고, 시위(侍衛)하는 종친·재추로 하여금 모두 금중(禁中)에서 자게 하였다. 또 사련인(辭連人) 박무(朴茂)·김연근(金連根)·문효원(文孝元)·최담(崔淡)은 모두 외방에 있었는데, 의금부에 명하여 잡아오게 하였다. 의금부에서 탁문아(卓文兒)를 국문하니, 말하기를,

“남이가 이달 20일 후부터 연 이틀 동안 명함[刺]을 가지고 나갔다가 혹은 날이 저물거나 혹은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는데, 이달 19일에 출번(出番)한 이후로는 환도(環刀)와 궁전(弓箭)을 반드시 베개 옆에 두었으며, 또 10여 일 전 밤에 남이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어째서 나를 멸시하느냐? 내가 너를 양인(良人)으로 만들면 이같이 아니할 것이다.’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어전(御前)에서 정재(呈才)165) 하는 사람이 어찌 양인이 되겠습니까?’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너 자신뿐만 아니라 네 아비도 내가 마땅히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당신이 어떻게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하니, 남이가 꾸짖었습니다. 또 5, 6일에 내가 계집종 막덕(莫德)과 더불어 측간(廁間)에 가서 말하기를, ‘요즈음 너의 주인 행동이 이상하다.’고 하니, 막덕이 말하기를, ‘국상 때에 어찌 작첩(作妾)하는 일이겠소? 난(亂)을 도모하는 일이 아닐까요?’ 하였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이 말은 단지 나와 너만 말하고 여러 종들에게는 말하지 말아라.’ 하였습니다. 24일 밤에 사내종 타내(他乃)가 명패(命牌)가 왔다고 급히 고하니, 남이가 놀라 일어나서 겁내어 떨며 바로 칼을 잡고 문을 나갔다가, 갑자기 도로 들어와서 갓[笠]을 쓰고 달아나며 내가 없다고 숨기라고 말하고, 내게 말하기를, ‘활과 화살을 찾아서 종 돌산(石乙山)에게 주라.’ 하며 인하여 떠들지 말도록 경계하고는 급히 말안장을 지워 몰고 와서 동산(東山)으로 바로 나갔는데, 내가 남이의 어미에게 달려가서 고하기를, ‘판서(判書)가 칼을 잡고 활을 가지고 달려 나갔습니다.’라고 하니, 어미가 말하기를, ‘이 자식은 어려서부터 활과 칼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註 162]남 판서(南判書) : 남이를 가리킴. ☞

[註 163]동맹(同盟) : 같은 공신. ☞

[註 164]승여(乘輿) : 임금의 수레. ☞

[註 165]정재(呈才) : 나라에서 연회(宴會)를 하거나 큰 행사가 있을 때 춤과 노래를 맡아 보던 천례(賤隷).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