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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순조실록(21권18년)

작성자山房山(榮國)|작성시간09.12.14|조회수122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3). 순조실록

 

 

순조 21권, 18년(1818 무인 / 청 가경(嘉慶) 23년) 3월 10일(정미)

 

우의정 남공철이 고 참판 윤심형을 증직토록 아뢰다

차대하였다. 우의정 남공철이 아뢰기를,

“고(故) 참판 윤심형(尹心衡)이 영조(英祖) 때에 젊은 나이로 벼슬하여 명망이 일세(一世)를 떨쳤으나 정미년3942) 이후로 시비가 혼잡된 것을 보고 벼슬에의 뜻을 끊고 시골에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래서 영조께서는 여러 차례 포장(褒奬)을 더하면서 탁무(卓茂)와 엄자릉(嚴子陵)3943) 에 비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사이 수십 년 동안 세도(世道)의 소장(消長)과 굴신(屈伸)이 한결같지 않게 변천되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지조로 하였음을 논한다면 오직 윤심형 한 사람뿐입니다. 청컨대 특별히 정경(正卿)3944) 을 증직하여 나라에서 명절(名節)을 포상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강순(康純)남이(南怡)가 죽은 지 3백 년이 넘도록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남아 있고 자손들이 쇠잔하고 또 오래되도록 아직까지 신설(伸雪)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강순과 남이는 모두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인하여 죄도 없이 화를 당하였습니다. 더욱이 남이는 효용(驍勇)이 여느 사람보다 뛰어나서 여러 번 기공(奇功)을 세웠으나 유자광이 심히 시기를 하고 시어(詩語)로 죄를 꾸며 법망에 끌어 넣어 죽였는데, 야사(野史)에 그 사실이 대부분 기재되어 있습니다. 전에 선조 때에 연신(筵臣)이 그의 억울함을 말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이런 일은 후일을 기다려서 적선(積善)하는 호사(好事)로 삼으면 매우 좋겠다.’ 하였습니다. 성명(聖明)께서 임금의 자리에 계시면 억울한 자로서 신설(伸雪)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아직까지 못하고 있는 조처가 오늘을 기다린 것 같습니다. 청컨대 고 영의정인 강순과 병조 판서 남이에 대해 모두 그 억울함을 신설(伸雪)하고 그 관작을 회복시켜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일전에 송경 유수(松京留守)의 장계에 대하여 절엄(截嚴)한 하교를 내리신 것을 보고 신은 흠탄(欽歎)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해 유수의 처지에서 보면 자세히 알아보려다가 도리어 경솔을 범한 것으로서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4릉(陵)이 만약 확실한 것이 아니면 차츰 무덤 주위의 땅을 파서 유지(幽誌)·명기(明器)·상설(象設) 등의 유적을 찾아보는 것도 별로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네 개의 돌조각이 덮여 있는 것을 보고서도 점차 열어볼 수 없는 곳까지 열어보느라고 하루 종일 깊이 파들어 갔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사체에 편안한 일일 수 있겠습니까? 개성 유수 윤익렬(尹益烈)에게 청컨대 파직하는 형전(刑典)을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註 3942]정미년 : 1727 영조 3년. ☞

[註 3943]엄자릉(嚴子陵) : 두 사람은 모두 후한(後漢)의 광 무제(光武帝) 때 절의(節義)를 지킨 명사(名士)였음. ☞

[註 3944]정경(正卿) : 정2품의 관직에 있는 의정부의 좌우 참관. ☞

 

 

 

 

 

                                                                      - 終 -

 

                                                            - 이어서 고종실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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