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일꾼을 얻기 위하여
2025년 7월 13일 / 눅 5:1-11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는 공통된 관점에서 보았다고 해서 공관복음이라고 부른다. 이 공관복음과 사도행전 1장에 12제자의 이름이 나오는데, 베드로의 이름이 항상 처음 등장하기 때문에 베드로를 보통 ‘수제자’라고 부른다. 이처럼 제자 중에서 가장 리더격이었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다.
베드로의 이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 주어졌다. 성경에서 어떤 때는 ‘시몬’으로, 어떤 때는 ‘베드로’로 또 어떤 경우에는 ‘시몬 베드로’로 나오는 그의 본명은 ‘시몬’이다. 지금도 ‘시몬’이라는 이름이 많지만, 그 당시에는 더욱 흔한 이름이었다.
얼마나 흔했는지, 열두 제자의 명단을 보면 또 한 명의 시몬이 있다. 바로 ‘열심당원 시몬’이다. 또 예수님의 형제 중에도 시몬이 있었고(마 13:55). 가롯 유다의 아버지 이름도 시몬이었다.
예수님은 시몬을 부르실 때 ‘시몬아’ 하지 않고 ‘바요나 시몬아’라고 하셨다. ‘바’는 ‘아들’이라는 뜻이고 ‘요나’는 ‘요한’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그러니까 ‘바요나’라는 말은 ‘요나의 아들’ 혹은 ‘요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이고, ‘베드로’는 그의 별명이었다. 베드로는 헬라어로 ‘페트로스’(petros)인데, ‘반석’ 또는 ‘큰 바위’라는 뜻이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본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외쳤다. 그러자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가 그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을 찾아가 만난 뒤 그분이 메시아임을 확신했다. 그래서 자기 형제 시몬에게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 1:41-42)
이때 처음으로 시몬과 예수님의 만남이 동생 안드레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예수님이 시몬을 만나 가장 먼저 하신 일은 그에게 ‘게바’ 즉 ‘반석’이라는 새 이름을 주신 것이다. 이 만남은 앞으로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가 새로 받은 별명 ‘반석’은 대개 안정감, 단단함, 육중함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지금으로서는 시몬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었다. 사실 시몬은 그렇게 육중함이 있거나 안정감을 주거나 단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장면에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라고 하신 것은 그의 겉모습을 보고 우직하게 생겨서 하신 유머이지만 그의 성품과 성격은 전혀 바위 같지 않았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의 차례가 되어서 예수님이 그의 발을 씻기시려 하자 그는 펄쩍 뛰며 말한다. ‘절대 안 됩니다! 어떻게 선생님이 제 발을 씻기십니까? 제가 씻겨 드려야죠!”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시자 돌변하며 그렇다면 다 씻겨주며 아예 목욕을 시켜달라고 하였다.
이처럼 베드로는 굉장히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기질을 가졌고, 전형적 다혈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런 시몬에게 ‘반석/바위’라는 이름을 주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후에도 그는 여전히 물고기를 잡으면서 살았다. 그래서 얼마 동안은 별로 뚜렷한 변화의 흔적 없이 살았다. 그러나 드디어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신의 삶을 버리고 그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결단의 순간이 찾아왔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행적을 볼 수 있지만 먼저 베드로전후서를 볼 때 하나님의 일꾼이 된 베드로가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지,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변화되기를 노력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베드로전후서를 보면서 예수님의 애쓰심이 베드로를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사도로 만드신 흔적을 통해 은혜를 받고자 한다.
1.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를 쓴 베드로
1.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자신을 소개하며(1:1), 그의 고백과 삶을 통해 이 서신의 진위를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또한, 이 서신에서 베드로는 여러 번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며(1:1, 5:1), 자신이 이 편지를 쓴 사람임을 명확히 한다. 이에 누구 한 사람 베드로전서를 쓴 사람이 베드로임을 의심하거나 흉보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베드로는 예수님의 뜨겁고 끈질긴 가르치심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도가 되어 믿음의 후배를 지도하였다.
기록 시기 / 베드로전서는 대체로 AD 60~64년쯤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Nero(네로) 황제가 로마를 다스리던 시기로, 그 당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시점이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점차 위협적인 종교로 인식되었고, 이에 기독교인들은 심각한 박해를 겪기 시작했다. 특히, 베드로전서는 로마에서의 박해와 관련이 깊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어려운 시기를 맞이할 때 믿음을 지키고 용기를 북돋울 수 있도록 격려하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기록 목적 / 베드로전서의 주요 목적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온전히 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이 서신은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주된 목적은 과거 제자로서 예수님께 받은 말씀들을 지금 성도들에게도 가르치는 것이다.
고난 중에 신앙을 지키는 법 : 당시 기독교인들은 박해받았고, 베드로는 그들에게 고난을 잘 견디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믿음을 지키라고 권면하였다. 그는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하며(4:13),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와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강조하였다. 그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선언하며(1:3-5), 신자들이 그 구원의 약속을 확고히 붙잡고 살아가도록 격려하였다.
성결하고 거룩한 삶 : 베드로는 성도의 삶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1:15-16).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서의 성결과 의로움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교회 공동체의 단합과 사랑 : 교회 내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격려하며, 하나가 되어 살아가도록 권면합니다(4:8). 또한, 각자가 맡은 역할에 충실히 하여 교회를 세우고, 신앙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강조하였다.
베드로전서는 주로 기독교인들이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으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밝히며, 고난과 시험을 맞이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도록 인도하고 있다.
2. 베드로전서를 써보내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여전히 로마에 있었던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순교)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1:14). 그래서 유언적 의미가 담긴 이 두 번째 편지를 쓰게 되었다(3:1). 베드로는 자신이 떠난 후의 교회를 생각하며 베드로전서에서 미처 다하지 못했던 말을 보완하고자 두 번째 편지를 기록하였다.
베드로전서는 세상 속의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잠시 죄로 가득하고, 부패하고, 사라져버릴 세상을 지나가는 나그네로 묘사했다. 그러면서 세상 속에서 교회는 거룩한 제사장, 증인,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한 삶의 과정에 필연적으로 고난과 핍박이 있기에,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소망하며 살아가도록 격려하였다.
베드로후서에서 사도는 교회가 세상 속에 있기만 한 것이 아니고, 교회 안으로도 세상이 얼마든지 침투해 들어올 수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였다. 교회는 홍수 심판 때 노아의 방주와 같아서, 부패한 세상의 물결 위를 지나가며 거센 파도에 흔들리기도 한다. 세상의 거센 파도에 부딪히고 흔들리는 것은 사실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세상의 물결이 방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거짓되고 부패한 물결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교회의 영적 생명과 거룩한 본질을 위협하는 것이 정말 경계해야 할 문제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교회 안에 넘쳐 들어온 세상의 거짓 가르침과 부패한 삶에 대해 강력히 경고함으로, 교회를 일깨워 생각하게 하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명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이 편지를 기록하였다(3:1-2).
2. 베드로를 제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애쓰신 예수님의 흔적을 보면서
요한복음 1:35-42에서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이에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선생님, 어디에 머물러 계십니까?’하고 되묻자 예수께서는 ‘와서 보라’라고 대답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머무르시는 곳에 함께 가서 오후 4시부터 밤까지 예수님과 같이 있었다. 안드레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말하고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께 갔다. 예수께서는 시몬을 유심히 바라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그러나 이제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그런데도 시몬은 안면몰수하고 자기 고향 갈릴리로 돌아갔다.
예수님이 다시 갈릴리로 시몬을 찾아가 제자로 만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성경은 정확히 나오지 않아 성경학자마다 다르게 설명한다. 적게는 몇 개월에서 많게는 9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렸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정확히 몇 개월이 흘렀다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 제자로 삼으시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떻게 많은 시간이 흘러갔는지 잘 나타나 있는 복음서는 누가복음이다.
요한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갈릴리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하게 시간의 흐름대로 기록된 것이 누가복음이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잡이 어부생활을 계속하는 베드로이기에, 베드로가 자기 발로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와 제자가 되고 싶다고 간청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베드로가 다시는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하게 못하게 만드셨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베드로와 헤어지고 난 뒤 유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마치시고 사단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그 후에 베드로가 고기잡이 어부로 사는 갈릴리로 오셨다. 갈릴리에 오셔서 회당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사람들이 난생처럼 보는 믿기 어려운 이적을 행하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지역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눅 4:14-15 /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그럼에도 베드로는 요지부동이다. 온 갈릴리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자자한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가오지 않고 자기 삶을 위해 살아갔다. 그 와중에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셔서 중한 열병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던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다.
눅 4:38-39 /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그러나 예수님이 자기의 집에 들어와 열병으로 고생하던 장모를 살려주셨음에도 꼼짝하지 않고 여전히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
▶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다시 찾아가셨다. 예수님께서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시몬의 배가 있다는 것을 아셨을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 5:3에서 예수님은 시몬의 배에 오르셨다. 누가는 이 부분에서 베드로를 그의 옛 이름인 시몬이라고 적고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잊고 옛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 ‘그분이 훌륭한 랍비요 선생님이다’라고 인정했지만 자신의 인생을 다 투자할 정도로 그분과 그분의 말씀, 그분의 삶이 자신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 그뿐 아니라 베드로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 그는 가장으로서 생계를 유지해야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당장 먹고사는 문제 또 자신이 일구어놓은 사업들을 버리고 따를 정도의 가치가 있는 분이 아니었다.
깊은 데로 나아가 내리라(눅 5:4-7) /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배를 호숫가에서 약간 떼어놓게 하신 후에 앉으셔서 군중을 가르치셨다. 시몬은 좋든 싫든 예수님을 자기 배에 태우고 나가서 불가항력적으로 말씀을 들어야했다. 불가항력적으로 끌려나와서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얼마나 귀에 들어오겠는가? 예수님의 설교가 끝났다. 지금처럼 짧은 설교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실만큼 하셨을 것이다. 사실 시몬은 빨리 집에 가서 쉬어야했다. 조금만 자고 나와서 다시 생업으로 복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우리라면 이 말씀을 상상하여 보면 웃음이 나올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보자. 지금 시몬은 밤샘 근무하고 퇴근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잠시 뒤 출근해야 했다. 더군다나 그는 예수님께서 직접 고기를 잡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수확도 의미도 없는 밤샘 근무로 인해서 얼마나 짜증이 났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한때 자신이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따랐던 선생이고 또 기껏 떠났는데 그분이 다시 자기를 찾아오셨다. 그분의 얼굴을 보니 차마 ‘아! 지금 저 자야 됩니다.’라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 말씀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선생님, 저희가 어제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상황을 상상하며 말씀을 읽었을 때 ‘말씀에 의지한다’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분명 우리였다면 이를 꽉 물고 ‘싫습니다’라고 이야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어를 찾아보았다. 이 ‘의지하여’에 상응하는 헬라어 단어는 ‘ἐπὶ’라는 단어였다. 이 단어는 ‘ ~위에, ~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에 혹은 당신이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내가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라는 정도의 마지못해 그 말씀을 따르는 모양새가 된다. 여기에는 의심과 짜증도 섞였을 것이다.
이 행동으로 말미암아 이 이야기의 결론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물고기가 그냥 잡힌 정도가 아니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다. 이 상황에서 시몬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코웃음을 치며 한 번 해보자 식으로 그물을 내린 그는 텅텅 빈 그물을 예수님 눈앞에 들이대며 ‘보셨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제 제 배에서 내리시고 갈 길 가세요.’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 참고로 창세기 17-18장을 보자. 창 17:17에서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으며, 18:12에서 사라가 속으로 웃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였다. 마땅히 기뻐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웃음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웃음은 행복한 웃음이 아니었다. 복된 말씀을 들었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행복하게 웃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웃음을 보자.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내가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을 하리요’하고 엎드려 웃었다(17:17). 아브라함의 이러한 웃음은 아무리 봐도 감사하는 행복한 웃음이 아니다.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던 자식을 주신다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웃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라의 웃음은 어떠했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라고 하며 속으로 웃었다(18:12). 사라의 웃음 역시 기뻐서 감사하는 웃음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누가 봐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은 행복한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베드로도 ‘아멘’이 아닌 코웃음 치며 행동한 그 순종의 결과는 그의 인생을 다시 한번 뒤바꿀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인생이라는 배에 오르셔서 앉으셨다. 그리고 그 배에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여 볼 것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결코 틀린 말씀을 하시거나 상식 밖의 요구를 하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21장에서 한 번 더 자신을 떠나간 베드로를 또다시 부르실 때는 날이 새어갈 때였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베드로에게 깊은 곳이 아닌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혀 근거가 없거나 터무니없이 틀린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행동은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따르지 못한다. ‘내가 내 인생의 전문가인데, 내가 내 배의 주인인데, 내가 이 일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데, 내가 밤새 수고했는데도 안 됐는데 ….’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믿으려고 하지 않고 믿지 않으려고 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시몬은 순종했다. 이미 베드로에게는 겨자씨만 한 믿음이 아닌 장모님의 열병을 고쳐주신 것을 비롯하여 동생 안드레의 조언,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기적에 대한 소문 등을 통해 주먹만 한 믿음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심과 짜증이 묻어난 행동에도 사랑의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역사하셨다. 이는 베드로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제자의 길을 통하여 사도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하지 않으신 것이다.
시몬의 이 행동을 통해 길과 진리와 생명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세상 가운데 살아가게 하지 않으시고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동시에 그의 정체성이 고기를 낚는 시몬이 아닌 사람을 낚는 길을 가게 하시기 위하여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배에도 오르시기를 청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좌정하시고 말씀을 전하실 것이다. 또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어떤 부분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때 우리도 시몬처럼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것이다. ‘이미 다 해본 건데, 저렇게 하면 더 쉽게 할 수 있는데, 남들은 다 저렇게 하는데, 안 될 게 뻔한데, 나 피곤한데,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
그러나 이 시간부터 시몬이 행동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보기 바란다. 다 알 수는 없어도,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만한 믿음은 못될지라도 순종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시면 그물을 내려 보기 바란다. 우리는 많은 경우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보다 순종을 통해서 ‘이게 된다’라는 것을 경험하고 그 행동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동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순종함으로 우리에게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장차 베드로로, 반석으로, 제자로 다시금 부르시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훈련을 계속해나감으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일꾼이 되시기 바란다.
계 3:20 /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3. 이제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셨다.
눅 5:8-11 /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성경은 이제야 ‘시몬 베드로’라는 말을 사용했다. 시몬은 그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이 예수님 한 분 때문인 것을 또 그분의 한마디 말 때문인 것을 알았다. 정신없이 고기를 주워 담던 그는 자신을 향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하신, ‘네가 장차 베드로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경외감을 느꼈다. 베드로는 자신이 비록 어부였을지라도 무지몽매(無知蒙昧, 지식이 없고 사리에 어두움)한 인간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상치도 못할 기적을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여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두 척의 배에 가득히 잡힌 고기들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자신을 돌이켜보았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이 말 밖에는 없었다.
베드로가 자기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말한 이유는 단순히 그 자신이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는 ‘죄’에 대한 인식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차원의 것이었다. 신약성경에서 백부장은 예수님을 감히 자기 집에 들이지 못한다고 하였고,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감히 예수님을 눈앞에서 볼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대했던 사람들과 같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감히 함께할 분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나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욥의 회개하는 말이 생각한다.
욥 42:1-6 / [하나님께 꿇어 엎드리다] 그러자 욥이 여호와께 이렇게 아뢰었다. 2)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는 줄을 나는 잘 압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모든 일을 다 이루신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3) 주께서는 말씀하셨지요. 알지도 못하면서 내 계획을 가리는 자 그 누구냐고 말입니다.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깨닫지도 못하고 함부로 입을 놀려 댔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하시는 놀라운 일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해댔습니다. 4) 주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듣고만 있으라고 주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질문하실 때 대답해 보라고 말입니다. 5) 전에는 내가 소문으로만 주님에 대해서 들어 왔습니다만, 이제 이 두 눈으로 주님을 똑똑히 뵙고 있군요. 6) 이렇게 내가 꿇어 엎드립니다. 먼지바닥 위에 앉아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배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이 자기와 같은 급의 존재가 아님을 느꼈을 것이다.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어 무릎을 꿇고 자신과 예수님의 차이를 인정하였다. 이와 같은 모습이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하나님의 그릇이 되어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사울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9:1-9 /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베드로가 그때 느낀 감정은 분명 ‘두려움’이었다. 자신의 믿음없음을 보게 되었고 자기와 예수님의 ‘급(級)’차이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어떤 이유로든지 그분 앞에 서 있을 수 없다. 감히 하나님이신 그분 앞에 우리는 서 있을 수 없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우리의 행한 일들이 작음과 보잘것없음을 알게 되며. 무엇보다도 이사야 선지자의 말과 같이 더러운 인간임을 깊이 느낄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그러하였듯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끼며 그분 앞에 엎드려 ‘저를 떠나달라, 저 같은 죄인과 함께 있어 예수님의 격을 떨어뜨리지 말아달라.’고 부르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시몬을 부르러 오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다. 시몬의 죄를 사하시고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시며,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꾼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시몬을 장차 베드로라 부르시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비전을 주셨다. 부르심에 대한 목적을 주셨다. 그리고 그 결과 시몬은 예수님을 선택하여 그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다.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이 놀라운 경험을 하고 난 뒤에 시몬은 베드로가 되었는가? 안타깝지만 우리는 그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임을 안다. 또 돌아가서 어부가 될 것을 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 또다시 옛 삶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까지 가셔서 다시금 베드로를 부르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베드로를 향하여 또다시 말씀하시고 부르심의 목적을 알려주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베드로와 같다. 아니 베드로보다 못한 인간이다. 언제든지 틈만 나면, 광야에서 배신의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나님을 협박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의 힘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과 부르심이 필요하다. 시몬은 그의 힘과 능력, 의지로는 베드로라고 칭함 받을 수 없었다. 시몬이었던 그가 베드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선택하셨고 사랑하셨으며, 베드로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에 그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쓰시는 베드로가 되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며, 부르심이며, 성령의 충만함이다. 우리의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잡힌 물고기가 아니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말씀을 정리한다.
예수님께서는 옛 삶으로 돌아간 베드로를 찾아오시고 또 말씀하시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인생에 주인이 자기 자신이 아닌 예수님이심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베드로를 부르시고 그 부르심의 목적을 알려주셨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흔들리는 삶에도 예수님께서 찾아오실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의 배에 올라 말씀하실 것이고 또 순종하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때에 순종하는 결정을 내리기를 소망한다. 그 순종은 어부에게 그물을 내리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지만 또 그렇기에 불편하고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의심과 고민이 있을 수 있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에 오늘 말씀을 생각하였으면 한다. 뜨거운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였으면 한다.
우리는 이런 순종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없음과 예수님 앞에서 감히 서 있을 수 없는 죄인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우리 마음대로 행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우리를 부르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다시 빚어 새사람으로 쓰시기 위하여 끝까지 찾아오실 것이다.
이때 우리가 함께 부를 ♬ 324장 찬송이 있다.
❶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후렴 /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❷ 겟세마네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 하네 피땀 흘린 동산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❸ 심판하실 자리까지 주와 함께 가려 하네 심판하실 자리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❹ 주가 크신 은혜 내려 나를 항상 돌보시고 크신 영광 보여주며 나와 함께 함께 가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