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굳게 서서
골로새서 2:6~15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주님 안에서 사셨습니까? 상투적인 질문 같습니다만 신앙생활이란 늘 이 질문 앞에 서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주님과의 접속을 유지한 채 산다는 뜻일 겁니다. 접속을 유지하는 방법은 자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애를 쓰고 또 시간을 정하여 엎드리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접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과의 접속을 중지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접속 중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주 앉아서도, 심지어는 가족이 모여도 대화를 나누지 않고 휴대폰으로 뭔가를 하고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것과의 접속을 끊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접속을 이루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수도원적인 생활을 그리워합니다. 수도원 생활은 성무일과(聖務日課)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무일과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바치고,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라고 해서 성경이나 경건 서적을 읽고, 또 주어진 분량의 노동의 수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 수도사들은 신앙적 리듬이 몸에 뱁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내년 라마단 절기를 지킵니다. 라마단이란 이슬람 달력으로 아홉 번째 달을 이르는 말입니다. 아홉 번째 달은 가브리엘 천사가 무함마드에게 꾸란을 가르쳤다 하여 무슬림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달입니다. 라마단이 되면 해 뜰 무렵부터 해 질 때까지 사람들은 단식을 하면서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드립니다. 대낮에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중동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는 것은 정말 고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노약자, 환자, 어린이, 임산부 등은 금식의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도대체 왜 그들은 그런 고행에 가까운 일을 그것도 한 달씩이나 지속하는 것일까요? 1958년 이라크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후 감옥에 수감된 한 정치지도자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금식은 개인적으로 알라에 대한 순종과 그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정신적 훈련이며, 사회적으로는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에 대한 동정과 모든 무슬림들의 연대 의식과 동등 의식을 권장하는 집단훈련이다.”(정수일, 『이슬람 문명』, 창작과비평사, p. 149)
신에 대한 순종, 은총에 대한 감사,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 연대성 강화야말로 무슬림들이 라마단을 통해 배워야 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훈련’이라는 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슬림들은 그렇게 철저하게 삶을 훈련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마땅히 훈련받지 않으면 성도다운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오늘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무기력한 것은 신앙 훈련을 받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영적 전쟁터라고 합니다. 앞으로 점점 더 험난한 전쟁터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훈련받아야 합니다. 훈련은 힘듭니다. 때로는 숨이 턱 끝에까지 차 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걸 이겨내어야 정예군이 되는 겁니다. 참믿음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의 라틴어 ‘크레도(credo)’는 ‘심장을 바친다’는 뜻의 ‘코르도’에서 나온 말입니다. 코르도는 영어로 용기를 뜻하는 ‘courage’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우리의 의지, 생각, 감정보다 더 깊은 생의 중심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입니까? 달라스 윌라드는 믿는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말이나 믿는다는 확신만으로는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행동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다.”(게리 하우겐, <정의를 위한 용기>, IVP, p. 78ff)
신앙고백을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믿는 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주님을 시인하면서도 삶으로는 그 분을 부인하거나 배신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도우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주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은 다시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아가는 것으로 변주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기본적인 정황은 감사입니다.
‘뿌리를 박는다’는 말을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1968년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작고한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라는 시입니다. 그는 진창처럼 더러운 역사일망정 이 땅에 굳게 뿌리를 내리겠다고 다짐하면서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내가 내 땅에/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이라고 노래합니다. 젊은 시절 이 시를 만났을 때 가슴이 뛰었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던 역사에 대해 속상해하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검질김과 당당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끔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채 자라고 있는 소나무를 볼 때가 있습니다. 소나무 씨앗이 날아와서 그 바위 속에 있는 조그마한 틈에 떨어져 그 속에서 싹을 틔우고, 안간힘을 다해 바위틈을 뚫고 뿌리를 내려 거기에 서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장엄함이란 바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 아무리 척박해도 예수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려는 절박함 혹은 열정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뿌리를 박은 사람이라야 세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우심을 받는다는 말은 정신적으로 든든하게 되어 주체적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주체적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율법 조문에 매여 있고, 종교적 권위에 매여 있는 것을 봅니다. 참으로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 기둥과도 같은 것이 박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유혹의 바람, 박해의 바람이 거세게 불면 가끔 흔들릴 수는 있어도 결코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뿌리를 내리고, 세우심을 입은 사람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일쑤 주님의 가르침을 우리의 욕망에 따라 왜곡하거나 축소시키곤 합니다.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제거하고 매끈매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심장을 바치는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 위해, 내 뜻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믿는 것과 믿는 척하는 것은 다릅니다. 비슷한 것은 다 가짜라는 말(似而非)이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에베소에서 바울을 통해 복음을 영접한 에바브라가 고향에 돌아가 세운 교회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도 역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이 등장해서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적 전통에 매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뿌리는 분명히 유대교입니다. 하지만 유대교와 갈라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교차되는 지점에서 발생하곤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매력적이었지만, 사람들은 뭔지 모를 미진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종교라고 하면 남들과 구별되는 표지가 있든지, 뭔가 비일상적인 경험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의 그런 마음을 파고듭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든지, 예배 의식, 음식 규정, 절기 등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천사들을 숭배하도록 사람들을 미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외적인 종교 행위가 전혀 불필요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외적 행위가 곧 좋은 믿음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외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을 남들과 구별하고 싶어 합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속사람의 변화가 없는 믿음은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사는데 저 사람은 왜 안 그런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외적인 행위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살기 시작해야 합니다. 믿음은 따름을 전제합니다. 우리의 말이, 행실이 예수님을 닮지 않고 어떻게 감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변화를 꺼리는 사람들은 꾸며낸 경건과 겸손과 몸을 학대하는 것에 집착합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위선적 신앙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가르침들은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골2:23)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사람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것을 부정할 수 없기에 슬픕니다. 대중의 신뢰를 받던 사람들이 뜻밖의 선택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깊은 충격을 받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게 사람입니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게 참 씁쓸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마음의 한구석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현실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렘17:19) 인간의 죄성(罪性)을 깊이 성찰했던 이들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날마다 철저히 자기 성찰을 하지 않으면, 자기 부인의 훈련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 속에 머물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라도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즐겨 했던 말이기도 하고 글씨로도 많이 남긴 구절 가운데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익을 보거든 의를 생각하고 위험을 만나거든 목숨을 바치라는 말입니다. 안중근은 논어에서 따온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는데 이게 바로 십자가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삶의 누추함을 벗고 자유인으로 신명나게 살기 위해 우리가 늘 주목해야 할 대상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9)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 다가가고, 그분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분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자꾸 내려놓을 때 하늘 바람이 우리를 안아줄 것이고, 내면에는 든든한 뿌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분께 다가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든지, 뭔가를 성취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할례를 받거나 율법 조문을 준수하거나, 특별한 입회 의식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마음을 열고 주님께 다가가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의 마음과 접속하고 싶은 강한 갈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나’라고 하는 감옥으로부터 해방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다”(15)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유인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당신의 아들의 나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흑암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말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칭얼거리는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날마다 자아에 붙들려 전전긍긍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과 만나기 전까지 마르틴 루터는 죄에 붙들린 채 살았습니다. 사제를 찾아가 고해를 하고 돌아서다가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 사이에 악한 생각이 찾아오곤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과 깊이 만난 이후 그의 생은 달라졌습니다. 인간을 의롭게 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개방하고 그 품에 뛰어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패배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기를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주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고단한 현실을 외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바른 눈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대로 볼 줄 알아야 세상이 병들었음을 볼 수 있고, 세상의 아픔 때문에 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더불어 세상을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불의와 어둠의 세력과 맞서는 일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합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 보면 어려움을 겪게 마련입니다. 거짓된 세상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불의한 세상은 고통받는 이들과 연대하려는 이들을 미워합니다. 오늘 우리가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이사야는 성전의 뜰만 밟는 예배에 대해 준엄하게 꾸짖은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사1:16c-17)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빚 문서를 이미 지워 버리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선한 싸움에 동참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기력합니까? 그 까닭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싸움에 뛰어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믿음, 인내와 소망, 겸손과 온유함으로 불의와 폭력에 맞서십시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세우심을 입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나날이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