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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가 쓴 편지인가- 2026. 6. 14

작성자둘로스|작성시간26.06.14|조회수24 목록 댓글 0

나는 누가 쓴 편지인가

고린도후서 3:1~6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참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계절은 망종과 하지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농가월령가는 보리 수확철의 흥겨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드는 낫 베어다가 단단이(한 단 한 단씩) 헤쳐 놓고, 도리깨 마주서서 짓내어(흥에 겨워 마음껏 기분을 냄) 두드리니, 불고 쓴 듯하던 집안 졸연(卒然, 갑자기)히 흥성(興盛)하다.” 요즘은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겹습니다. 노래는 수확한 보리 덕분에 여름 농사지을 힘을 얻었다면서 “천심을 생각하니 은혜도 망극하다”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겨우겨우 끼니를 잇게 된 것을 은혜로 여기는 소박함이 아름답습니다. 이 마음을 잃어버려 우리 인생이 고달픕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사람 때문에 위로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며 삽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면 산다는 것이 참 힘겹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둘 이상이 서로 걸림’을 뜻하는 관계(關係)라는 단어에서 관(關)은 문빗장을 지른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관문(關門)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면 될 것 같습니다. 관계는 관(關)자에다가 ‘걸리다, 잇다’는 뜻의 계(係) 자가 결합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고 하는 것은 때로 닫아걸기도 하고 또 풀기도 하고 또 잇기도 하는 것이 사람살이의 모습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관계가 순조롭고 원만할 때는 편안함과 행복을 느끼지만 관계가 어그러지면 고통스럽습니다.

 

   현대인들은 저마다 외롭습니다. 그렇기에 관계를 갈망합니다. 젊은이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누군가와 접속을 유지하려 애씁니다. 고립을 면하기 위해서입니다. ‘나 홀로’라는 느낌 속에 방치되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인터넷 공간에 자기의 근황을 알리고는 누군가가 반응해주기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누군가 의미 없는 기호인 ‘ㅋㅋㅋ’나 ‘ㅎㅎㅎ’로만 반응해도 흐뭇해합니다. ‘좋아요’라고 반응해준 사람들의 수나 댓글 수에 민감합니다. 문득 지구별에 왔던 어린 왕자가 떠오릅니다. 그는 뾰족산에 올라 외칩니다.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누가 나의 친구가 되어줘.”(생떽쥐베리, 「어린 왕자」) 외로움이 문제입니다.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타인의 인정을 갈망합니다. 사람들은 인정과 배제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며 살아갑니다. 누군가가 내게 반응을 보여주지 않을 때 왠지 잊혀진 존재가 된 것 같아 속상해지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따돌림받지 않기 위해 자기 소신과는 무관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영혼을 파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인들은 세상 평가에 크게 흔들리지 않지만, 그래도 사람인 이상 그들도 조금은 영향을 받게 마련입니다.

 

   저는 오늘 사랑하는 교인들로부터 외면당했던 바울 사도의 심정을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후 그의 삶은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이전에 잘 나가던 바리새파 사람이었던 바울 사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불신의 시선을 견뎌야 할 때도 있었고, 박해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내면에 일고 있던 불꽃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로마가 군대를 앞세워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서쪽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절묘한 엇갈림입니다. 한쪽에서는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해 나가고 있었다면 바울 사도는 사랑이라고 하는 복음을 가지고 서쪽으로 이동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와 복음의 운명은 마치 견고한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처럼 위태로웠습니다. 바위틈 흙먼지가 쌓인 곳에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을 의지하여 기어이 싹을 틔우고, 안간힘을 다하여 뿌리를 뻗어가면서 조금씩 자라는 나무를 볼 때마다 생명의 장엄함에 놀라곤 합니다. 2천 년 전 초대교회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로마제국이라는 그 강고한 체제에 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은 너무도 미약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독교가 로마 세계를 무너뜨렸습니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는 유목민처럼 바울 사도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늘 길 위에 서서 살았습니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를 잇는 항구 도시 고린도는 그에게도 각별한 곳이었습니다. 뱃사람들이 모여들기에 미신이 많았고, 그들의 적적함을 달래주기 위해 등장한 유곽이 발달해 있던 곳, 항구 도시답게 흥청거리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천막 공방에서 노동을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복음을 전하는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비록 몸은 고달팠으나 그런 만큼 교인들과도 깊은 정이 들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복음의 빚진 자로서 바울에게 말할 수 없는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황이 돌변했습니다. 교인들 간의 다툼이 벌어지면서 파벌이 생겼고, 바울을 비난하는 이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세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세상을 볼 때마다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 나오는 말이 떠오릅니다. “인심유위(人心惟危)하고 도심유미(道心惟微)하니 유정유일(惟精惟一)하여 윤집궐중(允執厥中)하라”. 인간의 마음은 흔들리게 마련이고, 하늘의 뜻은 가려지기 일쑤이니 오직 마음을 정성스럽게 하고 오로지 하여 그 중심을 굳게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표현처럼 사람의 마음은 늘 흔들립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시비하기 시작했고, 복음을 전하던 그의 동기가 순수했는지도 의심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기가 막힌 소식을 들은 바울이 다급한 마음에 써 보낸 서신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마음으로 가깝게 여기던 이들, 육신으로 자식을 낳아 기르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그들의 영혼을 낳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다했던 바울을 향해 쏟아진 그 비난들이 바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내고 있습니다. 갑자기 낯선 자 취급을 받는다는 것, 참 씁쓸한 일입니다. 바울은 다소 감정이 격해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2장 말미에 이렇게 자기 마음을 쏟아냅니다.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고후2:17)

 

   우리말이 우리말다워지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주어를 생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우리는’이라는 주어가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으로 시작되는 단문 세 개는 방점을 찍듯 단호합니다. 바울 사도의 피를 토하는 심정이 ‘우리는 이러이러합니다’라고 한ㄴ 세 개의 단문 속에 담겨 있습니다. 3장의 첫 구절을 통해 바울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자기와 동료들을 치켜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감정이 더 격해졌는지 “우리가, 여러분에게 보일 추천장이나 여러분이 주는 추천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존재 자체가 그들에 대한 추천장이 아니냐는 말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복음의 씨를 뿌린 사람입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바울의 사도직을 증명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 행동합니다. 인심유위(人心惟危)라는 말이 그른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역시 우리와는 다른 위대한 영혼입니다. 다소 격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린도 교인들의 본분을 일깨우려고 애씁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3a) 기독교인의 실존에 대한 아주 강력한 은유입니다. 지금 그들은 기독교인답게 살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은총조차 무효화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라는 단어는 바울 사도가 고르고 골라 쓴 단어일 겁니다. 그리스도의 편지, 그 편지는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돌판이 아니라 가슴에 쓴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편지입니다. 편지의 발신인은 그리스도이고, 편지의 수신인은 세상입니다. 편지에는 발신인의 존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의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는 것은 그 편지 속에서 그분들을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듯,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숨결을 존재로서 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그것을 일개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인 우리에게서 과연 그리스도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맞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안타깝지만 우리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한없는 연민으로 사람을 대하셨던 주님의 따뜻하심과 정겨우심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이들과 거역하는 이들에 대해 분노하셨던 그 울분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혹시 ‘나’라는 존재의 편지를 돈이나 명예욕이나 못난 자아가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라고 하는 편지를 쓰고 있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오늘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난하는 까닭은 우리가 주님의 편지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한 역할을 그리스도의 편지를 작성하는 데 봉사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가 한 일을 과장하지도 않고 과소평가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다만 주님의 손과 발이 되었을 뿐입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나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몽당연필’이라 말했습니다. 나는 볼품없는 몽당연필이지만,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나를 통해 사랑의 편지를 쓰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바울도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는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 나라의 꿈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요즘 믿음이란 ‘미래에 대한 기억’이라는 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기억은 과거에 속한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기억함으로써 오늘을 살아갈 새 힘을 얻습니다.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야말로 오늘 우리 삶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주님은 고통받는 이들을 이웃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사랑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무능하지 않다는 것도 당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병든 이들을 고치시고,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쫓고, 굶주린 이들을 먹이신 것을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신비한 능력으로 보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랑이 일으킨 기적입니다. 사랑은 무능하지 않은 법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눈에는 마치 익숙한 풍경인 양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이들의 아픔이 환히 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걷지 못하는 사람을 눈여겨보고, 그 앞에 멈추어 서고, 그에게 말을 건네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명했습니다. 그때 그는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모두가 그저 그런 풍경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하나의 인격으로 대하고, 그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그를 온전한 인격체로 돌려놓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눈 속에서 떨고 있는 한센병 환자를 보고 자기 옷을 벗어 그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비존재로 취급받고 있는 이들에게 존재를 돌려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는 사회적 장벽이 철폐되었습니다. 주님은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을 가르는 장벽처럼 서 있던 문화적․종교적 차별을 당신의 몸으로 무너뜨리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머무시는 곳마다 이런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는 예수 정신에 사로잡힌 이들로 인해 역동적으로 변해갑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고, 모든 이들이 형제자매의 사랑을 나누는 바로 그런 세상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런 세상을 열기 위해 자신은 ‘일꾼’으로 부름 받았다고 합니다. 일꾼이라는 단어는 그 당시에 그렇게 인기 있는 단어는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일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과감하게 자신을 ‘일꾼’으로 선언합니다. 허만 멜빌의 소설 <모비딕>(백경)에 나오는 이슈마엘은 포경선에 오르기 전 독백하듯 말합니다. “배에 오르면 난 결코 시중받는 손님이나 선장은 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수고하는 선원으로 남을 것이다.” 참 감동적인 말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이들은 시중받는 손님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지시하는 선장이 아닙니다. 말없이 섬기는 사람, 궂은일을 먼저 택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16장에서 그리움으로 호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일꾼’, ‘동역자’, ‘주님 안에서 수고한’ 아무개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 아닙니다. 많이 가진 사람 아닙니다. 주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이 수고한 사람, 일꾼, 동역자들이 말년의 바울에게 떠오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신앙 공동체를 살리는 것은 많이 아는 이들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이들임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전8:1b)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지식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과 함께 가지 않는 지식이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안다’ 하는 자부심 때문에 누군가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것을 더욱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그렇게도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은 그들이 자기 의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애덕으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간디가 한 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가 절대 진리를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형제애를 지닐 수 있겠는가?”(토머스 머튼, <토머스 머튼의 단상>, 바오로딸, p.97에서 재인용) 자기가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형제애를 깨뜨립니다. 반면 자기를 진리를 향한 순례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늘 조심스럽게 처신합니다.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합니다. 감사함으로 현실을 대합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3:17)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우리에게 불어오는 주님의 영을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돛단배가 돛을 펼쳐 바람을 받듯이 우리도 마음을 열고 주님의 영을 모셔야 합니다. 내 뜻과 내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생각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할 때 나도 새로워지고 공동체도 새로워집니다.

 

   인정과 배제 사이에서 바장이는 동안 우리 영혼의 창고가 비지는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 인생이 더욱 쓸쓸한 것은 아닙니까? 주님의 영을 갈구하십시오. ‘성령이여,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바칠 기도입니다. 주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생명의 기운이 약동하는 이 계절에 우리 속에 주님의 주님의 숨이 차올라 하늘 바람 타고 신명난 삶,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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