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혁명의 시대
개신교와 가톨릭교회 세력으로 갈라진 유럽의 세계는 종교개혁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들에게 별다른 감흥을 안기지 못했다. 역사의 중심을 지켜오던 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 공회 이후에는 빗장을 걸어 잠근 채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세력을 저주와 파문으로 맞서는 것으로 만족했다. 교황의 지도력은 17세기 이후로 역사의 그늘로 사라졌다.
개신교 역시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가톨릭처럼 고루한 전통주의로 회귀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개신교의 주류는 초기에 가톨릭 측으로부터 받았던 박해를 잊고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새로운 세력들을 무력으로 통제하려고 들었다. 그나마 개신교가 수구적인 가톨릭에 비해서 나은 점이 있다면 길지 않은 전통 때문에 미래 지향적인 특성을 갖고 있어서 18세기 이후의 주도적 사상들과 적극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종교가 영향력을 상실하자 자연과학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 시기를 근대라고 불렀다.
근대기에 들어서자 새로운 세대는 과감한 행보에 나섰다. 과학 분야의 발전은 눈부셨다. 베이컨의 주장처럼 지식이 곧 힘이 되는 세상이 도래했다. 갈릴레오, 데카르트, 파스칼이 계승한 그의 주장은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로크, 뉴턴, 보일을 통해서 확대되었다. 그들은 수학적 확실성과 이성의 우위성에 대해서 확실한 토대를 제공했다. 특히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는 모든 확실성의 기초는 사유하는 행위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인간 개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명제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에서 인간 자신으로 바뀐 것이다.
옛 질서가 구심력을 상실하자 일부는 자신들을 억압하는 고향을 떠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새로운 세계로 항해에 나섰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신앙의 부흥을 강조함으로써 세부적인 내용에만 집착해서 신학적 논쟁을 일삼는 바람에 사라질 뻔한 개신교의 열정을 되살려 놓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혁명들에 따른 그 결과들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과학과 철학의 혁명
루터와 동료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저서가 성서의 가르침과 상치된다고 해서 거부했다. 로마 가톨릭교회 역시 갈릴레이 사건이 불거지자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를 금서 목록에 등록했다. 나중에 그의 이론이 갈릴레이를 비롯한 몇 사람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입증되자 교회의 전통과 성서적 세계관은 피할 수 없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전통이나 성서를 의지하지 않게 되었고,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두 개의 사조가 유럽 전체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경험주의자들이 감각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기초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했다. 반면에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합리론자들이 이성을 제일 원리로 삼아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시도했다. 이 두 가지 사상은 모두 그리스도인에 의해서 제기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의 토대를 훼손하게 되었다.
거인들의 어깨에서
1676년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은 자기의 동료에게 이런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가 이룩한 과학적 업적을 인정하는 겸손한 표현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이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이유를 설명해내지 못했다. 천사들이 행성마다 배치되어서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지 모른다고 추정했다. 나중에 독일의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인 케플러 역시 행성이 태양과 관련해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확하게 기술했지만, 그 원인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설명해내지 못했다.
뉴턴은 케플러의 법칙을 기초로 삼아서 중력(혹은 만유인력)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행성의 궤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뉴턴은 자신의 연구 내용을 담은 「프린키피아」(Principia) 세 권을 18개월 만에 모두 완성해서 학계에 발표했다. 그는 「프린키피아」 제3권에서 “모든 물체를 향한 중력이 있으며, 이 힘은 물체에 포함된 물질의 양에 비례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 단 하나의 법칙으로 뉴턴은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과 지구를 통합해낼 수 있었다.
뉴턴이 1687년부터 자신의 과학적 주장이 담겨 있는 저서의 시리즈를 연속적으로 출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유럽 전역의 사람들은 숨 한 번 제대로 크게 쉴 수 없었다. 한 사람의 과학자가 전염병을 피해서 지방으로 갔다가 사과나무 아래서 얻은 모티브를 가지고서 거대한 우주의 비밀을 해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자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뉴턴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는 이렇게 그의 업적을 노래했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 속에 숨겨져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뉴턴이 있어라!’ 하시매 모든 것이 밝아졌다.”
뉴턴 이후로 지속된 자연과학 분야의 진보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영국에서는 보일이 기체의 압력과 부피의 관계에 관한 ‘보일의 법칙’을 발견하였고, 독일의 라이프니츠는 뉴턴과 더불어서 미적분학을 개척했다. 프랑스의 라부아지에는 산소를 발견함으로써 근대 화학의 기초를 쌓았으며, 생물학에서는 라마르크가 생물의 진화를 주장했다. 그리고 스웨덴의 린네는 식물 분류학을 창시하였고, 영국의 제너는 종두법을 발견해서 면역 접종의 길을 텄다.
차가운 신론, 이신론
뉴턴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과거에는 제대로 답변할 수 없는 거대한 수수께끼들을 해결했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철저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우주를 창조했고 거기에 변함이 없는 법칙을 부여했다고 믿었다. 그러자 역시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날 무엇을 하시는가? 칼뱅주의자들은 미리 결정된 구원의 계획에 따라서 하나님이 개입한다고 주장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기도에 대한 응답을 통해서 꾸준히 간섭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이미 변화한 세계에서 그런 대답은 잘해야 미신이고 심한 경우에는 광신으로 간주될 뿐이었다. 뉴턴은 조물주가 양도한 우주를 영원히 불변하는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힘을 지니고 있는, 스스로 작동하는 기계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기계를 정비하거나 고장을 예방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주장은 두 가지 방향으로 다시 가지를 쳤다. 하나는 초자연적 합리주의라고 불리는 이신론(Deism, 理神論)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반기독교적 이신론이었다. 두 가지 이신론 모두 기적과 하나님의 간섭을 공통적으로 배격했다. 그들이 보기에 기적이 증명하는 모든 가치는 이미 이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기적은 필요하지 않았다. 기적을 주장하는 것은 이 세계를 완전한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도록 창조하고 나서 더 이상 간섭하지 않는 하나님의 솜씨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은 가장 이상적인 인간, 윤리 교사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 역시 단번에 종교 법칙을 확립해 놓고서 더 이상 상관하지 않는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였고, 삼위일체는 전혀 근거 없는 허구적 개념에 불과했다. 이신론의 하나님은 이 세계와 무관한 차갑고 비인격적인 존재였다.
이신론의 영향은 강력했다. 독일 지역에서는 라이프니츠의 제자들이 이신론을 적극적으로 전파했다. 그래서 볼프와 같은 뛰어난 학자도 기독교의 교훈과 이성을 결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전투 중에 태양을 멈춘 여호수아는 뛰어난 천문학자였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예수님은 훌륭한 화학적 지식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었다. 프랑스 지역에서는 한층 더 광범위하게 지지를 받았다. 루소를 비롯한 대부분의 식자층이 이신론을 지지했고, 나중에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이신론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물론, 이신론은 무신론과 달리 유신론의 범주 안에 포함되어야 하겠지만 당시 무신론자들이 대부분 이신론을 거쳐서 무신론으로 진행한 것을 고려하면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에 상당한 해를 끼친 것이 분명했다. 이신론의 영향으로 여러 교회들이 삼위일체의 교리와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하는 유니테리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새로운 질서를 위한 혁명
엘리자베스가 세상을 떠나자 제임스 왕은 안식일을 존중하고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성직자들을 자유롭게 하는 정책을 펴서 청교도들로부터 상당한 불만을 샀다. 대주교 윌리엄 로드가 국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대중 집회를 금지하자 분리주의자들과 청교도들은 신앙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찾게 되었다. 1608년에 일단의 분리주의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용납하는 네덜란드로 떠났지만 그들의 꿈은 여전히 신대륙에 있었다. 마침내 1620년 102명의 분리주의들이 신대륙을 향해서 대서양을 건넜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의 플리머스항을 출발한 그들을 일컬어서 사람들은 순례자들(Pilgrims)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순례자들은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곳을 발견했을까? 그러지 못했다는 게 결론이다. 순례자들이 처음에 정박하려고 했던 곳은 매사추세츠가 아니라 영국의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를 기리기 위해서 이름을 따온 버지니아였다. 태풍을 만나게 된 메이플라워호는 배를 잘못 조정하는 바람에 원하는 지점을 지나쳐서 그만 북쪽으로 더 올라갔다. 순례자들은 처음 닻을 내린 곳을 플리머스(Plymouth)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620년 12월 순례자들 가운데 41명이 메이플라워 계약을 초안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헌법으로서 다수에 의한 지배를 공고히 하고 이탈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신대륙에서의 실험
1630년에는 청교도들이 건설하던 메사추세츠만 식민지는 존 윈스롭(John Winthrop)의 주도로 플리머스 정착지를 흡수했다. 그렇게 해서 약 1,500명의 청교도들이 메사추세츠 식민지로 옮겨갔다. 그 이후로 영국에서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게 되자 그것에 반발한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에 먼저 도착한 청교도들이나 순례자들은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든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바란 것은 영국의 국교회처럼 자신들의 신앙을 기초로 하나의 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 자유였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이 예정된 성도, 혹은 선택을 받은 자라고 부르면서 다른 사람들과 구분했다. 그들만이 정식 교인이며 투표권을 가진 완전한 시민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인 비신자들은 교회에 출석할 수는 있지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는, 이른바 이등 시민이었다. 몇 해 동안 청교도들의 이런 정책이 효과를 발휘한 게 사실이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오직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던 비신자들 사이에서 점차 불만이 높아갔다. 최초의 반항자는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한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ams, 1603-1683)였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 출신으로 영국 국교회에서 서품을 받았지만, 과격한 혁명 사상을 지녔다는 이유로 영국에서 추방당해서 1631년에 뉴잉글랜드로 건너왔다. 세일럼의 목사로 취임한 로저는 청교도들과 달리 교회와 국가의 통합을 격렬히 공격하면서 종교와 정치의 완전한 분리를 거듭 제기했다. 아울러서 그는 정부가 모든 교파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교도들은 그의 문제 제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로저가 원주민들에게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원주민들”이고, 백인들이 불법으로 토지를 점유하고 있다고 설교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메사추세츠 총회는 1635년에 로저 윌리엄스의 추방을 결의했다. 당시 그의 딸은 두 살이었고 아내는 임신을 한 상태였으나 그들을 모두 남겨둔 채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다. 로저는 14주 동안 얼어붙은 동부지역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인디언들은 처음의 순례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로저에게도 호의를 베풀고서 메사추세츠 주 경계 너머의 땅을 제공했다. 그의 아내와 자녀, 그리고 몇 명의 친구들이 그곳으로 합류했다. 로저는 그곳에 프로비던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프로비던스에서는 어떤 신앙을 갖더라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1644년에 영국으로 건너가서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 최초의 로드아일랜드의 총독이 된 로저는 특허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식민지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종교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종교적 문제에 관해서는 자신의 판단을 따를 수 있다.” 로저가 보기에 신앙은 개인의 양심과 관계된 문제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신앙이 다른 퀘이커나 유대인들에게까지 별다른 요구 없이 땅을 제공했다.
두 번째 반항자는 14명의 자녀를 둔 앤 허친슨(Anne Hutchinson)이었다. 허친슨은 자신의 집에서 당국이 금지하는 집회를 가졌다. 이 모임에서는 모든 목사들의 설교가 도마 위에 올랐다. 허친슨은 당시 사람들이 입 밖에 내기를 두려워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녀는 진리의 척도인 성서를 통해서 조명하는 성령은 물론이고 성서를 넘어서서 각 사람을 조명하는 성령을 내세웠다.
하나님의 은총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내리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내리기 때문에 각 개인은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허친슨은 주장했다. 이것은 모든 권위를 성서에 두고 있는 청교도 교회와 사회를 근본부터 흔드는 발언이었다. 바울의 신학에 근거한 그녀의 주장은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이 미리 예정된 선택받은 사람이 있다는 예정론과 선택받은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약속이 있다는 거룩한 계약론을 부정했다.
1637년 허친슨의 주장을 심의하기 위해서 성직자 회의가 열렸다. 허친슨의 발언이 더 발전하게 되면 퀘이커나 재세례파와 같은 급진적인 경건주의자들처럼 성직자의 필요성을 배제하게 되고, 그러면 메사추세츠의 신정일치 사회가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재판정은 앤 허치슨을 추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해산을 앞두고 있던 앤 허친슨과 가족들, 그리고 그녀의 추종자들은 한겨울에 지금의 로드아일랜드인 프로비던스로 급히 도망쳐야 했다. 로드아일랜드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작은 식민지였다. 하지만 그 작은 땅덩이에서 어떤 종교든 편애하지 않는 최고의 시민의 정부라는 거대한 사상이 잉태하고 있었다. 이 사상은 나중에 미주 지역 전체의 세계관을 변화시키게 된다.
식민지의 마녀사냥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간단하지 않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신들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고향을 등지고 오로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까지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녀들까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정착민 1세대는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자녀들 가운데 거의 절반이 그리스도를 믿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식민지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사회 전체를 지배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소위 ‘중도계약’이라고 부르는 고육책이었다. 이전까지 교회는 부모 모두 그리스도인이어야만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하지만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이 줄어들고 그것이 불가능해지면서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만이라도 교회에 참석하기만 하면 세례를 주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중도계약이었는데, 사회에 대한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청교도들의 두 번째 지배전략이었다.
새로운 시도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신뢰하는 어린이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청교도들은 이런 상황을 식민지를 파괴하려는 악마적 세력의 책동으로 간주했다. 급기야 그런 불만과 두려움이 일거에 분노로 표출된 사건이 발생했다. 1692년 2월 메사추세츠의 세일럼(Salem)에서 집단적인 히스테리가 발생했다. 어느 날 세일럼 교회를 담임하는 패리스 목사의 딸 엘리자베스가 발작하면서 헛소리를 해댔다. 며칠 뒤에는 엘리자베스의 사촌 애비게일과 또 다른 소녀들이 발작을 일으켰다. 원인을 찾지 못한 의사는 사탄의 짓으로 결론 내렸다.
사탄이 마녀를 시켜서 해코지한다고 생각한 주민들은 소녀들을 불러 심문했다. 아이들은 여성 몇 명을 마녀로 지목했다. 그들이 체포되었지만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소녀들이 계속 늘어갔다. 덕분에 마녀로 지목되는 여성의 숫자도 그만큼 더 늘었고, 그들을 변호하는 남성들까지 체포되었다. 5월 말까지 100여 명이 투옥되었고 세일럼 지역을 벗어나서 메사추세츠까지 확대되었다. 1년 남짓 계속된 마녀사냥으로 185명이 체포되고, 그중 59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31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가운데 19명은 처형되고, 1명은 고문으로 죽고, 3명은 재판을 기다리다 감옥에서 사망했다.
이 사건은 사람들 사이에서 ‘세일럼의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유럽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마녀사냥이 진행되었고, 그로 인해서 과부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이 고통을 겪다가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생명과 재산을 빼앗겨야 했다. 세일럼의 마녀사냥은 청교도들이 새로운 식민지에서 시도했던 여러 가지 긍정적인 실험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오점을 남겼다.
1696년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새뮤얼 시월은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회개했고, 1711년에는 식민지 정부가 생존해 있는 마녀재판 희생자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유죄 기록을 삭제했다. 당시 밀이나 귀리에 기생하던 곰팡이균에 집단으로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녀들이 내뱉은 한 마디 때문에 불어 닥친 피바람은 청교도의 이상을 퇴색시켰고, 결국에는 1700년대 초반에 청교도의 뜨거운 신앙이 소멸하면서 영적 공백을 유발시킨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