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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와 정서 이야기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힘든 이유— 관계에서 나를 잃지 않는 법에 대하여

작성자paipai|작성시간26.06.17|조회수22 목록 댓글 0

저도 어떤 날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혼자면 이렇게 지치지 않을 텐데.'

연락을 읽고도 답장을 미루고, 만남이 다가올수록 몸이 무거워지고, 분명히 좋아하는 사람인데 같이 있고 나면 이상하게 피곤한 이 감각, 여러분도 익숙하신가요?

AI 활용 이미지

 

상담을 하다보면 관계가 힘들다는 사람들이 점점 느는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상담실에서 만나는 20대, 30대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고통의 종류는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관계의 상대가 연인이든, 부모님이든, 친구든, 직장 상사든 — 그 안에서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감각이 있어요.

"내가 어디까지 맞춰줘야 하지?"

"이게 내 잘못인 건지, 상대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어."

"이 관계, 끊고 싶진 않은데 이대로는 너무 힘들어."

이 글은 관계를 더 잘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관계 속에서 자꾸 사라지는 나를 어떻게 되찾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가 빨린다는 것의 정체

상담을 하다 보면 이런 표현을 자주 듣습니다.

"같이 있으면 에너지가 빨려요.","그 사람 연락만 와도 긴장돼요.", "저도 모르게 그 사람 기분에 맞게 행동하고 있어요."

이런 감각과 생각을 가리켜 과잉동조(over-accommodation) 또는 정서적 융합(enmeshment) 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 감정과 상대의 감정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진 상태입니다.

상대가 기분 나쁘면 내가 뭘 잘못한 것 같고, 상대가 침묵하면 내가 눈치를 봐야 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내가 먼저 채워줘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거죠.

이 상태가 지속되면 어떻게 될까요?

처음엔 그냥 피곤합니다. 그 다음엔 그 사람이 싫어집니다. 그리고 결국, 내가 싫어집니다.

"왜 나는 이것도 못 참지?" 하고요.

관계마다 다른 방식으로 나를 잃어 버립니다

관계의 고통은 맥락마다 다릅니다.

연인 관계에서는 주로 신뢰와 안정이 만들어지기 까지의 불안이 문제입니다. 잘 지내다가도 상대가 연락이 늦으면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싸우고 나면 상대가 나를 떠날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옵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고, 본 뜻과 다른 해석으로 힘들어하죠. 결국 내가 더 많이 맞추고,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노력한다고 여깁니다. 그(그녀)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나를 조금씩 깎아나가는 것이죠.

부모 관계에서는 주로 '죄책감'이 작동합니다. 부모님의 기대, 걱정, 때로는 한숨 한 번에 내 결정이 흔들립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있어도 "부모님이 싫어할 것 같아서"라는 이유 하나로 접어버리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 패턴이 오래되면, 어느 순간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직장 상사나 선배와의 관계에서는 주로 위계에 의한 자기검열과 무조건적인 수용이 문제가 됩니다. 틀린 말을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고, 불합리한 요구도 "다 그런 거겠지" 하며 삼킵니다. 분노는 표현되지 못한 채 몸에 쌓여, 어느 날 갑자기 번아웃이라는 이름으로 터집니다.

친구 관계에서는 더 교묘합니다. '좋은 친구여야 한다'는 기준이 나를 옥죕니다. 친구가 힘들 때 내가 힘들어도 먼저 들어줘야 하고, 친구가 부탁하면 싫어도 거절을 못 합니다. 이런 관계가 쌓이면 우정인지 의무인지 모를 감각이 남습니다.

공통점이 보이시나요?

모든 관계에서 나의 감정은 뒷순위로 밀립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 세 가지 실제적인 전환

이론이 아니라 내일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① 내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관계가 힘들 때,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 진짜 못 살겠다."

그런데 이 감각을 좀 더 정확하게 해부해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나는 지금 상대의 반응이 예측 안 되어서 불안한 거다." "나는 거절당할까봐 두려워서 맞추고 있는 거다." "나는 화가 났는데, 화내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슬픈 척하고 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감정에 '먹히는' 대신 감정을 '보는' 위치로 이동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정서 명명화(affect labeling)라 하는데, 뇌과학적으로도 이 과정이 편도체의 과활성을 낮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창한 방법이 필요 없습니다. 하루에 한 번, "나 지금 어떤 감정이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② 내 자리를 만들어두는 것

관계에 지쳐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관계 밖에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취미도, 혼자 쓰는 시간도, 아무도 모르는 루틴도 없이, 삶이 온통 '관계의 응답'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관계에서의 건강함은 관계 안에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관계 밖에서 충전되어야 관계 안에서 소진되지 않습니다. 거창한 취미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아침에 혼자 커피 한 잔 마시는 15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산책 20분, 그 시간에 나를 '접속'시키는 것입니다. 그 루틴이 생기면 관계가 흔들려도 돌아올 자리가 생깁니다.

③ '노(No)'는 관계를 끊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절을 '관계의 위협'으로 경험합니다. 거절하면 상대가 나를 싫어할 것 같고, 관계가 멀어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 못 하고 삼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진짜 관계를 위협하는 것은 '거절'이 아닙니다. 말 못 하고 쌓인 감정입니다. 쌓이고 쌓이다가 어느 날 관계 전체를 끊어버리거나, 폭발하거나, 그냥 조용히 사라지게 됩니다.

거절은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처음엔 이렇게 작게 시작해보세요.

"오늘은 좀 힘들어서, 다음에 봐도 될까?"

이 한 마디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상대는 그 솔직함에 더 신뢰를 느낍니다.

상담실에서 처음 오시는 분들 중 많은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저 이거 하나 못 이기고 상담까지 와야 하나요?"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관계의 고통은 의지로 버티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관계 안에서 작동하는 패턴은 대부분 아주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것입니다. 처음 세상과 연결되던 방식, 처음 사랑받는 법을 배웠던 방식이 지금의 관계 패턴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패턴을 이해하고, 조금씩 바꾸는 일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용기를 낸 사람만이 관계 안에서 나를 잃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잘 대해줘야 할 사람은, 결국 나입니다.

이 글에서 다룬 패턴이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면, 혼자 감당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뎀심리학습상담센터에서는 관계 안에서 '건강하게 나'를 되찾고 싶은 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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