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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68.06.09 로마 황제 네로와 황후 옥타비아의 비극

작성자짱stigma|작성시간13.08.11|조회수282 목록 댓글 0

 

68.06.09  로마 황제 네로와 황후 옥타비아의 비극

 

 

 

 

 

 

 

 

 

37.12.15 네로 출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2333

64.07.18 로마대화재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8948

 

 

 

 

 

로마제국 황제 네로 사망(68-06-09)-매일신문, 2009-06-09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5821&yy=2009

 

 

 

 

 

 

 

ㆍ결혼 기념일에 모두 ‘하늘나라로’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는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딸로 서기 39년쯤 태어났다. 어머니는 클라우디우스의 사촌인 발레리아 메살리나였다. 메살리나는 남편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48년 처형됐다. 클라우디우스는 그 뒤 역시 사촌지간인 아그리피나와 재혼했다. 아그리피나도 재혼이었는데, 전 남편에게서 얻은 아들 네로를 데리고 황실로 들어왔다. 옥타비아는 어릴 적부터 루시우스 실라누스라는 사람과 약혼한 상태였다. 하지만 술책이 뛰어난 아그리피나는 이 약혼을 물리고 자기 아들 네로와 옥타비아를 짝지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네로와 옥타비아는 53년 6월9일 혼례를 올렸다. 하지만 옥타비아의 인생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아버지 클라우디우스가 이듬해 숨지자 네로는 옥타비아의 오빠인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한 뒤 황제 자리를 빼앗았다. 그 다음엔 네로와 친어머니 아그리피나가 권력다툼을 벌였다. 네로는 자기 어머니까지 59년 살해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옥타비아는 감정을 숨기고 사는 법을 배웠다.

기록에 따르면 로마 시민들은 네로를 싫어했지만 옥타비아 황후만큼은 좋아했다고 한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옥타비아를 가리켜 “귀족적이고 덕성있는 아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네로는 옥타비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점점 싫증을 냈다. 여러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며 옥타비아를 구박했다. 처음에 네로의 마음을 빼앗은 여성은 열서너살밖에 되지 않은 클라우디아 악테라는 소녀였고, 그 다음은 폼페이 태생인 포패아 사비나였다. 포패아에 빠진 네로가 옥타비아를 박대하자, 황실 주변에서 비난이 높아졌다. 네로는 옥타비아에게 사과하며 다독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포패아가 임신을 하자 네로는 아예 옥타비아와 이혼을 하고 내쫓은 뒤 포패아를 황후로 맞았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네로와 포패아는 옥타비아를 판다테리아라는 외진 섬으로 내쫓았다. 로마인들은 옥타비아에 대한 네로의 비정한 처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옥타비아를 복귀시키라는 거리 시위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엇나간 네로는 결혼기념일인 62년 6월9일 옥타비아를 처형해버렸다. 그 후로도 광인과 같은 악행을 일삼던 네로는 만 6년 뒤인 68년 6월9일 충실했던 전처를 그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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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은 불길한 날일까?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로마제국의 제5대 황제 네로(Nero`37~68)에게는 그러했다. 재위 14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살해해 정신이상자 혹은 폭군으로 불렸던 그는 첫번째 부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이날 죽였고, 자신도 공교롭게도 이날 죽었다.

 

첫 부인 옥타비아는 전임황제 클라우디우스의 딸이다. 네로는 어머니인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면서 황제의 양아들이 됐다. 클라우디우스가 죽기 1년여 전에 의붓동생인 옥타비아와 결혼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면서 황제에 올랐다. 결혼한 날도 이상하게도 서기 53년 6월 9일이었다. 비뚤어진 성격의 네로는 착하고 여린 옥타비아를 싫어했다. 사악한 정부이자 훗날 두번째 부인이 되는 포파에아 사비나(30~65)와 공모해 62년 오늘, 옥타비아를 살해했다.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목욕탕 안에서 그녀의 동맥을 강제로 끊었다. 조강지처를 버린 네로는 더욱더 광란적으로 치달았다. 그로부터 6년 뒤인 오늘, 속주 총독 갈바가 반란을 일으키고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자 자신의 시종을 시켜 자살했다. 포악무도한 왕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 아닐까.

 


/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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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 Nero ]

AD 37. 12. 15 라티움 안티움~68. 6. 9 로마.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AD 54~68 재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의붓아들이자 후계자였다. 방탕하고 사치하며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하고,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로마 시를 불태운 것으로 악명높다.

 

 

 

성장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AD 40년경에 죽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증손녀인 어머니 소(小) 아그리피나 손에 자랐다. 아그리피나는 2번째 남편을 독살한 뒤, 삼촌인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내가 되어 황제의 친아들인 정통 후계자 브리탄니쿠스를 제쳐두고 자기 아들 네로를 후계자로 삼도록 황제를 설득했으며, 황제의 딸 옥타비아를 네로와 결혼시켰다. 그녀는 황제와 결혼하기 전인 48년에 황제의 전처였던 발레리아 메살리나의 살해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55년에는 브리탄니쿠스를 독살하는 등 네로를 권좌에 앉히기 위해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고 자신을 반대하는 궁정 고문관들을 제거했으며 54년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마저 독살한 것으로 보인다. 황제가 죽자마자 그녀는 자기 편인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근위대장)인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를 통해 근위대가 네로를 황제로 선포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원로원에서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으며, 로마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17세도 채 안된 소년에게 절대권이 넘어갔다.

 

 

집권 초기

아그리피나는 네로가 즉위하자 항상 자신을 반대했던 막강한 해방노예 나르키수스를 제거했고 제국을 직접 다스리려 했다. 그러나 네로의 노스승인 스토아 철학자 루키우스 아나이우스 세네카부루스는 비록 아그리피나 덕분에 세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녀의 영향력 안에 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네로가 자기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동을 하도록 격려했고 결국 모자관계는 점점 냉담해졌다. 56년 아그리피나는 압력을 받아 은퇴했고 그때부터 62년까지 사실상 부루스와 세네카가 제국을 다스렸다.

 

네로는 이런 분위기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54년 황제로 즉위했을 때부터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 그는 황제 앞에서 열리는 비밀재판이라든가, 부패한 해방노예의 지배 등 클라우디우스 황제 말년에 있었던 나쁜 관례들을 없애고 원로원에 더 많은 독립권을 허용했다. 당대 사람들은 네로를 두고 훌륭한 외모를 갖춘 미남이지만 부드럽고 나약한 성격에 침착하지 못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 묘사했다. 59년 이전까지 전기작가들은 네로에 대한 일화 가운데 자비롭고 너그러운 업적만을 인용했다. 네로 정부는 경기장에서 살육하는 시합을 금지시키고 세금을 내렸으며 사형을 금하고 주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노예들이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네로 자신은 그를 비난하는 풍자시 작가들이나 심지어 그에 대해 음모를 꾸민 사람들까지도 사면해주었으며 비밀재판을 거의 없앴고 반역죄를 다스리는 법을 발동시키지 않았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원로원 의원 40명을 처형했으나, 아그리피나가 꾸민 살인 음모를 빼면 54~62년까지 네로가 재위한 동안 그러한 사건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네로는 검투경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시·연극·운동경기 경연대회를 열기 시작했다. 재난을 당한 도시를 원조했으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요청을 받아 유대인들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예술적 자만과 무책임

부루스와 세네카는 자기들이 직접 제국을 다스리면서 네로가 무절제하게 취미와 향락을 즐기도록 내버려두었다. 세네카는 네로에게 독재권을 책임감있게 사용하도록 역설하기는 했지만 네로가 소년으로서 갖는 많은 일시적 충동들을 조절해 책임있는 행동을 하도록 하지는 못했다. 처음에 네로는 사형 선고에 서명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으며, 세금 징수원들이 백성을 착취하는 것을 보고 58년에는 세금을 없애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뒤에도 그는 원정이나 공공토목사업과 같은 웅대한 계획을 생각해내기도 했으나 대부분 개인의 향락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자기의 지위를 이용했다. 일찍이 56년부터 네로가 밤에 길에서 난동을 부린다는 소문이 떠돌기는 했지만, 네로의 야만적인 행동은 59년 자기 어머니를 살해했을 때부터 62년 6월 아내 옥타비아를 죽였을 때까지 35개월 동안 드러났다.

 

아그리피나는 아들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에 격노해 비이성적 행동을 한 대가로 살해당했다. 또 네로는 원로원 의원 오토(나중에 황제가 됨)의 젊은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와 사랑에 빠진 뒤, 옥타비아를 버리면 궁정과 민중들이 불만을 품을 것을 두려워하여 옥타비아를 살해했다. 네로는 62년 포파이아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65년에 죽고, 그뒤 귀족 출신의 스타틸리아 메살리나와 결혼했다.

 

네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질책이나 징벌을 받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과도한 예술적 자만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 자신이 시인이며 2륜전차 기수이자 수금연주자라고 자부했으며, 59년(또는 60년)에는 대중공연을 갖기 시작했다. 그뒤 그는 연극무대에 등장했으며, 극장측은 그가 갖가지 배역을 맡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로마인들은 그의 이런 기괴한 행위를 품위가 없고 범절에 어긋난 수치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네로는 심지어 자신의 시적·음악적 재능을 펴기 위해서 왕위를 버리겠다는 철부지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63년경부터는 이상한 종교적 열성을 보이기 시작해 새로운 종파의 설교자들에게 점점 이끌리게 되었고 그무렵 세네카는 네로에 대한 영향력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62년 부루스가 죽은 뒤 은퇴했다.

 

64년 로마를 휩쓸었던 대화재로 그간의 네로에 대한 나쁜 평판이 드러났다. 화재로 도시가 파괴된 것을 이용해 네로는 로마를 그리스식으로 재건했으며, 로마 시 전체의 1/3 크기인 궁전 ' 황금저택'을 짓기 시작했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 화재가 일어났을 때 네로는 로마에서 56㎞ 떨어져 있는 안티움 별장에 있었기 때문에 화재에 책임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로마 사람들은 네로가 자신의 심미적 취향에 맞게 로마를 다시 지으려고 직접 불을 냈다고 오해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 Annals〉와 로마의 전기작가 수에토니우스의 〈네로 Nero〉에 따르면, 네로는 대응책으로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돌리려 했다 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도들을 여러 가지 나쁜 행위에 가담하는 무리로 여기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로마 정부는 그리스도교도들을 유대인과 명확히 구분하지는 않았다. 뜻하지 않게 네로는 심한 그리스도교도 박해정책을 시작한 장본인이 되었으며, 이때문에 그리스도교 외경(外經) 전설에서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나쁜 평판을 얻었다.

 

다가오는 종말

그동안 로마는 동방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넓혔는데 당시 대외정책에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아르메니아였다. 사이가 나쁜 동방의 파르티아에 대항하기 위해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집권 뒤부터 아르메니아에 속왕을 임명해 그곳을 완충국가로 삼는 정책을 써왔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오랫동안 로마의 통치를 못마땅해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 황제 말년에는 파르티아의 왕자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인의 지지를 받아 아르메니아 왕이 되었다. 이에 대응해 네로 정부는 유능한 장군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를 사령관에 임명하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66년까지 코르불로는 군사작전을 수행해 새로운 타협을 하게 되었는데, 티리다테스는 왕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네로에게서 왕관을 받기 위해 로마로 와야만 했다.

 

그러나 네로는 궁전과 건물의 신축, 총애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선물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속주의 금고를 강탈했기 때문에 속주는 점점 안정을 잃기 시작했고, 선물 비용만도 연간 군사비용의 몇 배에 이르는 20억 세스테르케스가 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60년(또는 61년)에 브리튼 섬에서 부디카(보아디케아) 여왕이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66~70년에는 유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이무렵 궁정에는 황제 반대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를 반대하는 세력은 원로원 의원에서 에퀴테스(기사)·장교·철학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에 걸쳐 있었는데 이런 반대세력들이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황제로 세우려는 대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음모자들의 노예들이 음모 사실을 네로에게 알려주어 위험을 면했으므로 네로는 겁을 먹지 않았지만 음모에 군장교가 가담했다는 것은 매우 불길한 징조였다. 그는 이 사건에 매우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피소 음모사건에 관련된 41명 가운데 겨우 18명이 두려움으로, 또는 명령에 의해 자살했고(세네카와 시인 루카누스 포함), 나머지는 추방되거나 사면되었다.

 

66년말 네로는 그리스 여행을 하여 15개월 동안 로마를 떠나 있으면서 해방노예 1명에게 집정정치를 맡겼다. 이 여행중에 그는 새로운 예술적 면모를 보여주었고 헝클어진 머리에 고행자 같은 옷차림을 하고 맨발로 돌아다녔으며 그리스 문화에 열정을 품고 과거의 영광을 기리는 뜻에서 많은 그리스 도시를 해방시켰다. 68년 2월 로마로 돌아왔는데 그뒤 4개월 동안 예술과 종교를 광적으로 숭배해 원로원 의원과 그에게 재산을 빼앗긴 귀족들에게서 반감을 샀다. 게다가 대부분의 군장교들 역시 이탈리아 중류층 출신들로 보수적인 도덕관을 갖고 있었으므로 네로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레기온(군단)의 일반 군인들까지도 카이사르의 후손이 무대에 올라 대중들 앞에서 고대 그리스의 영웅이나 또는 훨씬 더 비천한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분개했다. 네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레가투스(속주 부총독)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는 "나는 그가 무대에서 임산부역과 처형당하는 노예역을 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스페인 속주 총독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갈리아 리옹(프랑스 지방) 총독 율리우스 빈덱스, 그밖에도 동부 변경지역의 총독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 소식을 듣고 네로는 대응책을 취하지도 않고 코웃음만 쳤을 뿐 과대망상적인 과시에 더욱 몰두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네로는 "갈리아에 다시 한번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내가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다. 그동안 반란은 더욱 널리 퍼졌으며 레기온은 갈바를 황제로 추대했고 원로원은 네로에게 십자가에 달려 채찍에 맞아 죽는 형을 내렸다. 근위대는 그를 버렸으며 그를 섬기던 해방노예들은 네로가 로마 항구 오스티아에 준비해둔 배를 타고 달아났다. 네로는 로마 시에서 도망해야만 했는데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단검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에서는(타키투스가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나 꾸며낸 이야기인 것이 거의 확실함), 네로가 그리스 섬에 도착했으나 이듬해(69) 붉은 머리를 한 거지 왕초이자 예언자로 변장한 그를 키트노스의 총독이 알아보고 체포해 원로원이 선고한 대로 형에 처했다고 한다. 뒤에 로마 민중과 근위대는 그처럼 진보적인 황제를 잃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신하들에게 네로는 대체로 폭군이었고, 그의 실정 때문에 일어난 반란은 잇따른 내란을 몰고와 한동안 로마 제국의 존속이 위협받았고 전국이 혼란 속에 빠졌다.

 

李順珠 옮김

 

 

 

옥타비아 [ Octavia ]

BC 69경~BC 11.

 

옥타비아누스(뒤에 아우구스투스)의 누이이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내.

 

옥타비아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와 그의 2번째 부인 아티아 사이에 태어났다. BC 54년 이전에 옥타비아는 가이우스 마르켈루스와 결혼해서 2명의 딸과 아들을 낳았다. BC 40년 마르켈루스가 죽자 그녀는 당시 옥타비아누스·레피두스와 함께 로마를 다스리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재혼했다. 처음에는 이 결혼으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정치적 긴장이 다소 풀리는 듯했고 BC 37년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는 옥타비아의 중재로 타렌툼 조약이 맺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BC 36년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를 떠나 파르티아 주둔 군대를 지휘하고 동방에서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았다. 옥타비아가 BC 35년에 군대와 자금을 보냈지만 안토니우스는 그녀와 만나기를 거절했고 BC 32년에는 이혼했다. 옥타비아는 성실한 아내이자 어머니로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안토니우스의 아이들을 자기 자식들과 함께 키웠다. BC 23년 아들 마르켈루스가 죽자 그녀는 공적 생활에서 물러났다.

 

 

/네이트 백과사전

 

 

네로

“플리니우스는 그를 가리켜 ‘인류의 파괴자’이며 ‘세상의 독’이라 표현했다. 그는 원로원에서 국가의 적이라 선언한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후대 사람들은 네로에게서 사악한 인간, 더 나아가 반 그리스도의 전형을 보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라신의 [브리타니쿠스]와 같은 문학 작품에서 그는 모친 살해자나 몰인정하고 잔인한 인간의 상징으로 그려졌다. 또한 사드 후작의 영웅이기도 했다. ‘더러운 피를 물려받은 타락한 절대권력자’라는 말은 칼리굴라보다 네로에게 훨씬 더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비비안 그린이 [권력과 광기]에서 묘사했듯, 네로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폭군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그보다 더한 잔혹성을 보인 로마 황제들도 있었고, 오히려 네로는 잔혹성 면에서 온건한 편이었는데도 그런 오명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황제란 무엇인가?

기원전 48년,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격파함으로써 로마 공화국의 제국화는 사실상 결정되었다. 정식으로는 그로부터 21년 뒤인 기원전 27년에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사람)’라는 칭호를 얻은 때를 제국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의 급속한 번영과 그 번영의 그늘을 극복해 보려던 그라쿠스, 마리우스 등의 개혁, 그에 따라 나타난 군벌의 시대의 종착점이었다. 그러나 오래전에 왕정을 폐지했던 로마에게 황제란 생소한 존재였고, 실제로 황제권은 로마 공화정의 여러 제도를 이어붙여 만들어졌다. 이탈리아 본토의 행정과 군 통수권을 갖는 집정관, 그 집정관과 원로원에 맞서 민회를 대변하는 호민관, 각 속주를 지배하며 해당 지역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는 총독. 로마 공화국은 이렇게 권력 분립을 이루고 또한 집정관과 호민관은 각기 두 명씩 선임함으로써 독재를 막아왔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과 호민관을 겸임했을 뿐 아니라 동료를 두지 않았고, 각 속주의 총독을 지휘감독할 수 있는 권한까지 얻음으로써 “황제권”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이러다 보니 도대체 황제란 무엇이며 로마인은 황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가 한동안의 과제였으며, 초기 황제들은 이 과제에 각각의 개성으로 답을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각종 제도의 창시자였고, 티베리우스는 냉혹한 관리자였으며, 칼리굴라는 독재자였다. 그리고 개성이 충분치 않았던 클라우디우스를 거쳐 네로에게 5대 황제의 지위가 돌아왔을 때, 그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로마 황제를 연출해 보였다. 바로 “지중해 세계에 군림하며, 모든 로마인을 하나로 묶는 상징적 존재”라는.

 

 

아그리피나의 집념

네로가 황제가 되는 길은 험난했으며, 그것은 그 자신보다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집념의 결과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결혼생활에서 아들을 얻지 못했고, 따라서 딸인 율리아가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었던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낳은 루키우스와 가이우스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 모두 병사하자, 아우구스투스는 어쩔 수 없이 황후 리비아가 자신과 결혼하기 전에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한편, 역시 리비아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드루수스(낙마 사고로 죽었다)의 아들 게르마니쿠스는 수려한 용모에 화려한 언변, 그리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 세운 혁혁한 공로 등으로 로마 민중이나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그를 자신의 양자로까지 삼아야 했던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된 뒤에도 항상 게르마니쿠스를 잠재적 경쟁자로서 꺼렸다. 그러므로 게르마니쿠스가 안티오크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자, 티베리우스가 손을 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부인인 아그리피나(대 아그리피나)까지 섬에 유배 보내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죽을 때 겨우 세 살이었던 아그리피나(소 아그리피나)는 늘 죽음의 위협 속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오빠인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에 이어 황제가 되자 비로소 운이 트이는 듯했으나, 광기 어린 젊은 황제의 의심을 사서 어머니처럼 코르시카 섬에 유배되고 만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반드시 권력을 움켜쥐어야 한다. 그래서 적들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다짐한 그녀는 스스로는 여자의 몸이었기에 아들 네로에게 모든 기대를 건다. 그녀의 계획은 숙부뻘인 클라우디우스가 칼리굴라에 이어 황제가 되자 그를 유혹하여 황후가 됨으로써 1단계가 성공했고, 다시 클라우디우스를 암살하고 마침내 네로를 황제에 앉힘으로써 2단계까지 성공을 보았다.

 

네로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장남 네로(처음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태어났을 때 ‘아그리피나가 오빠 칼리굴라와의 근친상간으로 낳은 자식이 아닌가?’하고 의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그리피나가 코르시카에 유배되자 두 살도 안 된 네로를 숙모인 레피다에게 맡겨 버리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레피다는 네로를 살뜰히 보살피지 않았으며, 무용수나 이발사 교육을 시켰다. 아그리피나의 세력이 커지면서 네로도 좋은 생활을 누리게 되었지만, 54년, 고작 열여섯 살의 나이로 로마 황제가 되자 처음에는 귀찮아했다고 한다. 자신은 시나 음악을 즐기며 사는 게 좋지, 정치놀음은 적성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황제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리이며, 황제로서 시와 음악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충고했다. 네로는 이를 귀담아들었으며, 마침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실현하게 된다.

 

 

‘예술가 황제’의 ‘포퓰리즘’

“그의 성격의 특징은 대중의 인기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다”라고, 네로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쓰고 있다. 사실 네로는 평생 스스로를 황제라기보다 예술가로 생각했는데, 자신만의 미학의 세계에서 사는 고독한 예술가라기보다 대중의 환호와 애정을 먹고 사는 대중예술가에 가까웠다. 그는 황제로서 원로원이나 민중 앞에서 연설할 때 시적인 운율을 구사했으며, 아그리피나가 그의 스승으로 붙여 준 세네카의 도움 덕에 내용적으로도 알찼던 연설은 많은 갈채를 받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네로는 직접 류트나 리라를 켜면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환호하는 대중에게 환한 웃음과 함께 거액의 화폐를 뿌렸다. 원로원은 이를 황제답지 못한 경박한 일로 여겼으며, 수에토니우스나 타키투스는 네로의 목소리나 시의 수준은 형편없었으나 청중은 황제의 무력과 돈 때문에 마지못해 환호를 보내곤 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네로가 더 멋지게 공연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이야기는 수에토니우스도 인정하고 있음을 볼 때, 그가 단지 겉멋만 든 엉터리 예술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네로를 낳은 아그리피나 <출처: Wikipedia>

스승 세네카 <출처: Wikipedia>

 

 

젊은 황제의 이런 전시성 행사는 점점 규모가 커졌다. 올림픽을 본떠 ‘네로니아’ 축제를 열었는데 5년에 한 번 개최하기로 했지만 점점 기간을 좁혀 결국 연중행사가 되었다. 전차 경주와 검투사 경기 등에 이어 시와 리라 연주, 웅변 등의 경연이 벌어졌는데 이들 종목에서는 언제나 네로가 우승이었다. 그는 이를 축하하는 뜻에서 막대한 자금을 시민들에게 뿌리고, 축제 기간 중 누구나 자유롭게 목욕탕과 음악당을 사용하게 했으며, 수많은 경기장과 극장을 새로 지어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오락을 서민들도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 비극에 직접 출연하여 연기를 했는데, 매번 심혈을 기울여 임했으며 어쩌다 작은 실수를 하면 그 때문에 관중들의 야유를 받을까 봐 안절부절못했다고 한다. 감히 아무도 그를 야유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만큼 연기에 몰입했던 것일까?

 

이처럼 노는 일에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썼으니, 과연 폭군답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폭군은 대개 유혈을 좋아하고 전쟁을 취미로 여긴다. 하지만 네로는 정반대였다. 그는 사형이 확정된 죄인에 대해서도 되도록 집행을 미루며 장기 유배형으로 바꾸게 했으며, 대중이 좋아하므로 검투사 시합을 열었지만 스스로는 즐기지 않았고 끝내 폐지했다. 역시 로마 황제들이 곧잘 벌였던 암살도 적어도 한동안은 저지르지 않았다. (즉위 직후 경쟁자였던 브리타니쿠스를 암살했다고 하지만, 현대의 학자들은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그는 재위 14년 동안 한 차례의 전쟁도 일으키지 않았다. 당시 로마의 가장 큰 적대국은 동방의 파르티아였는데, 네로는 특별히 조련한 군사들을 파르티아와의 국경에 배치해 만일에 대비하고는 파르티아 왕자 티리다테스를 로마로 초대했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거액을 선사하여 양국 사이에 평화 무드가 이어지게 했다. 파르티아에서는 네로에게 큰 호감을 품은 나머지 네로가 죽은 뒤에도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또한 네로는 ‘친서민 정책’을 많이 내놓았다. 과도한 변호사 비용 때문에 서민들이 소송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변호사 비용 상한제를 실시하고, 보석금이나 과태료는 줄였다. 간접세를 일체 폐지하려다가 원로원의 저항에 부딪혀 세율만 낮추었으며, 속주에서 이탈리아에 들어오는 물품에 관세를 폐지했는데 이로써 사실상 무관세 혜택을 받고 있었던 이탈리아 내 대지주들의 기득권이 훼손되고, 생필품 물가는 내렸다. 노예들에게는 주인의 가혹행위에 맞서 주인을 고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고 보면 그 사치스러운 공연과 볼거리들도 대중에게 정신적, 물질적 만족의 기회를 주고 로마 전역의 경기를 활성화하는 효과를 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래저래 서민들 사이에서는 네로 황제의 인기가 드높았다. 반면 그의 전기를 쓴 수에토니우스와 타키투스를 포함하는 귀족들에게는 ‘철부지 황제’의 모든 것이 갈수록 못마땅해졌다.

 

 

로마 화재와 기독교 박해

그러나 재위 5년째인 59년, 그는 모후 아그리피나를 암살했으며 그것은 서민들 사이에서도 네로의 인기를 ‘조금은’ 떨어트리는 계기가 되었다. 친족 암살은 로마 황실에서 지겨울 정도로 많이 일어났지만, 친어머니를 죽인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네로로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점도 있었는데, 점점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게 실망한 그녀가 새로 얻은 정부를 대신 황제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으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를 시작으로 65년에 스승 세네카에게 자살을 강요하기까지, 네로는 처음과 달리 점점 폭력과 탄압을 늘려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천성적인 소심함(암살이나 반역의 낌새가 있다고 여겨지면 두려워서 견디지 못하는) 때문에, 그리고 그만큼 기세 좋게 퍼부어댄 결과 점점 뚜렷해지는 재정 부족 때문이었다. 반역이 의심되는 자를 처형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면 일석이조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과의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네로는 스스로 창작한 소극에서 광대에게 이렇게 외치도록 하여 그들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오 황제시여, 당신은 어찌 그리 게으르십니까? 어째서 원로원 의원놈들을 한꺼번에 죽이지 않으십니까?”

 

“어머니를 죽이고 회한에 사로잡힌 네로”. 1878년 워터하우스의 그림 <출처: Wikipedia>

 

 

그러나 서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유지되는 편이었는데, 이를 단숨에 꺼트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바로 64년 7월에 일어난 로마의 대화재였다. 네로가 자신이 생각한 신도시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로마를 불태웠으며,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는 이야기는 수에토니우스 등의 역사가가 기록한 후 [쿠오바디스]를 비롯한 여러 문학과 예술 작품에서도 오랫동안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사실 그렇게 믿을 만도 했다. 불타는 로마를 보며 네로가 시를 읊은 것은 사실이며(다만 그것은 진정 비통함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로마의 잿더미를 대체하여 네로 스스로를 위한 웅장한 황금궁전을 포함하는 반듯하고 깔끔한 계획 도시를 건축할 생각도 있었다. 더욱이 네로의 근위대는 불길을 잡기 위해 시가지의 한쪽에 맞불을 놓았는데, 이 광경이 “군대가 방화를 했다.”는 뜬소문의 근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네로 방화설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 화재로 네로가 아끼던 진귀한 수집품들도 불타 버렸다는 점, 네로가 화재 진압과 이재민 구호를 위해 안간힘을 썼던 점, 무엇보다 일반적인 이미지처럼 그렇게 광인은 아니었다는 점 때문이다. 당시 로마는 골목이 좁고 집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어 불이 번지기는 쉬우면서 진압하기는 어려운 구조였으며, 화재가 처음 발생한 팔라티노 언덕 근처에는 올리브유와 옷감을 파는 상점들이 밀집해 있었다. 말하자면 우연히 일어난 작은 화재가 걷잡을 수 없는 대화재로 번졌을 수 있다.

 

기독교도를 화형시키는 네로의 상상도 <출처: Wikipedia>

 

 

하지만 네로 방화설은 당시의 민중들에게 쉽게 먹혀들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로서는 미칠 것 같은 분노를 쏟을 대상이 필요했으리라. “황제는 친어머니를 죽였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로마 역시 죽이려 했을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는 또 하나의 로마 화재처럼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이 의혹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네로가 기독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자, 그것은 장기적으로 네로에 대한 평가를 더욱 떨어트리는 결과를 낳았다. 기독교는 그 뒤 계속해서 물밑에서 교세를 넓히며 로마 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교인들은 모일 때마다 “사도들이 예언한 종말의 때가 왔으며, 적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네로”라고 속삭였다.

 

 

예술가, 또는 광대의 죽음

이로부터 네로가 권력을 잃는 4년 정도의 기간에, 네로는 홀린 사람처럼 점점 더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65년에 발각된 피소의 황제 암살 음모가 그런 추세에 불을 붙였으며, 이제는 반역 혐의자뿐 아니라 황제를 조롱했다거나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거나 하는 사람들까지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여기에 60년에는 브리타니아에서, 66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나 로마군이 타격을 입자 네로의 국방 정책에 대해서도 비난이 쏟아졌다. 62년에 품행이 나쁘다고 소문난 포파에아와 결혼하기 위해 정숙한 황후였던 옥타비아에게 누명을 씌우고 끝내 죽인 것도 황제의 인기를 떨어트렸다. 게다가 로마에 전염병까지 돌아서 수천 명이 죽으니, 민심은 대부분 황제를 외면해 버린다. 마침내 갈리아에서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에스파냐 총독인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고 나섰다. 네로는 이들을 진압할 군대를 보냈지만, 황금에 굶주려 있던 군대는 도리어 반란군 편에 붙어 버린다.

 

반란군이 거침없이 로마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에 네로는 갈팡질팡했다. “내가 갈리아로 가서 저들에게 눈물로 호소하면 저들은 무기를 내릴 거야”라 하다가, “파르티아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어” 했다가, “그냥 갈 바에게 로마를 넘겨주자. 나는 이집트 총독 정도면 만족해”……. 하지만 결국 친위대까지 그를 버리고 달아나 버리자, 그는 네 명의 하인만 데리고 로마 교외의 별장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미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고, 네로는 잡혀서 갖은 고문 끝에 죽느니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 심약한 인간은 스스로를 찌르는 일마저 주저하며 제대로 못 해, 결국 하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이는 31세.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위대한 예술가가 이렇게 사라지는구나!”

 

네로는 분명 위대하고 현명한 황제였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라고도 할 만할까? 그는 적어도 카이사르 이래의 군벌들과는 다른 황제상을 제시했다. 그것은 다수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는 정치를 하고, 무력보다는 매력으로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포악한 싸움꾼보다는 인심 좋은 광대가 그나마 나은 지배자가 아니겠는가? 그가 귀족들, 지식인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히 밉보이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심한 오명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수에토니우스는 자신의 네로 전을 마무리하며 네로가 비열하고 우매했다고 비판하고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그가 죽은 날은 그가 옥타비아를 살해한 바로 그날이었다. 온 세상이 환호했다. 시민들은 자유의 모자를 쓰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그의 무덤에 오랫동안 봄꽃과 여름꽃을 바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조각상을 세우고, 토가를 입혀 놓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가 마치 아직도 살아서 황제로 군림한다는 듯, 포고령을 전하며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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