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워싱턴 침례 신학대학 교수님이시고 현재 목회자이신 어느 목사님의 글을 퍼 온 것입니다. ☆
제목 : 하나님은 과연 십일조로 시험해 보라고 했는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히브리어로 소리나는 대로 적어보면 "베레티 테레프 위히 베트 엘 함마세르 콜 에트 하비우 에트 라켐 에프타흐 로 임 체바오트 예호와 아마르 바조트 나 우베히누니 다이 벨리 야드 베라카 라켐 오하리코티 하솨마임 아루보트"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나를 시험하여"라는 구절인데 이것은 성경의 원문의 뜻대로 번역하면 "내게 증명하여"라는 뜻의 오역이다. 같은 단어일지라도 하나님께 쓰일 때의 의미와 사람에게 쓰일 때의 의미가 다른 것이 히브리어의 용법이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시험해도 좋은가? 성경은 하나님을 시험하면 죽을 수 있으며(고전10:9), 시험해서도 않되고(출17:2, 민14:22, 시78:18, 시106:14, 사7:12, 행5:9, 히3:9),또한 하나님은 시험을 당하시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거늘 우리는 유독 오역된 십일조에 대한 말라기서의 말씀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이다.
'나를 시험하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우베하누니'란 단어는 불분리 접속사인 '우'와 '증명하다(prove)'라는 뜻의 동사인 '바한'과 '나를'이란 말의 목적격 접미 대명사인 '에니'가 한데 어루어진 복합단어이다. 이것은 다른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한데서 사용된 단어인 '나싸'와는 전혀 다른 단어이다. '나싸'라는 단어는 헬라어 '페라이조'와 같이 '시험하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며 '바한'이란 뜻은 '마음의 상태를 증명하다'라는 뜻으로 헬라어에서는 '도키마조'라고 하기도 한다.
영어성경에서는 이 두가지 단어를 분명히 구분했지만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것을 구분하지 않고 한결같이 '시험하다'라고 번역을 하는 바람에 많은 혼동을 빚고 있으며, 이것을 가지고 교인들을 협박하기도 하고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러내 놓고 그것을 증명한다는 말은 곧 마음의 상태를 증명해 보인다는 의미이다. 신약성경에 사용된 '도키마조'라는 단어가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고린조후서 13:5을 보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중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여기에서 '확증하라'라는 단어가 헬라어의 '도키마조'이다. 에베소서 5장10절을 보자.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에서 '시험하다'라는 단어가 헬라어의 '도키마조'이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상태를 자기 스스로 확증하고 입증하여 확인해 보라는 뜻이다. 이 모든 것을 토대하여 말라기 3장10절을 성경원문 대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기를 너희가 온전한 십일조를 나의 창고에 가져와서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함으로써 너희의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내 앞에서 너희의 마음의 상태가 온전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라 그리하면 내가 하늘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부어주되 결단코 닳아 없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이 부어주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에서의 복이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러한 복이 아니라 시편 1:1에 나오는 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십일조란 히브리어로 '마아세르'라는 것인데 헬라어로는 '아포데카토오'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 중의 십분의 일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는 나의 소득을 정확하게 십분의 일을 떼어 교회에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나의 생명과 나의 아내와 자녀까지)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것이로되 단지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십일조보다 더욱 많은 십이조 아니 절반이라도 잘라서 드릴 수 있는 자발적이며 자원하는 헌신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원리를 가르치지 않고 우리말 성경 그대로 교인을 은근히 협박하여 돈을 긁어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성경 원문의 뜻을 모르고 엉뚱한 해석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거역하여 가르치고 그것을 우리말 성경을 번역한 '대한성서공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일이다. 성경은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성경원문을 공부하지 않고 은혜를 좀 받았다고 해서 함부로 강단위로 성큼성큼 올라가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주의 종들은 언제나 서재와 기도실에서 보내는 시간을 아까워 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