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적 신학자들
(1) 쯔빙글리(Zwingli, Ulrich 1481, 1,1 - 1531, 10, 11)
쯔빙글리는 스위스 종교개혁자, 토겐 부르크에서 출생, 베른, 비엔나, 바젤에서 수학, 1506년 사제서품을 받고 글라루스에서 사역했다. 에라스무스에 심취하여 글라루스교구 안에서 인문주의를 가르쳤고 개인적으로 바울 서신과 교부 저작을 공부했다. 13-15년 스임스 상인부대 문종사제로 교황을 위해 종군한바 있으나 16년 글라루스에서 야인지넬론으로 옮긴 뒤부터 종교개혁에 강한 의지를 품기 시작했다.
성만찬 떡에는 상징의 의미 외에 어떠한 그리스도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는 입장을 보인 쯔빙글리는 루터파와 성만찬 논쟁을 벌였고 그 결과 29년의 마르부르크 회담이 결렬되면서 루터파와의 연합운동을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또 스위스 내의 극단적 개혁파인 재세례파와도 논쟁을 벌여야 했다. 28년에 베른에서 공개 토론을 벌인 후 베른, 바젤, 쎙갈 등이 합류했으나 반면에 루세르네, 추크, 스비츠, 우리, 운터발덴 등 다른 삼림지역들이 반대 동맹을 맺어 스위스 내전이 일어났고, 결국 반대 동맹군이 쮜리히를 공격했을 때 쯔빙글리도 참전하여 카펠전투에서 전사했다.
(2) 멜란히톤(Melanchthon, Phillpp 1497,2,16 - 1560,4,19)
란히톤은 독일 인문주의자, 종교개혁자이다. 본명 쉬바르쩨르트(Schwarzerd), 어머니가 인문주의자 로이힐린(J, Reuchlin)의 조카였다. 어려서 외조모에게 교육받았고 하이텔베르크, 튀빙겐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518년 비텐베르크대학 교수로 헬라어를 강의하기 시작했다. 인문주의 입장에서 성경을 강의하여 루터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루터와 함께 대학 개혁을 추진하였다. 1519년 라아프찌히 논쟁에 참여한 후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으며, 1521년 칼쉬타트와의 논쟁에도 참여했고 이후 성서번역과 주석작업에 몰두하면서 비텐베르크 소요, 농민전쟁,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 논쟁, 쉬말칼덴 논쟁 등의 혼돈기에 기독교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을 보수적 전통적 형태로 통합시키고자 노력했다. 아우크스부르크신앙고백을 기초하여 종교개혁 교회 형성에 공헌했으며 루터사후, 제자들 사이에 신학논쟁이 벌어지고 라이프찌히가협정 및 성찬론에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는 다른 종교개혁자들보다 훨씬 인문주의적 입장에서 기독교를 해석하고자 했다.
(3) 베자(Beza, Theodore 1519. 6.24 - 1605. 10.13)
그는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칼빈의 후계자. 부르고뉴 베즐레에서 출생.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개럽을 하였으나 법률보다 고전작품에 흥미를 가졌다. 특히 병을 앓게 됨으로써 그의 신체적 고통은 영적 필요성을 느끼게 해 주었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 그는 당시 관련을 맺고 있던 모든 것과 단절하고 복음주의자들의 은신처인 제네바로 가 그곳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헬라어 교수직을 맡았다(1549). 1557년 프랑스 정부가 발도파 교도들을 박해하자 파렐과 함께 그들을 방문하여 격려했고 위그노를 위한 여행을 했다(1559). 1564년 칼빈이 세상을 떠나자 제네바로 돌아와 그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40년 동안 신학강의를 하면서 칼빈의 정통교리를 가르쳤다. 그가 케임브리지에 기증한 사본은 그의 이름을 따 ‘베가사본’으로 불린다.
(4) 백스터(Baxter, Richard 1615. 11.12 - 1692. 12.8)
백스터는 영국 신학자. 쉬래프셔 로우튼에서 출생, 대학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많은 학문을 쌓았다. 1638년에 우스터의 주교에 의해 서품되었으며, 1641년 키더민스터에서 교사로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사보이회의(1661)에서 비국교파 지도자였으며, 비국교도도 사용할 수 있도록 기도서를 개정할 것을 주장했다. 주요 저서로는 (The Reformed Pastor)(1656)가 있다.
(5) 웨슬리(Wesley, John 1703. 6.17 - 1791. 3.2)
그는 영국 감리교 창시자, 영국 교회 엡워드 주임사제 사무엘 웨슬리와 경건한 신앙인 수산나의 아들로 출생. 차터하우스와 옥스퍼드대학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를 졸업한 후 옥스퍼드대학 링컨칼리지 연구원이 되었고(1726) 아버지의 교회에서 부제로 일하기도 했다.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 시절 동생 찰스와 횟필드(G. Whitefield)등과 함께 신성구락부(Holy Clud)를 조직, 규칙적이고 엄격한 신앙운동을 실천했으며 로우(W. Law), 모어(H. More)등 경건, 신비주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프로테스탄트 기본 교리를 신중하게 받아들였고 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잇에서 열린 모라비안 교인 집회에 참석했다가 회심을 체험했다. 당시 집회에서는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웨슬리는 감리교 운동을 영국 국교회 범주 안에서 추진하려고 노력했지만 국교회의 페쇄적 대응과 감리교 내부의 여러 요건 때문에 별도의 교회 조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칼빈의 엄격한 예정론에 반대 입장을 보여 초기에 함께 신앙운동을 폈던 횟필드와는 41년에 결별하였다. 산업혁명 기간 중 열악한 사회적 환경에 처한 노동, 빈민계층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성공을 이룬 영국 감리교 운동과 웨슬리의 신학은 오늘날에도 제 3세계 신학자 등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6) 에드워즈(Edwards, Jonathan 1703. 10.5 - 1758. 3.22)
에드워즈는 미국 칼빈주의 신학자, 철학자,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출생, 예일대학에서 수학한 후 회중교회 목사로 안수 받아(1727) 노댐턴에서 목회했다. 로크(J. Locke)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고, 34-35년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을 때 횟필드와 손을 잡았으며 엄격한 칼빈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50년 스톡브릿지로 옮겼고 그곳에서 원죄와 인간의 의지 등에 관한 중요한 논문들을 썼다. 당대 뉴잉글랜드에서 미국이 배출한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7) 하지(Hodge, Charles 1797. 12.28 - 1878. 6.19)
그는 미국 장로파 신학자. 필라델피아에서 출생. 뉴저지대학, 필라델피아신학교를 졸업하고, 빠리. 할레. 베를린대학에 유학하여(1826-28)셈어와 유럽 신학을 연구했다. 19세기 미국 칼빈주의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프린스턴대학에서 실로 반세기 동안 동양학, 성경학, 조직신학을 담당하면서 ‘정통 프린스턴 신학’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 미합중국 장로교회 의장(46) 및 동 교회 외국 전도국과 교육국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문필활동도 활발히 전개, <Biblical Repertory>지를 창간하고(25)40년 이상 편집을 담당했으며, 주요 저서로는<Systematic Theology>(3권,71-72), <The Ctu- rch and lts Polity>(79)등이 있다.
(8) 코이퍼(Kuyper, Abraham. 1837. 10.29 - 1920. 11.8)
그는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신학자, 정치지도자, 마슬로이스에서 출새으 라이든대학에서 공부한 후 베스드에서 개혁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며(1863), 위트레히트와 암스테르담에서 인기있는 설교자로 목회했다. 그 후 칼빈주의 이론가 프린스테러(Groen Van Prinsterer)의 ‘반혁명적 정치관’에 매혹되어 반혁명당에 가입, 국회의원이 되었으며(74) 정통 칼빈교도들을 정치세력으로 만들어 나갔다. 80년에 자유대학교를 창설하고 교수로 활동하면서 엄격한 칼빈주의적 교육을 실시했다. 그리고 당시자유주의신학에 대항해 화란 개혁교회의 기초가 되는 기독교 개혁파 교회를 창설했고(86) 화란의 수상으로도 활동해(1901 - 05) 19세기말 화란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그의 업적은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해 온 중하류층의 정통 칼빈주의 집단에게 종교적 정치적 발언권을 주었다는 것과 현재 네덜란드의 복수사회의 발전에 공헌했으며 신학적으로는 보편적 은혜를 강조하는 조직적 정통적 칼빈주의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9) 워필드(Warfield, Benjamin Breckinridge, 1851 - 1921)
워필드는 미국 장로교 학자. 프린스턴 대학에서 문학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웨스턴신학교 교수, 프린스턴 신학부의 교훈주의 신학 및 논중 신학 교수가 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An lntr- oduction to the Textual Ceiticism of New Testament>와 <The Lord of Glory>가 있다.
(10) 바빙크(Bavinck, Hermann 1854. 12.13 - 1921. 7.29)
바빙크는 네덜란드 개혁파 조직신학자. 호게펜에서 출생. 라이든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1880)를 받은 후 프라네커에서 목회(1881-2), 캄펜신학교(1882-1902)와 암스테르담 자유대학(03-21)에서 교의학과 변증학 교수를 지냈다. 교리사, 철학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윤리, 정치,예술, 교육 등 문학적 제 관심에로의 넓은 관심으로 유명하고, 온전한 사상과 인격을 기초로 A. 카이퍼와 함께 근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11) 마펫(Moffett, Samuel Austin 1864. 1.25 - 1939. 10.24)
마펫은 미북장로회 한국 선교사. 한국명 마포삼열(馬布三悅). 미국 인디애나주 메디슨 출생. 하노버대학과 매코믹신학교를 마치고 한국 설교사로 임명되어 1890년 1월에 내한했다. 몇 차례 전도여행을 하였고 특히 서북지방 전교에 관심을 가졌다. 마침내 1893년 평양선교부를 설치하고 이곳에 주재하며 한국개신교 최대 교세지역으로 육성하였다. 널다리골교회(장대현)를 비롯해 서북지역 여러 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1901년부터는 자신의 거처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함으로써 평양장로회신학교를 태동시켰고, 숭실, 숭인학교의 육성에도 중심역할을 하였다. 특히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조직과 12년의 총회조직을 크게 후원했고 한편으로 19년의 3.1운동에 있어서도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적인 요구와 행위에 일부 이해와 협력의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마펫 선교사의 사역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일면은 한국 교회의 보수 근본 신학과 경건신앙 확립을 주도한 것이다. 일제 말기 귀국, 캘리포니아 먼로비아에서 사망했다.
(12) 벌코프(Berkhof, Louis 1873 - 1957)
벌코프는 미국의 칼빈주의 신학자. 네덜란드에서 출생.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 칼빈신학교와 프린스턴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잠시 목회하다가 칼빈신학교의 초청을 받아(1906) 30년 동안 가르쳤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조직신학에 있었으며 미국계보다 화란의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을 더 따랐다. 1920년대 당시의 신학적 논쟁들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광범위하게 글을 썼으며 대표작은 <Reformed Dogmatics>(3권, 1932)인데, <Manual of Reformed Doctrine>(1933)의 축소판으로 개혁주의 학교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13) 크레인(Crane, John Curtis)
크레인은 미남장로회 선교사, 신학자, 한국명 구례인(具禮仁). 미시시피주에서 출생. 콜로라도대학(1909), 루이스빌신 학교를 졸업하고 동신학교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3년 선교사로 내한하여 순천에서 선교 및 교육활동에 힘썼다.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37),성서 번역위원으로 활약하다가 38년 귀국하였다. 46년 재내한하여 순천에서 문서활동을 중심으로 선교사업을 재개 하였고 서울의 총회신학교 교수를 지냈다. 56년 은퇴하고 귀국하여 신학저작 집필로 여생을 보냈다.
(14) 메첸 (Machen, John Gresham. 1881. 7.28 - 1937. 1.1)
그는 미국 보수주의 신학자, 신약학자, 볼티모어에서 출생, 존스 홉킨스대학, 프린스턴 대학 및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독일 마르부르크대학, 괴팅겐대학에 유학했으며 부세트의 종교사학파 방법론을 연구했다. 1906년부터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강의했으며 14년 북장로회 뉴브론스윅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프린스턴에서 스승인 워필드의 보수주의적 입장을 수호하며 밀려오는 자유주의 신학과 대항해 싸우다가 프린스턴이 자유주의 경향으로 기울자 윌슨. 앨리스. 반틸교수등과 함께 프린스턴을 떠나 29년 필랄델피아에 웨스트민그터신학교를 설립하고 보수주의 신학을 고수하였다. 36년에는 북장로회에서 독립하여 미국장로회(후의 정통장로회)를 따로 설립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극단적 근본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그의 신학은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 몇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절대 신앙하는 보수주의적인 것이었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전투적 저항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 신학자로는 박향룡(朴亨龍)이 그에게 직접 사사하여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 전통을 수립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The Origin of Paul's Rrl- igion>(1921), <The Virgin of Christ>(1930)가 있다.
(15) 도드 (Dodd, Charold Harold 1884 - 1973)
그는 영국 신약학자, 옥스퍼드대학 유니버시티칼리지와 맨스필드칼라지에서 수학한 후 회중교회 목사로 안수 받았다(1912). 맨스필드칼리지에서 예이츠 신약강좌를 담당했고(15), 맨체스터대학(30), 케임브리지대학 교수가 되었다(35), 하나님의 나라 도래에 대한 구약의 약속과 그리스도 자신의 언급을 통해 ‘실현된 종말론’ 개념을 정립하여 신약신학에 이정표를 세웠고, 요한복음이 갖는 역사성을 강조하였다. 50년 이후<New English Bible> 번역위원장으로 성경 번역을 지도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The Parables of the Kingdom> (1934), <The l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1953)이 있다.
(16) 도이베르트 (Dooyeweerd, Herman 1894. 10.7 - 1977)
그는 네덜란드의 기독교 철학자, 암스테르담에서 출생, 네덜란드의 왕립과학원 회원이며 자유대학의 법철학 교수를 지냈다(1926). '범이념의 철학‘이라는 기독교 철학을 수립했으며, 세계 각지의 동조자들에 의해 한 파를 형성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A Nrw Creitique of Theoretical Tho- ught> (4권, 1958)와 <In the Twilight of Western Thought> (1960)가 있다.
(17) 반 틸 (Van Til, Cornelius 1895. 5.3 - ?)
그는 미국 신학자. 네덜란드에서 출생. 1905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프린스턴신학교외 대학원을 졸업(1927), 이듬해 본교에서 강의하다가 신학적인 문제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옮겨가 변증학 교수로 일했다. 중심 사상은. 기독교 철학과 비기독교 철학의 차이는 신과 인간 중 누구를 궁극적 존재로 생각하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학력과 전공과목과 주요저서들을 검토해 볼 때 그는 조직신학자가 아니고 변증적 신학자(辯證的神學者)인 것을 용이하게 알 수 있다. 그는 주로 기독교 변증학과 현대철학 특히 현대유심론철학(現代唯心論哲學)을 신학교와 신학교 대학원에서 전공 과목으로 삼고 연구했고 웨스티민스터 신학교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변증학(Christian Apologetics)을 교수해 왔으며 그의 주요 저서들(The New Modernism, 1947, Commonmcs Da- ane, 1959, Christianity and Barthianism, 1962, The Case for Calvinism, 1964)도 기독교 변증학적 성격의 것들임은 말할 것도 없다.
(18) 박형룡 (朴亨龍, 1897, 3.28 - 1978. 10.25)
그는 장로교 목사, 신학자, 평북 벽독군 운서면에서 출생하고, 평양 숭실대학교, 중국 금릉대학교(23)를 졸업한 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신학석사(26), 루이스빌 남침례교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고려신학교, 장로회신학교 교장을 지냈으며<신학난제선평> (神學難題選評), <박형룡박사전집> (전 14권)등 12권의 저서와 10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 그는 한국의 첫 신학자로서 한국교회의 정통적인 보수주의 교리를 정립하고 개혁주의 신학을 체계화했다. 그의 신학사상은 「청교도적 개혁주의 정통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19) 말스베리 (Malsbary. Dwight R. 1899. 5.22 - 1977. 7.28)
그는 미장로교 한국 선교사, 음악가, 한국명 마두원(馬斗元). 캘리포니아 폴리스노젤대학(21). 시카고 셀웃음악대학(24)을 졸업하고 훼이스신학교 명예 신학박사(65), 셀웃음악대학교수(26)로 재직했으며 교육선교사로 내한(1929), 일시 귀국하여 무디성경학원과 훼이스신학교에서 수학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48) 한국 선교을 위해서 재차 내한하였다. 많은 개척교회를 설립했고 방송전도 등에도 힘썼다. 1960년대에 대한신학교, 침례교신학교, 성결교신학교에서 강의하였고, 1969년 성경장로회 산하 신앙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20) 스톤하우스(Stonchause, Ned Bernard 1902 - 1962)
그는 미국의 신약학자, 미시간주의 그랜드래피즈에서 출생, 칼빈대학에서 교양학부를 수료하고(1924) 프린스턴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1927). 그 후 튀빙겐대학과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여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으며(1929),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신약부문 담당교수를 역임했다(1929 - 37). 주요 저서로는 <The Witness of Mathew and Mark to Christ> (1959)가 있다.
(21) 헌트 (Hunt, Bruce F. 1903. 6.4ㅡ )
헌트는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사, 목사, 수난자, 한국명 한부선(韓富善). 휘튼대학, 러트거스대학(1924), 프린스턴신학교(28)를 졸업하고 28년에 내한한 그의 선교사업의 중점은 종촌교 부흥에 집중되었다. 또한 그는 하르빈에 머물면서 북만주 전체를 순회, 전도하는 한편 신앙 동지자들을 모아 조직적인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3,4차례 일경에 구속되기도 했으며, 42년에는 강제 출국 당하기도 했다. 46년에 재내한하여 부산에 20년간 머물면서 고려신학교에서 강의하였고 지방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현재 은퇴하여 미국에 거하며 그의 옥중 수기인<증거가 되리라> (For a Testinony, 73)가 간행되었다.
(22) 영 (Young, Edward Joseph 1907 - 1968)
그는 구약학자 스탠포드대학을 졸업하고(1929). 스페인과 근동지역을 여행하면서 공부를 계속했다.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라이프찌하에 있는 알브레히트 알르 문하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드롭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43),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구약학 강사(36 - 39), 조교수(39 - 46)를 거쳐 교수(46)를 지냈다. 특히 그는 언어학적 명석함으로 유명하다. 주요 저서로는(An Introduction of the Old Testament) (49)가 있다.
(23) 클라크 (Clark, Allen D. 1908. 11.6 ㅡ )
그는 미북장로회 선교사, 한국명 곽안전(郭安全). 클라크(C.A. Clark)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출생. 미네소타대학, 프린스틴신학교(1933)를 졸업하고 그 해 부인과 함께 만주 홍 경선교부에 부임하여 활동하다가 36년 청주로 옮겨 40년까지 농촌선교에 몰두하였다. 청주성경학교 교수로도 지내다가 일제말기 강제 추방되어 콜롬비아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53년 재내한하여 청주에서 한국교회 재건을 위해 힘썼고, 장로회신학대학 교수(54 - 65). 피어선성경학교 교장직을 지냈으며 대한성서공회 번역위원으로도 봉직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A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가 있다.
(24) 쉐퍼 (Schacffer, Francis 1912 - 1984)
쉐퍼는 미국 신학자. 저술가. 펜실베니아에서 출생.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과 훼이스신학원을 졸업한 후 목사가 되어 목회를 했다. 그후 유럽의 젊은이들을 위한 소명으로 스위스의 샬례로 이사해「라브리」를 세웠다. 그곳에서 토론과 세미나를 통해 젊은이들을 가르치면서 강연과 저술활동에 전념함으로써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고 변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여러 저서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1973, 생명의 말씀사). <고뇌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1986, 기독지혜사)가 있다.
(25) 마펫 (Moffett, Samuel Hugh 1916 ㅡ)
마펫은 미연합장로회 한국 선교사, 한국명 마삼락(馬三樂) 혹은 마포삼락(馬布三樂), 초기 한국 선교사 마포삼열(馬布三悅)의 3남으로 평양에서 출생, 미국 휘튼대학과 프린스틴신학교를 거쳐 미국에서 목회하였고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얻었다. 1948년부터 중국에서 활동했고 55년 11월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여 안동과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장신대에서 가르치고 연합기관에서 활동하였다. 81년 은퇴 후 귀국하였다.
(26) 카넬 (Carnell, Edward John 1919 - 1967)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위스컨신주의 안티고에서 출생. 휘튼 웨스트민스터. 하버드. 보스턴. 등에서 수학했으며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고든대학의 교수(1945 - 48), 풀러신학교의 교수(48 - 68) 및 총장(54 - 59)을 지냈다. 그는 2차세계 대전 이후 보수적인 복음주의의 지적 각성에 있어 지도적인 인물이었으며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현대인의 사고와 언어에 적합한 명제로 바꾸어 제시하는 데 뛰어났다. 주요 저서로는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Ahologetics> (48), <Chistian Commitment> (57)가 있다.
(1) 쯔빙글리(Zwingli, Ulrich 1481, 1,1 - 1531, 10, 11)
쯔빙글리는 스위스 종교개혁자, 토겐 부르크에서 출생, 베른, 비엔나, 바젤에서 수학, 1506년 사제서품을 받고 글라루스에서 사역했다. 에라스무스에 심취하여 글라루스교구 안에서 인문주의를 가르쳤고 개인적으로 바울 서신과 교부 저작을 공부했다. 13-15년 스임스 상인부대 문종사제로 교황을 위해 종군한바 있으나 16년 글라루스에서 야인지넬론으로 옮긴 뒤부터 종교개혁에 강한 의지를 품기 시작했다.
성만찬 떡에는 상징의 의미 외에 어떠한 그리스도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는 입장을 보인 쯔빙글리는 루터파와 성만찬 논쟁을 벌였고 그 결과 29년의 마르부르크 회담이 결렬되면서 루터파와의 연합운동을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또 스위스 내의 극단적 개혁파인 재세례파와도 논쟁을 벌여야 했다. 28년에 베른에서 공개 토론을 벌인 후 베른, 바젤, 쎙갈 등이 합류했으나 반면에 루세르네, 추크, 스비츠, 우리, 운터발덴 등 다른 삼림지역들이 반대 동맹을 맺어 스위스 내전이 일어났고, 결국 반대 동맹군이 쮜리히를 공격했을 때 쯔빙글리도 참전하여 카펠전투에서 전사했다.
(2) 멜란히톤(Melanchthon, Phillpp 1497,2,16 - 1560,4,19)
란히톤은 독일 인문주의자, 종교개혁자이다. 본명 쉬바르쩨르트(Schwarzerd), 어머니가 인문주의자 로이힐린(J, Reuchlin)의 조카였다. 어려서 외조모에게 교육받았고 하이텔베르크, 튀빙겐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518년 비텐베르크대학 교수로 헬라어를 강의하기 시작했다. 인문주의 입장에서 성경을 강의하여 루터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루터와 함께 대학 개혁을 추진하였다. 1519년 라아프찌히 논쟁에 참여한 후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으며, 1521년 칼쉬타트와의 논쟁에도 참여했고 이후 성서번역과 주석작업에 몰두하면서 비텐베르크 소요, 농민전쟁,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 논쟁, 쉬말칼덴 논쟁 등의 혼돈기에 기독교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을 보수적 전통적 형태로 통합시키고자 노력했다. 아우크스부르크신앙고백을 기초하여 종교개혁 교회 형성에 공헌했으며 루터사후, 제자들 사이에 신학논쟁이 벌어지고 라이프찌히가협정 및 성찬론에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는 다른 종교개혁자들보다 훨씬 인문주의적 입장에서 기독교를 해석하고자 했다.
(3) 베자(Beza, Theodore 1519. 6.24 - 1605. 10.13)
그는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칼빈의 후계자. 부르고뉴 베즐레에서 출생.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개럽을 하였으나 법률보다 고전작품에 흥미를 가졌다. 특히 병을 앓게 됨으로써 그의 신체적 고통은 영적 필요성을 느끼게 해 주었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 그는 당시 관련을 맺고 있던 모든 것과 단절하고 복음주의자들의 은신처인 제네바로 가 그곳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헬라어 교수직을 맡았다(1549). 1557년 프랑스 정부가 발도파 교도들을 박해하자 파렐과 함께 그들을 방문하여 격려했고 위그노를 위한 여행을 했다(1559). 1564년 칼빈이 세상을 떠나자 제네바로 돌아와 그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40년 동안 신학강의를 하면서 칼빈의 정통교리를 가르쳤다. 그가 케임브리지에 기증한 사본은 그의 이름을 따 ‘베가사본’으로 불린다.
(4) 백스터(Baxter, Richard 1615. 11.12 - 1692. 12.8)
백스터는 영국 신학자. 쉬래프셔 로우튼에서 출생, 대학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많은 학문을 쌓았다. 1638년에 우스터의 주교에 의해 서품되었으며, 1641년 키더민스터에서 교사로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사보이회의(1661)에서 비국교파 지도자였으며, 비국교도도 사용할 수 있도록 기도서를 개정할 것을 주장했다. 주요 저서로는 (The Reformed Pastor)(1656)가 있다.
(5) 웨슬리(Wesley, John 1703. 6.17 - 1791. 3.2)
그는 영국 감리교 창시자, 영국 교회 엡워드 주임사제 사무엘 웨슬리와 경건한 신앙인 수산나의 아들로 출생. 차터하우스와 옥스퍼드대학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를 졸업한 후 옥스퍼드대학 링컨칼리지 연구원이 되었고(1726) 아버지의 교회에서 부제로 일하기도 했다.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 시절 동생 찰스와 횟필드(G. Whitefield)등과 함께 신성구락부(Holy Clud)를 조직, 규칙적이고 엄격한 신앙운동을 실천했으며 로우(W. Law), 모어(H. More)등 경건, 신비주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프로테스탄트 기본 교리를 신중하게 받아들였고 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잇에서 열린 모라비안 교인 집회에 참석했다가 회심을 체험했다. 당시 집회에서는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웨슬리는 감리교 운동을 영국 국교회 범주 안에서 추진하려고 노력했지만 국교회의 페쇄적 대응과 감리교 내부의 여러 요건 때문에 별도의 교회 조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칼빈의 엄격한 예정론에 반대 입장을 보여 초기에 함께 신앙운동을 폈던 횟필드와는 41년에 결별하였다. 산업혁명 기간 중 열악한 사회적 환경에 처한 노동, 빈민계층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성공을 이룬 영국 감리교 운동과 웨슬리의 신학은 오늘날에도 제 3세계 신학자 등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6) 에드워즈(Edwards, Jonathan 1703. 10.5 - 1758. 3.22)
에드워즈는 미국 칼빈주의 신학자, 철학자,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출생, 예일대학에서 수학한 후 회중교회 목사로 안수 받아(1727) 노댐턴에서 목회했다. 로크(J. Locke)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고, 34-35년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을 때 횟필드와 손을 잡았으며 엄격한 칼빈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50년 스톡브릿지로 옮겼고 그곳에서 원죄와 인간의 의지 등에 관한 중요한 논문들을 썼다. 당대 뉴잉글랜드에서 미국이 배출한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7) 하지(Hodge, Charles 1797. 12.28 - 1878. 6.19)
그는 미국 장로파 신학자. 필라델피아에서 출생. 뉴저지대학, 필라델피아신학교를 졸업하고, 빠리. 할레. 베를린대학에 유학하여(1826-28)셈어와 유럽 신학을 연구했다. 19세기 미국 칼빈주의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프린스턴대학에서 실로 반세기 동안 동양학, 성경학, 조직신학을 담당하면서 ‘정통 프린스턴 신학’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 미합중국 장로교회 의장(46) 및 동 교회 외국 전도국과 교육국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문필활동도 활발히 전개, <Biblical Repertory>지를 창간하고(25)40년 이상 편집을 담당했으며, 주요 저서로는<Systematic Theology>(3권,71-72), <The Ctu- rch and lts Polity>(79)등이 있다.
(8) 코이퍼(Kuyper, Abraham. 1837. 10.29 - 1920. 11.8)
그는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신학자, 정치지도자, 마슬로이스에서 출새으 라이든대학에서 공부한 후 베스드에서 개혁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며(1863), 위트레히트와 암스테르담에서 인기있는 설교자로 목회했다. 그 후 칼빈주의 이론가 프린스테러(Groen Van Prinsterer)의 ‘반혁명적 정치관’에 매혹되어 반혁명당에 가입, 국회의원이 되었으며(74) 정통 칼빈교도들을 정치세력으로 만들어 나갔다. 80년에 자유대학교를 창설하고 교수로 활동하면서 엄격한 칼빈주의적 교육을 실시했다. 그리고 당시자유주의신학에 대항해 화란 개혁교회의 기초가 되는 기독교 개혁파 교회를 창설했고(86) 화란의 수상으로도 활동해(1901 - 05) 19세기말 화란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그의 업적은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해 온 중하류층의 정통 칼빈주의 집단에게 종교적 정치적 발언권을 주었다는 것과 현재 네덜란드의 복수사회의 발전에 공헌했으며 신학적으로는 보편적 은혜를 강조하는 조직적 정통적 칼빈주의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9) 워필드(Warfield, Benjamin Breckinridge, 1851 - 1921)
워필드는 미국 장로교 학자. 프린스턴 대학에서 문학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웨스턴신학교 교수, 프린스턴 신학부의 교훈주의 신학 및 논중 신학 교수가 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An lntr- oduction to the Textual Ceiticism of New Testament>와 <The Lord of Glory>가 있다.
(10) 바빙크(Bavinck, Hermann 1854. 12.13 - 1921. 7.29)
바빙크는 네덜란드 개혁파 조직신학자. 호게펜에서 출생. 라이든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1880)를 받은 후 프라네커에서 목회(1881-2), 캄펜신학교(1882-1902)와 암스테르담 자유대학(03-21)에서 교의학과 변증학 교수를 지냈다. 교리사, 철학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윤리, 정치,예술, 교육 등 문학적 제 관심에로의 넓은 관심으로 유명하고, 온전한 사상과 인격을 기초로 A. 카이퍼와 함께 근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11) 마펫(Moffett, Samuel Austin 1864. 1.25 - 1939. 10.24)
마펫은 미북장로회 한국 선교사. 한국명 마포삼열(馬布三悅). 미국 인디애나주 메디슨 출생. 하노버대학과 매코믹신학교를 마치고 한국 설교사로 임명되어 1890년 1월에 내한했다. 몇 차례 전도여행을 하였고 특히 서북지방 전교에 관심을 가졌다. 마침내 1893년 평양선교부를 설치하고 이곳에 주재하며 한국개신교 최대 교세지역으로 육성하였다. 널다리골교회(장대현)를 비롯해 서북지역 여러 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1901년부터는 자신의 거처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함으로써 평양장로회신학교를 태동시켰고, 숭실, 숭인학교의 육성에도 중심역할을 하였다. 특히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조직과 12년의 총회조직을 크게 후원했고 한편으로 19년의 3.1운동에 있어서도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적인 요구와 행위에 일부 이해와 협력의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마펫 선교사의 사역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일면은 한국 교회의 보수 근본 신학과 경건신앙 확립을 주도한 것이다. 일제 말기 귀국, 캘리포니아 먼로비아에서 사망했다.
(12) 벌코프(Berkhof, Louis 1873 - 1957)
벌코프는 미국의 칼빈주의 신학자. 네덜란드에서 출생.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 칼빈신학교와 프린스턴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잠시 목회하다가 칼빈신학교의 초청을 받아(1906) 30년 동안 가르쳤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조직신학에 있었으며 미국계보다 화란의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을 더 따랐다. 1920년대 당시의 신학적 논쟁들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광범위하게 글을 썼으며 대표작은 <Reformed Dogmatics>(3권, 1932)인데, <Manual of Reformed Doctrine>(1933)의 축소판으로 개혁주의 학교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13) 크레인(Crane, John Curtis)
크레인은 미남장로회 선교사, 신학자, 한국명 구례인(具禮仁). 미시시피주에서 출생. 콜로라도대학(1909), 루이스빌신 학교를 졸업하고 동신학교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3년 선교사로 내한하여 순천에서 선교 및 교육활동에 힘썼다.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37),성서 번역위원으로 활약하다가 38년 귀국하였다. 46년 재내한하여 순천에서 문서활동을 중심으로 선교사업을 재개 하였고 서울의 총회신학교 교수를 지냈다. 56년 은퇴하고 귀국하여 신학저작 집필로 여생을 보냈다.
(14) 메첸 (Machen, John Gresham. 1881. 7.28 - 1937. 1.1)
그는 미국 보수주의 신학자, 신약학자, 볼티모어에서 출생, 존스 홉킨스대학, 프린스턴 대학 및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독일 마르부르크대학, 괴팅겐대학에 유학했으며 부세트의 종교사학파 방법론을 연구했다. 1906년부터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강의했으며 14년 북장로회 뉴브론스윅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프린스턴에서 스승인 워필드의 보수주의적 입장을 수호하며 밀려오는 자유주의 신학과 대항해 싸우다가 프린스턴이 자유주의 경향으로 기울자 윌슨. 앨리스. 반틸교수등과 함께 프린스턴을 떠나 29년 필랄델피아에 웨스트민그터신학교를 설립하고 보수주의 신학을 고수하였다. 36년에는 북장로회에서 독립하여 미국장로회(후의 정통장로회)를 따로 설립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극단적 근본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그의 신학은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 몇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절대 신앙하는 보수주의적인 것이었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전투적 저항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 신학자로는 박향룡(朴亨龍)이 그에게 직접 사사하여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 전통을 수립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The Origin of Paul's Rrl- igion>(1921), <The Virgin of Christ>(1930)가 있다.
(15) 도드 (Dodd, Charold Harold 1884 - 1973)
그는 영국 신약학자, 옥스퍼드대학 유니버시티칼리지와 맨스필드칼라지에서 수학한 후 회중교회 목사로 안수 받았다(1912). 맨스필드칼리지에서 예이츠 신약강좌를 담당했고(15), 맨체스터대학(30), 케임브리지대학 교수가 되었다(35), 하나님의 나라 도래에 대한 구약의 약속과 그리스도 자신의 언급을 통해 ‘실현된 종말론’ 개념을 정립하여 신약신학에 이정표를 세웠고, 요한복음이 갖는 역사성을 강조하였다. 50년 이후<New English Bible> 번역위원장으로 성경 번역을 지도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The Parables of the Kingdom> (1934), <The l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1953)이 있다.
(16) 도이베르트 (Dooyeweerd, Herman 1894. 10.7 - 1977)
그는 네덜란드의 기독교 철학자, 암스테르담에서 출생, 네덜란드의 왕립과학원 회원이며 자유대학의 법철학 교수를 지냈다(1926). '범이념의 철학‘이라는 기독교 철학을 수립했으며, 세계 각지의 동조자들에 의해 한 파를 형성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A Nrw Creitique of Theoretical Tho- ught> (4권, 1958)와 <In the Twilight of Western Thought> (1960)가 있다.
(17) 반 틸 (Van Til, Cornelius 1895. 5.3 - ?)
그는 미국 신학자. 네덜란드에서 출생. 1905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프린스턴신학교외 대학원을 졸업(1927), 이듬해 본교에서 강의하다가 신학적인 문제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옮겨가 변증학 교수로 일했다. 중심 사상은. 기독교 철학과 비기독교 철학의 차이는 신과 인간 중 누구를 궁극적 존재로 생각하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학력과 전공과목과 주요저서들을 검토해 볼 때 그는 조직신학자가 아니고 변증적 신학자(辯證的神學者)인 것을 용이하게 알 수 있다. 그는 주로 기독교 변증학과 현대철학 특히 현대유심론철학(現代唯心論哲學)을 신학교와 신학교 대학원에서 전공 과목으로 삼고 연구했고 웨스티민스터 신학교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변증학(Christian Apologetics)을 교수해 왔으며 그의 주요 저서들(The New Modernism, 1947, Commonmcs Da- ane, 1959, Christianity and Barthianism, 1962, The Case for Calvinism, 1964)도 기독교 변증학적 성격의 것들임은 말할 것도 없다.
(18) 박형룡 (朴亨龍, 1897, 3.28 - 1978. 10.25)
그는 장로교 목사, 신학자, 평북 벽독군 운서면에서 출생하고, 평양 숭실대학교, 중국 금릉대학교(23)를 졸업한 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신학석사(26), 루이스빌 남침례교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고려신학교, 장로회신학교 교장을 지냈으며<신학난제선평> (神學難題選評), <박형룡박사전집> (전 14권)등 12권의 저서와 10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 그는 한국의 첫 신학자로서 한국교회의 정통적인 보수주의 교리를 정립하고 개혁주의 신학을 체계화했다. 그의 신학사상은 「청교도적 개혁주의 정통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19) 말스베리 (Malsbary. Dwight R. 1899. 5.22 - 1977. 7.28)
그는 미장로교 한국 선교사, 음악가, 한국명 마두원(馬斗元). 캘리포니아 폴리스노젤대학(21). 시카고 셀웃음악대학(24)을 졸업하고 훼이스신학교 명예 신학박사(65), 셀웃음악대학교수(26)로 재직했으며 교육선교사로 내한(1929), 일시 귀국하여 무디성경학원과 훼이스신학교에서 수학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48) 한국 선교을 위해서 재차 내한하였다. 많은 개척교회를 설립했고 방송전도 등에도 힘썼다. 1960년대에 대한신학교, 침례교신학교, 성결교신학교에서 강의하였고, 1969년 성경장로회 산하 신앙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20) 스톤하우스(Stonchause, Ned Bernard 1902 - 1962)
그는 미국의 신약학자, 미시간주의 그랜드래피즈에서 출생, 칼빈대학에서 교양학부를 수료하고(1924) 프린스턴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1927). 그 후 튀빙겐대학과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여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으며(1929),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신약부문 담당교수를 역임했다(1929 - 37). 주요 저서로는 <The Witness of Mathew and Mark to Christ> (1959)가 있다.
(21) 헌트 (Hunt, Bruce F. 1903. 6.4ㅡ )
헌트는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사, 목사, 수난자, 한국명 한부선(韓富善). 휘튼대학, 러트거스대학(1924), 프린스턴신학교(28)를 졸업하고 28년에 내한한 그의 선교사업의 중점은 종촌교 부흥에 집중되었다. 또한 그는 하르빈에 머물면서 북만주 전체를 순회, 전도하는 한편 신앙 동지자들을 모아 조직적인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3,4차례 일경에 구속되기도 했으며, 42년에는 강제 출국 당하기도 했다. 46년에 재내한하여 부산에 20년간 머물면서 고려신학교에서 강의하였고 지방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현재 은퇴하여 미국에 거하며 그의 옥중 수기인<증거가 되리라> (For a Testinony, 73)가 간행되었다.
(22) 영 (Young, Edward Joseph 1907 - 1968)
그는 구약학자 스탠포드대학을 졸업하고(1929). 스페인과 근동지역을 여행하면서 공부를 계속했다.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라이프찌하에 있는 알브레히트 알르 문하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드롭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43),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구약학 강사(36 - 39), 조교수(39 - 46)를 거쳐 교수(46)를 지냈다. 특히 그는 언어학적 명석함으로 유명하다. 주요 저서로는(An Introduction of the Old Testament) (49)가 있다.
(23) 클라크 (Clark, Allen D. 1908. 11.6 ㅡ )
그는 미북장로회 선교사, 한국명 곽안전(郭安全). 클라크(C.A. Clark)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출생. 미네소타대학, 프린스틴신학교(1933)를 졸업하고 그 해 부인과 함께 만주 홍 경선교부에 부임하여 활동하다가 36년 청주로 옮겨 40년까지 농촌선교에 몰두하였다. 청주성경학교 교수로도 지내다가 일제말기 강제 추방되어 콜롬비아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53년 재내한하여 청주에서 한국교회 재건을 위해 힘썼고, 장로회신학대학 교수(54 - 65). 피어선성경학교 교장직을 지냈으며 대한성서공회 번역위원으로도 봉직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A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가 있다.
(24) 쉐퍼 (Schacffer, Francis 1912 - 1984)
쉐퍼는 미국 신학자. 저술가. 펜실베니아에서 출생.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과 훼이스신학원을 졸업한 후 목사가 되어 목회를 했다. 그후 유럽의 젊은이들을 위한 소명으로 스위스의 샬례로 이사해「라브리」를 세웠다. 그곳에서 토론과 세미나를 통해 젊은이들을 가르치면서 강연과 저술활동에 전념함으로써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고 변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여러 저서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1973, 생명의 말씀사). <고뇌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1986, 기독지혜사)가 있다.
(25) 마펫 (Moffett, Samuel Hugh 1916 ㅡ)
마펫은 미연합장로회 한국 선교사, 한국명 마삼락(馬三樂) 혹은 마포삼락(馬布三樂), 초기 한국 선교사 마포삼열(馬布三悅)의 3남으로 평양에서 출생, 미국 휘튼대학과 프린스틴신학교를 거쳐 미국에서 목회하였고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얻었다. 1948년부터 중국에서 활동했고 55년 11월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여 안동과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장신대에서 가르치고 연합기관에서 활동하였다. 81년 은퇴 후 귀국하였다.
(26) 카넬 (Carnell, Edward John 1919 - 1967)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위스컨신주의 안티고에서 출생. 휘튼 웨스트민스터. 하버드. 보스턴. 등에서 수학했으며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고든대학의 교수(1945 - 48), 풀러신학교의 교수(48 - 68) 및 총장(54 - 59)을 지냈다. 그는 2차세계 대전 이후 보수적인 복음주의의 지적 각성에 있어 지도적인 인물이었으며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현대인의 사고와 언어에 적합한 명제로 바꾸어 제시하는 데 뛰어났다. 주요 저서로는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Ahologetics> (48), <Chistian Commitment> (5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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