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진 박사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감신대에서 17년간 후학들을 가르쳤다. 지금은 대한성서공회 부총무이며, 국제적으로 세계성서공회연합회 학문용 성서 편집위원, 아시아태평양지역 몽골성서 번역 고문, 불교권 독자를 위한 해설성서 집필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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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우선주의의 견강부회(牽强附會)는 삼갈 일
이사야서 53장 3절의 “질고를 아는 자라”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艱苦)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疾苦)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疾苦)를 당케 하셨은즉...”(사 53:2-5, 10).
“질고”라는 말은 질병을 뜻하는 말이다. “질고를 안다”라는 것은 히브리어 “병을 앓는 자로 알려진 사람”을 뜻하는 히브리어 “예두아 홀리”에 대한 잘못된 번역이다. 이런 말을 “질고를 아는 자”라고 번역해 놓으니까 “질고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진 자” 혹은 “질고에 대한 의학적 지식을 가진 자”로 오해하는 독자들이 많다. 그들은 여기 주인공이 “질고를 아는 자”였기 때문에 멸시를 받았다는 문맥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고려했다면, “질고를 아는 자”가 수상한 번역임을 알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다른 여러 번역을 참고하여 올바른 뜻을 파악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영어의 “He was familiar with sickness(질병에 잘 걸리는 사람)”이라든가 독일어의 “voller Schmerzen und Krankheit(고난과 질병이 가득한 사람)”, 혹은,他多受痛苦 常經愚患(그는 고통을 많이 받았으며 늘 병을 앓음으로 지냈다)”<中國語官話譯,1919>라든가, 他受盡痛苦 常經沈患(그는 끝까지 고통을 받았으며 늘 병을 앓음으로 지냈다) <當代聖經,1979>, 혹은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표준새번역> 등을 볼 수 있다면, 이 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고하는 기능을 지닌 구절이라는 것은 이해하면서도, 이 구절의 본래적인 구약의 맥락에서 이사야서의 맥락에서 여기 고난받는 종이 지닌 역사적 의미는 구태어 알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고난 받는 종의 특징 묘사의 문학적 기법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이 구절을 그대로 예수의 전기로 보고, 문자주의에 입각하여, 이사야의 이 본문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주장들,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병자가 아니었다는 것, 예수가 환자였다는 말은 복음서 어디에도 없다는 것, 또 예수는 많은 병자의 병을 고치셨지 자신이 병자는 아니었다는 것, 오히려 예수는 모든 질고를 치료할 수 있는 전문적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많은 병자를 고치실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질고를 아는 자”의 참 뜻이라는 것 등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疾苦)를 당케 하셨은즉”(사 53:10) 이라는 구절 마저, 그리스도가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다는 말이지, 그리스도 자신이 병자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병을 짊어졌다는 것과 병을 앓는다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표현상의 차이일 뿐이지 실제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다.
이사야서 53장은, 우선, 그것이 예수의 전기가 아니다. 후대 교회가 다만 그 구절에서 메시야가 당할 고난의 예고를 읽은 것일 뿐이다. 메시아의 고난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발견한 것이다. 고난받는 종을 “간고의 사람” “질고의 사람”이라고 묘사한 것은 그의 생애가 간고와 질고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이다. 한 평생 사는 동안 누군들 가고를 안 겪으며 누군들 질고를 겪지 않는가?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간고의 사람(이쉬 막크오보트)”이라든가 “질고의 사람(예두아 홀리)”으로 알려지는 것은 아니다. 간고와 질병이 그의 삶의 특징적 요소일 때에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영어 번역들 중에서 얼마를 골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찍부터 영어권에서는, KJV, ASV, RSV, NASB, NKJV, NRSV 등이 히브리어 “예두아 홀리”를 “고통과(또는 질고와) 친숙한(acquainted with grief/sickness)으로 번역하였다. “질고로(또는 질병과 고통으로) 비천해졌다(humbled by suffering)”는 번역도 있다. NEB가 이렇게 번역하였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서는 클라우스 베스터만의 “humiliated by sickness(병으로 욕을 보다, 병으로 굴욕을 당하다)”라는 것도 있다. JB, AB, NIV 등은 “고통(또는 질고)과 자주 만나는, 친한 (familiar with suffering)”으로 번역하였다.
이 밖에, “질고를 짊어지다, 견디다 (endured pain), “병으로 괴로워하다(afflicted by disease)”, “병의 방문을 받은 사람(who has visited by sickness)” 곧 “병 걸린 사람”(John D. W. Watts) 등의 번역도 있다.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감신대에서 17년간 후학들을 가르쳤다. 지금은 대한성서공회 부총무이며, 국제적으로 세계성서공회연합회 학문용 성서 편집위원, 아시아태평양지역 몽골성서 번역 고문, 불교권 독자를 위한 해설성서 집필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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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우선주의의 견강부회(牽强附會)는 삼갈 일
이사야서 53장 3절의 “질고를 아는 자라”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艱苦)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疾苦)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疾苦)를 당케 하셨은즉...”(사 53:2-5, 10).
“질고”라는 말은 질병을 뜻하는 말이다. “질고를 안다”라는 것은 히브리어 “병을 앓는 자로 알려진 사람”을 뜻하는 히브리어 “예두아 홀리”에 대한 잘못된 번역이다. 이런 말을 “질고를 아는 자”라고 번역해 놓으니까 “질고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진 자” 혹은 “질고에 대한 의학적 지식을 가진 자”로 오해하는 독자들이 많다. 그들은 여기 주인공이 “질고를 아는 자”였기 때문에 멸시를 받았다는 문맥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고려했다면, “질고를 아는 자”가 수상한 번역임을 알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다른 여러 번역을 참고하여 올바른 뜻을 파악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영어의 “He was familiar with sickness(질병에 잘 걸리는 사람)”이라든가 독일어의 “voller Schmerzen und Krankheit(고난과 질병이 가득한 사람)”, 혹은,他多受痛苦 常經愚患(그는 고통을 많이 받았으며 늘 병을 앓음으로 지냈다)”<中國語官話譯,1919>라든가, 他受盡痛苦 常經沈患(그는 끝까지 고통을 받았으며 늘 병을 앓음으로 지냈다) <當代聖經,1979>, 혹은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표준새번역> 등을 볼 수 있다면, 이 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고하는 기능을 지닌 구절이라는 것은 이해하면서도, 이 구절의 본래적인 구약의 맥락에서 이사야서의 맥락에서 여기 고난받는 종이 지닌 역사적 의미는 구태어 알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고난 받는 종의 특징 묘사의 문학적 기법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이 구절을 그대로 예수의 전기로 보고, 문자주의에 입각하여, 이사야의 이 본문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주장들,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병자가 아니었다는 것, 예수가 환자였다는 말은 복음서 어디에도 없다는 것, 또 예수는 많은 병자의 병을 고치셨지 자신이 병자는 아니었다는 것, 오히려 예수는 모든 질고를 치료할 수 있는 전문적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많은 병자를 고치실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질고를 아는 자”의 참 뜻이라는 것 등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疾苦)를 당케 하셨은즉”(사 53:10) 이라는 구절 마저, 그리스도가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다는 말이지, 그리스도 자신이 병자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병을 짊어졌다는 것과 병을 앓는다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표현상의 차이일 뿐이지 실제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다.
이사야서 53장은, 우선, 그것이 예수의 전기가 아니다. 후대 교회가 다만 그 구절에서 메시야가 당할 고난의 예고를 읽은 것일 뿐이다. 메시아의 고난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발견한 것이다. 고난받는 종을 “간고의 사람” “질고의 사람”이라고 묘사한 것은 그의 생애가 간고와 질고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이다. 한 평생 사는 동안 누군들 가고를 안 겪으며 누군들 질고를 겪지 않는가?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간고의 사람(이쉬 막크오보트)”이라든가 “질고의 사람(예두아 홀리)”으로 알려지는 것은 아니다. 간고와 질병이 그의 삶의 특징적 요소일 때에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영어 번역들 중에서 얼마를 골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찍부터 영어권에서는, KJV, ASV, RSV, NASB, NKJV, NRSV 등이 히브리어 “예두아 홀리”를 “고통과(또는 질고와) 친숙한(acquainted with grief/sickness)으로 번역하였다. “질고로(또는 질병과 고통으로) 비천해졌다(humbled by suffering)”는 번역도 있다. NEB가 이렇게 번역하였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서는 클라우스 베스터만의 “humiliated by sickness(병으로 욕을 보다, 병으로 굴욕을 당하다)”라는 것도 있다. JB, AB, NIV 등은 “고통(또는 질고)과 자주 만나는, 친한 (familiar with suffering)”으로 번역하였다.
이 밖에, “질고를 짊어지다, 견디다 (endured pain), “병으로 괴로워하다(afflicted by disease)”, “병의 방문을 받은 사람(who has visited by sickness)” 곧 “병 걸린 사람”(John D. W. Watts) 등의 번역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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