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11월23일 [(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제1독서 마카베오기 상권 6,1-13
복음 루카 20,27-40
◈ [서울]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2019년 다해 11월23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불가항력(不可抗力),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준비한다고 하지만, 불가피한 상황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뉴욕으로
온 친구가 캐나다로 단풍 구경 간다고 했습니다. 숙소도 예약했고,
렌터카도 예약했고, 비행기도 예약했습니다. 그런데 미국면허증을
가져오지 않고, 한국 면허증을 가져왔습니다. 한국에 연락해서
미국면허증을 택배로 보냈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미국면허증을
받았습니다. 다시금 비행기 예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캐나다
전자 여행 허가(eTA)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법이 개정되었는데
모르고 있었습니다. 결국, 단풍 구경은 포기하였습니다. 옆에서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속이 상하고,
자신을 탓했지만, 그것도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덕분에 친구와 며칠 더 뉴욕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가을이 깊으면
겨울이 가까이 온다는 뜻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예수님과 ‘부활 논쟁’을 벌였습니다.
장기에 ‘외통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수입니다. 장기에 질 수밖에 없는 수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은 부활이
있다면 유대의 율법 규정을 들어서 ‘일곱 형제와 살아야 했던 여인의
남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은 존재의
차원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소유의 차원은 중심이 ‘나’입니다. 그러나
존재의 차원은 중심이 ‘하느님’입니다. 소유의 차원은 승자독식,
적자생존, 약육강식,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입니다. 존재의 차원은 믿음,
희망, 사랑의 세상입니다. 정결, 순명, 가난의 삶입니다.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노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더는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없는 세상입니다. 부활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은 인식과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존재의 삶을 산다면 이미 부활의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가을이 깊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입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가난한 이는 영원히 잊히지 않고,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1월23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20,27-40: 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이 없다
“사두가이”란 보상을 바라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의로운 자”라는 뜻으로 불린 명칭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보상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부활을 믿지 않는 특별한 분파였다.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던 사두가이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로 모여들었다.
이 사두가이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을 한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3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마태22,29-30) 고 하셨다. 하느님의 권능은 너무나 크시다.
어째서 그럴까? 그들은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의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4-36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 이상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6절)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도록 되어있고 또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써만이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금부터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되어있기 때문에 장차 부활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가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므로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고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즉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 일치가 죽음을 넘어 우리의 육신까지도 살려줄 마지막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기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하느님의 영광이 되는 인간이다. 이러한 삶을 살도록 결심하며
기도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진리가 부족하면 현세주의자가 되고 은총이 부족하면 인본주의자가
된다
2019년 다해 11일23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진리가 부족하면 현세주의자가 되고 은총이 부족하면 인본주의자가
된다.)
복음: 루카 20,27-40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일본 돈 만 엔짜리 지폐에도 새겨져
있을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폐쇄적인
계급사회의 부조리함을 느끼고 그것이 일본을 망치고 있다고 믿어
어려서부터 견문을 넓히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고 그 곳에서 공부하며 받은 충격적인
사실을 ‘서양 사정’과 ‘학문의 권유’ 등의 책으로 출판해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평등, 개인의 권리와
자유,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독립과 책임, 관존민비의 타파, 민권의
신장, 국회 개설 등을 주장해 일본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그의 덕분으로 일본이 빠르게 서양과 같이
근대화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서양처럼 되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만이 아니라 조선과 중국도 그런 길을
가야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조선을 자신들보다 훨씬 미개한 상태로
여겨 침략을 해서라도 아시아를 유럽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서양보다 먼저 조선과 중국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선생이고 조선이 하인입니다.”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서양 제국주의를 일본으로 끌어들여
다른 나라를 침략하게 만드는 정신적 기틀을 세웁니다.
‘힘’만 좋아하고 ‘진리’를 모르면 ‘현세주의자’가 됩니다.
현세에서 잘살면 어떠한 비윤리적인 행위도 용납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일본인들은 아직도 후쿠자와의 생각을 따르며 자신들의 침략으로
한국이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사랑’입니다. 힘은 이 사랑을 위해
쓰여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자유가 없다면 지옥입니다.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후쿠자와는 공부는
많이 했을지라도 참 진리에 대해서는 무식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두가이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극히 현세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로마
지배하에 있으면서도 독립보다는 그 힘에 결탁하여 잘 살고 있었던
이들입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 내세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이
있다면 현세를 즐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따집니다.
하지만 사랑을 진리로 믿는 이들에게는 부활이 필수적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부활이 없는 사랑은 허무한 죽음밖에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이 내세에서도
있어야합니다. 사랑을 참 진리로 여기는 이들은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사두가이들을 반박한 예수님을 두고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라며 칭찬해줍니다. 박해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두가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는 서로 일치했지만 자신들끼리는 교리가 달랐기 때문에
항상 싸웠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진리는
알았을지라도 은총(힘)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 힘을 주러 오신 예수님도 필요 없게 여겼습니다.
사람은 ‘은총과 진리’로 태어납니다. 은총은 에너지이고 성령이시며,
진리는 말씀이며 성자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이 은총과 진리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아기가 두 발로 걷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은총과 진리를 다 받아야합니다. 은총은 부모님이 주시는
양식입니다. 그 양식의 힘으로 부모처럼 하려고 걸음마와 옹알이를
시작합니다. 부모에게서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음식을 주지
않는다던가, 부모가 어떻게 걷는지 안 보여준다면 아이는 온전한
인간으로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힘만 강조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현세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사두가이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십계명을 알고 내세도 믿었기 때문에 진리에는 민감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총의 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랑을 자신들의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인본주의자들’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인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기가 부모로부터 양식을
받지 못하면 부모를 보아도 부모처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일본이 후쿠자와의 제국주의 사상으로 침략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의병운동도 많았고 3월 1일 독립선언서에도 발표했습니다. 이때
독립선언서에 빠져있었던 종교가 있었는데 유교였습니다. 당시
유생들도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은 했지만 붓으로만 하였습니다. 이는
‘마음이 곧 이치다’라는 사상으로 유교가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유교는 ‘기(氣)’보다는 ‘이(理)’에 치중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기는 힘이고 은총이며, 이는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이 은총과 진리는
항상 함께 가야 사람을 온전히 성장시킵니다. 성령님과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둘은 하나이면서도 둘입니다. 그 은총과 진리를
주시는 분과 함께 세 분이 사람의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힘만 좋아하는 현세주의자는 진리가 부족하여 절제할 줄 모르고
자신의 욕구와 싸울 줄도 모릅니다. 반면 진리만 좋아하는
인본주의자는 은총이 부족하여 알기는 하지만 그 아는 것을 이루기
위한 힘을 청하지 않습니다. 자신들 안에 그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은총도 진리도 다 하느님께서 아드님과 성령님을 통해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 둘의 균형을 잘 잡고 성장해야합니다. 진리를 명확히 깨달아
현세주의에서 벗어나고 기도로 아는 것을 실천할 힘을 청해야합니다.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균형이 맞추어져야하는 것입니다. 말씀
(진리)만 강조하면 성사에 소홀해질 수 있고, 성사(은총)만 강조하면
말씀에 소홀해 질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만 해서도 안 되고 기도만
해서도 안 됩니다. 둘 다 해야 합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루카 20, 38)|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1월23.토.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 38)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길을 이야기하시고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우리들은 죽음의 길을 이야기합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뜨겁게 우리를 맞이하십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 살아 있는 우리들 삶이 됩니다.
살아온 시간 살아 있는 시간 살아야 할 시간 모두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이며 하느님의 차원입니다.
살아 있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통해 죽음은 삶의 끝이 결코 아님을 알게됩니다.
당신의 생명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죽음을 당신 생명으로 구원하시는 산 이들의 하느님께
생명을 위한 사랑을 지금 여기서 이미 실천하는
사랑의 위령성월 되십시오.
생명을 위해 생명으로 찾아오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되살아나는 믿음의 여정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2019년 다해 11월23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요즘 자주 접하게 되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 앞에 할말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끔찍한 사건·사고들이 보도될때는 재빨리
외면하곤 합니다.
인생이 채 피어나기도 전인 어린 나이에, 홀로 쓸쓸히, 휘청휘청, 가지
말아야 할 길을 향해 걸어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에, 기성 세대로서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멀쩡히 살아 숨쉬고 있지만,
실제로는 살아있지 못한, 이미 무엇인가 그들 안에서 죽어버린 모습도
목격합니다. 생물학적으로만 살아있지 실제로는 살아있지 못한
사람들도 만납니다.
이토록 참혹하고 부끄러운 현실의 배경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을까?
고민해봅니다. 티비 채널을 돌릴 때 마다, 눈길을 확 사로 잡는
주인공들의 기적같은 성공 스토리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어마어마한 대저택에, 우아한 실내 인테리어, 세상 살이에 대한
걱정이나 근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수 없는 행복한 얼굴들...
그러다 내 발밑을 천천히 내려다보면, 티비 속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내 암담하고 참혹한 현실에 좌절합니다. 이 모든 것이 개발 독재의
구호 아래, 성공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가 만들어낸 참혹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미에서 주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음은 축복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복음 20장 38절)
때로 의구심이 들때도 많습니다. “오늘 내 삶이 이토록 구차스러운데,
오늘 내 인생길이 이토록 가시밭길 투성이인데, 이런 내 삶이 대체
무슨 가치와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질에 대한 지속적 반성과 성찰입니다. 오늘 나는 참으로 살아 있는가?
열심히 숨쉬고 삼시세끼 제때 밥 먹으며, 분명히 살아있지만, 이미 내
안에서 어떤 것들이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육체는 버젓이 살아 있지만,
영혼이나 정신이 이미 소멸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그래서 더욱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들의 육체는
점점 노쇠해지고 소멸되겠지만, 우리들의 영혼과 정신은 더욱
견고해지고 강건해질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들이 아무리 열악하고 비호의적이라 할지라도, 또 일어서고 또
넘어서겠노라고.
진정으로 살아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있지만 정신도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육체도 살아있지만 영혼도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결국
주님 안에, 그분의 성령 안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늘 내 앞에 펼쳐질 하루하루가 시련과 상처 투성이뿐일지라도,
기꺼이 견뎌내고 이겨내면, 언젠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스런
부활의 삶에 직접 참여할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또 다시 힘을
내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앞에 진정 살아있는 자로 굳건히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조차도 하느님 앞에 있다면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직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이 목적을 위해
살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제는 돌아가신 삶과 죽음의 전문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남긴
죽음에 대한 말씀은 위령성월을 지내고 있는 우리를 부단히 격려하고
자극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십시오. 삶에서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닙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11월 23일(토) -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오늘은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잠언서 1장 23절 말씀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이 가득한 성스러운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이라고도 하고 성서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성스러운
책에서 사랑만 강조를 합니다. 그리고 사랑만 받기를 원합니다.
야단치는 소리 책망 받는 소리를 듣기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짜증을 내고 피해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당연히 사랑받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람은 사랑받을 일도 중요하지만 책망 받을 일들을 훨씬
더 많이 하고 하나님을 힘들게 하고 성령님을 근심하게 합니다.
그럴 때는 이 땅에 주의 종들을 내세워 잘못한 것에 대하여 책망할 것에
대하여 기준을 정하고 직접적으로 관여하시며 채벌을 하듯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책망을 하십니다.
바로 이때 우리 성도들은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근신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조만식 장로님이 제 시간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늦게 들온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때 목사님으로부터 3주간 장로님의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온 성도들이 말씀을 듣는 제일 뒤편에 앉아서 예배드리도록
책망의 징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숙연한 마음으로 그 책망에 대하여 순종하는
조만식장로님을 존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망을 잘 받아들여 돌이키는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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