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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과 묵상

12월5일 자기 집을 반석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작성자김혜연 안나|작성시간19.12.05|조회수1,068 목록 댓글 0
    ▣ 2019년 가해 12월5일 [(자)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제1독서 이사야서 26,1-6 복음 마태오 복음 7,21.24-27
    ◈ [서울] 대림 제1주간 목요일 2019년 가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명견만리(明見萬里)’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력은 만리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력은 십리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지식은 만리를 넘어 은하계를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신앙은 우주의 시작과 끝도 볼 수 있습니다. 우주의 시작과 끝이신 하느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책은 경쟁이 아닌 공유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테슬라는 전기차에 대한 특허를 공유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전기차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서태지는 자신이 공들여 만든 음원을 공개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서태지의 음악은 더욱 풍부해졌다고 합니다. 인터넷 시대를 이끄는 구글, 페이스북, 애플은 공유가 있었기에 성공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정보를 올리고, 정보를 검색하고, 정보를 내려 받으면서 새로운 가치와 일자리도 생긴다고 합니다. 어릴 때 읽은 동화가 있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이들이 마당에서 노는 모습을 보기 싫어했던 아저씨는 높은 담을 쌓았습니다. 아이들은 아저씨의 마당에서 더는 놀 수 없었습니다. 그 후로 아저씨의 마당에는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계속 추운 겨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어린이가 작은 틈새로 들어와 놀았고, 그 뒤로는 마당에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아저씨는 마당의 담을 모두 헐어버렸고, 아이들이 다시금 뛰어 놀았고, 봄이 온다는 내용입니다.” 낙원(Paradise)는 포도를 키우는 정원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낙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곳이 아닙니다. 낙원은 우리의 능력과 재능을 나눌 때 시작됩니다. 하늘의 태양은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에게 빛을 주고 있습니다. 숲의 나무와 풀은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에게 꽃과 꿀과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주고 있습니다. 담이 없어도, 경계를 짓지 않아도 자연은 오랫동안 지구의 친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명견만리를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무엇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입니까? 우리는 그 모습을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각자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떼고 신명나는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들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하여 온 백성에게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그 모임에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늘려 주셨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하고, 세상의 어두운 곳, 소외된 곳, 가난한 이, 병든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소유가 아닌 공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영성체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대림 제1주간 목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가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 7,21.24-27: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예수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1절)고 하신다. 이 말씀은 지금 언행이 일치하지 않음을 탓하시는 말씀이다.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바로 아들의 뜻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과 반대되는 가르치실 수가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먼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죽은 다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말씀은 현재의 삶에서부터 맺는 열매와 덕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씀의 열매와 덕은 삶의 어려움에 의해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안정을 누리게 된다.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폭풍이 불고 극심한 풍랑이 닥치고 유혹이 계속되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25절) 비와 강물과 바람이라는 말로 인생의 온갖 상황, 모략, 중상, 상실, 죽음, 가족을 잃는 일 등 삶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끔찍한 일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뿌리박은 사람은 이런 재앙 어느 것으로도 무너지지 않는다. 바위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바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고 하겠지만 더 근본적적으로는 예수님 자신이시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대고 굳건히 서 있는데 어떤 어려움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겠는가!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은 인간을 인생의 모든 파도 저 너머에 올려놓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8)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세운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런 사람은 집짓는 수고를 다 하고서도 수고의 열매와 안식을 얻지 못하고 은총 대신 벌을 받기 때문이다. 강도, 간음, 위증하는 사람들도 자기 일을 하려면 수고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수고를 했어도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큰 손해까지 본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들은 불륜이나 방탕, 만취 분노에 빠져 사는 이들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되고 있다.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필리 4,13)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져 어리석은 자가 된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항상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이 대림시기를 노력하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람을 심판하면 믿으나 마나다. 2019년 가해 12일5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사람을 심판하면 믿으나 마나다.> 복음: 마태오 7,21.24-27 강사 김창옥씨의 강의 중에 어떤 부부가 감자 때문에 이혼한 사연이 나옵니다. 어느 날, 이혼재판소에 한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판사가 물었어요. 왜 이혼을 하려고 하냐고. 그랬더니 ‘감자’때문에 이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먹는 감자요?” “네!” 어리둥절한 판사가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사연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감자를 삶아서 내왔습니다. 그리곤 감자에 찍어 먹으라고 설탕을 줬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누가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냐? 소금 가져와 소금.” 했습니다. 아내가 그냥 설탕 찍어먹으라고 했지만 남편은 소금 가져오라고 계속 말했습니다. 아내는 짜증난 목소리로 투덜거렸습니다. “당신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그렇게 소금 찍어먹고 싶으면 당신이 가서 가져와! 손가락 하나를 까딱 안 해요. 이놈의 집안은.” 그러자 남편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해버렸습니다. “그래, 장모도 감자에 설탕 찍어먹더라. 감자에 설탕 찍어먹는 집안. 에휴.” 남편의 말에 아내가 화가 많이 나 소리쳤습니다. “뭐? 집안? 당신 집안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뭐가 그렇게 잘났기에 지랄이야!” “뭐? 지랄? 에잇!” 남편이 아내의 뺨을 치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째려보자 남편이 소리쳤습니다. “뭐, 어쩌라고? 어쩌고 싶은데? 어?” 아내가 차가운 말투로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이. 혼. 해.” “뭐, 이혼? 감자가 이혼할 이유냐? 이게?” 남편이 당황했지만, 아내는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나, 생각한지 오래됐어.” 그렇게 두 분이 재판소에 오게 된 것입니다. 아내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판사님께 물었습니다. “판사님, 판사님께서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셔서 좋은 교육 받으시고 판사 되셨잖아요? 판사님 댁에서는 감자에 설탕 찍어먹나요, 소금 찍어먹나요?” 당황한 판사가 몇 초 후에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감자에 신김치를 올려먹습니다.” 과연 이 부부는 감자 때문에 이혼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서로를 심판하는 버릇을 무시했기 때문에 이혼하게 된 것입니다. 배우자를 평가하고 그 배우자가 자란 집안까지 심판하니 그 관계가 오래 유지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엔 ‘기본’이 있습니다. 기본이 무시되면 더 이상 노력하는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기본에 충실히 하지 않으면 다른 노력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누가 기반도 다지지 않고 건물을 짓겠습니까? 흔들리는 바탕 위에 노력하는 모든 것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립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기본이 있습니다. 그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면 오늘 복음의 비유말씀처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면 그 집은 완전히 무너져 내립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라는 말씀의 결론부분입니다. 그러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는 것을 배우려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아무도 심판이 되지 않을 때 다른 덕도 쌓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일본 납세자 1위인 사이토 히토리씨가 결혼에 대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빨리 하고 후회하느냐, 늦게 하고 후회하느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결혼은 수행이니까요. 생판 남과 생활하는 수행입니다. 결혼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든지 상대방이 행복하게 해줄 거라는 망상을 하니 실패하는 거예요. 수행은 그런 것까지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남편의 이상한 말 한마디에 싫어지겠지만, 수행이라고 생각하면 ‘이 사람이 아니면 이런 수행을 할 수 있었겠어?’하고 생각하겠지요. 그리고 결혼하는 상대방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만나게 되면 반드시 결혼해야 해요. 정해진 운명이니까요. 그렇게 수행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운명의 상대라고 부르지 말고, 수행의 상대라고 하세요.” [출처: ‘돈을 부르는 말버릇; 운명의 상대? 수행의 상대’, 미야모토 마유미, 비즈니스북스] 신앙도 이웃과의 운명적인 수행의 시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운명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그들을 자기 행복을 위해 이용하는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판단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수행대상으로 보아야합니다. 신앙생활이 남을 심판하는 버릇을 고치려는 노력으로 시작될 때 반석 위에 집을 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 21)|한상우 바오로 신부 2019년 가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 아버지의 뜻과 실행은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신앙의 길에서 중요한 것은 기초이며 기본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기본으로 지켜지고 기본으로 이루어집니다.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우리 삶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뜻과 실행은 이렇게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실행으로 더욱 풍요롭습니다. 우리가 갖추어야할 기본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아버지 하느님 뜻안에 실행이 들어있습니다. 실행없이 우리 믿음은 자랄 수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실행이라는 실천의 문임을 기억하는 은총의 대림되십시오. 무너지지 않는 실행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실행이라는 튼튼한 반석위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신앙이 없는 업적은 속 빈 강정, 혹은 연료 없는 멋진 자동차와 같습니다! 2019년 가해 12일5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신앙이 없는 업적은 속 빈 강정, 혹은 연료 없는 멋진 자동차와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 7장~9장에는 그 유명한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장엄하게 펼쳐집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농축한 액기스 같은 설교 말씀, 그야말로 금과옥조(金科玉條)같은 말씀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참된 행복과 율법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화해와 평화, 정직과 극기의 생활에 대해서, 올바른 기도와 자선, 단식과 이웃사랑의 실천 등등.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할 신앙의 기본적 규범에 대해서 세세히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삼아 3가지를 당부하십니다. 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2.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 3. 가르침을 들었으면 실행하라! 당대 거짓 예언자들의 만행을 목격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저지르고 있던 악행을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오 복음 7장 21절) 당시 거짓 예언자들은 ‘주님, 주님!’하며 입으로는 늘 그분을 찾았지만 언행이 조금도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거짓 예언자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가운데 어떤 목자나 지도자가 아무리 그럴듯 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선포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결실과 성공을 주님께로 돌리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자신의 이름, 자신의 얼굴, 자신의 성공만을 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찾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이며, 주님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거나 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삶을 산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교회는 실행 쪽으로만 과도하게 지우치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도와 영적 생활과 사랑의 실천 사이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행동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극단적 선택은 늘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이 없는 업적은 속 빈 강정과도 같습니다. 연료가 없는 멋진 자동차와 같습니다. 최첨단 기술이 장착되어 있으나 영혼 없는 로봇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분석해보면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해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7장 24절)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입니다. 그분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입니다. 실행은 그 다음입니다. 진지한 자세로 그분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본질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다음 순서가 실행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냥 흘려보내도 되는 말이 아닙니다. 반드시 인간측의 응답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측에 의무와 과제를 지우는 강제소집령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실행 자체였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인간측의 응답도 책임감이 있으려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 사랑으로부터 분출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인간측의 등답은 사랑 안에 실행되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12월 5일(목) - 지혜와 이익 오늘은 ‘지혜와 이익’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잠언서 3장 14절 말씀에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를 얻는 자와 그리고 이익을 얻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재물을 얻고 이익이 사람을 얻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재물과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혜와 이익이 재물과 사람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지혜를 얻으면 직접 돈을 벌어 이익을 내는 것이 됩니다. (예화) 제가 아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매일매일 나가서 매일매일 돈을 벌어야 합니다. 식당을 하는 분입니다. 언젠가 부터 이제는 돈도 귀찮다고 할 정도로 몸이 너무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집을 사고파는데 일 년에 한 채나 두 채 정도 사서 수리해서 팔고는 합니다. 그래서 한 채당 약 이천 여 만원 남기고 파는데 일 년에 4천 여 만원의 수익을 낸다고 합니다. 집 2채 팔고 나머지 시간은 여유롭게 취미생활도 하고 여행도 가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지혜를 발휘해 보십시오. 이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지혜를 동원하여 세상에 매여서 살지 말고 세상을 누리며 사는 성도가 되십시오. 할렐루야! - 인천 부평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신부 -
    ◈ [서울] 반석 위 인생 삽시다. 2019년 가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반석 위 인생 삽시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마태오 7,21;24~27)”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해야 된답니다. 문제는 하늘나라 가기와 안가기 예수 가르침 실행하기 안 하기입니다. 이 문제를 사람들에게 제시하면 듣기 안 듣기부터 자유라고들 합니다. 존엄성 자유 목숨 지닌 인간이라면 종교에 생을 맡기는 사람들입니다. 유물사관에 입각한 공산주의에선 존엄성 자유 목숨 다 인정 안합니다. 종교주의는 민주주의 뿌리이고 공산주의는 유물사관이 그 뿌리입니다. 북한 찬양자들은 영혼 천당 지옥 다 부정하니까 북한으로 이주하세요. 하느님가족 되려는 분들 남한서 가톨릭신앙으로 반석 위 인생 삽시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멘델스존/피아노 삼중주 제1번 D단조 op. 49 - 트리오 데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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