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가해 12월30일 [(백)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제1독서 요한 1서 2,12-17
복음 루카 복음 2,36-40
◈ [서울]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2019년 가해 12월30일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지구 사제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서울교구의 지구사제회의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서울교구는 회의를 먼저하고, 식사하였습니다. 회의
시간에 나누는 이야기도 좋지만, 식사하면서 친교를 나누는 것에도
의미를 두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는 먼저 식사하고 회의를 하였습니다.
식사는 간단하게 하고, 회의를 하였습니다. 식사와 친교보다는 회의에
더 비중을 두는 것 같았습니다.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회의는
진지했고,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왔지만, 가능하면
교구의 회의나 행사에 참석하려합니다. 상관없다고 피하기보다는
힘들어도 부딪치는 것도 좋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과 재산에 만족한 사람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편안함에
안주하는 사람입니다. 변화와 혁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궁궐에 있었던 헤로데 왕이 그랬습니다. 헤로데 왕 곁에서 풍족한 삶을
살았던 신하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의 잣대로 세상을 보았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이 그랬습니다. 세상의 것에 취한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현상은 보지만 본질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계산하고, 분석하는 것은 잘하지만 의미와 가치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을 보았고, 경배한 사람이 있습니다. 참된 행복,
참된 기쁨, 참된 평화를 찾았던 사람입니다. 현실에 만족하기보다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입니다. 머리를 들어 별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았고, 구세주의 탄생을 보았습니다.
먼 길을 걸어, 주님께 경배 드렸습니다. 황금, 유향, 몰약을
가져왔습니다. 천사의 소리를 들었던 목동들이 주님의 탄생을
보았습니다. 시메온과 한나가 주님의 탄생을 보았습니다. 겸손한
사람, 기도하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은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보았고, 경배하였고, 축복하였습니다.
지구사제회의에서 함께 읽었던 기도문을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경배합니다. 당신은 과거에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법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의 글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 경배합니다. 당신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오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지는 이웃들을 통해서 오십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오십니다. 우리의
이웃들과 함께 당신을 경배할 때도 오십니다.
주님, 경배합니다. 당신은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죽음의
시간에 우리와 함께 하실 겁니다. 당신은 인간의 제도적인 실패에도
여전히 권능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당신은 인간의 역사 안에
여전히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환영합니다. 주 예수님,
우리에게 오소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경배할 수
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하느님손길이 함께 하신 상태는.
2019년 가해 12월 30일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하느님손길이 함께 하신 상태는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36~40)”
84세 할머니가 하느님 성전에서 살다시피 사시다가 예수님을 봅니다.
이 할머니가 인류가 기다리던 아기라고 예수님께 대해서 말했습니다.
봉헌 예식 마치고 나자렛으로 가서 살며 예수님은 잘 자랐다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자라나는 과정에 하늘의 힘님이 늘 함께하셨지요.
수태 이전부터 하느님의 손길이 계속 따라다녔다는 점들 느껴집니다.
남에게 자랑하거나 칭찬 받으며 축하할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손길이 함께 하신 상태는 세상서 비참한 모습들 이었다봅니다.
우리도 세상자랑 칭찬받기보다 영생에서 환영 칭찬 받기로 하시지요.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성탄 팔일 축제 제6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가해 12월 30일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복음: 루카 2,36-40: 한나라는 과부의 기쁨
시메온의 뒤를 이어 여예언자 한나가 등장하고 있다. 먼저 시메온이
아기를 뵙고 품에 안아 본 다음에 한나가 나타났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38절)고 한다. 복음에 그녀의 조상과 지파를
밝힘으로써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키고 있다.
그들이 증인이 되는 것이다.
신비적인 의미로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의미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에서 기도하며 지내다가 하느님의 구원을 발견한
한나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여인이
과부라고 소개한다. 인생에 있어서 과부라고 하는 생애는 남편과
사별을 하고 ‘외롭고 슬픔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편을 잃은 슬픔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비통에 빠지기 쉬운
경우라고 하겠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흔히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하시는가?” 하며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외면하고 냉담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뼈아픈 체험을 통하여 현세의 삶과
죽음의 허무함을 통감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더욱 의뢰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 현세에서 당하는 슬픔은 단지 이런 여인의 슬픔만이
아니라,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하는 모든 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외면하게도 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어 그 뿌리를
튼튼하게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을
자기 생활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는 여인은 결혼한 후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84세에 이르도록 성전에 몸담아 하느님께 봉사와 기도로써
지내왔다. 이것은 하느님 공경에 참으로 정성스러운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그 할머니가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의 한나 할머니는 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았고 충실히 믿었기 때문에, 또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분이시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남녀가 혼인하여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귀엽고 믿을 수 있는 자녀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한 생애를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원하는 대로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현세의 큰 축복이겠는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모든 부부가 그렇지는 못하다. 또 부부 중에
어느 한 편이 세상을 먼저 떠났다고 해서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안나 할머니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을 청하여야 하겠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집중하는 것이 커진다.
2019년 가해 12일30일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집중하는 것이 커진다.>
복음: 루카 2,36-40
한 번은 두 자매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다 머리를 깎으러
미용실에 들어갔습니다. 손님이 없어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자매님도 따라 들어왔습니다. 조금은 고급스러운
가게였습니다. 퇴근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지 스마트폰을 보던 팔에
문신한 남자가 제 머리를 깎으려 조금은 투덜거리듯 다가왔습니다.
저는 머리를 감을 때 샴푸를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좋은 샴푸가
있다고 해서 한 달 정도 샴푸를 썼습니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아 다시 노푸(샴푸를 쓰지 않고 머리를 감는다는 뜻)로 돌아갔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동안은 기름이 많이 나와 머리가 기름졌습니다. 대뜸 그
청년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침에 머리 안 감으셨어요?”
그리고는 자신의 손에 머리 기름이 묻는 것이 기분 나쁜지 짜증나는
표정으로 연신 머리를 만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털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제가 보기를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머리를 깎는 것이
아니면 머리를 숙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처럼 그냥 그 청년에게
머리를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매님들이 미리 계산을 다 해 놓았습니다. 자매님들이
저를 대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샴푸를
하고 난 후엔 그 청년의 태도가 눈에 뛰게 바뀌었습니다. 깊은 절을
하며 미소 띤 얼굴로 또 오시라고 인사하고, 날씨도 추운데 나와서
저희가 걸어가는 것을 뒤에서 계속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지방 총선을 앞두고
시장님이 저희 성당 신자들에게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나왔습니다.
제가 사복을 입고 청년처럼 생겨서 그런지 시장님은 뻣뻣한 자세로
저의 폴더 인사를 받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다 신자들에게 혹시
신부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어보더니 다시 제 앞으로 와서 깊은 절로
인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뻣뻣하게 인사를 되돌려주었습니다.
받은 대로 되갚아줘야 하는 못된 청년이었던 것입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신을 최고로 느껴 사람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너무 커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커지면 사람은 개미처럼 작아
보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밟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살게 되는 진짜 이유는 그 사람이 정말로 큰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자신에게만 너무 집중하며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집중하면 커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마더 데레사가 천국에 갈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
봤더니 79%가 천국에 가실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그들에게 자신들이
천국에 갈 확률을 적어보라고 했더니 87%가 천국에 갈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다들 마더 데레사보다 잘 산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한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가정의 평범한 아이였고 성전에서 남들처럼 할례를 받기 위해
봉헌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는 여인만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작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이 자신은 작아져야 하고 그리스도는
커지셔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자신을 끊임없이 작게 만드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남편과 7년을 살다가 사별하고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지냈습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기도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식하면 배가 고프고 배가 고프면
자신의 낮은 처지를 알게 되고 그러면 기도하게 됩니다. 하느님밖에
의탁할 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시지만 오직 자신을 작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만 구원자로 보이십니다.
우리 자신을 정결함과 단식, 그리고 기도로 작게 만들어야겠습니다.
자신보다는 하느님과 이웃의 행복을 바라며 살아야겠습니다. 사람은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위한 생각만 하는 사람과 하느님과
이웃의 행복만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은 자신이
너무 커져서 안하무인이 됩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까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작아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때 하느님처럼 됩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 38)|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가해 12월30일 월.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 38)
성탄의 이야기가 우리의 온 세상을 다 뒤덮어 버렸습니다.
희망이 필요한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희망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의 이야기 하나가 우리에게 가장 강한 희망을 선사합니다.
우리를 살리는 희망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희망을 통해 우리들의 하느님을 기쁘게 만납니다.
희망은 멈추지 않습니다.
희망의 예수님께서 우리를 껴안아 주십니다.
희망을 꿈꾸는 사람이 되게합니다.
희망을 찾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시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할 희망과 속량은 없습니다.
성탄을 기쁘게 이야기하는 우리의 일상되십시오.
우리 삶안으로 주님의 속량이 성탄으로 들어왔음을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2019년 가해 12월30일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세상 속에 깊이 함몰되어, 세상의 좋은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 말씀은 꽤나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랑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요한 1서 2장 15절)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요한 1서 2장 17절)
사실 세상은 본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창조하신 세상이요, 그분의 손길과 흔적이 담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칭하는 세상은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적대시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인간의 그릇된 욕망과 교만함, 죄와
이기심으로 가득한 악한 세상입니다. 그리스도 정신과는 달리 사탄의
지배 하에 꿈틀거리는 인간의 집단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참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의미의 세상, 악으로 가득한 세상과는 늘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자연스레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악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을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깊이 동참하는 것이니, 더할 나위없는 기쁨과 영예로 여겨야겠습니다.
세상이 예수님과 교회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비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은 요구성이 훨씬 많고 불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날선 지적과 충고가 가슴에 찔리고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미움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 안에서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세상이라는 것,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참으로 영악하고 사악합니다. 정말이지 고단수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비둘기처럼 단순할 필요도 있지만,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 앞에 매일 펼쳐지는 이 세상, 사랑이신 하느님 손길과 흔적이
담겨있는 이 세상이기에, 때로 이해할 수 없고, 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큰 사랑의 마음으로 성장시켜나가고 완성시켜나가야
할 대상입니다.
동시에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세상, 바로 옆의 이웃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극단적 자기
중심주의와 천박한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이 세상은, 다같이
합심해서 극복하고 투쟁하고 이겨내야 할 대상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지만, 최첨단·글로벌 세상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 안에서도
동료들로부터 찬사와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는 모범사원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학교 안에서도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우등생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경쟁력과 전문성이라는 개념이 복음 정신과 상충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경쟁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서도 빛나는 삶을 살아,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이야말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며, 삶을 통한 복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이 깊고 착하기만 하지 성적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뱀처럼 지혜로워지라는 주님 말씀에 좀 더 방점을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의 빛나는 승리의 길, 강한 경쟁력,
불굴의 의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순결하기만 하지 지혜롭지 못하다면, 악한 이리 떼의
먹잇감으로 적락하고 말것입니다. 세상 안에서도 패배자나 낙오자로
밖에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주님 사랑 받는 사도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더 열심히 살아가야만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하느님만으로 족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가해 12월30일 성탄 8일 축제 제6일(루카2,36-40)
하느님만으로 족하라.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그러나 현실은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방황하고 걸려 넘어지며 은혜를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오늘을 감사하고 늘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며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출신 '한나'라는 예언자를 생각합니다.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벌써 이름에서부터 행복을
누렸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누엘은 “하느님은 빛이시다”는 뜻입니다. 아세르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이겠습니까? 그는 충만한 은총 안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름 자체가 행복을 가져 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은총이 많아도 담을 그릇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나는 겉으로만 보면 남편을 일찍 잃은 불행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여든 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루카2,37). 불행한 처지에 매여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처지를 하느님을 섬기는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남편이 있다면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것은
불행이지만 온전히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음은 행복입니다. 한나가
행복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나의 행복은 그의 처지나 형편에
따라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것을 추구함으로써 누리는
행복입니다. 주어진 현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를 생각할
때입니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왔다가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을 보았고 시메온이 예수님께 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루카2,33-35). 그리고 구원자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아기에 관해서 말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늘 성전을 찾아 기도한
덕택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원한다면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체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께 마음을 둔다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사랑과 기쁨, 희망과
평화로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청주교구는 내년 1월7일 오전10시에 사제.부제 서품식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2명의 사제 후보자와 3명의 부제 후보자가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 한나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피정에
임하게 될 후보자를 위해서 희생의 기도를 봉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후보자들이 모든 희망을 오로지 천상 것에 둘 수 있도록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즐거워 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그들이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기를 빕니다.
'한나'예언자가 하느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였듯이 사제.부제 후보자도
우리도 모두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셔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12월 30일(월) -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예수
오늘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예수’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8절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중풍 병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중풍 병자는
베데스다라는 못 곁에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모습을 보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동하면 먼저 들어가는 자가 치료가 되는데 자기는
몸이 나빠 들어갈 수 없어 이렇게 누워만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그 사람은 곧 나아서 그
자리를 들고 뚜벅뚜벅 걷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 말씀에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신적 능력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죄만
씻어 주는 분으로 우리가 마무리기도 때 부르는 이름으로만 예수님을
찾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보여주십니다. 바로 예수님의 능력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성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가장
우선시하고 절대적으로 행해야 할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그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 성도의 모습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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