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가해 1월7일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제1독서 요한 1서 4,7-10
복음 마르코 복음 6,34-44
◈ [서울]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2020년 가해 1월7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뉴욕에서 LA까지 신문 홍보를 위해 다녀왔습니다. 가장 크다는 성당
신부님과 약속했습니다. 9시 미사에 함께 하기로 했는데 그만 조금
늦게 도착했습니다. 미사 후에 신부님과 만났습니다. 내년에 시간을
주시면 홍보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내년에는 다른 신문사에서
홍보한다고 합니다. 내 후년에라도 시간을 주시면 홍보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 본당에서 2개의 신문을 홍보하고 싶지는 않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계시는 동안 혹여 시간을 주시면 언제든지 오겠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성전을 보았습니다.
다음 본당에 갔습니다. 신부님께서 커피를 주시고,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시간을 주시면 홍보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긍정적으로 말해 주셨고, 다른 신부님들께 메일을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성령 기도회에 와서 강의해도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사목적인 결정을 하실 때 3가지 원칙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적인 문제는 없는지, 문화적인 문제는 없는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부지런하시고, 밝으신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세 번째 성당으로 갔습니다. 깊은 우물처럼 영적인 힘이 느껴졌습니다.
미사 한 시간 전에 성체 현시를 하고, 묵상하였습니다. 신자분들이 미사
전에 오시고, 성체 앞에서 조배하였습니다. 성당이 마치 수도원
같았습니다. 신문 홍보로 지친 저에게 하느님께서 힘을 주시는 걸
느꼈습니다. 앞으로 본당 사목을 하게 되면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성체를 현시하고, 묵상하시는 신부님이 마치 커다란 바위 같았습니다.
미사 중에 소개를 해 주셨고, 내년에 홍보하도록 시간을 마련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에게서 ‘산해숭심(山海崇深)’을 보았습니다.
신문 홍보를 다니면서 좋은 분을 만났습니다. 수녀원에서 숙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새벽에 수녀님들과 함께 기도하고, 미사 하는 건
기쁨이었습니다. 꽃이 피기 위해서는 땅속 깊이 뿌리가 양분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건, 새벽에 기도하는 수도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녀님의 기도 소리를 들으니, 신문 홍보를 온 것이 아니라, 피정 온
것 같았습니다. 수녀원 서가에는 영적인 깊이를 더할 수 있는 책이
많았습니다. 여기저기 보물이 있었습니다.
바쁜 시간에도 차량 봉사를 해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봉사할 수 있는 시간과 건강을 주셔서 감사드린다는 자매님의 말을
들었습니다. 홍보가 잘 안 되면 저보다 더 안타까워 해 주셨습니다.
홍보할 기회를 주면 저보다 더 기뻐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두 가지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선교하고 싶다고 합니다. 지금도
충분히 봉사하고 있는데,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가고 싶다고
하십니다. 더 깊이, 더 멀리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 같았습니다. 순례를 다니면서 느낀 마음을 책으로 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분이 많습니다.
마리아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평화신문을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2주
정도 신문이 오지 않으면 전화를 하신다고 합니다. 지난 신문이라도 꼭
보내 달라고 하십니다. 평화신문은 종합 비타민이라고 하십니다.
교황님의 소식도 듣고, 교리와 전례를 배우고, 따뜻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니 종합 비타민이라고 하십니다. 어르신은 새 영세자에게는
평화신문을 선물로 주신다고 합니다. 주소와 구독료를 신문사로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이번에는 새 영세자가 없어서 신문을 선물하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어르신의 말씀을 들으니 힘이 나고, 용기가
생깁니다. LA에서 뉴욕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오늘부터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를 다녀옵니다. 잘 다녀올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 사고방식과 속세인의 사고방식
2020년 가해 1월7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예수님 사고방식과 속세인의 사고방식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마르코 6,38~44)”
예수님의 식사걱정 모으기와 기도 후 나누고 남은 게 12광주리였다죠?
장정만도 오천 명이면 여자 애들 모두 만 명은 넘었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에 감사해야할 음식과 평등하게 나눔과 낭비 버림 없이 모은 거죠.
음식 나눔으로 목숨 돌보셨다는 것을 현세 삶과 비교 묵상하게 됩니다.
모든 음식자료에 대해 하늘의 힘에 감사할 것과 평등 나눔 아낌입니다.
먹을거리 관해 예수님 사고방식과 속세인의 사고방식이 다르다 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예수님방식으로 먹었기 때문에 습관됐어요.
식사 전에 기도하고 평등하게 나눠먹지 않으면 이상하다 느껴지거든요.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좋은 기분이 기적을 일으킨다
2020년 가해 1월7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좋은 기분이 기적을 일으킨다.>
복음: 마르코 6,34-44
1968년 6월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 교수팀은 매우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길거리에 지갑을 떨어뜨린 후 그 속의 신분증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를 확인했습니다. 그 결과
약 45%의 신분증이 주인에게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습니다. 6월4일은 단 하나의
신분증도 주인에게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바로 미국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가장 유력했던 로버트 F. 케네디가 괴한에게 암살당한
날이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한 가지 기분
나쁜 소식이 사람들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로지 예수님만이 빵 5개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고 믿는 분이셨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그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적을
하시기 전에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을 놀리시는 말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해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라고 되물으며
자신들에겐 그러한 기적을 할 믿음이 없음을 스스로 고백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고 믿음이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시도라도 해 봤냐?”라고
물으시는 듯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자신들이 가진 음식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보지도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한 불만이 녹아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음식은 10명도
먹을 수 없는 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다고 믿고 열 명이라도
먹이려고 노력해보아라.”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복권을 사야 복권에 당첨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레짐작으로
불가능하다고 믿어 아무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5천 명을 먹이는 것도
한 사람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부터 먹이려는 마음은
기분이 좋아야 생깁니다. 사람들은 기분이 좋고 싶으면서도 자기
기분을 소홀이 대합니다.
옛날에 동양의 어떤 임금이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그 꿈은 자기의
이빨이 하나하나 다 빠져버리는 꿈이었습니다. 왕은 나라에서 유명한
해몽자를 불러다 꿈을 해석하게 하였습니다. 해몽자는 꿈을 풀어
해석하기를 임금님의 친척들이 한 사람씩 죽어서 맨 나중에는 임금님만
남게 된다고 해몽을 했습니다. 기분이 언짢은 임금은 그 해몽자를
죽였습니다.
임금은 계속해서 다른 해몽자를 구해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해몽자가 임금에게 불려왔는데 그는 임금님의 꿈 얘기를 들은 후에
다음과 같이 해석을 내렸습니다.
“임금께서는 집안의 모든 친척들보다도 가장 장수를 해서 오래 오래
사신다는 꿈입니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그 해몽자에게 많은 상금을 내렸습니다.
기분은 전염됩니다. 내가 기분이 좋으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겐 좋은 일만 생기게 됩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긍정적이고 기분이 좋은 사람은 기적을 볼 수 있지만
부정적이고 기분이 나쁜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셨다면 그들을
통해 기적을 행하시려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의
기회를 주시지만 우리가 기분이 나빠서 평상시 부정적인 생각에 너무
물들어서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마더 데레사처럼 모든 가난한
사람들로 천국을 채우고 싶은 만큼 기분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기분이 좋으려면 끊임없이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20년 가해 1월7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복음: 마르 6,34-44: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오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을 들었다.
한때 굶주리셨던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분이 지금 많은 사람을 먹이신다.
그분은 말씀으로 그들을 우선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빵은
“외딴곳”에서 하느님께 봉헌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진다. 그곳은
외딴 곳이었지만 세상을 먹여 살리시는 분이 함께 계시고 시간이 이미
늦었지만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 분이 함께 계셨다.
그분은 전에 빵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으로서 승리하셨다
(참조: 마태 4,1-11; 마르 1,12-13; 루카 4,1-13). 배고픔도
겪으셨지만 수천 명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
(참조: 마태 14,20-21; 15,37-38; 마르 6,42-44; 8,6-9).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참조: 요한 6,51). 목마름도 느끼셨지만
(참조: 요한 19,28),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요한 7,37)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보이는 인간이신 동시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시다.
인간으로서는 우리처럼 잡수셨고,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겪으셨지만
(참조: 히브 4,15), 하느님으로서는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
(참조: 마태 14,17-21; 마르 6,38-44; 루카 9,14-17; 요한 6,10-13).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배고픔을 헤아리셨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37절) 하신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38절)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주님 앞에 내어 놓았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풀밭에 앉도록
명하신다. 사람들은 백 명의 식탁에, 쉰 명의 식탁에 둘러앉는다.
말씀의 식탁, 성찬의 식탁에서 그들은 양육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서 받는 선물에 대해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는 순간
창조의 행위가 이루어진다.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기적을 이루셨다. 그러고도 남은
빵조각과 물고기가 열 두 광주리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 빵의 기적의 신비는 이것이다.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빵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열매를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의 활동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전해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누는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보이더라도 그것을 주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기적을
언제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천이라는 숫자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완전함을 가리킨다. 오천의
영적인 의미는 대담하게 행동하고 올바른 정신으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갈 용기를 지닌 사람은 천상 지혜로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오천
명이 상징하는 의미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르 6,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20년 가해 1월7일 화.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르 6, 42)
사랑의 이름은 빵의 이름입니다.
사랑은 빵이 되는 것입니다.
부서지는 자아처럼 가루가 되고 빵이 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랑은 빵이 되는 때를 놓치지 않습니다.
빵이 되는 길을 일깨워주십니다.
빵안에 사랑이 있습니다.
빵이 되는 행복으로 우리를 배불리십니다.
욕망의 빵을 나눔의 빵으로 되돌려 놓으십니다.
빵의 행복은 삶의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의 뜻을 비로소 알게됩니다.
모든 빵은 하나의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사랑을 위해 빵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묻는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친히 사랑의 빵이 되십니다.
사랑의 진실한 빵으로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빵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꼭 빼닮은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2020년 가해 1월7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꼭 빼닮은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초대교회는 빵의 기적 사화를 성찬례의 예시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빵과 물고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대대로 성체성사의 상징이
되어왔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제자단을 중심으로 둘러서있는 군중,
그리고 주님께서 군중에게 빵과 물고기를 나눠주는 모습은 오늘날 세상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표상이 되고 있습니다.
빵의 기적이 이루어진 곳은 놀랍게도 큰 도시나 고을이 아니라
빵가게나 구멍가게 하나 없는 ‘외딴곳’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은
복음선포를 위한 여행길을 계속하셨고, 말씀에 굶주린 수많은 군중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숫자가 장정만 오천명이라니, 그 상황이 눈에 그려집니다. 광활한
대평원이나 광야에 엄청난 군중이 운집해있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빵의 기적을 하시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예수님과 제자단,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음, 영광에 도달하기 전까지 광야를 횡단하는 은총의
여행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광야 여행의 인도자로서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모세와도 흡사합니다.
에집트를 탈출한 이후 민족의 영도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며, 안전하게 가나안땅으로 인도였듯이,
예수님께서도 목자없이 방황하는 백성들을 가르치고, 갈증과 굶주림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역사상 유래없는 참목자요 착한 목자로서 세상 사람들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자, 백성들의 기쁨과 환희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이스라엘에는 착한 목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양떼를 향한 관심과 애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거짓 목자들은 양들을 보호하기는 커녕 잡아먹기 바빴습니다.
거짓 목자들은 양들에게 조금도 힘이 되어주지 못했으며 돌보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거짓 목자들은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당시 이스라엘에는 목자가 없는 상태보다 더 비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양떼는 흩어져 맹수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상황 속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이다.”(마르코 복음 6장 34절)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한 기적의 배경에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 연민의 마음, 측은지심이 깔려있음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목자없는 양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백성들을 지도하고 이끌어야 할 당시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망각했기에 발생한 일입니다. 양들을 향한 애정이나 열정이
티끌만큼도 없는 당시 목자들은 직무에 따라오는 돈이나 영예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지도자로서의 능력이라 리더십을
완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사회의 모습이 어찌 그리 당시 모습과 유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거짓 목자들의 거짓 가르침과 위선, 무사안일주의와
백성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에 대한 외면 앞에 양떼들을 길을 잃고
방황하며, 교회를 떠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꼭 빼닮은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정확히 파악할 줄 아는 목자, 이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분석하는 지도자, 용기있게 백성들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1월 7일(화) - 생명과 복을 선택하는 성도
오늘은 ‘생명과 복을 선택하는 성도’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신명기 30장 14절 말씀에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 즉 네가 이를 행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다”고 말씀하시고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세운 기준과 자신이 아는 기준과 자신의
편향에 맞는 기준을 정하여 본인이 원하는 대로 나아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처럼 생명과 복과 화와 저주를 우리 앞에 놓고 우리에게
선택을 하여 가져가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과 복을 선택하면
하나님께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자세히 우리의 삶을 되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를 하기보다 나를 기쁘게 하는 행위를 얼마나
많이 해 왔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내 뜻대로 가다가 고통가운데 헤매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말씀에 순종하여 생명과 복을 소유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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