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가해 1월11일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제1독서 요한 1서 5,14-21
복음 요한 복음 3,22-30
◈ [서울]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2020년 가해 1월11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요즘 누가 종이 신문을 봅니까? 종이 신문을 본지 오래되어서요?’
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신문을 만들고, 홍보하는 제게는 어깨가 처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맛있는 집이라면 굳이 시간을 내서 찾아가곤
합니다. 먹어보고 맛있으면 이웃에게 소개하기도 합니다. 시간도,
비용도 기꺼이 낼 용의가 있습니다. 종이 신문이 영적으로 맛이 있다면,
지치고 힘든 일상에 위로와 용기를 준다면 기꺼이 시간을 내고, 비용을
지급할 것 같습니다. 신문을 정독하면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립니다.
1년에 150불이니 한 달이면 13불이 채 안 됩니다. 고맙게도 제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새 영세자에게 평화신문을
소개하고, 구독료를 내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친구들에게 성탄 선물로
평화신문을 보내 주는 문도 있습니다. 대자와 대녀에게 평화신문을
선물로 보내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평화신문의 가치를 알고
계십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이 주는 영적인 양식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매주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이 소개됩니다. 주변에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듯이,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병든 이의 모습으로, 외로운
이의 모습으로 여전히 우리에게 오시고 계십니다. 많은 분이 온정의
손길로 그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의
교황님의 일정과 교회의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의
친구가 되어야 함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소개하는 지면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영적인
깊이를 봅니다. 현대의 신학 동향을 소개하는 지면도 있습니다. 간단한
교리 상식을 소개하는 지면도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선교하시는
수녀님, 수사님의 이야기에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미주 지역의 한인 가톨릭 공동체의 다채로운
활동과 나눔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평화신문은 영적인
종합비타민입니다.
어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마리아, 엘리사벳, 요셉, 즈카리야, 목동, 동방박사,
시메온, 안나, 베로니카, 키레네 사람 시몬, 십자가상의 한 죄인,
세례자 요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겸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을까요? ‘헤로데, 왕궁의 사람들, 율법학자,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빌라도, 군중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지는 사람들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서를 보면 죄의 현장들이 잘 나타납니다.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은 일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바세바를 차지한 것은 욕망 때문입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은 빼앗은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인 것은 분노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것은 인색함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할 때 잠을 자던 제자들은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빨간 십자가가 도시를 가득 채워도, 화려한 교회의
건물이 우뚝 솟아도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능력과 그분의 지혜를 보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이 보여준
겸손함입니다.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
그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함을 보여주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겸손함으로 죄의 뿌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참된 진리의 길로 가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 따르며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2020년 가해 1월10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예수님 따르며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루카 5,13~16)”
말조심 입조심 몸조심 불조심 중요한 것들은 전부 조심해야 되잖아요.
모든 법적 절차는 십계명을 준수하라는 방법이 아주 원천적 방법이죠.
그리고 좋은 일했다고 자만 우쭐대지 말고 하느님께 조용히 보고해요.
따지고 비방에 갈라지고 싸우고 원수지고 원 참 정치인 일반인 모두요.
나 외 모두가 나의 적이라 말고 모두를 위해 봉사하는 나 라고 합시다.
죽었다 되살아날 자신 없으면 예수님 좀 따르며 살아야 되지 않겠어요?
무섭고 잔인한 인간들 속에서도 예수님은 올바른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세상 살 길만 생각 말고 가톨릭사상 배워 영원히 살 길 가라는 겁니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20년 가해 1월11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요한 3,22-30)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
모임에 참석해 보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늘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일이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초대받은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두 분은 다 자신의 방식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먹고 마시며 떠돌던
예수님보다 훨씬 더 구도자처럼 보이고 존경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을 앞세우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자기의 할 임무를 다 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자기의 기쁨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비유합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당시 혼인
잔치가 잘 이루어지도록 이것 저것 챙기며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잔치 뒤편에서 묵묵히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실 “달이 더욱
밝으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만큼 흐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달을 이용하여 자기 손을 돋보이게 하려니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를 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 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해 추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아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권력이 영원한 줄 아나봅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회개의 세례는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요한은 세례를 통해 많은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얻은 명성은 요한의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부추겨
주었습니다’(박병규). 이때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나타난 예수라는
인물에게 몰려가고 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에 대한 애착은 예수라는 참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요한은 자기의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을 잊지 않았고
신랑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자 요한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가 완성되는
순간에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봉사를 하고 물러선 자리도 늘 그렇게 주님만이 으뜸으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주님을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일은 없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분은 십자가의 주
예수님뿐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20년 가해 1월11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복음: 요한 3,22-30: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우리는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름답고 겸손된 자세를 볼 수 있다.
즉,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로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 요한에게 불평을 한다. 그러나 요한의 답변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답변으로서 3가지를 설명한다.
우선은 세례자 요한은 사실상 자신의 위치가 하느님의 단순한 전달자며
앞으로 오실 더 크신 분을 위한 선구자요 예비자로 보냄을 받았을 뿐,
그 이상의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킨다.
둘째로 그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새로이 나타난 선생이 더 많은 제자와 더 많은
개심자들을 얻고 있다면, 그것은 요한에게서 사람들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이며, 하느님 앞에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자기들과 하느님은 너무나
밀접한 인연으로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그 관계를 신랑 신부의
혼인관계 인연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표현했고, 이러한 인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신을 따를 때에는 마치 정혼한 여인이 혼인한 계약을
위반하여 부정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탈출 34,15; 신명 31,16;
시편 73,27 등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랑이요,
이스라엘 백성은 신부라는 것이며, 세례자 요한은 신랑과 신부를
맺어주는 연락자이며 신랑과 신부를 함께 모시는 사람으로서 혼인
잔치를 주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자신이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면서 그 신랑을 신부에게로 맞아들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임무는 끝났으니 기꺼이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무대
중심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즉 요한의 사명은 이스라엘과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 그리고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이스라엘 사이에 혼인준비를 하는
것으로서 그 사명이 끝났을 때 자신은 뒤로 사라지는 것이 그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것은 좌절과 질투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자기의 임무를
다했다는 기쁨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들로 하여금 따르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 오늘 복음에 나타난 요한의 참된
겸손의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겸손된 삶을
본받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30)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20년 가해 1월11일 토.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30)
하느님만이 계실뿐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작아져야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작아지면 모든 관계는 편안하고 평화롭습니다.
작아져야 우리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작아져야 환상과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작아져야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습니다.
작아지는 것이 참된 봉헌입니다.
하느님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봉헌의 여정은 우리의 자아가 작아지고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삶안에서 점점 커지시는 감사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새로워지는 것이며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봉헌은 우리 자아가
작아지는 것입니다.
작아지신 아기 예수님의 봉헌을 기억합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1월 11일(토) -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심
오늘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심’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 16절 말씀에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이 가까울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는데
성전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로
가득히 붐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너무나도 분노하셔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고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버리고 상을 뒤엎었습니다.
그리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고 시편 69편 9절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한 말씀을 마음속에 생각했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열심히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향한 봉사로 성전을 삼킬 정도가 되라는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어찌하던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에만 집중해야지 사람들을 보고 갖가지 생각을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며 사람에게 마음이 빼앗기는 교회 생활 얼마나
힘듭니까? 하지만 하나님만 바라보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 결코
시험들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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