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세례 축일(가해)
오늘 제1독서(이사 42,1-4.6-7)는 주님의 종으로 불리는 이에게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바빌론에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는 직접 선택하신 당신의 종을 소개하면서 그의 직무가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그 종이 페르시아의 임금인 키루스인지, 어느 집단인지, 또는 성실한 이스라엘 공동체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종이 민족들의 빛이 되고,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것이기 때문에 당신 마음에 드는 이 종을 하느님께서는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은 주님의 종의 직무는 인간 세상에 공평한 정의를 세우는 것이며,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종이 자기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무기나 강압적인 힘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의 힘(영)에 의지할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으로 할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기가 꺾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주님의 종이 겪어야 할 아픔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종에 대한 주권은 하느님이 쥐고 계시기 때문에 그 종은 어떤 사명이든지 완수할 수 있습니다. 결국 주님의 종은 멸시를 받을 것이며,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할 것입니다(이사 55,3). 이렇게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선포하는 주님의 종은 세례자 요한, 예수님, 그리고 우리 자신을 암시하기 때문에 신약성경은 많이 인용합니다.
오늘 복음(마태 3,13-17)은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 대한 내용입니다.
갈릴래아에 계시던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요한을 찾아가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보다 훨씬 더 강하신 분, 주님의 영을 지니고 계신 분, 그리고 불로 세례를 주실 분(마태 3,11)이 자기에게 찾아오셨음이 매우 예상 밖이었다면서 자기는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런데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첫 말씀으로 “지금은 이대로 하라”시면서 세례는 이루어져야 할 일임을 강조하고,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한다.”(15절)면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구세주의 사명을 수행할 것은 물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어떤 반대도 당당하게 물리치실 것을 요약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자칫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 취급될 위험이 있었음에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전해준 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어떤 박해를 무릅쓰고서라도 하느님의 뜻을 펼치시는 분(마태 5,10)으로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마태 5,20) 의로움을 실현하실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완성하기 위한 일(마태 5,17)이며, 앞으로 제자들에게 명하실 모든 일(마태 28,20)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즉 자기 복음의 시작부터 예수님의 신원(하느님의 아들)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지혜문학적이며 묵시문학적인 표현인 세례의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렸고(에제 1,1),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예수님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성령의 내려오심이 마치 비둘기가 우는 소리처럼 들린 것 같습니다. 후에 사도들은 불과 같은 혀들이 갈라지는 형상으로 내려온 성령을 체험했듯이 완전한 구원체험을 묘사하는 것이지만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사도 2,7) 어떻게 묘사할 줄을 몰랐던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체험이야말로 인간에게 향하는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에 대한 체험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붙들어주시는 종, 하느님께서 선택하셨기에 그분 마음에 드는 종”(이사 42,1)을 뜻하면서, 하늘이 열리는 순간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의 만남,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성령과 성자의 만남에서 솟구치는(발출되는) 삼위일체적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단순한 세례성사 예절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에 공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태오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단지 “아들”이라 부르다가 세례를 받으신 뒤부터 “하느님의 아드님”(마태 4,3)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란 단순하게 하늘로부터 계시된 존재일(마태 2,15; 16,16; 17,5)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는(마태 27,43.54) 뜻이 담겨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임마누엘“ 마태 1,23; 28,20)이심을 뜻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는 겸손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전하게 받들어 평화를 이루시면서(마태 5,9)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시는 분이시고, 아버지처럼 완전한 분이심을(마태 5,48)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사도 10,34-38)에서 예수님의 세례와 그 이후의 활동을 요약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환시를 통하여 유다인이었던 베드로에게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줄 것을 암시하셨으나(사도 10,9-16) 코르넬리우스의 초대를 받은 뒤에야 깨닫게 됩니다. 환시의 내용은 단순하게 율법을 거스르는 동물을 잡아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당신을 경외하는 모든 이를 받아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으로 이방인들을 무시하던 유다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민족과 백성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당신께 대한 신앙과 경외심에 따라 모두 받아주신다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충격적인 표현입니다. 세례를 받으신 이후 갈릴래아에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시면서 좋은 일을 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만을 위한 분이 아니라 만민의 주님이시며, 갈릴래아에서 그분이 선포하신 것은 평화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기름을 바르시어 성령과 함께 우리에 대한 모든 주권을 쥐고 계신 분으로 세워주셨다고 고백하고, 하느님을 경외한다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모든 직무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듯이 베드로 사도 역시 예수님께서 주신 직무로 세례를 주기에 앞서 예비신자 교리를 하는 것입니다.
세례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여정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펼쳐지기 위한 것이며, 제자들에게는 물론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요구되는 여정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세례성사란 단순하게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기(요한 1,12) 위한 입문성사만이 아닙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1베드 3,21) 세례성사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1코린 8,6) 여정의 출발점이고,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아가기로 다짐하면서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는 자격을 얻는 순간이며(갈라 4,5-7),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로마 8,14-17). 세례성사와 더불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차별 없이 모든 이를 부르시는 분이시며, 우리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계신 분이시고, 하느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부르심 응답한 사람은 그 응답에 책임지기 위해 주어진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또 다시 우리의 삶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죽음의 바다(死海)로 흘러가는 물로 세례를 받으셨음은 당신께서 예루살렘에서 맞이하실 죽음을 암시하며, 악을 끊어버리고 죄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길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악을 끊어버리는 여정의 시작이 바로 세례성사이며, 물에 들어가 인간으로 죽고,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되는 것이 바로 세례성사입니다. 그래서 세례성사야말로 십자가와 빈무덤에서 그 의미가 드러나는, 의로움을 위한 거대한 투쟁의 시작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모두가 당연히 구원의 대열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성사는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표징일 뿐입니다.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면서 의롭고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 그리고 무덤에서 그 의미가 드러나야 하는 엄청난 영적 투쟁(에페 6,10-20)의 시작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하여 은총의 망망대해로 뛰어드는 대단한 결단을 가지고 시작하는 모험이기도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제껏 살아오던 우리의 세속적인 삶의 방식을 하느님 나라의 삶의 방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례성사 전에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고, 악과 마귀의 모든 행위를 떨쳐버리겠다고 약속하라는 것입니다.
- 방효익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