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삿 6장 33-40절
설교제목 : 옛 신을 극복하기
질서 안으로 들어가기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장마가 오는 듯하더니 무더위와 열대야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뜨거운 여름 건강하시길 빕니다. 유럽 여러 나라들이 불덩이가 내리듯 40도를 훌쩍 넘기며 극강의 더위와 싸우고 있습니다. 스위스 분석가 선생님과 최근 만남에서 스위스도 이례적인 무더위를 견디며 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에어컨과 선풍기가 없기 때문에 더위와 지내는 방법으로 낮에는 햇빛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창문을 닫고, 밤에는 창문을 개방하여 더위를 견디고 있노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적 세계도 열기로 몸살을 앓고 있고, 집단 안에서 여전히 뜨겁게 불을 일으키고 있는 이들과 사건들이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 뜨거운 날 동안, 다시금 레인메이커를 생각해보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집단과 개인 안에 달아오르는 열기가 자연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기에, 자신을 성찰하고 균형을 되찾기 위해 침잠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C.G. 융은 바젤 세미나(1934)에서 한 남성의 꿈과 관련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더 큰 힘과 다시 조화를 이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의 근본적인 것을 의식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인간 실존의 기본 법칙들과 어떻게 다시 한번 조화를 이룰 것인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것에 집중하고,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그는 삶의 본질과 불만족의 이유를 숙고함으로써 다시 자신과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파충류 단계의 심층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내려가며, 거기서 모든 자연을 통해 흐르는 영원한 생명의 줄기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올바른 길로 발달하며, 따라서 어떤 욕구도 남지 않고,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신 안으로 내려가는 것은 동양에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한수엘리 에터 지음, 융심리학과 동시성, p109]
삶의 본질과 불만족의 이유를 숙고하는 것이야말로 자신과 평화로울 길임을 강조하며, 자신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한 마을에 기근이 들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비가 내리지 않아서 타지역에 있는 레인메이커를 초청습니다. 그런데 레인메이커는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삼일 동안 마을 입구에 움막을 짓고 거기에 가만히 머무렀습니다. 삼일이 지나고 놀랍게도 눈보라가 쳤습니다. 레인메이커가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그 자신은 마을이 도(질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다시 질서를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도 안으로 들어가는 일, 자신의 깊이로 내려가서 질서 안으로 들어갈 때 다시 조화로움이 끼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스로 질서 안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개인과 집단의 혼돈과 열기를 잠재우고 다시 질서와 균형을 찾아가는 길일 것입니다. 무질서와 뜨거운 열기 속에서 우리 자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호와 샬롬
하나님은 미디안의 공격이 무서워 몰래 포도 틀에서 밀을 수확하던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큰 용사야! 내가 너를 보낸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의심하며 회의에 빠지고, 작고 힘없는 자신과 지파라고 생각하며 패배의식에 빠진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네가 미디안 사람들을 마치 한 사람을 쳐부수듯 쳐부술 것이다”(6: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기드온은 나를 좋게 여기신다면, 당신이 정말로 주님이시라는 증거를 보여주길 간청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드릴 예물을 가져다드리겠으니, 떠나지 마시라고 합니다. 기드온은 즉시 가서 염소 새끼 한 마리로 요리를 만들고, 밀가루로 누룩을 넣지 않은 빵도 만들어 상수리 나무 아래로 가지고 가서 주님의 천사에게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고기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바위에 놓고 국물을 부으라고 합니다. 주님의 천사가 손에 든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빵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서 고기와 빵을 살랐습니다. 그때 기드온은 주님의 천사라는 것을 알아차리며 떨었습니다.
기드온은 지금 회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증거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한 인간이 중대한 도전 앞에서는 계속되는 의심을 벗어나기 위해 확신을 주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증거를 요구한 것을 넘어서 기드온은 낯선 방문자를 대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고기와 빵으로 공양하려고 합니다. 낯선 자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 무시하지 않고 그에 합당한 제물 혹은 양식을 드리려는 태도는 중요합니다.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낯선 방문자를 환대하며 귀히 여기려는 자세는 새로운 삶과 변화를 가능케 합니다. 낯선 부름 앞에서 회의를 가지고 증거를 구하지만, 이를 귀히 여기며 내게 있는 것을 드리려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낯선 관념과 충동이 일어날 때 그것을 무턱대고 따라서도 안되고,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먼저는 의심하며 확신을 찾아가야 하고, 여전히 그것을 귀히 여기며 먹을 것을 제공해야 합니다.
기드온은 신성한 경험 후에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제단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습니다. 히브리어로 “아도나이 샬롬”, “주님은 평화”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기드온은 주님과의 평화의 관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경험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여호와 샬롬은 기드온과 하나님과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 전체 이스라엘과의 관계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평화로 다가오시고, 이끌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 낯선 자의 부름에 회의를 가지면서도 환대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샬롬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옛 신상을 파괴하기
그날 밤에 주님께서 기드온에게 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네 아버지의 외양간에서 어린 수소 한 마리를 끌어오고, 또 일곱 해 된 수소도 한 마리를 끌어오고, 네 아버지의 바알 제단을 허물고, 그 곁에 있는 아세라상을 찍어라. 그런 다음에 이 산성 꼭대기에서 규례를 따라 주 너의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고, 찍어낸 아세라 목상을 불을 살라 번제를 드려라.”(6:25-26)
기드온은 자신의 종 열명을 데리고 가서 바알 제단과 아세라상을 파괴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낮에 하지 못하고 밤에 가서 시행하였습니다. 아침에 이를 발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제단과 신상을 부순 기드온을 죽이려고 그의 집까지 쫓아가 소동을 벌였습니다. 그때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너희들이 바알의 편을 들어 싸울 것인가?”라고 반문하고, 만일 바알이 신이라면, 자기의 제단을 헌 사람과 직접 싸우도록 놓아두라고 성읍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때부터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알과 싸운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첫 번째 요구한 것은 집단이 신봉하고 의지했던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파괴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옛 신상을 헐고 파괴하라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신상은 지금까지 고수했던 옛 삶의 방식과 신념, 주의를 파괴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하신다할 지라도 그 일을 수행하는 인간 안에서 옛 것이 파괴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드라마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전 낡은 것이 새 것을 금새 밀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은 낡은 신을 극복하고 새로움을 덧입으라고 요구합니다.
10여일 전에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어떤 모임에 참석한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형태가 길고 낡은 자동차를 운전했습니다. 뒷좌석에는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예전 교회에서 믿음 좋은 권사님과 그 아들을 태우고 운전했습니다. 그런데 작은 다리를 지나려고 하는데 오른쪽에서 차 한 대가 끼어들려고 했습니다. 저는 자리를 내주지 않고 옆으로 돌아서 앞서 갔습니다. 그런데 그 길바닥이 약간 둔덕처럼 되어 있어서 자동차 바닥이 긁히는 느낌이 났습니다. 어느 정도 갔는데, 연기가 나는 듯 하여 모두 내리라 하고 보니 자동차에 불이 붙었고, 폭발할 수도 있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 위험을 알리고 떨어지라고 했습니다.”
이 꿈은 옛 방식으로 추동하던 나의 자동차는 불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낡은 자동차는 낡은 옛 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낡은 신의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코 새로운 부름 앞에 응답할 수 없고, 새로운 시간 앞에 온전히 설 수 없음을 마음 깊이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징표 : 이슬
그 때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 사막 부족들이 모두 모여 요단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곡식을 약탈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영이 기드온을 사로잡아 기드온은 나팔을 불어 전쟁에 참여할 지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다시금 징표를 구합니다. 이스라엘을 구하시려면,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놓아두겠습니다. 이슬이 양털 뭉치에만 내리고 다른 땅은 모두 말라 있으면,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저를 시켜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려는 것으로 알겠습니다.”(6:36-37)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달 기드온은 다시 하나님께 징표를 요구합니다.
“주님, 저에게 노하지 마십시오. 제가 한번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양털 뭉치로 한번 만 더 시험하며 보게 하여 주십시오. 이번에는 양털은 마르고 사방의 모든 땅에는 이슬이 내리게 하여 주십시오.”(6:39)
그 날밤에 하나님은 그대로 하여 주셨습니다. 이런 기드온의 요청은 그의 두려움과 불안을 반증하는 것임과 동시에 군대를 일으킨 것이 자신의 교만한 관념에 사로잡혀 나온 것인지 확인하려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기드온 이 둘을 왔다갔다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상징적 이미지는 이슬입니다. 초대교부인 이레니우스는 기드온의 이슬을 “성령”과 동일시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이슬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동일시했습니다. 광야에서 경험하는 이 이슬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의 생명력으로 대지를 풍요롭게 하는 하늘의 자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융은 “현자의 장미원”의 8번째 그림을 설명하면서 기드온의 이슬에 관해 논평합니다. 이 이슬을 메르쿠리우스(수은), 영원한 물과 동의어로 보고,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 무의식과 동료 인간 모두에게 정의를 행하고자 하는 태도는, 지식이 단순히 사고와 직관으로만 구성되어있는 한, 지식에만 의존할 수 없다. 그러한 태도는 가치를 인식하는 기능, 즉 감정과 현실에 대한 감각적 지각, 즉 감각 기능이 부족할 것이다.
따라서 책과 그 책이 전달하는 지식에 배타적인 가치를 부여한다면, 인간의 정서적 정동적 삶은 고통받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지적인 태도는 버려야만 한다. 기드온의 이슬은 신의 개입의 신호이며, 영혼의 귀환을 알리는 습기이다. [CW16, 전이의 심리학, paras.486-487.]
이슬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의 한복판에 개입하신다는 신호이며, 영혼의 돌아옴을 알리는 습기입니다. 바로 우리가 경험해야만 하는 신의 간섭이며, 우리 안에서 느껴져야하는 영혼과 감정의 살아남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기드온의 이슬이 내려서, 삶의 두려움 없이 용기있기 나아가고, 감정과 정서가 만족함 가운데 우리에게 맡기신 삶을 기쁘게 실현할 수 있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