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과 살구(Essay 35th of 2026)
오랜만에 우리 아파트 102동과 104동 사이에 있는 형광색 나무계단을 내려왔다. 계단 칸칸이 끝에 칠해 놓은 노란 형광색은 흐르는 세월 앞에 거의 다 지워졌다. 계단 중간에 있는 허리 굽은 영산홍도 잎이 풍성하고 씩씩하게 두 팔을 높이 들며 잘 지내고 있다. 여느 날처럼 멀리 동쪽에서 들어오는 긴 햇빛에 104동 아파트 벽면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의 그림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주 조용하고 여유로운 여름날의 싱그러운 아침이다.
요즘 여유 부리다가 일이 막판에 몰려서 한꺼번에 쏟아졌다. 8개월이란 많은 시간이 있었는데, 너무 여유를 부렸다. 조금만 서둘었다면 지금쯤은 일을 다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을 텐데, 지나고 나면 늘 아쉽다. 그래도 어제 큰일은 마무리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저녁 먹고 경의선 숲길공원을 터덜터덜 걸어서 들어왔다. 6월 중순인데 요즘 기온은 8월의 한 여름날처럼 33도나 되었다. 지구가 많이 데워져서 몸살을 앓고 있고, 올해 8월의 혹서기가 벌써 걱정이 된다.
형광색 나무계단 아래에 사는 삼 형제 살구나무의 열매는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지난 3월 초에 하얗고 붉은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봄을 시샘하는 동장군의 꽃샘추위에는 진 꽃도 많았다. 그래도 올해는 살구가 영글기 전에 불어친 세찬 바람과 비에 열매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지날 때마다 살구가 거의 보이지 않아 흉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살구가 많이 열렸고, 노란 살구와 파란 잎의 조화도 예쁘다. 벌써 형광색 나무계단의 구석구석에는 잘 익어서 가지에 매달려 있기 힘든 살구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 뒹굴고 있다. 도시에서 태어난 살구가 아니었으면, 모두가 좋아할 과일인데, 이곳에서는 도시의 오염된 공기와 맞닿았다고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는 살구나무 사진을 몇 장 찍고서 지하철역으로 나오는데, 뒤에서 ‘탁’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노랗게 익은 크고 예쁜 살구 하나가 바닥에 막 떨어져 있다. 아마도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여기저기 떨어져 깨지고 밟힌 살구 형제들의 비명이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살구나무의 밑 보도는 당분간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울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매년 반복되어 보는 살구나무의 일생이지만 늘 새롭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올해도 살구나무 삼 형제 중에서 나무계단 밑 큰형이 가장 다산이다. 아파트 3층 높이까지 자란 큰 키에 햇볕이 잘 드는 동쪽 편 가지마다 더 많은 살구가 달렸다. 이렇게 6월의 살구와 만나고 헤어짐으로 내가 일 년을 또 보낸다. 내년 6월에는 좀 더 탐스러운 살구가 나무 가득히 열렸으면 좋겠다. 앞으로 내가 몇 번이나 더 살구꽃과 살구를 만날 수 있을까?
2026년 6월 18일 출근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