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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첫날. 고교산악회를 따라 마이산을 다녀오다. 익산-장수간 고속도로에서 진안인터체인지로 나오니 진안고원이란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지식백과를 보니 진안은 소백산맥과 노령산맥(蘆嶺山脈) 사이에 형성된 이른바 무진장(무주,진안,장수)이라 일컬어지는 해발고도 500m의 고원지대다,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소재 마이산(馬耳山), 전라북도 도립공원이자 국가지정 명승(名勝) 제12호다. 문화재가 널려있고 조선의 역사와 민족의 혼이 곳곳에 보물처럼 숨겨져 있다. 마이산은 백두대간에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 위치하여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
말이 두 귀를 쫑끗 세운 형상으로 이름 붙여진 마이산. 동쪽 봉우리가 숫마이봉(680m), 서쪽이 암마이봉(686m). 산의 이름은 시대별로 달랐다. 신라시대 때는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엔 용출산(聳出山), 조선 초기에는 속금산(束金山)이라 불리다가 조선 태종 때부터 마이산으로 불리고 있다.
계절에 따라 산의 이름도 달랐다. 봄에는 안개를 뚫고 나온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수목이 울창해져 용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용각봉,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의 귀 같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이므로 문필봉이라 부른다.
또 마이산의 전설도 있다. “아득한 옛날 신선부부가 살았다. 마침내 승천할 때가 되자 남신이 말했다 "사람들이 승천하는 광경을 보면 부정을 타서 안되니 한밤중에 떠나자고" 하였다. 하지만 여신은 새벽에 떠나자고 하였다. 여신의 뜻을 쫒아 새벽녘에 승천할 즈음 때마침 일찍 물길러온 동네 아낙이 목격을 하게 되었다 "어머나 산이 하늘로 올라가네" 하고 소리치자 승천이 틀린 것을 안 남신은 화가 났다. 두 자식을 빼앗아 그 자리에서 바위산을 이루고 주저앉았다 한다. 구전되어 내려온 전설이긴 하지만 진안읍에서 마이산을 보면 숫마이봉은 새끼봉이 둘 붙어있고 서쪽 암마이봉은 죄스러움에 반대편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북부주차장에 도착 후 마당에서 간단한 스트레칭 후 기념촬영. 산행에 앞서 하는 스트레칭이 산악회의 전통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매표소입구에서 마이산을 오르는 길은 나무계단이다. 두 봉우리가 이어지는 고개마루에 들어선다. 숫마이봉은 가파라 오를 수가 없고 암마이봉은 한 번 오른 적이 있다. 지금은 자연휴식년제로 2014년까지 등반로가 10년간 폐쇄된 상태.
남부주차장쪽으로 내려오면서 봉우리 중턱 급경사면에 군데군데 마치 포탄을 맞은 듯 음푹 패인 굴들이 보이고 레미콘을 부은 것마냥 돌들이 박혀있다. 마이산도립공원 사이트를 보니 학술용어로 타포니 지형이라 한다. 풍화작용은 보통 바위 표면에서 시작되나 마이산은 내부가 팽창하서 밖에 있는 바위 표면을 밀어내 만들어졌다. 진안 마이산은 중생대 후기 약 1억년전까지 담수호였다고 전한다. 약 7천만년전 지각 변동으로 융기되어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민물고기 화석이 간혹 발견되고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산 주변에는 은수사, 금당사, 탑사 등 유서깊은 절들이 여기저기 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전설을 간직한 은수사의 청실배나무. 배나무꽃이 화사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이곳을 찾아 기도를 올리고, 그 증표로서 씨앗을 심은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다음에는 은수사 태극전에 걸려 있다는 단군 영정과 이성계가 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는 모습의 금척수수도를 보고 와야 겠다.
마이산은 조선조 창업의 게시를 내린 영산으로 모셔졌고 꿈속에서 받은 금척은 통치권의 상징으로서 그 금척을 꿈꾼 내용을 담은 몽금척요가 정도전에 의하여 지어지고 金尺舞(금척무)도 만들어졌다.
태조가 이 때 마이산을 보며 읊은 시가 詩碑(시비)로 만들어졌다.
“천마가 동쪽으로 와 형세가 이미 궁하니 흰털 말발굽 더 건저지 못하고 도중에 스러졌네 연인(내시)이 뼈만 사가고 그 귀만 남기니 변하여 두 봉우리 되어 반공 중에 솟아있네”
이 시를 읽으려면 풀이가 필요하다. “옛날의 아라비아지방의 명마인 천마가 동쪽으로 오다가 기진맥진하여 이 마이산에 와 쓰러져 죽었다. 천마라면 값을 따지지 않고 사들이는 임금님의 심부름꾼이 죽은 말의 뼈 일망정 천마의 것이라 높은 값으로 사가고 그 두 귀만 남겼는데 그것이 변하여 암수 두봉우리의 마이산으로 변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만나는 마이봉 기슭에 세워진 돌탑들. 당초에는 120기 정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80여기가 남아있고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있다. 마이산 돌탑들은 폭풍이 몰아쳐도 흔들리기는 하지만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 석탑을 쌓은 것으로 전해지는 이갑룡(1860-1957) 처사의 석상도 보인다.
마이산 자락 안에서 겨울철 정화수를 떠 놓으면 사진같이 얼음기둥이 하늘로 솟아 오르는 역고드름 현상이 일어난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마이산만의 신비한 현상이며 특히 은수사와 탑군 주변에서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읽지는 못했지만 최근 발간된 책 ‘마이산 석탑군의 비밀’의 한 구절이라 하기에 내용을 옮겨본다.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이 머리에 쓰던 왕관 즉 익선관은 마이산을 본따 만든 것이고 왕좌의 뒤에 펼쳐진 그림인 일월오악도 역시 마이산을 본뜬 것이라 한다. 마이산 탑사 또한 이성계에 의해 비밀리에 금척으로 천부도를 형상화한 것이다.”
탑사에서 내려와 봉두봉과 전망대로 이어지는 산길로 들어서다. 마이산은 여러번 와봤지만 주변산행은 처음이다. 봉두봉과 광대봉 등산로가 궁금했는데 이번 기회에 길을 새로 익혔다. 황사영향으로 전망대의 조망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신록의 잎새들로 물들기 시작한 진안고원의 연록색 숲을 걷는 즐거움을 누리다. 종주를 마치고 하산하니 남마이산 입구의 식당가들이 나온다. 남부주차장의 버스 탑승시간이 일러 주변을 둘러본다.
매표소 입구쪽에 넓직한 큰 바위가 보인다. 안내판이 있다. 주필대(駐蹕臺)와 이산묘와 사당과 비석들이 들어서있다. 조선시대의 발자취가 곳곳에 서려 있는 곳이다. 주필대(駐蹕臺)는 이성계가 1380년(고려 우왕6) 남원 운봉전투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전주로 개선하던 중 수레를 멈추어 쉬어 갔던 곳으로 조선 개국의 꿈을 지폈던 현장이다.
호남의병 창의동맹단 결성지(湖南義兵倡義 同盟團結成址)란 비석도 보인다. 1907년 항일 의병장 이석용이 호남 각지의 의병들을 규합하여 마이산 남쪽 용바위 위에 제단을 쌓고 500명의 의병들과 함께 천재를 지낸 곳으로 호남에서 최초로 국권수호를 위해서 댠체를 결성하여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시작한 곳이다.
이산묘는 구한말 순국지사 연재 송병선선생과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의 애국충정의 뜻을 이으려는 지역의 선비들이 1925년 이산정사를 건립하고, 1946년 사당을 지어 단군, 태조, 세종, 고종 등 4성위와 조선개국 이래 충신과 유림 40위, 구한말 을사조약 이후 충신, 열사 34인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어는 분들을 모셨는지 궁금해졌다.
뒷쪽 절벽에는 희미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지만 非禮勿動(비례물동)이라고 쓰여진 고종황제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非禮勿動>-‘예가 아니면 행동하지도 말라’는 논어 안연편의 글귀를 고종황제는 반어법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자존을 되찾는 일은 곧 예의이니, 이천만 동포는 분연히 일어나 빼앗긴 조국을 되찾자"는 요지다. 조선왕조의 몰락을 지켜봐야 했던 고종이 조선개국의 성지(聖地) ‘마이산’에 남긴 고뇌어린 글이 아닐 수 없다.
남부주차장을 지나면 마이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고여서 만들어진 호수 탑영제가 나타난다. 봄의 벚꽃과 함께 마이산이 명승임을 눈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조선의 성지, 명승(名勝) 마이산을 다시 찾아야 함에는 계절이 따로 없어 보인다. 가을 시제 때 이곳을 다시 찾아보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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