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74. 산 지미냐노 수녀원을 회상하며
허무 2026.06.20 08:23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시에나 근처에 산 지미냐노San Gimignano라는 작은 중세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은 산 위에 위치했는데 로마로 가는 순례자들의 중요한 연결지점이었고, 특별히 토레Tore(타워)로 유명합니다. 산 위 마을 한가운데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발롬브로사 연합회에 속한 베네딕도 수녀원이 하나 있습니다.
2001년 초 이 수녀원에서 며칠간 묶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럽의 수도원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 수녀원 역시 성소자가 줄어 아주 작은 공동체가 되어버렸고, 특별한 생계수단 없어 경제적으로도 가난했습니다. 그래도 인상적인 것이, 먹고사는 것에 대해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제가 며칠 머무르면서 느낀 것은 제가 받은 밥상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끼니마다 다양한 음식이 나왔습니다.
한번은 제가 원장 수녀님에게 물었습니다. “수녀님들은 생계수단이 무엇인지요?” 원장 수녀님 왈, “우리는 특별히 생계가 될 만한 수단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주로 자수를 해서 그럭저럭 생활했었는데 오늘날은 그것이 별로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지요. 그래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마련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내막을 자세히 들어보고서 저는 아주 깊은 인상은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분들은 오늘 무엇을 먹을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른 아침마다 수녀원 문 앞에다 먹을 것을 살며시 놓고 간다는 것입니다. 빵집을 하는 사람은 빵을, 닭집을 하는 사람은 닭을 놓고 간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하루를 먹고도 충분하다고 하며 매우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제가 있으면서 먹었던 닭 다리나 빵 등은 모두 마을 사람을 통해 하느님이 친히 마련해주신 일용할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그 수녀원은 산 위에 있는데 아랫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저 위에 계신 수녀님들은 우리와 우리 가정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 주고 계시는데 생활이 어려우시니 우리가 조금이라도 도와드려야지!” 이 수녀원은 가난하기 때문에 제가 그곳을 방문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방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고, 손님이 묶을 객실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으고 노력 봉사를 하여 수녀원에 난방장치를 해드리고 손님이 머물 객실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원장 수녀님은 제게 “로무알도 신부님은 아주 운이 좋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섭리에 의탁하는 삶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 세상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 12,29-31)
하느님 섭리에 모든 것을 의탁하는 삶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원대하고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걱정한다 한들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그분은 우리를 도구로 당신 일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인간적 야심과 욕망을 버리고 늘 열린 빈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라 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당신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입니다.
왜관성당 영성자료실 에서 퍼온 글입니다.